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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ORARY CHRISTIAN MUSIC 이란?
(C.C.M. 이란?)
M. Div. 3차 김 요 한
서론
급속히 발달해 가는 매스미디어 앞에 우리의 젊은이들은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다. 매스미디어의 놀라운 발달은 대중문화의 보급에 앞장섰고, 이러한 대중문화는 자본주의의 상업성과 손을 잡고 계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은 쉬지 않고 자극적인 문화를 재창출하여 흥미와 재미를 유발시키고 점점 더 알 수 없는 허구의 실체들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대중문화에서 특히 음악은 아주 많은 역할을 한다. 대중음악은 20세기 초 Rock'n Roll의 성장과 더불어 세계 시장에 파고든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일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1시간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이들이 듣고 있는 대중음악은 6시간에서 7시간을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대앞에, 변화하는 문화 앞에, 교회의 말씀은 잔소리가 되어버리고 교회의 음악은 고리타분한 구식음악이 되어버렸다. 록과 팝을 듣는 이들에게 어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것인가, 어떤 음악으로 이들의 욕구를 충족하며 이 변화하는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교회 내에서 새로운 문화운동-문화선교가 생기게 된다.
변화하는 세대와 변화하는 물음 앞에 새로운 커뮤니케이터로 등장한 CCM에 대해 그 역사적 배경과 한국의 CCM 현황을 살펴보토록 하자.
본론
☞CCM이란 무엇인가?
1) 새로운 대중음악 CCM
'CCM'으로 불리는 컨템퍼러리 크리스찬 뮤직이라는 용어는 80년대 말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CCM이 우리나라에 소개 된지는 꽤 오래지만 그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셈이다. 그 이유는 용어상의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에서는 이 말 대신 '가스펠송'이라 말과 이를 번역한'복음성가'라는 말이 보편화되어 있다. 기독교 음악 중에서 찬송가나 성가를 제외한 대중적 스타일의 음악은 '복음성가'라는 말로 함부로 불리워 졌다.
언어는 이를 쓰는 대중들이 규정 지워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 전 세계에 걸쳐 공통적으로
쓰이는 말이라면 우리도 정확히 구분해서 써야한다 이런 점에서 '가스펠뮤직','컨템퍼러리
크리스찬 뮤직','컨템퍼러리 가스펠','가스펠'이란 용어를 명확히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1)가스펠 뮤직 -이는 복음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전통적인 찬송과는 달리 주관
적인 내용이 많고, 사람들에게 권고하며 설득하는 수평적인 내용이 많다.
형식적으로는 전통찬송에 비해 보통 경쾌한 리듬과 단순한 화성으로 이
뤄져 있다. 여기서 '가스펠 뮤직'이 란 형식적으로 전통찬송가와 구분되는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음악과는 형식적으로 구분이 되지 않
고 내용적으로 구분이 된다. '가스펠'이란, 내용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
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스펠뮤직'은 복음적인 내용이 담긴 대중적인
노래를 모두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2)컨템퍼러리 크리스찬 뮤직
- 크리스찬 뮤직 중에서 '컨템퍼러리'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같은 시대의
음악적 흐름을 따르고 있는, 대중적 스타일의 기독교 음악이다. 그러므로 '컨템퍼러
리'라는 말에 비중을 두고 보아야한다. '크리스찬'이란 말은 내용을 규정하고 '컨템퍼
러리'라는 말은 음악스타일을 규정한다. 이때 '컨템퍼러리'라는 말은 흑인영가를 뿌리
를 둔 흑인들의 음악 즉 전통가스펠과 구분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CCM계에
서는 이를 단순히 음악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담고 있는 근본 사상
이나 문화와 역사성이 동시대의 흐름과 같이해야 한다는 내용적 밑바탕에서 규정하
고 있다.
