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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역'에 대한 칼빈신학교 다섯 교수의 대담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를 위한 5인의 미국 칼빈 신학교 교수들(캘덜먼, 볼트, 쿠퍼, 훌스터, 스미스)의 대담
캘덜먼: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무엇이 특히 중요한가?
훌스터: 성령의 사역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 – 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우리 안에서의 그리고 우리를 통한 성령의 사역이다.
쿠퍼: 그것을 또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보면, 성령이 창조의 모든 일과 재창조의 모든 일 배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명한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은 창조세계의 모든 구석구석에, 심지어 기독교 교회를 넘어 관계한다고 가르쳤다. 만약 나무들이 살아 있다면, 만약 아돌프 히틀러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면,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볼트: 성령의 사역은 여전히 남겨진 기독교 교회의 의제들 중 하나이다. 초대교회에서 우리는 [기독교 교회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들을 수행했고, 중세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교리를 수행했으며, 종교개혁시대에 칭의에 대한 질문들을 다루었다. 하지만 성령론에 관한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작업과 합의 같은 것은 없었다. 그 후 20세기가 도래하고 우리는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운동 계열의 기독교가 성장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에 대한 증거로 충만하다.
성령이 지난 백 여년동안 극적인 방법으로 역사해 왔다는 대단히 많은 경험적인 증거가 있다. 그것은 왜 방언이나 예언 같은 특별한 은사들이 단지 사도시대를 위한 것이었다는 관점을 간단히 방어할 수 없는 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것은 성령의 경이롭고 강력한 역사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받아들여 져야 한다는 걸 의미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가르치는 지 분별하도록 부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강력한 증거를 우리의 신학적 팔로 감싸야 한다.
캘덜먼: 수년 전 어떤 이가 나에게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을 살펴보면서 성령이 언급될 때마다 밑줄을 그어보라고 말했다. 성령이 어떻게 삶과 구원의 모든 면에 관계하는지를 관찰하는 건 매우 놀랍다. 그렇다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든 축복에 동참하게” 하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볼트: 그 첫번째 문구[‘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그에 의해 성취된 유익으로, 죄에 대한 완전한 대가의 지불이다. 그리스도의 유익에 동참한다는 것은 죄 용서를 받는 것과 우리가 인간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들이 되기 위한 힘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쿠퍼: 그것은 또한 중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이다. 비록 옛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옛 본성은 새 본성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것은 성령의 역사 – 초자연적 기적 – 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중생이고 기독교 교회에서 항상 일어난다.
캘덜먼: 성령의 열매 또한 초자연적 역사에 의한 기적인가?
훌스터: 그렇다. 그것은 중생의 모든 부분이다. 성령에 의한 그 기적[중생]이 없이는 우리 중 누구도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를 소유할 수 없다. 어떤 사람 안에서 발생하는 변화가 바로 참된 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내 일어나고 있다!
캘덜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말씀과 성령”이라는 문구가 자주 나타난다. 왜 개혁주의 신자들은 그 두 단어를 짝짓는가?
훌스터: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혹은 “성령이 나에게 저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제안하는 개선책 중 하나는 말씀과 기독교 공동체와 대면해서 그것을 검증해 보라는 것이다
쿠퍼: 우리는 또한 삼위일체 때문에 말씀과 성령을 언급한다. 삼위일체 – 성부, 성자, 성령 – 는 창조, 구속, 그리고 재창조와 연관된다. “말씀과 성령”은 단지 성경과 성령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씀은 삼위일체에서 두번째 위격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 하며, 두번째와 세번째 위격들은 첫번째 위격과 함께 일한다. 기독교 내에서의 문제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성자와 성령 없이 성부의 종교를, 혹은 다른 두 위격들 없이 성자의 종교를 취할 때 발생한다. 오순절운동의 위험성은 성령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성부와 성자를 뒷전에 남겨두는 것이다.
볼트: 우리는 또한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즉,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능동적인 역사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캘덜먼: 나의 신학교 교수였던 핸리 스탑 (Henry Stob) 은 “성령은 성경의 등에 올라탄다”라고 말했다.
쿠퍼: 맞는 말이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의 등위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둘은 공생의 관계이다.
캘덜먼: 개혁주의 신자들은 가끔씩 성령에 매우 취약한 이들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을 잘 살펴보면 그것은 성령에 대해 매우 풍성하다. 우리가 스스로의 신학에 충실하지 못한 게 아닐까?
