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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寧邊(영변)에 藥山(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해설> 1922년 [개벽]에 발표한 처녀작이다. 1925년 발간된 [진달래꽃]의 시집명(時集名)이 될 만큼 많은 사람에게 애송된 대표작의 하나로 주제는 이별이다.
총 4연, 각 연 3행의 짧은 서정시로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님의 가시는 길에 진달래꽃을 담뿍 뿌리겠다는 것이 그 간추린 내용이다. 그러나 지금 떠나가는 님은 다시 돌아올 기약조차 없다. 오직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그런 기대감을 갖고 보내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사람의 사무친 정(情)과 한(恨), 동양적인 체념과 운명관에서 빚어내는 아름답고 처절한 사람의 자기 희생적이고 이타적(利他的)인 인고(忍苦)의 마음이 이 이상 더 깊고 맵고 서럽게 표현될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라고 박두진(朴斗鎭)은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산유화(山有花)>와 함께 소월의 대표작의 하나로 우리 근대시사에서 기념비가 되고 있다. 혹자는 이 시에서 떠나는 님의 실제 모델을 제시하고도 있지만, 그 모델의 사실 여부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떠나는 님을 억지로 붙잡아 두지 못하고 보내는 한 여인의 심정을 이만큼 완벽하게 시적으로 형상화한 데 있다.
이런 이별의 보편적 정서는 <가시리>나 <서경별곡(西京別曲)> 등과 같은 고시가나 민요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의 해석에서 ‘나보기가 역겨워/가실때에는’의 반복구에 나타난 역설적(逆說的) 의미의 추구에만 집중되어 왔을 뿐이며, ‘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에 대해서는 유념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작자가 굳이 ‘영변에 약산’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의 해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변의 약산에 피어있는 진달래꽃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한다. 이 시의 제작 과정에서 이런 시적 배경을 설정한데 작자의 의도가 없었다면, 굳이 그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영변의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을 이끌어 왔을 까닭이 없다.
영변의 약산동대는 서관(西關)의 명승지로서, 그곳을 둘러싼 많은 전설과 민요가 전해지고 있다. 봄이 되면 온통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진달래가 꽃밭을 이루고 있는 약산, 그 서쪽으로 넓은 벌판이 펼쳐지고 구룡강(九龍江) 푸른 물이 산록(山麓)을 흐르고 있다. 옛날 어떤 수령(守領)의 외딸이 약산에 찾아왔다가 그 강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그 죽은 넋이 진달래가 되어 약산을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소월도 약산동대에 얽힌 이런 전설과 민요를 알고 있었고, 특히 수령의 죽은 외딸의 넋이 진달래꽃이 되었다는 전설을 의식하고 이 시를 썼을 것이라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마디로 이 시에서 소월이 떠나는 님을 붙잡지 않고 꽃을 뿌리며 보내겠다고 함으로써 보내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는 결코 울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슬픔과 원망이 사무쳐 있다는 것으로, 꽃을 뿌리며 ‘님’을 보냈듯이, 곧바로 되돌아올 것을 바라는 작자의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4연 3행으로 된 이 시의 첫 연에서, 먼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생각하고, 그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했다. 만나자 이별을 예상하고, 만류나 반발 대신 고이 보내 주겠다는 점에서 동양적인 체념이 엿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님의 태도와 관계없는 절대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다.
