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 신씨의 시조는 몇 해 전 ‘태조 왕건’이란 드라마에서 충(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강골무인의 기상을 잘 보여준 고려 개국공신으로 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에 오른 신숭겸(申崇謙)이다. 그의 초명은 능산으로 광해주(춘천지방) 출신인데 태봉(궁예가 세운 나라)의 기장으로 있다가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더불어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해 고려를 창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고려개국원훈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던 인물이다.
평산 신씨 판사공파는 신숭겸 장군의 12세손인 문정공(文貞公) 신 현(申 賢)의 손자인 판사공(判事公) 신득청(申得淸:고려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인 신득청은 영해 인량촌에 주거하던 중 일어난 신임지화(辛任之禍)로 인해 자손 양 대가 안동과 원주 등지로 은둔하다가 증손인 지(祉)가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현재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로 이거해 살게 된다. 그 후 예남의 현손인 한태(漢泰)가 파천면 중평리로 이거해 조선 숙종 때 종택을 짓고 집성촌 150여호를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창성 이후 현존하는 신씨 가운데 대본으로 알려진 평산과 고령 신씨는 전체 신씨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들도 이 두 본의 후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 신숭겸 장군의 충의 잇는 명문가 안동에서 길안면을 거쳐 청송 초입에서 진보쪽으로 갈림길을 따라 가다보면 파천면 중평리 평산 신씨 집성촌락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에서 진성 이씨 집안에서 22세에 시집와 90세인 지금껏 종부로 살아오고 있는 평산신씨 판사공파종택 종부 이성숙 여사를 만났다. “종부가 뭐 있나? 그냥 사는 기지!” 내어준 음료를 마시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짧은 한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시집와 아이가 6세 정도 되었을 때 남편이 사망하고 남아있는 남매마저 그 당시 유행하던 홍역으로 인해 잃어버린 어미의 심정을 아느냐고 물어온다. 남편이 같이 있어도 힘든 일의 연속일 터인데 혼자 남은 시간 대부분은 시부모님 그리고 시댁 가족들과 관계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고향에 살고 있는 친정 가족들과의 추억을 곱씹거나, 무슨 일이든 몸을 놀리지 않고 일하여 혼자만의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특별한 음식이 따로 있다기보다 전부가 특별한 음식이다. 외로움과 적적함을 잊기 위해서라도 음식 차리는 데는 지극정성을 다 쏟으며 일을 했다고 한다.
◆한 많은 종부의 삶을 지탱시킨 친정 가족 종부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집안 대소사이다. 그중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것은 종부의 중요한 의무 사항이며, 제사에다 명절 차례까지 더하면 매달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를 모셔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맞어!. 거의 매달 제사를 모셔야 하는 처지 맞다. 종부로서 제사 음식을 잘못 준비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늘 불안했지. 그뿐만이 아이라! 서른 가지 넘는 제사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시누이의 손을 빌려도 몇 날을 고생해야 했다 아이가! 종가 남자들이 뭐 아나. 그게 얼마나 힘든지 말이라. 정말 만날 제사상 차리면서 다음 제사를 걱정해야 할 판 이지.” 잔뜩 새 식구를 주시하는 종가어른들에게는 사소한 실수라도 자칫 크게 흠 잡힐 수 있기 때문에 조심조심 행동을 해야 했을 종부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70년 전 처음 종부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와 지금은 큰 변화가 있다. 종가도 이미 79년도에 한번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수 백 년 전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졌는가 하면 종부의 얼굴에서 분홍빛이 가득한 앳된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수십명의 자손들이 찾아와 매년 꼬박꼬박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그 많은 손님을 치르는 일에는 바뀐 게 하나 없다. 현재 종가를 지키고 있는 분은 종손의 종조부이신 신두현씨이다. 연속되는 불행과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양자로 들인 종손은 대도시로 나가 살고 있어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종가 건물관리까지 모두를 맡고 있다. 종부를 만나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며 몇 번의 전화통화 끝에 종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신두현 어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종손인 형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도우미 일을 하다 보니 지금까지 왔다. 여러 해 걸친 도난으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울분과 안타까움을 한 번에 표시하는 어른의 표정에서 조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조상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마을에는 경북도 민속자료 제89호인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경북 민속자료 제101호인 서벽고택 그리고 사남고택이 나란히 자리하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초입에는 중평리 솔밭이 보기 좋게 우거져 있으며 그 옆에는 마을 동편 산기슭에 사양서원이 위치하고 있다. 서원 앞은 낙동강 지류 용전천이 흘러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지나는 길손이 쉬어 갈만하다 여겨진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건만 어르신은 가문에 대해 이야기에 여념이 없으시다.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계 중 대표적인 것은 ‘과거(科擧)를 보기 위한 학문에만 힘쓰지 말 것이며, 신의를 저버리고 교사(巧詐)하게 남을 사귀지 말 것이며, 자기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단점만을 책하지 말라’는 등 청백(淸白)을 위주로 한 교훈을 남겼다. 또 당시의 사대부들이 3대만 제사를 받들었으나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학설(學說)에 따라 4대의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고조(高祖)까지 봉사(奉祀)하였다.
마을 초입에는 중평리 솔밭이 보기 좋게 우거져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사천의 물가라 이름하여 사양서원이라 정한 바로 사수(泗水)인 낙동강의 지류 용전천이 흐르고 있다.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 사남고택, 서벽고택은 사양서원에 이르기 전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마을길이어서 진입로가 좁긴 하나 국도와 인접하고 있어 한번쯤 들러보기에는 좋은 위치에 있다. 종부에 이어 현 종손의 종조부인 어른을 만나 나눈 이야기와 시간은 나에게 굴곡 많은 한 가정의 변천사를 통해 여러 종류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종가법도를 지키기 위한 희생의 가치측정이나 경중을 나눌 만한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택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는 걸음에 ‘종부가 뭐 있나?’ 라는 한 마디가 귓가를 맴도는 까닭은 무엇일까?. 70여년 종부의 질곡 많았던 삶을 되뇌어 본다. (사)문화를가꾸는사람들 강병두plmnb12@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