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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만년 22 /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④
21세기 <한국철학사상> 강화학江華學!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 즉 ‘강화학’은 중국의 양명학과는 다른 조선적 양명학을 정제두로부터 이룩한 것으로 본다. 정제두 이후 강화학은 정후일을 비롯하여 가학 형태로 계승되면서 구한말의 민족사관 형성하였고 이어서 근대적 사상으로 변모되어 정인보, 박은식, 신채호 등 일제항쟁기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문한사료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시원의 《국조문헌》, 이건창의 《당의통략》은 매우 자료적 가치가 높은 사료이며, 이광사의 《오음정서》, 유희의 《언문지》 등은 우리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다.
강화학파는 정약용의 경세적 학문, 실용적 학문을 연구하고 결합하여 민중적 성격을 더욱 발전시키며, 아울러 노장사상 및 불교 연구에도 천착하는 등 〈한국적 사상〉을 형성하는 토대로 작용했다.
강화학파江華學派-개설槪說
강화학파는 하곡 정제두로부터 시작된다. 정주학의 폐단과 단점을 보완하여 왕양명이 일으킨 양명학이 조선의 정제두를 만나 실천적인 학문, 철학으로 거듭나면서 조선의 철학사상으로의 강화도에 정착한다. 21세기 들어와 ‘조선양명학’은 하곡 정제두가 일으킨 신기풍 철학으로 독자적인 〈하곡학〉이란 명칭을 부여받는다. 현재 한국양명학회는 강화도에서 〈강화양명학 국제학술대회〉를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
조선 숙종 때부터 강화도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적 학풍을 일컫는 조선후기의 학파이다.
하곡의 학문은 참된 자아를 확립하려는 정신태도를 견지하면서, 국학의 제반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경전을 재해석하는 작업에서 높은 수준을 이루었다. 즉 참된 자아의 각성과 생활 속의 실천을 중시하는 순수동기주의를 추구하였다.
정제두 이래로 강화학파는 도교와 불교까지 수렴하였고, 이학理學보다는 한학漢學을 연구하고 동시에 국학國學을 일으켰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考證學 또한 주체적 철학관으로 수용했다. 따라서 하곡 이후 원교∽담원으로 이어지는 인맥에서 훈민정음연구, 국어학, 국사학, 서법書法, 문자학, 문헌학 등 국학 전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이 탄생하며 구한말의 사회개혁과 일제항쟁기 중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해방 이후 담원을 통해 한국적 철학사상을 제시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강화학파의 인물로는 서법書法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국사학에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과 매천梅泉 황현黃玹, 한학漢學에 석천石泉 신작申綽, 훈민정음 연구에 서파西陂 유희柳喜, 문자학에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南克寬 등 오늘날 국학 분야에서 거론되는 선구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강화학파 학맥에 속한다. 아울러 홍양호洪良浩, 이종휘李種徽 등 학자들도 강화학파와 관련이 깊다.
강화학파에 관하여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 《국학산고國學散藁》 등 저술을 통해 그 사상과 학문과 철학적 성과를 정연하게 평설해 놓았다.
이후 민영규閔泳珪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자료연구실에서 행한 ‘강화학江華學과 그 주변’이란 강의(1988. 3. 15)에서 그들의 학적 전승 관계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강화학파〉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강화학파는 소론으로 분류되는 당색과 상호간의 혈연적 관계를 맺으면서 향후 250여 년간 학맥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양명학을 수용하되 전내실기專內實己(내면을 오롯하게 하고 자기에게 충실할 것)의 실천적 학풍을 지켰다.
강화학파는 소론少論의 가계家系를 통해 이어졌다. 영조의 탕평정국에서는 소론도 일정하게 정계에 진출하였으나,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이진유李眞儒가 김일경 옥사에 관여되어 영조 초에 정치권에서 축출 당하고 만다. 이어서 이인좌李麟左의 난, 기유처분, 반야하교半夜下敎 파동, 경신처분을 거치면서 더욱 타격을 받는다.
영조 31년(1755), 나주괘서사건(을해옥사)에 연루된 이진유의 집안이 몰락하게 된다. 이진유의 다음 세대인 이광신李匡臣, 이광려李匡呂, 이광찬李匡贊, 이광사李匡師, 이광명李匡明 등이 모두 연좌되어 집안이 몰락하였다.
정치적 수난
이들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새삼 탐구하며, 하곡 정제두의 실천적 학문을 잇기 위해, 강화도에 은거해 있는 정제두를 찾아 강화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심학心學으로서의 ‘실학實學’을 실천했고, 노장老莊에서 가식을 배제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추구하였다.