(3)가스펠 -'가스펠뮤직'이 내용적인 분류로 복음적인 노래를 통틀어 말한 것이라면 이때
의 '가스펠'은 형식적인 분류로 특정음악 스타일을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스타일면에서는 흑인들의 음악인 R&B, 소울 그리고 전통적인 흑인 가스펠을 말
한다. 가스펠은 '블랙가스펠'과 '컨템퍼러리 가스펠'로 나뉠 수 있겠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보면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은 모두 '가스펠 뮤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가스펠 뮤직'은 스타일 면에서 과거 '컨템퍼러리 크리스찬 뮤직'과 '블랙가스펠'(보통 가스펠이라고 부르는)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괄적인 뜻으로의 가스펠 음악은 19세기말 미국에서 발전하였다. 가스펠송이라는 말도 그 무렵 미국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1847년 당시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휘틀(D.W. Whittle 1840-1907)의 집회에서 찬양인도자로 활동하던 블리스(Phillip Bliss)에 의해서 출판된 노래모음집 「가스펠송」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가스펠송은 당시의 대중적인 부흥집회나 산과 들에서 열린 캠프 집회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거나 구원에의 기쁨을 간증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개인적,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음악적으로는 명랑하고 민요적인 요소를 담은 세속적인 스타일이었다. 당시에 불리던 가스펠송 보면 "하나님의 진리등대(276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539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499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331장)","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363장)"등 필립블리스, 아이러 생기, 월리암 커그패트릭, 패니 크로스비등 당시의 유명한 가스펠송 작사,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20년경 가스펠송은 흑인영가와 재즈의 요소를 혼합하여 생기있고 더욱 힘찬 곡으로 변해갔다. 이런 음악은 후에 미국 북동부 흑인들 위주로 발전해나가면서 리듬앤블루스, 소울 등의 요소를 가미하여 오늘날 좁은 뜻의 가스펠 음악이 되었다. 이를 밝혀 블랙가스펠이라고 부른다. 한편 백인들 사이에서는 가스펠송에 컨츄리 음악의 요소를 혼합해서 나름대로의 가스펠송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음악은 남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서던 가스펠 (southern gospel)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백인들의 가스펠이 록 음악의 요소를 혼합하고 새로운 현대적인 다양한 음악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컨템퍼러리 크리스찬 뮤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블랙가스펠이나 서던 가스펠은 초창기 가스펠송을 그 큰 뿌리로 하고 있으므로, 좁은 뜻에서 가스펠 송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단순한 멜로디와 화성을 사용한다는 초창기 가스펠송의 특징을 이어 내려왔다. 그런 뜻에서 오늘날 가스펠송 (우리가 '복음성가'라고 부르는)이라고 하면 좁은 의미의 가스펠,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가스펠의 형식적인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블랙가스펠, 서던 가스펠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밖의 음악들, 즉 백인들의 팝음악 스타일을 띤 음악은 넓은 뜻으로서의 가스펠 음악이긴 하지만 좁게는 '컨템퍼러리 크리스찬 뮤직'으로 지칭되는 것이다.
세속적인 스타일을 빌린 가스펠송은 감성의 시대인 낭만주의 시대에 출현했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급격한 사회변동이 일어났던 19세기 후반에 그 반작용으로 영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그 부흥운동과 함께 가스펠송이란 독특한 음악문화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새로운 가스펠송은 분명히 영적인 반응을 유발하여 개인의 구원이나 기독교 진리에 헌신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스펠송은 바로 '대중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인 팝/록 음악은 바로 이 가스펠송과 흑인영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스펠송에서 갈라져나온 미국의 대중음악이 락켄롤의 탄생과 함께 전세계의 대중음악시장을 석권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그 뿌리마저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인 교회음악이 오늘날의 컨템퍼러리 크리스쳔 음악(CCM)으로 변화된 첫 번째 시도는 1964년 미국의 래이랩(Ray Repp)이라는 사람이 카톨릭 교회에 포크(Folk)미사를 선보인 것이었다.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하고 웅장한 미사곡만을 연상하던 사람들에게 포크음악 미사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듬해인 1965년 랄프 카마이클은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선교영화(The Restless Ones ; 쉼이 없는 사람들)에 음악을 삽입하면서 싱코페이션(박자의 강약을 바꾸거나 전환하는것)이 가미된 음악을 사용했다. 전통적인 교회 음악에서 사용치 않던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 유명한 팝 아티스트인 배리 맥가이어(Barry McGuire)가 락 음악계의 반항적인 물결을 떠나는 신호처럼 <Eve of Destruction ; 파멸의 전야>라는 앨범을 녹음했다. 이 앨범은 당시 유행하던 팝 음악 스타일에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다.
1967년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이 정점에 달했다.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젊은 세대들 간의 반항의 물결이 크게 일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내의 젊은이들은 그 만큼 과격하진 않았다.
