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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고종실록]
3. 떨어지지 않는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
동학이라고 하면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단순한 민족 종교 단체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동학은 단순히 서학으로부터 민족의 문화와 국가를 지키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서학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위대함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동학은 외세의 영향 없이 조선 사회의 봉건 질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계급을 철폐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의 형성을 통해 민족의 부강을 꾀한
가장 자주적인 정치 조직이었다.
* 정읍 황토현 갑오동학농민혁명기념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어떤 단체보다도 가장 탄탄한 조직과 힘, 그리고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다수의 농민과, 선각적인 양반의 상당수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거대한 민족
조직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그 어떤 이름보다도 민족적이며, 적극적인 민중 사회운동체
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민이 평등하고, 인류애가 살아 있는 이상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던 동학들은
1894년 민란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혁명적 농민봉기를 주도한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제도적, 정치적으로 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시민 혁명이었다.
이 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854년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
(지금의 정읍시)에서 향교의 장의를 지낸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의 초명은 명숙, 호는 해몽이지만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리었다. 그는 젊은 시절 생업을 위해 약을 팔기도 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과 상관없이 늘상 버릇처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 한다. 그만큼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는 약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지 못하자 태인 산외리 동곡 마을로 이사하여 세 마지기의
전답을 소유한 소농으로 지내면서, 스스로 선비를 자처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겸하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그는 19세기말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급변하고 외세가 밀려드는
것을 보고 민족과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신념으로 1890년 37세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사회 개혁을 꿈꾸는 혁명가적인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입교한 직후 그는 동학 제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된다.
그의 인품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주변 교도들의 추천에 힘입은 일이었다.
접주가 된 전봉준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말목장터에서 주로 포교 사업에
전념한다. 그는 포교의 일환으로 병자들을 고치는 일도 함께 하였다. 일찍이 읽은
의서들과 한때 약초를 취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들에게 처방전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892년 그가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자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는 형벌을 가하였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조병갑의 횡포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
부터 천 냥이나 되는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들을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쫒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 미리 당도해 있었다.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나 고부군수 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고부 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자, 그 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으로 불어
났다.
* 전봉준(1854-1895). 동학혁명을 주도한 동학의 고부접주. 동도장군. 일명 녹두장군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지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4대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잡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4월 4일 부안을 점령하고,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는 한편 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습권하였다. 그리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를
거쳐 마침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군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정은 청국군을 요청하였고,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텐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조선에 진출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학군과 관군은 화의를 약속하고 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에 들어가 전봉준은 폐정 개혁을 골자로 하는 27개조에 달하는 조건을 내놓았고, 이에
관군 대표인 홍계훈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동학군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위한 행정 관청 구실을 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전라도 지역은 동학의 자치 구역이 된 셈이었다.
집강소의 행동 강령은 총 12개조로 양반 중심의 봉건 사회를 혁파하고, 신분차별을
없애며, 인습에 갇혀 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 농민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든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집강소 행동 강령은 17세기 이래 진보적인 실학자들이
내걸었던 개혁안과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주장했던 정책보다 훨씬 진보된
내용이었다.
그만큼 시대를 멀리 내다보았던 전봉준의 개혁 사상은 봉건 사회인 조선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혁명적인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 농민군이 해산되고 집강소가 설치된
후 전봉준은 20여 명으로 기마대를 조직하여 전라도 내 각지를 순회하며 집강소 설치를
지도하고, 개혁 정책의 실시 상황을 점검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내에는 53군에 모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집강소의 원만한 운영을 협의하기 위해 전봉준을 전주감영으로 초청했고, 감영 내에
'대도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동학 세력의 힘을 두려워 한 전라감사는 자신의 집무소인 선화당을 대도소로 내주고,
자신은 그 곁의 작은 건물로 옮겨갔다. 그러나 집강소의 설치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들은 집강소의 행동 강령속에 들어 있는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상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애고, 또한 양반과 유림의 방자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강소는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양반과 유교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양반 세력이 강했던 나주, 남원, 운봉의 세 곳에는 좀처럼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다.