이광신은 정제두 심학의 적전嫡傳으로서, 정제두의 저술을 교정하고 선사繕寫했다. 《의주왕문답擬朱王問答》, 《논정하곡학문설論鄭霞谷學問說》에서 정제두의 계승자임을 밝혔다.
이광신은 하곡이 양명학을 배운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회암과 양명의 차이가 ‘격(格)’의 해석에 있을 뿐이라고 하고, 그 둘은 방편적方便的 차이밖에 없으며, 강색講索과 존성存省은 궁극적으로는 보합한다고 변론하였다.
이광사는 《서결書訣》을 남기고 〈동국진체東國晉體〉를 확립한 서법가書法家이면서 동시에 강화학의 정신을 문학과 논문으로 표출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다.
이광사의 둘째 아들인 이영익李令翊은 정제두의 손자사위가 되었는데, 그는 정제두의 심학을 비교적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이영익은 제종형제 이충익李忠翊과 함께 주학朱學(성리학)과 왕학王學(양명학)을 변석하고, 《상서》의 〈금고문今古文〉을 논하는 등 지적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충익은 양명학을 공부했으나 나중에는 불교에 심취해 《초원담로椒園談老》를 이루었다.
이영익은 양명학을 자득해 주체의 존재양식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의식의 ‘방랑放浪’을 염려하였다.
이영익은 ‘방랑’을 중지하기 위해 주자학적 격물치지의 공부를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에 머물지 않고 경학 연구와국학에 열정을 쏟았다.
이영익은 《주역》과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연구에서 한당漢唐의 고주古注를 살펴서 경전의 본뜻에 직접 접근하려고 했는데, 그 시도는 뒷날 신작의 《삼차고三次故》로 결실을 맺는다.
이영익의 형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편찬, 국사에 대한 연찬에 주력하였다. 그 원집原集과 별집別集은 조선후기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하게 읽혀서, 야담이나 패사를 정리해 조선의 역사를 탐구하고 조정 정책의 향배를 제시하려는 ‘외사(外史)’들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자극을 주었다.
강화학파를 이룬 또다른 가계家系, 평산 신씨平山申氏
신대우申大羽는 정제두의 손자사위로서, 강화도로 이주해 정제두의 학문을 이었다. 그도 정제두의 유집遺集을 정리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다만 심학과 관련된 논문은 남기지 않고 산문 창작에 치중해, 인간의 문제를 문예적 산문으로 표현해내었다.
신대우는 중년 이후에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고, 셋째 아들인 신현申絢이 관료로 성공하자 경기도 광주 사촌社村에 세거지世居地를 마련, 그 일문은 경화거족京華巨族에로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 당파 간의 이해 대립이 첨예한 현실을 사도斯道의 퇴락현상으로 규정하고 그 폐단을 구할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였다.
신대우는 전내실기적인 삶을 실생활에서 추구했고 함축성이 높은 산문 문학을 제창하였다.
신대우의 둘째 아들 신작은 일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문헌 집성의 방법을 활용해 경학 연구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려, 조선 학술사에 유례가 없는 박학樸學의 종宗으로 남았다.
신작은 경학에서는 《시차고詩次故》, 《역차고易次故》, 《서차고書次故》 ‘삼차고’를 저술했다. 이어서 《춘추좌전례春秋左傳例》를 집필하고 《의례儀禮》를 연찬하였다.
신현申絃은 정조 때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정조의 학문 진작에 협찬했다. 순조 초까지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의 《노자주》 그리고
이충익의 《초원담로》로 이어지는 노자 연구의 전통을 이어 《노자지략老子旨略》을 집필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 서로 학술 토론을 전개해 연구를 심화시켰다.
정제두의 문인으로 심육沈錥과 이진병李震炳
심육은 학문적인 후계를 갖지 못했고, 그의 아우(鑰, 鉍, 鈸) 형제는 모두 을해옥사에 연좌되어 노奴가 되거나 유배를 당함으로써 그 형의 학문이 계승될 수 없었다.
다만 심육의 부친 심수현沈壽賢에게서 수학한 홍양호가 강화학파와 일정한 연관을 맺었고, 그 가학이 구한말의 홍승원洪承憲에게로 이어졌다. 또한, 심수현의 후손에 심대윤沈大允이 경학 연구에서 창신創新을 이루었다.
