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25년간 사역을 하면서 예수전도단을 시작하고 키웠던 데이빗 로스(한국 이름:오대원)목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시애틀 근처에 미주 한인들을 대상로 예수전도단 캠프를 세워서 운영했다. 2009년 로스 목사가 시드니의 한 교회의 초청을 받아 왔을 때 칼럼을 쓰고 있던 동포신문인 ‘TOP’ 지를 위해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만났다. 나와 이야기를 해 보더니 로스 목사는 나에게 매년 한 번씩 3 개월 동안 시애틀에서 운영하는 '북한 학교'에 와서 시민 단체들의 통일 운동에 대하여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예수전도단의 모든 행사는 자비량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나는 경비를 내서 미국까지 갈 수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TOP지 이숙진 발행인이 쾌히 후원을 해 주어서 북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내가 참석한 주간에 80세가 된 원로 북한학자인 서대숙 박사가 남북한 문제에 대하여 한 주간 동안 집중강의를 했다. 고등학교 때 서 교수가 쓴 글들을 읽었는데 50년 만에 서 교수를 만나니 감회가 깊었다. 강의 내용은 386 세대들에게는 기본적 교양 수준이었던 남북한에 관한 객관적 비교연구이었다. 오늘의 대학가에서 사라진 북한에 대한 공부가 가장 보수적인 선교 단체인 예수전도단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이 놀랄 일이었다. 왜냐하면 효과적으로 북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에 로스 목사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선교사들 200여 명이 모인 친교 모임에서 전 주미 대사였던 레이니의 주도로 북한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경제제재를 풀어야 한다고 서명을 해서 의회와 백악관에 보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대 했던 오바마 대통령이 예상 했던 것 보다 훨씬 보수적이어서 부시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고 염려를 했다.
숙소가 부족해서 서 교수와 한 주간 동안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서 교수도 나와 같이 예수 전도단의 정규 멤버가 아닌 초청강사로 온 것이기 때문에 오전의 2 시간 강의 외에는 거의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해서 숙소에서 혹은 산책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사실은 1986년도에 하와이에 있는 동안 경희대 한의대 학장을 지내고 하와이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는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노정우 박사가 자기 환자인 하와이대 정치학 교수인 페이지를 소개해 주면서 돌아가지 말고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라고 강력하게 권했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따져 보아도 내가 정치적 망명을 신청할만한 존재가 못 되는 것을 설명하느라고 오히려 애를 먹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979년 11월 발생했던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 망명생활을 한 홍세화 씨도 망명을 신청하는데, 막상 활동내용을 설명하려다 보니 전단을 뿌린 것 말곤 한 일이 없어서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다. 당시로서 고작 전단이나 뿌린(?) 홍세화 씨보다 나는 훨씬 위험한(?) 일을 많이 했지만 불행하게도 홍세화 씨처럼 재수 좋게(?) 공안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아니어서 망명신청이 가당치도 않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망명 신청을 했다면 도미 직전에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접촉했으니 크게 이용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이기에 옛날 이야기를 했더니 서 교수는 "그런 일이라면 나한테 왔어야지"라고 했다. 서 교수는 비록 박정권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하와이 대학에 한국학 센타를 건립 했지만 북한과 접촉 가능성 때문에 항상 남한 정부와 긴장 관계를 유지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전문성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남과 북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하는 위험한 외줄타기 삶을 살아야 했다.
몇 년후 로스 목사가 다시 시드니에 와서 8순 잔치를 한다기에 축하금을 준비해서 기쁜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 축하 예배 시간에 시드니 교계에서 원로 대접을 받고 있는 H 목사가 설교를 했다. 그는 설교 중에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던 선교사들이 한국의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던 실례까지 들어가면서 한국인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던 시대에 선진 문명 속에서 살던 선교사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조 말엽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왕실의 적극적인 협조 덕이었다. 선교사들은 자기들끼리 선교사촌을 이루어 본국과 같은 조건에서 안락하게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내가 남아공에 직접 가보니 아무리 흑인들을 위한다고 해도 그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의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 소득의 차이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미국의 힘을 빌려 볼까 생각하는 조선 조정으로서는 선교사들을 우대해야 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특히 지방에서는 고을 사또보다도 선교사가 더 영향력이 강해서 백성들이 억울한 이가 생기면 사또에게 가기 보다는 양대인(선교사를 부르는 호칭)에게 가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 지방관헌들에게서 선교사들 때문에 행정을 집행할 수 없다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심지어는 선교사들의 위세를 믿고 지방 관리들을 무시하고 거들먹거리는 신자들 때문에 소동이 일어나는 일조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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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수원 창립자인 고 대천덕 신부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다. 선교사들이 자신들에게 굽실거리는 한국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착각하여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는데 이중 어떤 사람들은 선교사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교회 내에서는 거들먹거려서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선교초기 가톨릭 선교사는 고생도 했고 순교도 당했으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특권 속에서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가난하기는 했으나 수백 년을 유교적 교육을 받아온 탓에 도덕적 수준은 무법자들이 판을 치던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조선이 형편이 어렵다 하여 미개했고 야만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대주의 문화에 찌든 목사들이 많다.
예배가 끝난 후 생면부지의 사이였지만 나는 설교를 했던 목사에게 "잠깐 할 말이 있다."고 옆 방에 데리고 가서 "역사적 사실을 모르면서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해서는 되겠느냐?"하고 엄중하게 따졌다. 상대방은 나 보다 10살 위인 원로목사였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설명을 다 들은 원로 목사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그렇습니까?"라고 했다.
아마 H 목사의 이 날의 설교를 일반인들이 들었다면 돌팔매를 맞을 일이지만 한심하게도 그 자리에 모였던 목사와 젊은이들 가운데 설교 내용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원로 목사와 내가 옆 방에 들어 갔다가 나오는 것을 보고 눈치 빠른 로스 목사는 식사 시간에 "사실 저는 별로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해서 분위기를 조절하려고 했다. 로스 목사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짐작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로 목사는 끝내 아무런 사과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