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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미스테리 스크랩 제사를 지낼 것인가, 말 것인가?
티끌 추천 1 조회 140 16.10.11 11: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을밤 추석은 신라 때부터 이어져온 우리 민족의 큰 축제였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추석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함께 기다리던 축제였다. 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텅 빈 마을이 되고, 또 농경축제로 이어져온 한가위라는 축제의 의미도 빛이 바래면서 오늘날 추석이라고 하면 가족끼리 만나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풍물놀이, 차전놀이, 길쌈놀이, 풍등 날리기 등 고유 풍습은 다 사라지고 오직 제사 지내고 성묘하는 <온국민 제사 지내는 날>로 남은 셈이다. 그래서 이 글을 적는다.


제사를 지낼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참고자료 삼아 글을 드린다.


조선 시대 말기, 정조 순조 연간에는 제사를 안지내고 신주를 불태우다 걸려 목숨을 잃은 천주교도들도 있다.

지금은 그런 세상은 아니지만, 그때 신주를 불태우며 제사를 거부하던 천주교는 도리어 제사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제는 기독교만 제사를 거부한다.


우리 집안도 장손이 목사가 되고, 지금은 필리핀 선교로 나가 있어 제사가 중지된 상태인데, 막내에 해당하는 우리집은 아직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제사는 본디 양반만이 지내는 거였다. 그러기로 말하면 조선시대 초기에는 3%만 지낸 셈이고, 후기에 와서는 약 10%가 지낸 셈이다. 즉 조선시대 양반이란, 정치적인 특권층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유교를 믿는 종교인들이기도 하다. 제사는 양반의 특권이 아니라 유교인들의 제례문화인데, 양반은 곧 유교인인 儒가 돼야만 하던 조선시대 실정상 같은 개념이 돼버렸다.


그럼 유교인들은 왜 제사를 지냈을까?

원래 수천 년 전 우리나라와 중국에는 귀신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벼라별 귀신을 다 섬겼다. 크고 작은 귀신이 너무 많아서 다 헤이라기도 어려울만큼 많았다. 지금의 일본 같은 것이다. 

그러던 중 상나라(기자조선의 선조 나라)가 왕실에서 선대 조상들을 제사하는 문화를 발명했는데, 나중에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주나라가 이 상나라 제사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상나라를 무너뜨리면서도 제사에 관여하던 관리들은 하나도 안죽이고 고스란히 제관으로 받아주었다.


- 발굴된 상나라 시대의 무덤. 이 때는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순장이 기본이었다. 기타 죽어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건을 함께 묻었다. 이 시대에는 왕만이 죽어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고, 일반인은 죽으면 그만이었다.

상나라 왕 조갑이 토착신을 완전 배제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왕실 직계 조상을 제사하면서 오늘날의 제사 풍습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나중 주나라의 주공이 온전히 받아들여 주나라 왕실 제사법으로 발전하고, 이를 공구가 발견, 정비했다.


그러던 중 유교 시조인 공구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당시 춘추시대 말기라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강간하고, 아버지가 며느리를 빼앗고, 남매가 붙는 등 인륜이 어지러웠다.

이때 공부는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하여 주나라 왕실에서만 지내던 조상 제사 문화를 일반에 퍼뜨린 것이다. 유교의 儒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선비 유라고 나오는데, 원래는 제사 지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공구 자신이 儒가 되어 제사 지내는 방법, 절차, 제수 등에 관한 제도를 정비하여 널리 보급했다. 이로부터 儒가 늘어나고, 춘추와 전국 시대를 지나면서 儒를 통해 윤리를 바로잡자는 그의 사상이 왕들에게 왕권강화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러한 제사 문화는 급속히 퍼졌다. 왜냐하면 儒는 잡신은 거부하고 오직 조상만 귀신으로 섬기기 때문에 왕의 입장에서는 통치 기법으로 대단히 좋은 기술로 여겨졌던 것이다. 즉 공자가 말한 삼강오륜을 시행하면 나라가 안정되고, 임금의 존재 가치가 '가장 큰 조상'만큼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다. 죽은 왕의 제삿날은 국정 공휴일이 될만큼 왕은 죽으면 나라의 큰 귀신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儒 문화는 급속도로 번져 여기저기서 유교의 승려 혹은 사제인 儒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믿는 바가 유교가 되고, 이들은 유림이 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오랜 귀신 전쟁에서 사람 귀신이 이기는 시대가 되었다.