조선후기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양명학을 수용한 학자 문인들은 많았지만, 강화학파는 그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가학家學의 형태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정제두는 이기理氣의 개념을 빌어다가 심心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의 강화학파 학자들은 이기론理氣論의 틀을 점차 벗어났다. 이광사가 《논동국언해토論東國諺解吐》에서 한글 ‘언토諺吐’에 관해 논한 이후 강화학파의 학문이 국학으로 확장하는 기원을 이루었다.
그들은 이후 박학樸學으로 학문적 관심을 넓혔고, 시문에서 올바른 인간상을 제시하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부합시키려 했으며, 전통 가치와 학술 내용을 회의하고 재구성하였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현실의 모순이나 제반 문제를 직접 언급할 수는 없었지만, 강화학파의 시문은 그 자체가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때로는 실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비판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강화학파 가운데는 학술적 저술을 넘어, 시문으로 사상 내용을 형상화해 담아낸 문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전내실기를 중시했으므로, 시문에서도 수식을 배격하고 효제孝悌와 행의行誼에서 우러나온 문학을 우위에 두고 경술문장일치經術文章一致를 추구하였다.
특히 문학을 전공한 인물로 이광려와 신대우는 당대의 평가를 받았다.
이광려는 각의도련刻意陶煉한 단형의 시로 맑은 심상心象을 표출했고, 신대우는 보기 드문 의고파擬古派 산문가였다.
또한 강화학파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진성측달眞誠側怛의 태도를 지녔기에, 가난家難을 당한 여성의 고초에 눈을 돌려 〈비지문碑誌文〉이나 〈애제문哀祭文〉 혹은 〈회상시〉와 〈서한시〉에서 그 아픔을 다루었다.
아울러 지방 풍정과 민족 역사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이광명李匡明은 유배지인 갑산甲山의 지리와 풍속을 한글 산문으로 〈이쥬풍속통〉을 서술했고, 이광명의 계자系子인 이충익은 죽지사체竹枝詞體인 〈이산잡시夷山雜詩〉 10수로 갑산의 풍정을 읊었다. 이광사는 연작 영사시連作 詠史詩 《동국악부東國樂府》를 지었고, 그 아들 이영익은 그것에 차운하였다.
구한말 이건창李建昌과 황현
이들은 우국의 정신에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강화학파의 덕천군파 가계는 철종이 등극하면서 이시원李是遠이 징사徵士로서 중앙권력에 편입되어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판서직을 지낸 이시원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고령이면서도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자결해 외침에 대한 대처를 촉구하였다.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과 함께 정원하鄭元夏, 홍승헌洪承憲, 이건승李建昇, 이건방李建芳이 정제두의 유풍을 흠모해 강화도에 모여 함께 강학을 하면서, 새로운 학문 방법과 현실 대처 방안을 토의하였다.
명성황후明星皇后 시해사건이 있었을 때 이건창은 홍승헌, 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문에 나아가 〈청토복소請討復疏〉를 올렸고, 당색의 제한 때문에 정치이념을 구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체험하고는 붕당정치사인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집필하였다.
이건창의 아우 이건승은 황현과 교유한 문인으로, 이건창, 이건방 역시 갑오정국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홍승헌, 정원하와 함께 자결을 결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건승은 1906년에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해 교육구국 운동을 전개했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지지하였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정원하의 뒤를 따라 만주의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였다.