그 즈음 랄프 카마이클과 커트 카이저는 ‘가서 그대로 전하라’(Tell it Like it is, Natural high)같은 청소년 뮤지컬로 크리스쳔 음악을 거칠게 나마 현대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반전운동과 함께 일어난 미국의 반문화 운동(히피운동)은 자유와 평화의 상징, 자유 연애, 마약, 그리고 록큰롤을 성스러운 것으로 삼았는데 이 운동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피크를 이루었다.(*우드스탁 페스티벌 : 미국 우드스탁 근교에서 열린 대규모 락 페스티벌, 기성세대에 반기를 든 젊은이들 50만 명이 조화, 평화, 사랑을 외치며 이 록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미국 히피들의 사상이 대변된 이 페스티벌은 락 뮤직의 하나의 전설처럼, 이상적인 락 페스티벌로 얘기되었으나 몇 개월 뒤에 다른 곳에서 열린 락 페스티벌에서는 그 같은 동기는 사라지고 폭력과 혼란이 난무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러한 히피운동에 반대하는 대항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반문화 히피 운동이 내세운 자유와 사랑에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안에서의 진정한 자기 실현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환멸에 빠진 세대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참 평안을 발견했다. 참된 존재 가치를 발견한 젊은이들은 그들 세대가 가진 문화의 언어로 새로운 스타일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9년 래리 노먼(Larry Norman)이라는 젊은 아티스트가 캐피탈 레코드에서 <Upon this Rock>이라는 앨범을 냈다. 이 앨범은 정통 락음악에 신앙의 내용을 실은 것이었다. 래리 노먼의 이 앨범은 크리스쳔록의 선구적인 신호탄과 같았다. 이 해의 첫 CCM 앨범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일런 르페브르와 홀리 스모크의 <Mylon>, 래리 노먼의 <Upon this Rock>, 존 피셔의 <The Cold Cathedral>이 나왔다.
캘리포니아에 새로이 세워진 갈보리 교회에서는 태평양 연안에서, 회심한 히피들을 위한 대규모 침례식을 거행하였다. 갈보리는 크리스쳔 음악이란, 음악이 가지고 있는 소리나 외양보다는 그 마음의 조건과 더 관련이 있음을 일찍부터 깨달은 교회였다. 갈보리 교회의 척 스미스 목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해 그 스타일이 어떻든지 주님을 위한 음악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한 음악들은 당시의 교회 음악과는 판이했으나 그러한 음악은 젊은 크리스쳔들의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갈보리 교회에서 만들어 낸 음악도 새로운 크리스쳔 문화의 한 부분을 형성해 갔다. 이렇게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물결은 미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 물결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일어나게 된 예수 운동(Jesus Movement)과 중첩되어서 일반매체인 ‘Times'등을 포함한 수많은 매체가 이 운동을 다루게 될 만큼 확산되었다.
한편 초창기 CCM이라고 할 수 있는 앨범이 아주 열악하게나마 나오기 시작했다. 음악적, 기술적 수준도 낮은데다 제작비용에서도 아주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초창기 CCM은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음악적 수준은 낮았지만 그 순수성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돋보이는 시기이기도 했다.
1970년도에 들어오면서 1971년 갈보리 교회에서는 ‘Maranatha! Music'이라는 음악 선교단체를 설립해서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Children of the Day, Blessed of Hope, Gentle, Country Faith, The Way, Selah, Love Song 등이 그룹으로 소속되었다.
1972년 여름, CCM은 달라스의 미식축구 경기장인 카튼보울에서 열린 ‘엑스폴로 72’대회에서 활동영역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래리노먼, 러브송, 리타 쿨리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배리 맥가이어, 안드레 크라우치 등이 출연해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 앞에서 복음이 담긴 새로운 기독교음악을 선보이게 되었다. 또 Word 레코드사는 크리스쳔 전문 레이블인 Myrrh를 설립, 초창기 크리스쳔 음악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가 진행되면서 CCM은 기성 교회의 거부감과 라디오에서의 거의 방송되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도 성장해 갔다. 1976년 CCM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Sparrow사가 설립되었다. Word 레코드사에서 아티스트와 선곡 담당자로 일해오던 빌리 레이 헌은 작지만 선교적인 성격이 강한 레코드 레이블을 세워 배리 맥가이어, 애니 허링, 존 마이클 탈보트, 케이쓰 그린등의 앨범을 출반했다.