이에 전봉준은 마침내 무력으로 집강소를 설치할 것을 결심하고 김개남, 김봉득, 최경선
등에게 각각 3천 명의 병력으로 남원, 운봉, 나주를 접수하도록 했다.
남원과 운봉은 쉽게 함락시키고 집강소를 설치하였으나 나주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나주 관아에는 많은 동학교도들이 붙잡혀 있었고, 또한 나주목사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최경선은 나주 입성을 감행하지 못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전봉준은
단신으로 나주 목사를 만나 그를 설득하고 동학교도들을 석방시킨 뒤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학의 자치 행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이러한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동학 농민군의 제 2차 봉기는 그 해 9월에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제2차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과 관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피하다가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895년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의 동지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렇게 일본군에 의해서 동학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봉준은 영원히 민중의
영웅으로 남아 그 뒤에도 계속된 농민군과 의병의 항일 투쟁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민족의 녹두꽃이 되었다.
4. '고종실록'편찬 경위
'고종실록'은 본문 48권 48책과 목록 4권 4책을 합쳐 총 52권 5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6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고종 재위 43년 7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의 조선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망국 이후인 1927년 4월에 시작되어 1935년 3월에 완료되었다.
이 책이 편찬된 것은 일제 통치 기간으로 1927년 '이왕직'을 설치한 뒤 임시 고용원 10명과
집필생 26명을 배치하고, 실록 편찬에 필요한 자료인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각종
기록 2,455책을 경성제국대학에서 빌려 자료를 추출하였다.
그리고 편찬 작업에 필요한 자료가 확보되자 1930년 4월에 편찬위원을 임명하여 역대
실록 편찬의 예에 따라 실록 찬술 작업에 착수하였다. 편찬 초대 위원장은 일본인
이왕직 차관 시노다였으나, 그는 1932년 7월 이왕직 장관에 임명됨에 따라 이왕직의
예식과장이던 이항구를 차관으로 승격시켜 부위원장에 임명하고 실록 찬술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실제 편수의 총책임은 감수위원으로 임명된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가 맡았다.
편찬실에는 위원장, 부위원장 밑에 편찬에 필요한 공·사의 문서를 수집하며 사적의
조사 및 관계자로부터의 사실 청취의 일을 맡는 사료수집부, 각 사료에 기초하고 역대
실록에 준하여 편년체의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편수부, 편집된 원고에 대하여 사실의
정확성을 기하고 문자 장구를 정리하여 실록 원고를 작성하고 간행할 때 교정하는 일을
맡는 감수부의 3부서를 두었다.
그리고 편집부만은 다시 1, 2, 3반으로 분리하고 각 부에는 위원, 보조위원, 서기를
두었다.
한편, 위원장 직할로 서무위원, 회계위원을 배치하고 편찬실 서무는 보조위원서기가
담당하였다. 편찬위원들은 기술, 체제, 편찬을 위한 역대 실록, 특히 <철종실록>의
예에 따른다는 작업 원칙을 세우고 <고종실록>과 <철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실록은 민족 항일기에 일본인들의 간여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편찬 각 위원회에서 편찬된 원고가 편찬 총책임자인
경성제국대학 오다 교수에 의해 감색, 감증 등의 손질이 가해졌고, 또한 실록 원고는
일본인인 이왕직 장관의 결재를 얻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록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그 밖의 관찬 기록들에서 중요한 내용을
채록하였기 때문에 고종 시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종 시대의 세계 약사
고종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는 일본의 팽창이 뚜렷해져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 시기에 중국 내부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리기 위한 한족의 독립운동이 전개된다.
한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 제국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해
아프리카 분할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는 한편,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동남아 국가에 대한 신민 정책을 수립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수하고,
내부적으로 남·북전쟁을 종식시키면서 본격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감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