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0년 건륭제 재위 15년에 공사를 개시하였다. 솜씨좋은 장인들은 정원양식의 다양한 궁궐을 창조해 내었다. 쿤밍호는 기존의 작은 연못을 확장하여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영프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수난을 당했고, 모조리 약탈 당했다. 1900년에도 의화단의 운동 때도 8개국의 서양 열강에 의해 공격당하였다. 다행히도 완파되지는 않아서, 1886년과 1902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1888년 현재의 이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였다. 서태후는 이곳을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 30만은을 유용하여, 재건과 확장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는 중국의 조경과 정원예술의 창조적인 예술을 빼어나게 표현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이화원 가는 도중 거리 모습


이화원 입구

사자+용






모란(목단,목작약)-작약과(芍藥科 Paeoniaceae)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 키는 1~2m 정도 자라며 가지가 굵다. 잎은 잔잎 3장으로 이루어진 겹잎으로, 하나하나의 잔잎은 다시 3~5갈래로 갈라지며 잎 뒤는 흰색을 띠고 있다. 자색의 꽃이 5월에 가지 끝에 피고 지름이 15~20㎝에 이른다. 꽃잎은 8장, 꽃받침잎은 5장이며 수술은 많고 암술은 2~6개이다. 구형(球形)의 열매는 가을에 익고 검은색 씨가 들어 있다. 뿌리껍질을 말린 목단피(牧丹皮)는 한방에서 소염·진통·정혈·고혈압 등에 쓰고 있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한국에서는 꽃을 감상하거나 뿌리를 약으로 쓰기 위해 널리 심고 있다. 모란은 또한 목단이라고도 하고 많은 원예품종이 만들어졌다. 양지 바른 곳에서 잘 자라며, 번식은 작약 뿌리나 모란 줄기에 접붙여서 하고 뿌리가 깊지 않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모란을 꽃 중의 제일이라고 하여 꽃의 왕 또는 꽃의 신으로, 또 부귀를 뜻하는 식물로서 부귀화(富貴花)라고도 부른단다. 모란꽃에서는 보기와는 달리 향기가 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중국 당나라 왕이 모란 그림 1폭과 모란 씨 3되를 보내왔는데 그때 모든 사람들은 모란꽃에서 대단한 향기가 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선덕여왕만은 그림에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단다. 실제로 모란 씨를 심어 꽃을 피워보니 향기가 나지 않아 모두 선덕여왕의 뛰어난 관찰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작약과 비슷하나 작약은 목본식물이 아니라 초본식물이다.

모란↑↓

모란↓

만첩홍도↓.....중국의 도로가나 화단에 많이 보였다.




이렇게 큰 호수를 땅을 파내 인공으로 만들었다니 당시 황제는 포악한 황제?

공기가 좋지 않아 사진이 뿌옇다.



이화원 다음장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