볼트: 우리 자신의 신학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우리가 성령에 취약한 이들로 간주되는 이유의 일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에 다녀온 후 해변을 달리며, 그 후 갑자기 피서를 가고, 책을 읽거나 위기를 맞은 후, 그들의 과거나 그들의 교회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보다는 “나는 지금 갖게 된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이전엔 갖지 못했었다” 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실로, 우리가 만일 지속적으로 교회에서 성령충만한 삶을 촉진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반응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쿠퍼: 나는 오늘날 우리가 성령에 대한 일상적인 관점이 부족하다고 본다. 성령은 주님이고 생명의 수여자이다. 창세기 1장에 성령이 나온다. 성령은 나무가 자라게 하고 심장이 뛰게 한다. 성령은 사람들에게 지성과 예술적 공학적 재능들을 주며 농부에게는 어떻게 농사를 짓는 지 가르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깊이 경건하고 영적이었는 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경건 저서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To Be Near Unto God)』 는 기독교 전통의 어떤 것 못지 않을 만큼 영적이고 카리스마적이며 신비적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개혁주의 인물들에 충분히 필적하지 못하고 그들이 성령에 대해 행한 바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우리 스스로의 전통에 대한 망각이다. 아주 경건하고 영적인 그들 또한 힘든 삶을 살았고 소박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했고 매우 힘든 일을 하러 갔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을지 혹은 그들의 건강이 내년에도 괜찮을지 혹은 자녀들이 다음해에도 살아있을 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루에 여섯 시간동안 기도하지 않았고 방언과 지식의 말씀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영적 에너지가 폭발할 정도로 충만하지 않았다. 내 생각엔, 살아있는 믿음은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았던 수많은 성도들의 ‘삶을 견디고 지탱해가는 신앙’이며,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나는 그것이 번쩍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낮춰 보지 않을 것이다.
캘덜먼: 이것은 정확히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메시지이다. 그는 자신이 영성의 교사임을 인정하지만 우리가 가장 우선 행할 필요가 있는 일은 ‘영성’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 단어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의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캘덜먼: 좀더 세계적인 관점에서 성령의 권능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가 북미권에서 겪는 것보다 더 극적인 힘 - 그들 자신이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겪는 - 에 관해 증거하는 것 같다. 적군은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도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걸까?
훌스터: 나는 당신의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적의 힘은 세계 모든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정말 실제적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가시적이다. 나는 상당 기간동안 북미개혁교단(CRC)의 한 교회를 섬겼고, 비록 적군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을 드러냈었지만 그곳에서 적들의 힘과 어둠의 권세를 잘 인식할 수 있었다. 가정폭력, 강간,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중독 문제들을 취급하게 될 경우, 당신은 실제로 당신에게 소리치는 귀신을 상대하진 않겠지만 적군은 그처럼 현실적이고,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서 당신은 인도네시아에서 만큼이나 성령의 권능이 필요하다.
대적들의 힘이 실제적이고 교활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루이스(C. S. Lewis)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를 읽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가운데 내가 깨달은 점들 중 하나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청중들에게 대적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쿠퍼: 훌스터의 주장에 동의한다. 나 또한 북미의 기독교가 [1692년에 있었던] 역사적 살렘 마녀재판 이후엔 천사나 귀신에 관한 부분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우 경건한 자세로, “나는 천사를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천사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샤머니즘이나 원시 종교의 강신술적 배경에서 자란 제 3세계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일들에 정말 관심이 많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공언하는 거의 모든 카리스마적 은사들은 샤머니즘이나 강신술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성령에 관한 어떠한 성경적 표현일 수 있는 이상으로) 샤머니즘적일 수 있는 징후들 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매우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그것을 쫓아내기 위하여 이름을 부르고 쫓겨가야 할 곳을 정해줘야 하는 지역적인 귀신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성경에는 그것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샤머니즘에서 그것은 일반적인 풍습이다. 샤먼(Shaman)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영적인 세계의 달인이다. 동물소리, 웃음(소리), 영적 권위자가 손을 댓을 때 정신을 잃는 것, 방언, 병고침, 사람을 저주함 – 이런 종류의 일들은 다른 많은 종교에서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매우 분별력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오순절운동과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이어 새롭게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운동인] 제3의 물결 운동(Third Wave Movement)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런 모든 위조품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들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얼마나 정통한지 궁금하다. 나는 이 점이 우리 동료 교수들인 룻 터크(Ruth Tucker)와 마리아노 아빌라(Mariano Avila)가 그들의 소수파-보고서에서 교단총회에 주의를 주고자 애썼던 것들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캘덜먼: 이제 성령이 어떻게 예배와 설교에 관련되는 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훌스터: 오늘날 예배에 대한 많은 경험적 이해가 있다. 만일 음악이 좋고 설교가 좋다면, 성령은 그날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때로는 예배가 그리 좋지 못할 지라도 좋았을 경우처럼 성령이 그곳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이 예배당에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이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성령은 예배당에 있다. 인간의 경험은 하나님의 임재 (the presence of God) 의 척도가 아니다.
볼트: 계획된 즉흥성은 주의 깊게 준비된 기도나 설교보다 성령의 임재에 관한 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훌스터: 모든 설교자는 최선이 아닌 설교를 한 경험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방의 햄버거 헬퍼(Hamburger Helper: 제너럴 밀스라는 미국 식품그룹에서 생산하는 인스턴트 파스타)이다. 그것은 그 역할을 할 것이지만, 필레미뇽(filet mignon: 값 비싼 뼈가 없는 소고기 부위로 안심이나 등심부위를 나타내는 프랑스 조리용어)은 아니다. 당신은 설교단에 서서 그것으로 전력을 다한다.
