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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I.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개론)
1. 하나님을 공부하는 길
신학은 하나님을 공부하는 것이다. 때로 신학은
어려운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며, 심지어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학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다. 문제는 바른
신학, 좋은 신학을 하는 것이다.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은 독특한 분이시며, 신학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방법이다. 신학은 신앙의 맥락 속에서 태어났으며, 신앙과 동떨어진 신학은 공허할 뿐이다.
신학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즉, 우리의 신앙을 명료하게 하며, 현재 신앙 형태를 되돌아보는데 도움을 준다.
1)신학의 종류
신학(theology)이란 말의 어원인 그리스어 ‘theologia'는 하나님(theos)과
논리(logia)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이것이 바로 신학 공부의 목적이 된다.
신학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 연구를 진행하는데 일반적으로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성서신학
-신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의 분야로 성경 사본의 형성, 본문의 비평, 편집 의도에 따른 비평 등 여러 종류의 신학적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②조직신학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신학의 다양한 교리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신학분야이다.
조직(systematic)이라는 말은 ‘체계적’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조직신학은 교의학(Dogmatic)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기독교윤리를 조직신학의 한 분과로 넣기도 하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윤리는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과로 간주한다.
③역사신학
-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신학분야로, 교회의 실천적 분야의 지나간 흐름을 추적하는 교회사 분야와 교회의
사상적 측면을 연구하는 교리사(사상사)의 분야가 있다.
④실천신학
-성경과 신학의 가르침이 실천적 삶의 측면에서
반영될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는 신학 분야이다. 여기에는 기독교교육학, 예배학, 설교학, 기독교 상담학 등의 다양한 분야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네 분야를 구분해 연구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이유는 본래 하나의 학문 분야였던 신학이
분업화되는 것이 신학적 통찰력의 공유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사실, 각 신학의 영역들은 서로 연결되어있는 전체의 일부이다.
조직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하며 실천적 함축성을 가진다. 실천신학도 성서적이어야 하며 체계적인 가르침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의 분업은 인정하되 신학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연구하든지, 교리의 체계화를 시도하든지,
교회의 역사를 살피든지, 또는 실천적 삶을 탐구하든지 간에 중심적 관점은 하나님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다.
2)신학의 변천
역사적으로 볼 때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탐구와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는 가운데 신학이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로마와 같은 다신론 세계 가운데서 던져진 질문이었다. 또한
초대 교회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로부터 던져진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해 왔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논의에서 비롯된 대답의 시도였다. 처음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연구(신론)를 의미했으나, 점차로 기독교 신앙과
연관된 모든 주제에 대한 논의라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신학은 다양한 목소리 속에 다양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개념도
다양해지고,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의에도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여성신학, 해방신학, 환경신학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3)신학의 연구 대상
학문은 연구 대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점은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기에 신학의 일차적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신학의
연구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학은 단순히 철학적인 하나님 개념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①신학의 대상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은 인식대상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사로잡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속에 가두어 둘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으로 들어오는 순간에도 인간의 사고(思考)의
포로가 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님이시다. 결코 손님(객체)으로 전락되지 않으시며 주체이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
속에 갇히는 분이 아니라 자유로운 분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②신학의 인식대상인 살아계신 하나님은 피조물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공부하는 것은 피조물을 공부하는 것을 포함하며,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창조자이며 완성자이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 구속, 완성하시는 분이시므로 피조물의 세계도 신학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피조물에 해당하는 자연, 역사, 인간세계를 연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결코 피조물의 한
부분에 속하지 않으며, 큰 존재에서부터 작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피조물과 동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 인간, 산회, 자연, 역사,
세계, 교회, 자아 등 인간 삶의 모든 주제들이 신학의 주제가 된다. 또한 구원, 은혜, 믿음, 죄, 영광 고난 등 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에 대하여 ‘하나님과의 연관성’ 가운데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조직신학이다.
4)신학의 방법
학문에는
고유한 방법론이 있으며, 그 연구대상에 따라 적합한 방법론을 사용한다. 수학, 천문학, 사회학,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대개의 학문은 연구의 대상을 고정시켜 놓은 채,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천문학자는 망원경을 사용하여 별을
관찰하고, 생물학자는 현미경을 사용하여 작은 생명체를 살펴본다.