2 · 3연에서는 이런 태도를 발전시켜, 유명한 약산의 진달래를 꺾어다가 길에 뿌릴 터이니 그것을 밟고 떠나가라 한다. 이것은 이별의 슬픔을 축복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으로, 그만큼 그 곳에 담긴 비애가 커 보이기도 한다. 이런 비애는 끝 연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에서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눈물을 아니 흘리겠다는 것은 눈물을 흘리겠다는 것보다도 더한 비애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통으로 이어 받은 서글픈 정서를 소월이 솜씨있게 표현해 보인 작품이며, 그가 민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점에서 민요시인이었다면, 그 본보기가 될 만한 시(詩)다. (레몬맛젤리, 인터넷)
* <진달래꽃>은 전통적인 여성상이 잘 그려져 있다. 하지만 여성이 강세인 요즘의 세태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많은 분야에서 여성들이 사회의 중심에 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독일 총리가 그렇고, IMF 총재 그리고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여성 대통령 등등. 이제 어쩌면 성별로 그 역할을 고정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인지 모른다. 진정한 남녀 평등은 성별이 아니라 능력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따지는 것일테지만, 아직도 여전히 성차별 고정관념은 남아있고, 어떤 면에서는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그래도 '진달래꽃'의 서정성은 꼭 여성, 남성을 가리지 않더라도 감각적이고, 소유욕에 찌든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게 꽃을 놓아주는 자세, 슬퍼도 참고 보내는 마음,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국어혁신, 인터넷)
* 그러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화자는 여성일까, 남성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성일수도 있고, 남성일수도 있다. 시에서 현상적 화자나 청자의 성별이 확실히 드러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떻게 이해해도 좋다. 이 말은 시 <진달래꽃>의 화자를 여성으로 단정 지어 가르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여성적인 것이 곧 여성이 될 수는 없으며, 여성적이라는 것조차 그 기준이 매우 주관적이다. 서정시가 1인칭 독백문학임을 고려할 때, 시적 화자가 특정 퍼스나(persona)를 쓰고 있지 않는 한, 오히려 시인 자신과 동일시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박민영/문학평론가, '현대시 산책')
* 김소월論/김유중(서울대, 카톨릭대 강사)
한국 근대시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김소월이라는 이름 석자는 반드시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될 필수 코스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그의 시는 우리 주변에서 대중적인 폭넓은 이해와 사랑을 동시에 얻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역대 앙케이트 표본 조사 자료를 검토해 보면, 그는 거의 매번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하나로 손꼽혀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결과가 다소간 부풀어진 측면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월의 시는 제대로 읽어보지 못 했을망정,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그의 문명(文名)을 접해 본 사람들의 경우 본인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기 어색한 심사에서 '나의 애송시인=김소월'이라는 편리한 도식 위에 잠시 스스로를 맡겨 버린 경우도 결코 적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족시인 김소월 신화의 형성 과정에는 순전히 풍문만을 듣고 모여든 이와 같은 불특정 다수의 허수 독자들의 참여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도 사실이리라. 그렇다면 그의 시가 가진 마력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들을 그 답으로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시의 주조를 이루는 여성 편향성과 이별의 정한, 대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 좌절로 이어지는 낭만적 인식 구조 등은 우리 민족 본래의 기본 정조와 닿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널리 알려진 <진달래꽃>을 위시하여 <접동새>,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못잊어> 등 소월 시의 대부분은 어떤 메꾸어질 수 없는 간극,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그리움 같은 것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은 곧 그의 시가 우리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민중들의 삶과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일제 치하 망국민으로서 민족 전체가 겪어야만 했던 수난이나 설움과도 일정 부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변인(outsider)적인 인식과 태도는 일단 전통적인 것에 근거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시대사적인 측면에서 재해석할 때 더욱 그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될 수 있다. 그의 시가 당대는 물론 후대 독자들에게까지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로 바로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와 가락의 맥을 잇고 있으며, 동시에 근대적 발상 및 양식, 조어법에도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주로 자신의 출신 지역인 서도(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구비 전승되어 내려오는 민요와 잡가를 수집하여 이를 새롭게 재창작해 냄으로써 시대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시형(민요조 서정시)으로 발전시켰다.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 볼까요
창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친다
눈물은 새우잠의
팔굽 베개요
봄꿩은 잠이 없어
밤에 와 운다
두 동달이 베개는
어디 갔는고
언제는 둘이 자던 베개 머리에
죽자사자 언약도 하여 보았지 ― [원앙침] 일부
3음보의 기본 음보와 7.5조의 기본 음수율을 보이고 있는 이 시는 소월이 자주 사용하던 민요조 서정시의 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전술한 <원앙침> 외에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가는 길>, <산>, <팔베개 노래> 등의 작품은 전통적인 율조와 가락에 바탕을 두고 이를 새롭게 재창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재래의 민요가 갖는 운율 상의 정직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다양하고도 융통성 있는 변형과 파격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측면은 그로 하여금 스승인 안서 김억(金億)의 그늘에서 벗어나 우리 시사에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셋째, 그의 시는 그간 자주 사용되었던 한자어나 생경한 외래어의 사용을 가능한 한 배제하는 대신,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던 고유어, 토착어들을 발굴하여 이를 갈고 닦아 그것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펼쳐 보여 주고 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 [접동새] 일부
산새는 왜 우노, 시메 산골
영(嶺) 넘어 가려고 그래서 울지 ― [산] 일부
퍼르스럿한 달은, 성황당의
데군데군 헐어진 담 모도리에
우둑히 걸리었고, 바위 위의 가마귀 한 쌍, 바람에 나래를 펴라. ― [찬 저녁] 일부
위의 인용시들에 사용된 '불설워'(-<접동새>), '시메 산골'(-<산>), '데군데군', '담 모도리'(-<찬 저녁>) 등의 시어는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이 가진 아름다움을 가장 수준 높은 차원에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후대 시인인 정지용, 서정주 등과 더불어 한국 시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들과 함께 어떤 무엇보다도 소월 시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청소년층으로부터 중장년,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연령에 구애됨이 없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와 함께 널리 국민적 애송 시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용운, 윤동주 등의 시가 상대적으로 청소년 독자층에 치우친 것과는 구별되는 면이다. 우리 모두에게 소월이 진정한 국민 시인, 민족 시인으로 칭송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 김소월이 처음 시를 발표한 것은 1920년 『창조』라는 동인지를 통해서였다. 『창조』는 일본 유학생들이 모여서 만든 문학잡지였고,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글을 실었다. 비단 이 잡지뿐 아니라, 1920년 당시에 새로운 시를 쓰고 문학을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서양의 근대문학을 접한 이들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 김소월에게 시를 가르친 김억도 마찬가지다.
