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아니 비단 중국을 떠나서, 대만까지. 현재의 공산당에 반대하는 반체제 세력들에까지. 쑨원은 그야말로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쑨원이 어찌하여 마적 출신 장작림과 같이 움직이게 되었는가? 그 일은 더 이전부터 이루어졌습니다. 1919년 쑨원은 같은 동맹회의 회원 영무(寧武)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러시아와 연합하여 레닌의 혁명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에서 5.4운동을 활발히 진행시키려면 중국의 신청년이 일어서야 합니다. 중국 혁명의 새로운 피로, 새로운 힘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들은 시기를 잘 파악해 정권을 잡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근원을 잘라 내야 합니다. 먼저…… 북양 직계 군벌을 타도 해야 하지요. 그래서 나는 즉시 광동으로 돌아가 정부를 새로 조직하고, 친히 대군을 인솔해서 북벌을 단행할 계획입니다."
"또 하나, 우리는 북방 군벌을 분화해야 하며, 직계와 안휘계의 이해 충돌을 이용해야 하며, 단기서와 연락을 취하고 특별히 관외 실력파 장작림과도 연락해 셋이 합작, 조곤과 오패부를 몰아내야 합니다."
쑨원이 장작림에게 써준, 천하위공(天下爲公)의 글씨.
'천하는 천하 사람의 것'
쑨원은 자기 의도를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단기서, 장작림과 연합하여, 조곤, 오패부를 무너뜨리는 것. 적의 갈등을 이용해 와해 공작을 하고 병력을 집중시켜 가장 강력한 직계 군벌들을 먼저 쓰러뜨리고, 그리고 나서 다른것들은 다시 논의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쑨원의 책략이었습니다. 쑨원은 영무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동북인입니다. 당신을 보내니, 장작림에게 돌아가 공작을 완수하십시오."
계략에 따라 영무는 장작림에게 접근했습니다. 장작림이 항만 건설을 생각하고 있자, 영무는 화교 자본가들의 서신을 가지고 천진에 와 투자를 하겠다고 하면서 접근 했고, 두 번의 면담 기회를 얻었습니다. 첫 번째 면담에서 영무는 쑨원이 이미 단기서와 합작했다고 말하면서 공동으로 조곤과 오패부에게 대항하자고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장작림 역시 직설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이 일은 나도 역시 알고 있었다만은, 나는 군대에서 병사들만 이끌어 왔기에 교양도 없고 정치도 잘 몰라! 헌데 내가 잘 알 수 없는건 쑨원은 개국의 원훈이고, 저서에서도 혁명을 주장하고 있는데 혁명 당이 어찌하여 단기서 같은 사람과 한패가 된단 말이지?"
단기서가 매국질을 한다는건 모두가 다 알고 있었기에, 이 이야기는 의외로 아픈 부분을 콕 찌르는 언급이었습니다. 딱히 대답할 논리가 없었기에 영무는 껄껄 웃으면서 얼렁뚱땅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던 간에, 혁명을 인정한다면 쑨원 선생은 모두 함께 일을 합니다."
대충 이야기가 그렇게 되었고, 장작림은 부관 장아동(張亞東)을 영무에게 보내면서, 같이 쑨원을 뵈라고 전했습니다. 영무는 장아동을 데리고 왔고, 쑨원은 기쁘게 그를 영접했습니다. 먼저 혁명의 도리에 대해서 말을 하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우정(장작림) 장군은 동북을 아주 잘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밖으로 제국주의 일본이 통제하고 있어 처지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국가가 통일이 되어 중앙에 혁명정부가 들어선다면야, 지방은 매우 일하기 좋겠지요."
쑨원은 말을 많이 했지만 어떤 구체적인 표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약속을 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말했는데, 돌다리도 두들겨보자는 식입니다. 일단 이때의 만남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두번째 만남은 1920년 가을, 장작림이 북경으로 왔을때, 장이 영무를 초청했던 일입니다. 장은 영무를 만나자마자 말했습니다.
"쑨원 선생이 나를 높이 평가하신다니 매우 기쁩니다."