신학은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하기에 독특한 방법론을 요청한다.
하나님을 공부하는 것은 달리는 말 위에서 날아가는 새를 그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죽이고 고정시킨 뒤에 해부하고, 분석하여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운동에 참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신학의 방법이며, 이를 위해 먼저 연구자의 변화를 요청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체험함이 없이 하나님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체험은 반드시 연구자의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식 주체인 인간과 인식 대상인 하나님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자요 주인으로 인간은 피조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즉,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자요 인간은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하는 존재이다.
신학의 방법은 신앙의 방법이며, 신학의
인식은 은혜의 인식이다. 신앙의 방법이란 하나님께서 열어주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운동 속에 참여하는 가운데 전개되는 방법을 말한다.
5)신학의 역할
신학은 신앙의 사건 속에서 마주친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공부하는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탐구하며, 하나님의 법칙을 탐구한다. 하나님의 영을 탐구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탐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기 원하며, 하나님의
운동, 사건, 역사 속에 참여하길 원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신학은 신앙에 대한 개념적 해석을 시도하며 신학은 신앙인과 교회에
대해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①신학은 신앙인과 신앙공동체에 대해서 해석적 역할을 담당한다.
-상징, 은유,
표징 등의 신앙의 언어들을 개념적 언어로 바꾸어준다. 즉, 신앙생활의 구조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보여주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지향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지 등 삶에 대한 신앙의 요청을 명료화하는 역할을 한다.
②신학은 신앙인과 신앙공동체에 대해서 검증과 비판적 성찰의 역할을 제공한다.
-신학은 신앙의 삶 가운데 담긴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현재 우리의 신앙 형태가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검증해준다. 마치 설계도가 집은 아니지만 설계도의 도면을 보고 지금 건축되는 집의
형태와 문제점을 진단할 수 있듯이, 신학적 이론을 통하여 현재 우리의 신앙의 모습과 문제점을 점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 형태가
왜곡된 형태가 되어 인간의 역사와 삶에 부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를 신학은 검증할 수 있다.
신학은 이러한 해석의 기능과
비판적 성찰의 기능을 조화롭게 수행함을 통해서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공헌할 수 있다.
6)신학의 유익
신학이 주는 유익은 다른 학문에 대해서 신학이 주는 유익과, 신앙에 대해서 신학이 주는 유익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①다른 학문에 대해서 신학이 주는 유익은 하나님의 관점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관점이란 인식자의 눈이 땅으로부터
어느 높이에 붙어 있는가를 말해주는 지점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제한 속에서 사물을 인식한다. 상식적인 관점, 과학적 관점,
어린이의 관점, 어른의 관점 등에 따라 상황을 읽는 눈이 달라진다.
하나님을 공부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하나님의 시가에서
바라보게 된다. 마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관점에서 문제를 살펴봐서 상황 속에 빠져들면서도 동시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공부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풀어간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을
원인으로 놓고 모든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문제의 원인과 해결의 방향으로 제공하여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요인을 우선순위에 놓는 것을 말한다.
②하나님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에 대해서 바른 길로
갈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행을 하는 데 있어서 발을 떼면서 걸어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좋은 지도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 전체적인 길의 흐름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여행 지도를 보면서 여정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곳에 절벽이 있고, 봉우리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이 바로 신학의 해석적 기능이다. 또한 약도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도움을 준다. 때로 신앙의 여정을
벗어났을 때 약도는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쳐준다. 이것은 신학이 제공하는 비판적 성찰의 기능이다.
신앙과 신학의 관계는
건축과 설계도, 등산과 지도, 컴퓨터와 사용설명서, 인생과 학문 사이의 관계와 같다. 신학은 지도가 주는 유익을 신앙인에게 준다.