끝에 당신은 부끄러워서 강대상 뒤쪽에서 조금 고개를 숙일 것이고, 설교 후엔 변함없이 누군가 다가와서 “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설교를 통해 오늘 정말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당신은 자신의 겸손이 잘 자리 잡혔는지 확인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설교자로서의 당신에 관한 일이 아니고 다른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설교자로서의 그런 경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캘덜먼: 나는 잔디밭 축제에 나타난 스컹크가 되는 것이 정말 싫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얘기된 어떠한 것도 틀렸다 생각하지 않지만,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는 상당 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책임을 져야 할]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이 스스로의 신앙유산의 부유함을 모르고 있다고 성급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대응이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떠났나요?” 라고 물을 때, 그들의 대답을 관통하는 주제는 종종 이렇다: “있잖아요, 저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싶어 정말 견딜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매 주일마다 다녔던 교회에서는 그걸 볼 수 없었어요. 목회자와 찬양인도자와 전체 회중들 중 그 누구도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깊이 믿는 것 같지 않았어요. 시늉만 많았지요.”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길 갈망하고 있다.
훌스터: 나는 우리가 증거하는 일에 취약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분명히 말할 줄 모른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른다. 증거(testimony)는 당신 삶에서의 하나님의 권능을 증언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가 예배와 회중들의 삶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증거의 능력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스미스: 아마 그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청하는 일에 있어 더 많이 개방되도록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라고 부르게 될 수도 있는 바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전통에서의 관행이다. 봉헌 증거에서부터 “누가 오늘 아침에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는가?”로 이동하는 것은 그리 큰 발전은 아니고 발전을 위한 좋은 예가 될 순 있겠다.
쿠퍼: 분명히 우리는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는 이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순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랫동안 열심히 지켜봐야 한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육체적 건강과 영적인 건강 사이의 비교가 알려 주는 바가 있다. 나는 스스로의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고 내가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다. 아니면 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건강이란 선물을 강화하기 위해 먹는 것을 조절하고 운동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 표지들 중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그 선물을 받고도 그것을 양성하고 있지 않는 현상황의 기독교에 만족하고 있다. 내 생각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때 그들이 찾기 원하는 바는 생명력과 성숙이다.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카리스마적 증거라기 보다는 중생의 일반적 열매들이다. 내 생각엔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아마 어떤 교회에서는 대다수가, 영적 게으름뱅이 구경꾼이다.
훌스터: 많은 사람들이 영적 게으름뱅이 구경꾼으로서 예배에 참석한다. “제가 불이 붙고 변화되는 건 예배 인도자인 당신에게 달렸어요.” 하지만 예배는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강한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뭔가 해야한다는 각오를 하고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교회가 매주 크게 한 건 하지 못하는 설교자를 두고 있을 때,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적극적으로 설교를 들을 수 있을까? 예배 음악이 당신의 기호에 맞지 않을 경우, 당신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신이 예배로부터 무엇을 얻었는가”의 문제일까 아니면 “당신이 예배 속으로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의 문제일까? 우리는 예배를 통한 스스로의 영적 성장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볼트: 우리는 또한 겸손히 성령을 의지하는 데 있어 분명하지 못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칼빈주의자들이지만 미국의 “할 수 있다-주의 (can do-ism)”의 배경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 (can do)”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함이 없이는 죽은 교회이다 라는 인상을 우리가 늘 주고 있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캘덜먼: 이제 성령과 기도에 관해 잠시 얘기해 보자.
훌스터: 나는 최근 그들의 당회장이 당회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가에 대해 얘기하는 어떤 장로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당회 때 얼마나 많은 시간 기도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시작할 때와 마칠 때” 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그러면 당신들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든 일에 대해 얼마나 오래 얘기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는 “글쎄, 우린 정말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나는 “아마 당신들의 효율성이 당신들의 영적 리더십을 이기고 있는 것 같다” 라고 대답했다.
만일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교인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들의 필요를 직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기도와 열정의 사람인 영적 지도자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만큼 성령에 민감해 질 수 없을 것이다.
캘덜먼: 우리는 기도를 교회 내에서의 또 다른 프로그램으로 한정시키지 않으면서 더 깊고 더 충만한 기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에게 도전을 줄 필요가 있다. 이 일은 (생명력 있는 기도생활을 위한 조직신학적 가르침과 실천과 책무 등의) 기도를 위한 프로그램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교인들 가운데 매우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대개 오래 전부터 그런 기도의 삶을 살아왔고 교인들을 보다 잘 기도하도록 돕기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기도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주의 깊게 인정해야 한다.
나는 기도 갱신을 위한 프로그램을 평가절하 하길 원치 않는다. 나는 또한 참으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각 교회마다 있는 수십 여명의 성도들을 간과하기도 원치 않는다.
스미스: 다시금 그 주제가 떠오른다: ‘일상적인 일이 얼마나 특별한가, 또는 우리의 삶 전체에 걸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얼마나 일상적인가!’
[1]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07년 가을 호에 “The Work of the Holy Spirit”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Forum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