그러면서 매우 호감을 표시해서 기분이 좋아서 말했는데, 친근한 친구를 대하는것 같았습니다. 장작림은 영무와 고향이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마침 조곤이 찾아왔습니다. 영무는 곤란해질것이 눈에 선해 우선 자리를 피했습니다. 조곤은 들어서자마자 씩씩 거리면서 장작림에게 성질을 냈습니다.
"우정 동생! 나는 우리가 형제라고 믿었는데! 어째서 쑨원과 결탁하여 나를 치려고 하는 거요?"
장작림은 정말 놀랐습니다. 어디서 이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장은 우선 발뺌하고 봤습니다.
"하늘을 향해 맹세하니, 다른 사람들이 헛소리 하는것을 믿지 마시구려!"
"그럼 이건 뭐요?"
조곤은 봉계의 인물들이 영무에게 보낸 서신을 꺼내들었습니다. 서신 속에서는 장작림의 비서장 송문림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물증이 확실하자 장작림은 난처했는데, 곧바로 임기응변을 발휘해 책임을 송문림에게 모두 뒤집어 씌우기로 했습니다. 조곤의 눈 앞에서 그는 부하인 장경혜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 나야! 지금 당장 송문림 그 자식을 잡아들여! 아주 요절을 내버릴 테니!"
그런식으로 화려하게 연기를 펼치고는 조곤을 정중히 배웅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영무와 송문림을 불러들여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영무는 그 서신들이 모두 일본의 우체국에서 부쳐진것을 지적했습니다. 일본으로 출장이 간 적이 없는데, 이건 무슨 일인가? 뭔가 놀아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작림은 이 소리를 듣고 대노했습니다.
"개자식들! 내가 있는 한 이놈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
그러고는 앞으로는 일을 주도면밀하게 하자고 하며 북경에서는 남들 이목이 있으니 본거지인 봉천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봉천으로 갔습니다. 조곤이 시끄럽게 군것은 오히려 장작림을 자극해서, 일이 빠르게 진행될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미적거리느라 합작은 훨씬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1921년 2월, 영무는 봉천에 와서 장학량을 만났고, 곧 장작림의 최측근이자 그의 모사인 양우정(楊宇霆)을 만났습니다. 양우정은 "양 제갈량" 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꾀가 많고 장작림의 신뢰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양우정
곧 장작림도 만났습니다. 장작림은 확실한 의사 표현을 했습니다.
"현재 국가는 썩을 대로 썩었다. 쑨원 선생은 개국의 원훈이고 국가를 도모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난 사람을 쑨원 선생에게 보내 자문을 구하고자 한다. 당신이 먼저 전문으로 연락해 주시오."
그러고는 여단장 이소백(李小白)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소백과 영무는 쑨원에게 가서 그를 만났습니다. 쑨원이 이소백과 대화해보니 장직림과의 합작 가능성이 매우 큰것을 느끼고 장작림에게 보내는 서신을 주었습니다. 같이 연합하여 직계군을 때려부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봉천으로 돌아가는 도중, 신문에 밑도 끝도 없이 장작림, 계림에 대표 파견. 쑨원을 대총통으로 지지 했다는 기사가 나왔고, 장작림은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뭐? 너 임마! 네가 무슨 대표냐? 난 너를 서신만 갖다 주라고 했는데 내가 쑨원을 지지한다고 떠들고 다녀?"
이소백은 정신이 얼얼해 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무가 이 짓은 적들의 간계이며, 광동과 봉천의 합작을 방해하는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무는 쑨원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혁명당은 결코 실패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번 직계의 토벌은 우리가 먼저 움직일 것입니다. 봉천에서는 다만 뒤에서 옹호만 해 주십시오. 만약 우리가 실패하게 된다면, 우린 또 다시 시작하면 그 만입니다. 우정 공의 사업에 대하여는 조금도 훼손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쑨원 선생의 생각입니다."
흉악무도한 장작림마저 이 말에는 감동했습니다. 그는 즉시 태도를 바꾸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결정했습니다.
"물론, 나 역시 파병할 것이다!"
