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하고 순수한 수도사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웃다가 울었다.
젊었을 때 '좀 놀았다'는 벤노 수도사.
칸토리안의 교단규범집(?)인 '우르반의 교본'을 30년째 연구하고 있다.
새아버지와의 불화로 14살 때 집을 나와 수도사가 된 타실로.
그가 아는 유머는 세 가지 뿐. 수도원의 요리사다.
갓난 아이때 수도원에 맡겨진 미소년 수도사 아르보.
그가 알고 믿는 것은 찬양 뿐. 순수한 동정남이다.
그들은 칸토리안이다.
"목소리를 따르라" 라는 가르침을 섬기며, 찬양(성가)만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데,
그 교리 때문에 17세기 후반 카톨릭 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계속 '왕따'를 당해왔다.

세월의 풍파 속에 독일에 하나, 이탈리아에 하나, 세계에 단 두 개의 수도원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 '신의 목소리를 따르라'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두 수도원도 지난 200년간 불화였다.
수도원은 검약과 침묵을 계율 삼아 찬양으로 신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가난과 빚에 쪼들리는 현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수도사가 숨을 거두며 남긴 말.
"우르반 교본을 이탈리아 수도원으로 가져가서 그들과 함께 하세요"
원장님의 유언에 따라 수도원의 전 재산인 교본과 염소, 힐데가르트를 데리고 길을 떠나는 세 수도사.
그렇다. 이것은 일명 '로드무비'다!!
30년 만에 세상을 나선 두 장년 수도사들에게도 세상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오죽하면 달리는 기차를 손을 흔들어 세우려 하겠는가.
게다가 '문명'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아르보에게는 달려오는 자동차도 무섭지 않은판인데...
그렇게 그들의 이탈리아행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성격 괄괄한 젊은 여성, 키아라에게 차를 얻어 타게 되고, 엉뚱한 여정은 갈피를 못 잡는다.
타실로는 30년 만에 찾은 고향 농장에 홀로 남은 노모를 떠날 수가 없다.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한 너 만큼, 염소 젖을 짜던 나도 신에게 가까이 가 있었다구!!"
벤노와의 갈등으로 뒤에 남겨진 타실로.

벤노와 아르보는 '기차 갈아 타는 법'을 몰라 노숙자 신세가 되고, 속인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러다가 과거의 연적이자 친구였던 카톨릭교단의 한 자리하는 거물, 클라우디우스를 만나게 되고
그의 신학교의 권위와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 앞에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한편, 클라우디스는 이단인 칸토리안의 맥을 끊어 놓을 음모를 꾸미고...
그 모든 혼란 속에 폭풍의 눈처럼 고요한 아르보.
타실로와 벤노를 통해 절망하고 상처 받지만
한편, 키아라를 통해 전혀 새로운 감정과 세상에 눈을 뜨기도 한다.

아르보의 순수함과 영적인 매력에 폭 빠진 키아라,
그러나 아르보의 찬양을 통해 그녀 역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데...
"벤노 형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수도사로 남을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만 결정하면 됩니다."
"아르보 형제, 매일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수도사의 길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지요."
"아닙니다. 저는 이 길을 선택한 적 없습니다. 그저 이 길 밖에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르보에게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에게 진정 '신의 목소리를 따르라'에 대한 주체적 해석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신의 교리나 믿음에 대해 설교하는 종교 영화가 아니다.
신의 희생과 섭리를 일방 찬양하는 영화도 아니며,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냉소와 허무의 각본도 아니다.
세속화된 교회와 속인보다 더 속인이 된 종교인들을 풍자하고 희화하며
순수한 수도사들이 어떻게 유혹에 맞서 흔들리는지,
또 그들을 통해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과 함께 가는 길은 다양하다는 것,
무엇을 믿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실천하는 것에 미덕을 두고 있다.
여기서 당연히 '신'은 굳이 한 종교나 종파로 좁힐 필요도 없다.

세 수도사가 성가를 부르는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세속을 떠난 수도사의 눈을 통해 세속을 바라보고,
세속의 눈을 통해 세속을 떠난 수도사를 바라보는 것.
나는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안에서도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이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