계속해 CCM은 그 질과 양에 있어 성장해 갔고 1978년 CCM계에는 큰 영향을 준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CCM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 ‘CCM'이 창간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초대형 가수인 Amy Grant의 등장이었다. ’CCM'지는 처음에는 크리스쳔 음악계의 종사자들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점차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보급이 되었고 CCM의 챠트도 집계하는 등 명실상부한 CCM 잡지로 발 돋음하게 되었다.
1979년 포크의 대명사로 불리던 밥 딜런이 ‘Slow Train Coming'이라는 앨범을 내고 기독교인이 되어 공연 때마다 거듭난 내용을 주로 하는 노래만 불러 세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 1979년 크리스쳔 록을 비판해 오던 Bob Lason이 그 태도를 바꾸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세속 Rock음악에서 보았던 위험성이 크리스쳔 록에서도 존재할 위험이 있다고 해서 크리스쳔 록을 반대해 왔으나 CCM을 자세히 접하고 CCM 아티스트들의 확고한 믿음과 그들의 생활을 보면서부터 종전의 비방하던 관심을 바꾸어 오히려 옹호하는 입장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1980년 No Comppromis! 라고 뜨겁게 외치며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렬한 선교에의 도전을 불러 일으키던 케이스 그린은 자신의 새 앨범을 자유 가격제로 판매함을 발표, 충격을 주었다. 그는 구매자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앨범을 판매했다. 이와 같은 판매 방식은 돈이 없어도 그의 음악을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1981년 CCM은 양적으로도 성장해서 일반 레코드 회사에서도 크리스쳔 음악을 보급하려는 움직임이 시도되었다. 그래서 크리스쳔 음악이 일반 시장에도 배급됨에 따라 일반 시장에도 적합한 노래를 만드는 경향이 생겨나서 음악영역의 전환에 따르는 문제가 발생해 이른바 ‘크로스 오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2년엔 CCM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백워드 매스킹.에 대한 논쟁이 크리스쳔 음악계를 들끓케 했다. 레코드를 거꾸로 돌려보면 거기에 사탄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백워드 매스킹‘문제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어 레코드를 호기심으로 거꾸로 돌려보는 일이 유행했다.
또 1982년 CCM계에 시대의 에언자로 불리우던 케이쓰 그린(Keith Green)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시대의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였고 많은 음악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아티스트였다. 그의 부인인 멜러디 그린은 그가 설립했던 ‘라스트 데이 미니스토리’를 더욱 확장 시켜 수많은 선교 사역자들을 길러 냈다.
1985년 워드 레코드는 일반 팝 회사인 A & M사와 계약, 에미 그란트의 앨범을 일반 시장에 보급했다. 그녀의 앨범 ‘Unguarded'가 85년 5월에 나오고 그 앨범이 수록된 ’Find a way'가 빌보드챠트 TOP 40에 진입하고 크리스쳔 가수로는 처음으로 일반 POP챠트에 등장하게 되자 다시 크로스 오버 논쟁이 일기도 했다.
세상과 타협했다는 비판, 즉 세속적 성공을 위해 영적인 내용을 의도적으로 줄였다는 비판이 가해지고, 반면 에미 그란트의 옹호자들은 에미 그란트야 말로 오랫동안 CCM 아티스트들이 꿈꾸어 왔던 일, 즉 일반 팝 음악계에 크리스쳔 음악을 통해 진리를 전파함으로써 진정으로 복음이 필요한 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그 의미를 강조했다.
