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백과사전>
신라의 제31대 왕(681~692 재위).
이름은 정명(政明) 자는 일초(日怊)·일소(日炤). 문무왕의 큰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665년(문무왕 5)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태자로 있을 때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을 비(妃)로 맞았으나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키자 내쫓은 뒤 683년에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비로 맞았다.
신문왕대는 통일신라의 국가 제도가 완비되었으며, 귀족들을 누르고 국왕의 권위가 확립된 시기였다. 즉위초인 681년에 김흠돌 등의 모반을 평정하고, 이를 사전에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 하여 병부령(兵部令) 이찬(伊飡) 김군관(金軍官)과 그 아들을 자살하게 하는 등, 귀족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이어 682년에는 위화부령(位和府令) 2명을 두어 관리를 선발하고 추천하는 일을 맡겼고,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국학(國學)을 세워 경(卿) 1명을 두었다. 또 이해에 공장부감(工匠府監) 1명과 채전감(彩典監) 1명을 두었고, 685년에는 집사부(執事部)와 조부(調府)에 실무자인 사지(舍知)를 두었으며, 688년에는 선부(船府)에 경(卿) 1명을 더 두는 등 중앙관청의 실무에 원활을 기했다.
683년에는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을 경주로 불러들이고, 684년에 금마저(金馬渚)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금마군(金馬郡)을 설치함으로써 모든 영역이 신라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685년에는 남원소경(南原小京)과 서원소경(西原小京), 청주(菁州:지금의 진주)와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함으로써 지방통치조직인 9주5소경이 완비되었다. 통일기의 군제(軍制)인 9서당(九誓幢)도 신문왕대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정책 기조 위에서 686년에는 지방제도를 조정했고,
689년에는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세조(歲租)를 지급하게 함으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달구벌(達句伐)로 천도하려 했으나 실현하지는 못했다. 경주 낭산(狼山) 남동쪽에 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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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동쪽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9.3m, 높이 7.6m인 이 왕릉(王陵)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모습이다.
봉토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들을 오단(五段) 정도 돌려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은 호석(護石)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 구조는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다. 호석 받침돌 가운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문(門)'이라고 음각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호석 밖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은 보이지 않으며, 그의 석사자(石獅子)·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의 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왕릉(王陵)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왕릉(王陵)의 동쪽에는 석상(石床)이 있는데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상에 비해 비교적 얕고, 석재도 고르지 못하여 원래의 석상인지 의심스럽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은 본명이 김정명(金政明)(혹은 김명지(金明之))이며,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장자(長子)이다. 재위기간 동안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685년 구주(九州)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능(陵)은 낭산(浪山)의 남쪽 방향에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망덕사(亡德寺) 동쪽에 있다고 한 효소왕릉(孝昭王陵)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이 능(陵)은 효소왕릉(孝昭王陵)이며, 신문왕릉(神文王陵)은 낭산(浪山) 동쪽인 황복사지(皇福寺址) 아래쪽에 십이지석(十二支石)이 남아 있는 폐왕릉(廢王陵)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