1895년 9월 5일~1982년 7월 22일
김도락 집사님은 동너리에 사셨다. 결혼 전부터 신앙을 가지셨던 분인데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교회에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교회에 나가기를 기도하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 한약방을 하시던 시아버지께서 교회에 나가지는 않으면서도 늘 성경을 읽으셨다. 성경을 읽으며 깨달음이 있었던지 아들들에게 교회를 다니도록 권했다.
교회에 나갈 기회만 엿보던 김도락 집사님은 시아버지께서 교회에 나가라는 말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시는 남편을 거스르고 교회에 나갈 수 있는 자유로운 시대가 아니었다. 비록 몸은 교회에 나아가지 못했지만 마음은 이미 교회당에 나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김도락 집사님은 8남매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아들인 허석영 장로님은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의 추억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5살 때 어머니 무릎에 누워 있으면 “내 주를 가까이” 찬송을 불러주시고 기도해 주셨다고 한다. 다섯 살이던 허석영 장로님은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어머니께 “교회에 갑시다.”라고 어린 아이답지 않게 말했다.
그때부터 김도락 집사님은 다섯 살 막내아들의 말에 용기를 얻어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새벽기도회를 가기 위하여 새벽 1시에 일어나셨다고 한다. 새벽마다 다섯 살 먹은 막내아들을 등에 업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불신앙을 청산하지 못하고 아내의 신앙생활을 반대하고 핍박했다. 집사님은 남편이 교회 다닌다고 나무라면 교회에 달려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아픈 마음을 토하였다.
남편은 신앙의 핍박만 하는 게 아니라 집안의 경제도 실패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빚을 해결하기 위해 어머니께 교회 가자고 했던 막내아들 허석영 장로는 큰 집에서 8년 일을 해주고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 막내아들은 어머니 김도락 집사님에게는 교회를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드림으로 신앙을 선물했고, 아버지에게는 빚을 갚아드림으로 효도를 한 셈이다.
김도락 집사님은 눈물이 많은 분이셨다. 본디 눈이 안 좋기도 했지만 쉬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다 보니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연달아 성한 눈까지 시력을 잃게 되었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을까? 그래도 하나님을 향한 집사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처음엔 손자들이 수레로 교회에까지 실어다 줌으로 예배당에 올 수 있었다. 더 이상 교회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집에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뜻으로 여기고, 집에서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하며 신앙을 지켰다.
10년 동안 눈이 어두운 상태로 계시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또 자녀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격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8남매를 향해 “너희들은 교회에 잘 다녀야 한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너희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라는 권면을 꾸준하게 해주셨다. 자녀들은 어머니께 순종하여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 둘째 아들허문영 장군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믿음을 따라 살았고, 장로의 직임을 받아 주의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다. 한 사람으로 비롯된 믿음이 많은 후손들에게까지 계승되고 있음이 너무 귀하다.
첫댓글 귀한 글 잘 읽고 감동 받았습니다.
목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늘 가까이서 저희들을 보살펴 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 주시며 축복해 주시리라 믿고 하나님 말씀 순종하며 살길 원합니다. 아멘
네 과장님 감사합니다.
귀한 어머니의 신앙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귀한 믿음의 선배가 계셔서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