1986년 에미 그란트의 ‘Unguarded'는 백만장 이상이 팔려 나가 플래티넘 앨범을 수상했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시기엔 에미 그란트 뿐만 아니라 80년대를 이끌어 갔던 아티스트들이 성장해갔고 1979년 첫 앨범을 낸 스탠다드한 노래로 사랑을 받게 딘 샌디 패티도 대형 가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들 외에도 미이클 W 스미스, 마이클 카드, 트와일라 파리스, 존 마이클 탈보트, 스티븐 그린, 랜디 스톤힐, 데이빗 미스, 카 맨,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 돈 프란시스코, 필 케이기, 웨인 왓슨, 뉴 송, 챨리 피 콕 등이 CCM계의 선두주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니엘 아모스 밴드, 레즈 밴드, 페트라, 화이트 하트, T T S, 러스 태프 등도 크리스쳔 록을 성장시켜 나갔다. 스트라이퍼가 헤비메탈을 들고 크리스쳔 음악을 시도하고 화이트 크로스, 샤우트 등 크리스쳔 메탈도 태동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CCM은 일반 POP의 흐름과 거의 대등한 흐름을 이어갔다. 80년대 중반 스티븐 테일러가 뉴웨이브 스타일의 크리스쳔 뮤직을 선보인 이래로 CCM은 갖가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 스타일을 원용하기 시작했다. 크리스쳔 록, 크리스쳔 랩, 포크, 재즈, 에어로빅 음악, 묵상을 위한 연주음악 등등 이젠 그 종류가 다양해져서 분류조차 어렵게 되었다.
한편 마라나타 뮤직이 성장시켜온 컨템퍼러리한 찬양
등은 호산나 인테그러티 뮤직의 ‘프레이즈 앤 워십’ 시리즈로 더욱 그 영역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으며 빈야드 교회의 워십송도 컨템퍼러리 프레이즈 앤 워십 분야를 살찌웠다. 또 85년에는 CCM에서도 CD를 제작하기 시작해 음질면에서도 일반 음악과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또 일반 POP 음악에 뮤직 비디오(MTV)가 키게 성장하면서 거기에 대한 대안으로 크리스쳔 MTV가 등장했다. 1986년에는 CCM이 대학에서 정식 과목으로 가르쳐 지게 되었다. 세인트 루이스 근처의 그린 빌 대학에서는 CCM을 정규학과로 세워서 그 커리큘럼에 CCM의 여러 분야 - 스튜디오, 레코딩 테크닉, POP이론과 작곡 코스, 실기 코스, 무대효과, 프로그래밍, 프로모션, 업계활동 등을 포함 시켰다.
CCM의 역사가 이제 30년을 넘어 장년기에 접어드는 1990년대는 CCM의 새로운 장을 여는 시대가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크리스쳔 뮤직 비디오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그런 뮤직 비디오가 방송될 수 있는 CCM 전문 TV가 생겨났다. CCM 수준은 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일반 팝 음악계의 수준에 완전히 도달했으며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악마주의, 쾌락주의, 상업주의로 얼룩져있는 일반 팝과 락 음악의 대안으로 복잡한 현대 문화 속에서 효과적으로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
CCM은 유럽에도 들려지기 시작해 에미 그란트, 샌디 패티, 화이트 하트, 페트라 등은 유럽의 공연에서 성공적 결과를 낳기도 했고 80년대 말부터 자유화의 물결이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도 CCM은 들어가게 되었다. 1989년 8월 발트해 공화국의 하나인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탈린에서 열린 ‘에스토니아 89’는 수 많은 결신자를 배출했다. 소련의 공산화이래 처음으로 열린 CCM 공연이었다.
1991년에는 유럽 각국의 크리스쳔 아티스트들이 스위스에 모여 유럽의 CCM을 모은 앨범 ‘첫 발자국’을 냈다. 이들은 유럽 특유의 크리스쳔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에서의 CCM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결의했다
한 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도 CCM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CCM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음악이 아시아 각국의 찬양문화가 발전하면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개방화되는 세계의 추세에 따라 나라간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CCM은 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
1990년대는 CCM이 본격적으로 일반 팝 음악계로 뛰어든 시기가 되었다. 내용이 완전히 선교적 입장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CCM의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에미 그란트가 1991년 POP 계의 정상을 차지했다. 이어서 가장 뛰어난 CCM 사역자중의 한 명인 마이클 W 스미스가 ‘Place in his world'라는 확실한 복음 메시지가 담긴 노래로 빌보드 상위로 진입하게 되었다. ’Be Be and Ce Ce Winans'는 리듬앤 블루스 챠트 1위를 기록했다. Take 6도 그래미상에서 여러 부분을 수상하는 등 CCM은 일반 팝계에서도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크리스쳔의 음악인들이 품어왔던 "일반 POP 음악계에서의 복음 사역을!“ 이라는 슬로건이 실현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한국에서의 CCM(CCM현황)
한국은 기독교문화의 대부분을 서양을 통해 받아들였고 개신교의 경우 미국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통해 기독교문화를 살펴보면 한국기독교는 외국의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우리 문화를 스스로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은 미흡했다.