강화학파의 문인 학자들
지적 결벽성을 지닌 강화학파의 문인 학자들은 일제의 강제 합병을 당해, 자결을 하거나 국외로 망명하였다. 이건창이 이은 조선양명학의 정신, 민족자주의 이념은 정인보에 의해 계승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정인보의 강화학
강화학파는 양명학 일색은 아니다. 정인보는 강화학을 포함한 조선양명학도의 존재를 지적하고, 그 논리 구조를 밝히고자 했다. 담원은 일제에 부역하는 학문 자세를 허학虛學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근거로 양명학적인 실학의 이념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강화학파의 학문이나 사상의 저류에는 윤리 주체로서의 인간을 고려하는 양명학적인 지향이 큰 줄기를 이룬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내수內修를 주장해 자기 내면을 오로지 하고 충실히 하라는 가르침을 강화학파의 삶과 문학과 학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정인보鄭寅普(1893∽1950):일제항쟁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작가이며,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 저술가이다.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 도중에 사망하였었다. 본관은 동래,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수파守坡,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 한문학의 대가로서 서지학, 국사학, 국문학에 두루 관여했다. 조선역사 연구의 바탕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한민족은 곧 ‘얼’임을 강조한다. ‘국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그 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았다. * 1946년 국민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조선서연구초》(신채호書, 홍명희序, 정인보署)를 펴내며, 주자학자들의 공리공론과, 존화사상을 없애기 위해 유학의 개혁을 주장했다. |
<강화 중심, 대표적 6인의 한시>
*시조시인 한상철의 〈2017 만추, 《한강문학》 江華 세미나〉 발제시
-이규보, 정제두, 이건창, 이건승, 김택영, 정인보(年代順)
서사序詞:강화도는 기가 강한 섬이다. 민족의 젖줄 한강, 임진강 담수가 합류해 서해 함수鹹水의 기운을 받아 생기의 절정을 이룬다. 그리하여, 우국충정지사가 많고, 뛰어난 문객도 많았다. 아울러 강화는 통일 후, 미래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번역은 원문의 시의詩意를 최대한 살려 현대감각으로 풀이했다.(한상철 서) |
1. 이규보
〈美人怨-回文〉(글을 되돌림)
-미인의 원망
順讀순독
腸斷啼鶯春 장단제앵춘 꾀꼬리 우는 봄날 애간장 타는데
落花紅簇地 낙화홍족지 꽃은 떨어져 온 땅을 붉게 덮었구나
香衾曉枕孤 향금효침고 향긋한 이불 새벽베개는 외롭기만 하여*
玉臉雙流淚 옥검쌍류루 고운 뺨엔 두 줄기 눈물 흐르누나
郞信薄如雲 랑신박여운 님의 약속 믿음 없기 뜬구름 같고
妾情撓似水 첩정요사수 이내 마음 일렁이는 강물 같누나
長日度與誰 장일도여수 긴긴 밤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며
皺却愁眉翠 추각수미취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
逆讀역독
翠眉愁却皺 취미수각추 푸른 눈썹은 수심 겨워 찌푸려 있는데
誰與度日長 수여도일장 뉘와 함께 긴긴 밤을 지내볼까
水似撓情妾 수사요정첩 강물은 내 마음인 양 출렁거리고
雲如薄信郎 운여박신랑 구름은 신의 없는 님의 마음 같아라
淚流雙臉玉 루류쌍검옥 흐른 눈물은 두 개의 고운 옥인양*
孤枕曉衾香 고침효금향 외론 베개 새벽 이불만 향기롭구나
地簇紅花落 지족홍화락 땅 가득히 붉은 꽃이 떨어지고
春鶯啼斷腸 춘앵제단장 봄 꾀꼬리 우는 소리에 애간장 타누나
* 대문장가 다운 절묘한 시다. 오언율시五言律詩 총 8구 40자를 구句는 물론, 글자 전체를 완전히 뒤집어 읊어도 율律에 맞고 뜻이 통한다.
그는 수사修辭의 마술사이다. 이 ‘회문시’는 원류인 중국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물다. ‘강화문학관’ 글을 그대로 전재轉載했다. 다만 순독 제3구와, 역독 제5구는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필자가 다시 다듬었다. 또한 독음讀音을 달았다(필자주).
* 이규보李奎報(1168∽1241) : 고려 시대의 시인이자 철학자. 호탕하고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다.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읊은 즉흥 감상시가 유명하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떨어졌다.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와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다. 백운거사라는 호를 통해 그가 산촌에 한가롭게 은거하면서 인생을 달관한 멋스러운 일생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있다. 그리고 ‘삼혹호’ 선생이라는 호는 세 가지를 몹시 좋아하여 붙여진 것으로서, 그 세 가지란, 거문고와 술과 글을 일컫는다. 몽고 침입 때 강화에서 살았다.
2. 정제두
〈山溪산계〉
-산의 계곡
涓涓流出愛無情 연연유출애무정 졸졸 새어나오니 정 없음도 사랑해
好看纖源一脈淸 호간섬원일맥청 보기 좋아라 실낱같은 근원에서 한 줄기 맑은 물
去會江湖千萬里 거회강호천만리 흘러가다 강과 호수 천만리로 모이나니
洪波誰識此中生 홍파수식차중생 누가 알겠는가 큰 물결도 여기에서 생긴 것을
歷盡千巖萬壑艱 역진천암만학간 수천 바위와 많은 골짜기 험한 곳 다 지나지만
如何日夜不曾閑 여하일야불증한 어찌하여 밤낮으로 한가하지 못 하는가
滔滔萬里奔歸意 도도만리분귀의 도도히 수만 리를 바삐 돌아가는 뜻은
只在滄波大海間 지재창파대해간 단지 푸른 파도 일렁이는 큰 바다에 있고 싶어서라오
*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읊었다. 하곡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 명징明澄한 서정시다.