그러나 신학에는 위험성도 있다. 신학하기를 즐기는 동안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기보다는 철학적 개념과 신학적 사상을 무의식적으로
즐기려는 유혹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고 주님의 심정을 갖지 않고 신학을 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우상적 신(神) 개념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신학자는 신학하기를 배우는 동시에, 때로는 미련 없이 신학을 넘어설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신학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신앙의 자세와 함께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하거나 장악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지는 그 순간에도 신비이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7)신학의 자료
학문에는 자료가 필요하다. 자료가 없는 연구는 공허한 연구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자료가 없이 연구하는 것은 사변적인 이론을 양산할
뿐이다.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흔적이 담긴 자료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라는 원자료에 접근해야 한다.
신학의 자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성경, 경험, 이성, 문화, 전통 등이다.
①성경은 하나님을 공부함에 있어서 최고의 자료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성경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는 성경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을 공부함에 있어서 성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성경은 신학의 자료일 뿐 아니라 다른 자료를 해석하는 해석의 틀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②하나님을 공부함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과 이성 역시 중요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다른 피조물과 접촉함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을 갖게 된다. 성경을 읽는 것 또한 인간 경험의 일부분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서 감각 기관을 활용하여 자료를
수집하며, 수집된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수행한다.
이러한 경험된 자료를 활용함으로써 합리적인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지적능력을 우리는 이성이라고 한다. 이성은 인간이 학문을 하고 실제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을
공부하는 신학적 작업을 함에 있어서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경험과 이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큰 틀
안에서 그 중요성을 가진다.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 경험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경험의 잣대로
재단하고 마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 경험에 대한 강조는 낭만주의 또는 실존주의 등의 세속적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경험에 의지하기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면서도 성경에 의지하는 가운데 자기 시대의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③하나님을 공부함에 있어서 문화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교리만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뒤에 그 말씀을 인간의 문화 속에 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과거의 문자와 틀 속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살아 움직이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시대를 읽는 것은 하나님을 공부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신앙인은 진공상태에 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신앙인에게 말씀하시며 피조물들을 인도하신다.
신학자 밀리오리는
신학을 질문을 던지는 신앙으로 규정한다. 즉, 신학이란 주변 상황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답변을 추구하는 것이다.
④하나님을 공부함에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자료는 전통이다.
모든 사람은 문화적 존재일 뿐 아니라 특정한 전통에
속한 존재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조차도 전통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무시한 채 성경연구에서 전통을 배제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
이해가 아니며, 올바른 전통 이해도 아니다. 이러한 성경 이해는 성서 문자주의에 빠지게 된다.
(안식일교, 여호와증인들...)
전통이 하나님 공부하기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역시 경험과 마찬가지로 신학의 자료일 뿐 신학의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전통을 넘어서 성경의 우선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다른 곳과는 달리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면으로 본다면 성경은 다른 전통적 문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령의 조명과
감동이라는 신앙의 핵심에서 볼 때 성경에서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험, 문화, 전통 속에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시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II. 하나님의 존재
기독교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인식을
대전제로 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가정이 없다면 기독교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하나님은 자존적(self-existent)이며,
자의식적(self-conscious)이며, 인격적(personal)인 실유(Being)로 계시다는 것이 대전제(大前提)가 되어진다. 그러나 한편
인간은 유한하여 무한하신 하나님을 측량하고 이해할 수가 없다고 소위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간혹 사람들은 그러한
불가지론을 통하여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정확하고 구체적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뜻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 존재와 절대성은 알고 있다. 즉 불가이해(不可理解)는 타당하며, 그러나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 존재론적인 증명
-불신자라 할찌라도 자신들이 피조물이며 창조주가 있다는 내적감각을 갖고
있다(롬1:25). 바울은 악한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롬1:25)라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인다”고 말했고 “이는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즉 인간이 신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관념을 갖게끔 하는 절대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진실로 그를
믿고 사랑하게 되는데, 성경은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에게 증거한다”(롬8:16)고 기록하고 있다.