기독교 음악도 우리 손으로 노랫말과 곡이 붙여진 찬송가도 별로 없었다. 매주일 예배시마다 서양 찬송가를 그대로 불렀고 성가대 찬양도 서양의 음악이었다.
1.초창기 한국의 CCM
한국에서 컨템퍼러리 음악은 1960년대 말의 가스펠로 거슬러 올라 갈수 있다 미국의 선교단체와 연결된 교회학교 지도자나 선교단체 지도자들 또는 교회음악인들이 미국의 초창기 가스펠송을 번역해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 예수 전도단은 찬양과 경배모임을 시작하면서 "내게 강같은 평화"등 부르기 쉬운 가스펠을 도입하여 보급했다. 이런 노래는 빠른 시간 내에 보급되었지만 교회지도자들의 정책적이고 문화적인 안목에 따라 수용됐다기보다는 젊은이들의 문화에 일찍이 눈을 뜬 비교적 젊은 지도자들에 의해 수입된 것이었다. 출처도 불분명한 이러한 컨템퍼러리한 음악들이 조그마한 책자와 기타반주로 급속히 퍼지게 되었다. 70년대 후반 C.C.C.등에서 자체 테잎을 제작하고 복음가수라는 이름으로 당시의 가스펠을 테입에 담아내었던 것이다.
1970년대말, 80년대초 연예인 교회를 중심으로 크리스찬 연예인들이 재능을 찬양으로 돌리게 되었다. 작곡능력과 인기를 겸비하고 있던 이들은 복음성가를 만들어 레코드로 제작해 보급했다. 윤형주, 이종용, 윤복희, 윤향기, 김세환, 서수남, 방은미, 유준, 허림, 방주연, 이용복, 선우성등 많은 기성가요 가수들이 부른 복음성가가 제작됐다.
2.본격 CCM의 탄생
한국에서 본격적 CCM은 1980년대 중반 최덕신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성악을 전공하고 작곡능력까지 갖춘 최덕신은 주찬양 선교단을 이끌면서 본격적인 컨템퍼러리 음악을 만들고 보급했다. 그의 첫 앨범 <그이름>은 한국교회의 청소년들에게 우리 손으로 만든 본격 컨템퍼러리 음악을 부를 수 있게 했다.
최덕신은 박종호, 최인혁, 송정미의 첫 앨범을 편곡, 제작함으로써 영향을 주었다. 예수 전도단에서 리더로 활동하던 최인혁도 1988년 첫 솔로 앨범 <어두워지는 세상>을 냈다. 최덕신의 음악이 한국적인 프레이즈 송 스타일이었다면 최인혁의 음악은 본격적인 팝스타일을 띠었다. 한국의 CCM은 최인혁의 앨범으로 본격적인 컨템퍼러리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박종호와 '축복송'의 송정미가 그 뒤를 이었다.
3.복음성가 경연대회를 통한 CCM발전
한국의 CCM은 복음성가경연대회를 통해서도 성장했다. 1981년 12월14일 극동방송이 주최하는 복음성가 경연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그후 매년 열린 이 복음성가 경연대회를 통하여 최덕신, 최인혁, 박종호, 송정미, 손영진, 옹기장이 등 대표적인 CCM아티스트들이 등장했다 그후로 전국대학생 복음성가 경연대회,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연 경연대회, 십대 선교회의 청소년 복음성가 경연대회가 이어졌다. 1990년부터 기독교방송(CBS)에서도 창작복음성가제를 열어서 새로운 복음성가 가수를 배출했다. 이복음성가제에서는 이혜정, 소리엘, 박주동 등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성가대회는 오히려 프레이즈 송 스타일을 강조하므로 새로운 스타일이 시도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음악인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통해 CCM 계에 들어와야 했다.