- 유교의 교주인 공구(서기전 551~479). 유교는 공구의 이름을 따 Confucianism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눈을 돌리면 삼국시대에 제사문화가 들어왔는데,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교가 되면서 부처님오신날이 최대 명절이 되고, 이런 저런 불교행사가 중심이 되었다. 고려 정권은 그 나름대로 불교를 이용했는데, 정도전은 고려를 무너뜨리면서 이런 정신 체계 자체를 뒤엎어버렸다.

먼저 조선 건국의 중심은 다름 아닌 儒들이었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그는 이 儒들을 모아 조선을 儒의 나라로 설계했다. 그러니까 유교를 국교로 삼는 儒의 나라로 만든 것이다.

관리들은 100% 儒로만 등용하고, 성균관 학생들은 儒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유생이 되어야만 했다.


들의 가장 큰 종교시설인 성균관에서 교주 공구를 제사하는 석전 의례. 이 석전이 제사의 모범이다.


즉 모든 불교 명절을 없애버리고, 왕과 왕비의 생일과 기일을 국정공휴일로 삼아 누가 조선의 귀신인지 명확히 했다. 즉 귀신전쟁에서 정도전이 부처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죽은 왕>을 올려세운 것이다.

그러니 이런 왕의 은덕을 입은 공구의 교도들인 儒들은 역시 자신의 조상을 제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실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를 儒들도 지내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에도 양반이 아닌 97%의 사람들은 제사 없이 살았다. 심지어 성도 없이 살아 조상이 누군지 족보 없이 살았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양반 신분 매매 등 신분질서가 무너지면서 일반 백성도 제사를 지내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까운 4대 제사는 얼굴도 알고 신분이 뚜렷하겠지만, 그 이상의 선대에 대한 제사는, 이를 테면 시제 등, 지금 인구의 80~90%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남의 집 조상들에게 드리는 것이다. 세거지에 살아온 사람들 아니고는 웬만하면 가짜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만큼 조선 후기에서 일제 시대 사이에 엄청난 신분세탁이 일어난 결과다.


이런 이유로 나는 유교라는 한 종교의 수행자임을 뜻하는 儒들의 풍속인 제사를 아무 비판없이 그냥 지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교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멸실된 종교나 다름없다. 조선시대를 망친 것으로유교와 성리학의 폐해는 충분했다. 유교의 좋은 점은 학문적으로 잇고 발전시키면 되지 그걸 종교적으로 잇는 건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특히 향교 등에서 儒들이 지내던 석전의식 등을 이 시대의 자치단체장들이 아무 생각없이 지내는 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지금도 잔존하는 儒들이 전통문화 삼아 지내는 거야 권장할 일이지만 일반인들이 그러는 건 좋아보이지 않는다.


서당, 서원, 성균관이 우리는 학문연구기관이요, 학교라고 하지만 사실은 불교의 절이요, 기독교의 교회다. 儒들이 모여 유교의 교주인 공자를 모시고 유학을 배우는 그들의 사찰이다. 절에서 공부하면 승려가 되고, 교회에서는 목사가 나오듯이 서당, 서원, 성균관에서는 儒가 나오고, 이들이 양반이 되어 정치까지 독점했던 것이다.


조상을 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추석은 그야말로 가을밤이요, 가을밤 중에서도 커다란 보름달이 뜨는 한가위날이라서 우리 조상들이 큰 잔치를 열어 즐기던 날이다. 신라 때부터 이어져온 이런 풍속을 되찾으려 노력해야지 조상 제사하는 날로 의미를 좁혀놓으면 안된다.

차례를 지내더라도 그야말로 제 철에 나는 과일과 채소로 상을 꾸미고, 그 앞에서 덕담하는 것으로 족하다.

절하는 건 각자 자유다. 다만 지방을 써붙이는 건 儒들의 고유 풍습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 

지방에 쓰는 문장 자체가 儒들의 사상이 꽉 찬 것이다. 너나없이 儒들이 하던 습속대로 지방을 써붙이는 것도 잘못이다. 특히 대부분에 해당되는 '학생부군'는 儒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조선시대는 儒가 돼야 9급 공무원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현대에 굳이 이런 지방을 붙일 이유가 없다.


- 불교식 제례인 영산재. 불교에는 49재, 천도재 등의 여러 제사 의식이 따로 있다.

유교의 제사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특히 집에서 지내는 제사는 없고, 모든 제사를 절에서 지낸다.


- 천주교 제사의 기본 차례상. 수많은 천도교들이 제사 문제로 목숨을 잃자 할 수 없이 유교의 제사법을 차용하였다.


<알아두면 좋은 제사 관련 어휘들>


<아버지 명정에 학생부군이라고 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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