뒤의 이야기지만, 정작 사태가 벌어졌을떄 혁명군은 봉천군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쑨원은 모든 북벌 준비를 끝냈는데, 병참은 진형명(陳炯明)이라는 인물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이 진형명이 직계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형명
진형명은 권력욕이 강했고, 사고 방식이 군벌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쑨원이 광저우에 오자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총독부를 습격했습니다. 탕! 탕! 하는 총소리가 들리자, 쑨원은 평상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부인과 함께 총독부를 걸어서 나왔습니다. 쿠데타군이 눈 앞에 있었지만, 워낙 쑨원의 태도가 당당하여 이쪽의 고관인줄 알고 통과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장작림은 쑨원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해한다는듯이 말했습니다.
"저쪽에는 진가 놈이 설치고, 이쪽에는 장 아무개란 놈이 일을 다 망쳐 놓았군(북경 봉군 장군 장경혜의 두 개 사단은 빠르게 무장해제를 당해버림). 뭐, 승패야 병가지상사인데 따져 보면 무엇하겠는가! 쑨원 선생은 문인이시라 병력을 다루기에는 수월치 않을 거야. 난 그에게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국가 대계에 대한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으로 보아 우리의 무력 행사를 수습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쑨원이 상해로 탈출 하자, 영무를 불러 의리있는 말을 했습니다.
"영무! 난 환난 중에도 친구를 사귄다. 난 서신을 쓰지 않는다. 서신은 쓰기 어렵지. 당신은 나를 대표하여 쑨원 선생을 찾아 이곳 동북에 와서 살도록 청해 보시오."
쑨원은 이 요청은 아주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금을 조금 빌리는게 가능하지 않나, 하고 물어보자 장작림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말했습니다.
"어려울 떄 사귀는 친구인데, 좋아! 내가 쑨원 선생에게 10만 원씩 생활 비용으로 보내 주지. 광동 지역의 난을 평정하는 문제는 대표를 파견하면 자세한 상의를 하겠다고 당신이 전보를 쳐 주시오."
이렇게 장작림은 묘하게 쑨원에 대해서는 호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장작림을 긍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이렇게 쑨원을 도와준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 후 양측의 왕례는 번번해져 왕정위(汪精衛), 엽공작, 영무, 정잠, 손과 등 쑨원 쪽 사람들이 장작림을 계속 찾아가 활발하게 합작 사업을 논의했습니다. 장작림 쪽에서도 사람을 보내 이들은 서로 얼굴을 익혀 한층 친밀해졌습니다.
훗날 매국노로 이름을 날리는 왕정위
왕정위는 1883년 생이고 1905년부터 중국 동맹회에 가담했습니다. 이후 쑨원을 보좌하며 혁명 조직을 만들었고, 1910년 청나라 섭정왕 재풍(載沣)을 암살 하려다 정보가 누설되어 종신형을 받았다가, 신해혁명 이후 출옥하여 여전히 쑨원을 보좌했습니다. 그는 일본, 남양, 유럽 등을 다니며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이미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런 유명인사가 오자 장작림은 마치 쑨원을 직접 만나는것처럼 이상하게 흥분해서, 그를 만나고는 개인적으로 흠모해 왔다고 말하며 장학량과 함께 아주 극진하게 접대했습니다. 성의 있고 품격 있는 연회에 왕정위도 좋아했습니다. 그는 장작림이 쑨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고 보았고, 합작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것도 알았습니다. 이제 분명한 방안을 논의할 시기가 왔습니다.
첫댓글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작림이 무슨 궁리때문에 쑨원이랑 저렇게 친한가요?
장작림은 남하 하여 산해관을 넘고 오패부를 칠 계획 입니다 그리고 손문은 북벌 하는데 저 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인 오패부가 껄끄러ㅂ습니다 바로 여기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집니다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 그런데 21년까지도 저렇게 싸움질인데 중일전쟁때 무슨 힘으로 버텼는지 참 신기하네요 싸움질 와중에도 중국경제는 잘 돌아 갔나요??
왕정위는 60년대 한국배우처럼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