4. 1990년대 이후의 CCM
1990년대 이후의 CCM계는 질과 양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그 토대가 취약하기 그지없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크리스챤 록 논쟁은 90년대에 이르러서 더욱 가열되었고 안티 크리스쳔 록커들의 강연이 계속되어 CCM계는 잠시나마 동요됐다.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CCM 공격목소리는 점점 커갔지만 이에 맞설 CCM계의 이론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컨템퍼러리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는 대세였고 크리스쳔들의 인식이 점점 넓어지면서 CCM은 꾸준히 발전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CCM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기독교 방송의 CCM 전문 프로인 ‘가스펠 아워’와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도 CCM 보급과 확산에 기여했다. 극동방송에서도 ‘참 기쁜 노래를’, ‘윤형주와 함께’, ‘밤을 찾는 당신에게’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 CCM을 방송했다. 카톨릭 방송인 평화방송에서도 생활성가란 이름으로 CCM을 방송했다. 평화방송은 부족한 생활성가 외에도 개신교의 복음성가, 즉 CCM을 방송했다.
일반 가요계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도 CCM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새로 앨범에 참여한 김현철, 빛과 소금의 박성식, 장기호, 들국화에서 활동했던 손진태, 허성욱, 그룹 11월의 김효국, 그리고 시인과 촌장의 멤버였던 함춘호 등은 CCM 앨범제작에 편곡과 연주로 참여하여 CCM의 음악적 수준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 김현식, 빛과 소금은 그들의 앨범에 CCM을 한곡씩 넣어서 CCM의 대중화에 한 몫을 담당했다.
두란노 경배와 찬양 모임도 계속 확산됐다. 두란노 경배와 찬양은 1991년 ‘올네이션스 큰 잔치’라는 이름으로 연인원 15만 명의 대규모 찬양 집회와 세미나를 열었다. 광성교회, 은성교회, 소망교회, 충신교회 등 큰 교회를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서 찬양 모임이 활발히 열렸다.
한편 사회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노래하는 운동도 생겨났다. 이런 움직임은 군사정권의 강압통치에 항거하는 표현으로 “자유와 평등, 생명의 존엄”을 노래했다. 말하자면 노래의 실천운동으로서 컨템퍼러리 운동이었다. 기독교장로회 계통의 청년들이 이런 노래를 만들어 보급했다. 이런 흐름은 수직적이고 주관적, 개인적 구원 차원을 넘어 수평적이면서도 크리스챤들의 사회적 책임을 권면하며 부 정의한 사회의 단면들을 직선적으로 고발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랫말을 주로 하였다. 노래 마을의 백창우, 장청과 전교조에서 주로 활동하던 주 현신, 민족음악연구회에서 활동하던 류형선 등이 대표적이다.
컨템퍼러리 정신이 깃든 국악 찬양도 시도되었다. 국악은 전통음악이긴 하지만 그 스타일을 새롭게 변화시켜 적용한 노래는 또 하나의 컨템퍼러리 음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국악찬양은 한국국악선교회와 이성재, 문경일에 의해 시도됐으나 굿거리 장단에 대한 거부감이 워낙 커서 컨템퍼러리 국악찬양은 정체된 상태로 남아있다.
한국의 CCM의 앞길은 아직도 험난하다. CCM계의 영적 지도자가 드물고 CCM 음악인 자체의 지원과 역량 또한 모자라다. CCM을 지원해 주어야 할 교회에서는 아직도 안티 크리스챤 록커들의 영향이 강하고 CCM에 대한 많은 왜곡된 편견이 강하게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CCM을 아는 교회지도자나 목회자가 부족하여 교회 내에서 많은 편견에 부딪히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결론을 대신하며
CCM을 아는 교회지도자나 목회자가 부족한 한국의 현실 속에서 오늘의 작은 소고(小考)를 통해서 CCM의 정확한 인식의 틀을 제공받기를 원한다. 우리 나라의 CCM이 조금씩 성숙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과연 CCM이 생명과 진실을 잃어 가는 세속의 문화 속에 들어가 문화를 순화시키고 생명력을 회복하고 궁극적인 목표인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해서 길 잃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될는지, 아니면 CCM이 일반 POP 음악이 추구하는 인기와 상업주의에 물들어 재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도태되고 말는지.... 이 책임은 CCM을 이끌어 가는 뮤지션들만의 책임은 분명 아닐 것이다. 격려자요 후원자가 되면서도 냉철한 비평가가 될 우리 크리스쳔들, 특별히 시대의 문화를 늘 진보해 가려고 하는 젊은 기독 청년, 청소년들의 몫이라 나는 생각해 본다.
이전의 시대는 군사전쟁의 시대를 거쳐 경제전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뒤이어 정보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요 문화 전쟁의 시대’임을 결코 잊지 말자.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