2) 우주론적인
증명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는 인과론적 접근방법. 즉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존재케 하는 제일의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논증이다(Locke, Leibnitz).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생명이 있는 실존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우주는 서로 상호 작용하는 구조로 나타나고 있으며, 무한한
우주는 몇 부분으로 구성되는 단위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일원적인 근거를 갖는 집행자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3) 목적론적인 증명
-자연만물이 질서를 유지하되 혼돈에 이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어떠한
이성적 존재가 필연적으로 있다는 논증이다(Theophilus, Clement). 간단한 유추로 볼 때에, 사계절의 날씨와 비와 햇빛과 식물의
결실은 모두 인간과 동물의 음식과 깊은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음으로 그 생존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볼 때에, 이러한 자연만물의 질서와
법칙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으며, 이 모든 세계가 지식과 목적의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4)
도덕론적인 증명
-이 사회에는 권선징악을 권장하는 도덕적인 판단이 있다. 또한 개인의 양심도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선을 지향하려는 도덕적 성향은 곧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인도하려는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Kant).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한 의식과 필요성을 인식한다. 이것은 선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학은 이것을 지고선(至高善, a highest good)이라고 부르는데, 사람의 인식과 도덕적 이상에 대한 탐구가 어떤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필연케 한다.
5) 종속론적인 증명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지상의 모든 종족이
보편적인 신관관념과 종교를 가졌다는 것은 절대자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의 인종과 민족이, 과거이든
현재이든 자연적으로 모든 형태의 신과 그 종교를 갖고 있으며 외적인 제사(external cultus)의 형식을 갖고 있다.
즉
사람의 본성이 본능적으로 종교적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은 신적 실유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6) 성경적 증명
-앞에서와 같은 합리적 유신논증(有信論證)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증명시도로서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불충분하다.
위의 설명들은 믿는 자에게는 약간의 가치를 갖으며, 논증 이라기보다는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적인 유추에 의해 증명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다.(창1:1)
따라서 믿는 자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완전한 증명이 된다.
III.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위에서 언급한 유신(有信) 논증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구체적 속성을 알 수 없지만 특별 계시의 기록인 성경을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구체적 속성도 알 수 있다.
1) 영성(靈性)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영이시므로(요
4:24), 손으로 만져지거나 눈으로 관찰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초월하실 뿐만 아니라 편재(偏在)하실 수도 있다(렘
23:23).
2) 완전성(完全性)
하나님은 여러 신 중의 하나가 아니고 유일하신 분이므로, 투쟁하거나 혹은
발전하실 필요가 없다. 또한 완전하시어 피조물과도 철저히 구별되신다(출 15:11;시 147:5).
3) 단순성(單純性)
하나님은 다른 요소들과 혼합되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직 절대 완전하심으로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다.
IV. 하나님의 명칭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가 부여하신 여러 이름들을 통하여 당신의 성품의 일면을
계시하신다.
1. 기본적인 구약의 이름
1) 엘, 엘로힘(Elohim) - 성경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초의 단어가
바로 ‘엘로힘’이다. 창세기 1장 1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으며,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 번역되고 있다. '엘'은
'강한 자'란 뜻을 갖는 가장 단순한 이름으로서, 강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2) 여호와(Jehova)
'스스로 있는 자'란 뜻으로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다(출 3:14). 이 이름은 하나님의 자존성(自尊性)과 거룩성
및 영원불변성을 강조한다. 특히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야훼’라는 표현으로 번역됨)
3) 아도나이(adonai)
'주'(主)라는 뜻을 갖는 이 이름은 인간에게도
사용되지만,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인간을 포함한 전(全)피조 세계에 대한 소유자 혹은 통치자를 가리킨다.(창세기 15:2)
2.
복합적인 구약의 이름
) 엘의 복합어
⑴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창 17:1;28:3).
⑵
엘 엘론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9).
⑶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사 40:28).
⑷ 엘 로이
―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
2) 여호와의 복합어
⑴ 여호와 이레 ― 여호와가 준비하심(창 22:14).
⑵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출 17:15).
⑶ 여호와 살롬 ― 여호와는 나의 평강(삿 6:24).
⑷ 여호와 라파 ― 여화와가 치료하심(출 15:26).
⑸ 여호와 삼마 ― 여호와가 거기 계심(겔 48:35).
⑹ 여호와 치드케누 ― 여호와는 우리의 의(렘 23:6).
⑺ 여호와 로이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
⑻ 여호와 체바오트 ― 만군의 여호와(삼상 1:3).
