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의 만행이 저러한데, 집에 숨어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수만은 없다.] 18일 오후. 이제 시민들도 거리로 나선다. 좀더 체계적이고 전시민적으로 대응해야한다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자연스럽게 지도부가 태동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일단 이날 조직적인 운동세력의 행보를 보면 먼저 전남대정문앞 사레지오고안에 있는 수도원에서 JOC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여성근로자 70여명을 대상으로한 노동교육이 진행된다.
연사로는 이창복 (현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이 초빙된다. 광주YWCA (당시에는 현광주일보뒤편에 있었음)에서도 문병란교수 (현 조선대의 강연으로 삼양제사 일진방직 전남제사 전남방직 등 모두 90여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노동교육이 진행된다. 또 70년대 후반 문화방송의 필요성에 따라 전남민주정년협의회 (회장·정용화)와 연대문화연구소 (〃)의 문화선전대로 조직된 [광대] 문화패도 황석영작품 [한씨연대기]를 공연하기 위해 광주YWCA [양서조합]에서 연습을 해온다.
[예비검속] 지도부 공백
당시 광주·전남지역의 재야운동은 홍남순변호사를 중점으로한 야당권 정치재야인사 그룹과 윤한봉을 중심으로 서아라YWCA명예회장을 중심으로한 종교단체 및 사회단체 등이 주축이다. 그밖에 앰네스티를 중심으로 한 중·고교 교사들모임, 장두석·황일봉이 관여한 양서조합, 서서히 뭉쳐져가는 노동운동 그룹, 김민기 등 노래운동팀도 자주 합세한 야학운동팀등이 외곽조직으로 포진된 상태다.
5·17계엄확대와 동시에 예비검속 대상이 된 이들 재야지도자들은 많은 수가 18일 날이 새기전에 잡혀가고 남아있던 지도자들도 18일 하루내내 몸을 숨기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도피처를 찾는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홍남순변호사는 18일 시내상황을 보고받으면서 일단 몸을 피하자고 생각해 19일 서울로 도피해버려 5·18민중항쟁의 초반기 지도부형성 관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20일 다시 내려와 21일 아침 광주에 다시 들어옴으로써 항쟁중반과 후반에 시민수습위원으로 활약한다. 윤한봉의 경우도 18일 몸을 숨긴채 사태추이를 관망하다 19일 오전 광주를 빠져나갔다가 20일 다시 광주에 들어옴으로써 항쟁초반기 지도부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물론 그밖의 많은 재야지도자와 청년·학생들이 예검속되어 18일 상황은 지도부공백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78년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투옥됐다 80년에 다시 북적한 전남대 김윤기 김선출과 김태종등은 같은 고교동기생들로 문화패 [광대]활동을 했던 경험으로 문화선전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자는데 의견일치를 본다. 이들은 시민들에게 우선진실을 알려야한다는 생각에서 18일 오후 전남대 탈춤반인 전용호와 합류해 유인물등사에 필요한 가리방, 등사기를 갖춰 곧바로 유인물 작성·배포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16절지 5백여장의 유인물을 만들어 변두리지역인 산수동, 계림동일대에 뿌린다. 내용은 [전두환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니 광주시민은 총궐기하자]는 것이다. 김선출 (당시 전남대복적생)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2개조로 나눠 공용터미널, 중흥동부근과 산수동, 계림동 일대에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고 회고한다.
유인물 작성 시내배포
이들 문화선전 유인물팀은 18일 밤 통금이 앞당겨진다는 보도를 듣고 지원동 배고픈다리 근처에 있는 후배집으로 들어가 19일 아침까지, 또 20일오전까지 계속해서 유인물을 작성해 학동 방림동 서동 양림동 등에 살포한다. 이들은 이후 광천동 들불야학팀과 합류해 5·18민중항쟁당시 유일한 언론매체인 [투사회보]홍보팀이 된다.
5·18항쟁기간중 문화패 [광대]와 들불야학팀은 가두방송선전과 대자보 부착, 궐기대회 등을 주도적으로 전개, 광범위한 문화선전활동을 벌이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70년대중반 74년의 민청학련관련 수감청년학생들로 조직된 광주구속자협의회가 70년대후반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약칭 민청협)로 재편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회원들이 예비검속되고 이들의 연락사무실 역할을 하고 있던 현대문화연구소 역시 폐쇄되다시피한 18일 상황에서 광천동 들불야학을 이끌던 윤상원(80년5월27일 도청함락시 사망)이 후배들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이같이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한 유인물홍보팀을 겸한 지도부는 21일을 전후로 강력한 지도부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이들이 18일 저녁부터 제작·발간·배포하기 시작한 유인물들은 재야민주화운동 지도부의 태반이 예비검속되고 지하로 잠적해버린 상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나온 청년·학생들의 시위를 조직적으로 지도해 나가기 위한 몸부림의 한 표현이다.
또 이들은 이 유인물에서 학생운동의 지도부였던 당시 전남대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예비검속되지 않고 건재하고 있다는 것과 재야세력지도부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한다. 18일 밤 유인물작업에 참여한 김윤기등은 [유신시대에 제적 수감되었다 풀려난 복적생을 비롯, 대학내 문화운동인사들이 모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고, 현대문화 연구소 등 재야사회운동단체들과 연계, 조직적 훈련을 쌓았던 덕분에 당시 상황에서 그나마 대처했던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회고한다.
물론 18일 밤상황에서 시내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전체적으로 주도하고 지도할 뚜렷한 지도부는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예비검속되지 않은 전남대총학생회장 박관현과 재야청년운동지도자인 윤한봉, 재야어른들의 핵심이었던 홍남순변호사를, 조아라장로, 이성학장로 등이 건재하고 있음을 홍보하는 것만으로도 시위군중들은 지도력이 부재하지 않다는 위안감을 줄 수 있었다고 보는게 타당할 듯하다.
초기 수습대책위 구성
18일밤을 전후해 [광대]팀과 둘불야학팀을 비롯 노동야학팀 전남대내 [대학의 소리]팀 등이 연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기 유인물 홍보작업에 들어갔음이 뒤에야 밝혀진다. 현재 수집된 당시 유인물가운데 18일밤부터 19일 오전까지 제작되어 뿌려진 유인물은 16절지 갱지에 등사프린트한 [광주시민민주투쟁회]이름으로 낸 [호소문]이다.
이 호소문은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해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의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라고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한다.
당시 유인물팀으로 활동했던 김윤기는 [당시 유인물 발행단체는 실제로 존재했던 전남민주청년협의회나 현대문화연구소 양서조합 가톨릭청년회 등의 이름을 넣지않고, 유인물을 제작하는 팀들 임의대로 이름을 지어 붙였다]며 [책임소재 추궁과 출처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팀을 각기 임의대로 이름을 붙여 제작·배포했다]고 증언한다.
이같이 18일밤을 고비로 유인물홍보팀으로 규합됐던 이들은 뒤에 항쟁지도부로 활동케 된다. 그리하여 다음날 옛YWCA자리에서는 신부 목사 교수 교사 법조인등 이른바 초기 수습대책위원회 (전두환정권밑에서는 수습대책위 강경파로 지칭됨)가 결성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