* 정제두鄭齊斗(1649∽1736) 서울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추곡楸谷이다.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조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 이다. 부는 진사 정상징鄭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1631∽1695)의 문인이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건창
〈北漢失路북한실로〉
-북한산에서 길을 잃고
丹霞欲躡愴難梯 단하욕섭창난제 붉은 노을 질 때 산 오르려니 참 힘드네
絶頂彷徨日已西 절정방황일이서 꼭대기서 헤매느라 해는 벌써 서산에 지고
海色纖如通澮畎 해색섬여통회견 밭도랑인양 저 가느다란 바다색이여
雲容深不辨山谿 운용심불변산계 구름 자욱하여 산인지 계곡인지 모르겠네
* 이건창李建昌(1852∽1898)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시원是遠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상학象學이다.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강위姜瑋,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깊었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해 부정,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 친구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행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는 특히 북한산을 사랑했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1858∼1924)의 형이다.
4. 이건승
〈合邦後入都합방후입도〉
-합방 후 도성에 들어와서
松栢森森日色昏 송백삼삼일색혼 소나무와 잣나무는 울창하고 해는 저무는데
西風垂漏倚宮垣 서풍수루의궁원 가을바람 부는 대궐 담에 기대어 눈물짓누나
關心祭器無人抱 관심제기무인포 종묘 제기 걱정이어도 품고 갈 이 없어
亡國孤臣又後孫 망국고신우후손 나라 잃은 외로운 이 신하 게다가 왕손 후예이니
* 망국의 심정을 읊은 귀중한 영사시詠史詩다.
* 이건승李建昇(1858∼1924)은 조선 말기의 학자 겸 문인이다. 호는 보경保卿, 경재耕齋, 본관은 전주全州로 왕손이다. 그는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깊이 교유하였고,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의 스승으로서, 양명학을 그에게 전수하였다. 을사조약(1905. 11. 17)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홍승헌洪承憲, 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자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6년(고종 10년)에는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해, 교육으로 나라를 살리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지지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의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한다.
5. 김택영
〈聞雁문안〉
-기러기 소리를 듣다
明河初灩別書堂 명하초염별서당 은하수 처음 일렁일 적 서당을 나섰는데
錦水邊山驛路長 금수변산역로장 금강을 거쳐 변산 가는 길 아득히 멀고도 머네
鴻雁後飛過我去 홍안후비과아거 기러기 뒤에서 날다 나를 앞질러 지나가니
秋風秋雨滿江鄕 추풍추우만강향 가을바람 가을비가 강 마을에 가득하네
* 김택영金澤榮(1850∽1927) 본관은 화개,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 아버지는 개성부 분감역分監役 익복益福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윤희락尹禧樂의 딸이다.
* 시詩의 황현黃玹, 문文의 이건창李建昌과 더불어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가로 불렸으며, 역사서술에도 힘을 기울였다(다음 백과).
6. 정인보
〈獻忠武公헌충무공〉
-충무공에게 바침
一誓海山立 일서해산립 한번 맹서하니 바다와 땅이 서고
綱常於百代 강상어백대 사람의 도리[綱常]는 백 대에 전하네
再造乾坤無 재조건곤무 하늘과 땅이 없어 다시 세워도
伐矜於當時 벌긍어당시 공을 자랑하지 않고 그저 때가 되어 그리되었다 하네
成仁取義精 성인취의정 어질음을 이루고 바름을 정성스레 취해
忠光於檀聖 충광어단성 충절이 빛남은 단군의 성스러움이라
補天浴日功 보천욕일공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 공로로
德蓋於槿邦 덕개어근방 덕은 무궁화 나라(우리나라)를 덮었네
* 補天浴日보천욕일:‘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큰 공훈을 세움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신화에서 유래하였다.
* 이 시는 현충사 구 본당에 새겨진 주련柱聯이다. 〈홀로 전 민족을 구해낸 충무공〉께 바친 헌시다.
* 정인보鄭寅普(1893∽1950):일제항쟁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작가이며,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 저술가이다.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 도중에 사망하였었다. 본관은 동래,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수파守坡,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 한문학의 대가로서 서지학, 국사학, 국문학에 두루 관여했다. 조선역사 연구의 바탕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한민족은 곧 ‘얼’임을 강조한다. ‘국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그 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았다.
* 1946년 민족사에 어두운 국민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조선사연구》를 펴냈으며, 주자학자들의 공리공론과, 존화사상을 없애기 위해 유학의 개혁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