⑼ 여호와 마케 ― 멸망시키시는 여호와(겔 7:8).
⑽ 여호와 엘 게물로트 ―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심(렘 51:56).
⑾ 여호와 메카디쉬켐 ― 너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출 31:13).
3. 신약의 이름
1) 데오스(theos)
구약의 '엘'이나
'엘로힘'의 헬라어(그리스어) 번역어이다. 그러나 '엘'이나 '엘로힘'은 민족적 종교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과 관계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나, 이것은
신자 개인과 관계하여 사용된다.
2) 큐리오스(kyrios)
'주'를 의미하며 구약의 아도나이와 동일하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에게서 보다는 그리스도에게 더 많이 사용된다.
3) 파테르(pater)
'아버지'란 의미가 있으며,
신자 개인에게 영적 혹은 육적 도움이 되시는 아버지로서 성부 하나님을 지칭한다(마 6:6;롬 8:15).
V. 삼위일체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역사와 사건 속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전개할 때 막연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구체적인 하나님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그분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신앙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연구할 때 두 가지 길이 있다.
첫 번째 길은 하나님에 대해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고찰한 뒤 이것을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와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막연한 표상에 근거하여, 철학이나 수학적 논리의 도움을 얻어서 하나님에 대해 보다 정교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또 하나의
길은 전자의 경우와 달리,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가운데 계시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귀납적으로 그 현실에 기초한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후자의 길을 따름으로써 얻어진 결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인간의 경험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니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경험한 계시의 현실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참여하는 가운데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제자들과 함께 하였고 제자들이 따랐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였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은 누구신가?
지금도 이 세상 속에서
인간과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영은 누구신가?”
이러한 질문들을 숙고하고 대답을 찾는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이 고백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면을 완전히 파악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재된 구속의 사건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충실히 말하고자 애쓴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따라가는 가운데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 가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게
되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사도들의 메시지 중에 드러나게 선포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삼위일체론을 증거하고 있으며, 사도들의 전파 내용은 삼위일체 신앙을 전제로 한 것들이었다.
삼위일체론에서 논란의 쟁점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었는가의 문제이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고 사람이었다면 삼위일체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여러 선지자 중 한사람이라면 하나님은 한 하나님으로 고정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하게 된다. 성경에는 물론 예수님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5~6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 뿐 아니라 구원자 그리스도께 대하여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돌려지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명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이룩한 십자가의 성취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하나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일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을 위한 구원의 성취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핵심적인 요소가 되며, 이것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삼위일체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 신앙은 성령에 대한 물음에서 나타난다. 성령은 과연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우리의 주관적 느낌인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체험한 것은
영으로 오신 하나님과의 만남인가, 아니면 한때의 흥분한 감정이었는가?
제자들의 체험이 한때의 감정이었다면,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기운이다. 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제자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죽을 때까지) 받았으며,
성경에서 성령은 주권적인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삼위일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면,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하나님임을 믿는다. 삼위일체 신앙의 첫 걸음은 삼위 하나님이 모두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삼위(三位) 하나님의 부분만 인정한다면 그것은 삼위론 또는 삼신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일체(一體) 하나님을
강조한다. 우리가 예수님과 성령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서로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세 분 하나님 속에서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을 만난다.
창조주 여호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 대결하지 않으며, 서로 다르지 않으며, 서로
하나의 하나님을 구성한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하늘 위에 계셔서 그저 자족하는 가운데 인간과 그의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아무 상관하지 않는 무심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고, 지금도 살아서 우리 곁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즉,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을 희생 하시면서 까지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삼위일체론을 말할 때 그러한 신학 개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피조물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오늘도 살아계셔서 피조물들을 위해 탄식하며 친히 간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삼위일체론은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이 있다. ‘세 분 하나님이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 되는가’의 문제는 사실
우리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적/사회적 비유를 사용해보기도 하지만 어느 것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성되어있느냐의 문제는 산술(算術)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VI.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가지셨는지를 아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계시, 특히 특별 계시로서의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하나님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독특한 성품으로서 일명 본체적(本體的) 속성이라 불리운다.
1) 자존성(독립성)
하나님은 당신 안에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갖고 계시므로, 무엇에 의존적인 피조물과는 달리 지적으로(롬 11:33:34),
의지적으로(단 4:35;롬 9:18), 능력적으로(시33:11;115:3) 자존하신다(요5:26).
2) 불변성
하나님 스스로와 그분께 속한 그 어느 것도 결코 변함이 없다(말 3:6).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하다. 즉, 사상의 측면(시 33:2), 활동적 측면에서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3) 무한성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그 누구 혹은 무엇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행 17:25). 따라서 그 어떤 제한이 없이
자유로우시다. 즉, 하나님은 본질적 무한성(시 145:3), 시간적 무한성(시102:26), 공간적 무한성(렘 23:24)을 가지시므로 만물
속에 갇혀 있는 신을 가리키는 범신론(汎神論)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4) 유일성
하나님은 여러 신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 유일하신 절대자이시다(신 4:35). 따라서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결국 그분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롬 11:36).
2.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서도 발견 될 수 있는 성품으로 보편적(普遍的)
속성이라 불리어진다. 그러나 인간은 지극히 불완전 하나 하나님의 그것은 완전무결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1) 영적 속성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합일체(合一體)이지만,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요 4:24). 그래서 하나님은 불가견적(不可見的)이다(딤전
6:15,16).
2) 지성적 속성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고 계신다(요일 1:5).
⑴ 하나님의 지식 ― 하나님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 모두에 대하여, 즉
실제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것을 원형적(原型的), 직각적(直覺的), 독립적(獨立的), 총괄적(總括的),
불변적(不變的)으로 분명히 알고 계신다(잠 15:3; 히 4:13).
⑵ 하나님의 지혜 ―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지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실수 있는 지적 능력도 갖고 계신다(시 19:1-7; 고전 2:7; 엡 3:10).
⑶ 하나님의 진실 ―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진실하시므로 (출 34:6), 인간에 대한 계시와 행위 또는 진실하시다(시 117:2; 신 7:9).
3) 도덕적 속성
불완전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이방신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큼 하등의
도덕적 결함이 없으시다.
①하나님의 거룩 ― 피조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위엄적 거룩(출 3:5)과 죄와는
합치될 수 없으심을 말하는 윤리적 거룩이 있다(사 5:16;마 5:48).
②하나님의 의 ― 여기에는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
원리로서의 의(사 32:1) 및 정치적 의(신 7:9)와, 또한 하나님이 그 통치 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시어서 불순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게
하는 동기로서의 분배적 의(롬 2:9)가 있다.
③하나님의 선 ― 선의 유일한 원천(막 10:18)으로서의 하나님은 그 뜻과
행위가 항상 선하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선에는 일반 생물에게 베풀어지는 자선(시 145:9,15,16),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사랑(마 10:31;12:12), 죄인으로서의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값없는 은혜(롬 3:24;딛 3:11)가 있다. 또한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달하는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긍휼(삼하 24:14; 시 79:8; 애 3:22), 범죄를 일삼는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인내(출 34:6;롬
9:22) 등도 있다.
4) 주권적 속성
하나님은 우주의 조성 자이시므로,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그 우주와
인간들을 다루실 수 있다. 여기에는 당신의 행위 방향을 결정짓는 주권적 의지(롬 9:15,16)와 실제로 그 의지를 행하게 하는 주권적 능력이
있다.
5) 유복적 속성(有福的) 속성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시므로 모든 덕에 요소를 지니시며, 자신을 아시는
절대적 지식과 자신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가지셨으므로, 스스로에 대하여 자충족적(自充足的) 기쁨이 있으시다(딤전 1:11;6:15).이러한
내면적 유복성이 외향적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3. 하나님의 성품
신앙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이다.
1)신실하신 하나님
-인간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고, 자신의 성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시며 항상 미쁘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기댈 수 있다.
2)사랑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신 분이시다.
3)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인 동시에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이 자신에게 거역한 것을 오래 참으신 하나님이다. 탕자를 감동시킨 것은 아버지의 풍족한 재산이 아니라 자신을 오래 참고 기다린
아버지의 마음이었듯이, 오늘도 불신앙인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성품이다. (베드로의 고백-벧후 3:9)
4)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별된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스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단지 정적인
거룩함이 아니라 동화(同化)시키는 거룩함이며, 닿는 것마다 거룩함으로 변화시키는 거룩함이다. 이 거룩함은 우리의 성품도 동화시킨다.
5)의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며, 죄 없으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 한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란 도덕,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의 의로움이 신앙인의 성품 안에 전달되며, 그리하여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VII. 계시에 대하여
신학은 하나님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하나님을 공부하려면 자료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알수
있는 자료들을 우리는 계시라고 한다. 계시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연약하며 불충분하기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1)계시의 의미와 필요성
계시란 이전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계시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계시가
왜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①인간은 존재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전체를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락한(그것도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찌그러진 모습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있다.
②인간은 인식의 차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으며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지냈다. 하지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게 된 이후에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간격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높여서 하나님처럼 여기게 되었다. 영적인 타락은 지적인 타락으로 이어져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오늘도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찾는 길을 열어주신다. 그
길을 걷는 자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사랑을 받는 가운데 신앙인의 길로 들어선다.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자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다. 믿음이 있는 곳에 계시가 있고, 믿음이 없는 곳에는 계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2)계시의 내용
하나님의 계시는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다.
①계시는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 준다.
계시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인간 앞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자유로운 가운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위해 다가오신 하나님의 모습이 계시의 사건들 가운데 드러난다.
②계시는 인간의 참모습을 알려준다.
계시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두 면을 본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깨닫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인하여 새롭게 드러나는
인간의 참된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보게 하는 동시에, 미래에 실현될 참된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③계시는 약속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알려준다.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결코 꿈꾸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대면하게 되며, 그 세계 속으로 초대받게 된다.
3)계시의 종류
①일반계시
-하나님께서 자연, 양심, 역사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행위, 존재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전달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
역사, 문화,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시편 19편을 보면,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행위, 지혜를 알 수 있다.
또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뜻과 행위 교훈을 계시하신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역사의 방향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역사의 비극적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게 된다.
②특별계시
이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만드는 보편적인 계시를 인간의 죄악된 습성은 일반적인 하나님
지식을 우상숭배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또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지만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으로 인해 그 뜻을 곡해하거나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의 양심은 때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변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될 때 양심이 타락하여
왜곡되고 타락한 기준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한계와 오류를 보충하기 위해 특별계시를 우리에게 주셨다. 즉, 특별계시를 통하여 일반계시의
손상된 측면을 보완하기 위함인 것이다.
특별계시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존재가 있다.
하나님의 로고스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가운데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기독교는 기독(基督, 그리스도의 한문(漢文) 표현) + 교(敎, 가르침, 종교),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계시를 통하여 일반계시를 바라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의 시각으로 자연, 역사를
바라볼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4)계시와 이성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언제나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이 인간 이성과 무관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화된 이성’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방향이 왜곡된 이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계시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하거나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을 성화(聖化) 시킨다. 인간의 죄와 이기심에
의하여 사로잡혔던 인간 이성과 상상력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올바른 방향을 회복할 수 있다.
5)계시의 사건성
성경에서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 지식이란 정보(information)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계시는 물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궁체적인 만남에서 얻어지는 생동하는 지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 속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는 지식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만남의 사건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6)계시와 인격의 변화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을 받는 사람의 인격적 변화를
동반한다. 계시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앎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인격적인 변화가 뒤따른 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한 사람들은 인생의 한 복판에서 근본적인 변화(paradigm shift)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새로운 소명을 부여받는다. 이전에 목적 없이 살았던 인생이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을 체험하고 난 뒤에 인생의 새로운
소명(부르심, calling)을 경험한다. 이제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서 사는 인생이 된 것이다.
*참고도서
-기독교 신학개론, 루이스 벌콥, 성광문화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다니엘 밀리오리, 한국장로교출판사
-스피드 조직신학, 정성욱, 홍성사
-신학서론, 황승룡, 한국장로교출판사
-조직신학(상), 황승룡,
한국장로교출판사
-하나님 공부하기, 장경철, 낮은울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