김소월의 많은 시들은 7·5조의 음수율(音數律)을 지키고 있다.
한 행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은 7·5조가 이 시에서는 두 행으로 처리되었다. 또 "영변에 약산" 부분은 글자수가 적어서, 천천히 읽게 된다. 「진달래꽃」은 「풀따기」와 같은 리듬을 지니는 것으로 보이지만, 행의 처리가 달라지고 글자수가 변형됨으로써 좀 더 자유로우면서도 감정을 충분히 실은 리듬감을 독자에게 전해 준다.
글자수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전통 시가의 율조와 감성을 느끼게 하는 시들 역시 많다. "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산유화」)나 "비가 온다 / 오누나 / 오는 비는 /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왕십리」), "갈래갈래 갈린 길 / 길이라도"(「길」) 같은 구절들은 반복되는 한국어가 얼마나 리드미컬하게 들리는지를 보여 준다. "잔디 / 잔디 / 금잔디 / 심심(深深) 산천에 붙는 불은 /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금잔디」)나 "접동 / 접동 / 아우래비 접동 /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 진두강 앞마을에 / 와서 웁니다"(「접동새」) 같은 구절은 시를 읽는 사람을 소박한 민요의 세계에 연결해 준다.
한편 그가 사용하는 일상적이고 쉬운 언어들은 운율의 친숙함을 한층 강하게 만든다. 그는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친근한 우리말로 시를 지었다. 진달래꽃은 한국의 강산에 지천으로 널린 꽃이지만, 시 속에서는 별로 호명된 적이 없었다. 옛 사람들은 이 꽃을 두견화(杜鵑花)라고 불렀다. 두견화는 중국 촉나라 황제의 전설과 관련된 이름으로, 한시에 자주 나타나는 단어였다. 김소월은 같은 꽃을 지칭하면서도 두견화 대신 진달래꽃이라는 고유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의 세계를 조선인의 현실에 밀착시켰다. 또 "엄마야 누나야" 같은 구절은 가장 일상적인 호칭을 시에 쓰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포근한 세계를 그려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구체적인 지명을 즐겨 쓰기도 했는데, "영변의 약산", "삭주 구성", "삼수갑산" 같은 어휘들은 고향에 대한 한국인 공통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시가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면서 민족적 보편 정서에 호소할 수 있게 된 데는 그 어휘의 힘이 크다. 앞 단락에 열거한 구절들만 보더라도,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초적인 어휘들만으로 율조가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소월은 소박하고 친숙한 언어들로 울림이 큰 리듬을 만들어 냈다. 그의 시에서 만나는 운율의 아름다움과 호소력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으며, 시의 고향이 음악임을 새삼 일깨워 준다. 한국 현대시의 음악적 형식은 그의 시집 『진달래꽃』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인이 된 후 김소월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그는 타고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정주·서울·일본·구성 등지를 방황하며 그 번민과 한스런 마음을 시로 썼다. 시집 『진달래꽃』의 시들은 스무 살 전후의 불행한 젊은이가 토해 낸 울음과 같은 것이었으며, 한국인의 서러움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소월 시는 전통 시가의 정서와 형식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현대 시의 물꼬를 텄으며, 이로써 이후 한국 서정시의 전범이 되었다. 시집 『진달래꽃』은 한국 서정시의 신화요,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달래꽃』을 출간한 이후 김소월은 서서히 시에서 멀어져 갔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는 등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며 생계를 도모했으나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결국 1934년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자살에 가깝게 삶을 마감했다. 시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돈벌이에도 실패한 자신에 대한 쓰라린 절망감이, 소월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소월의 시들은 몸과 마음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시인이 피워 낸 붉은 꽃들이다. 어딘가에 있을 그의 무덤 위엔, 봄마다 진달래꽃이 무성할지도 모른다. (발췌) (이남호/고려대 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김소월(金素月. 1902∼1934)>
* 1902년 평북 곽산군 구성면(龜城面) 출생. 본명은 정식(廷湜).
*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 스승인 김억(金億)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
* 1920년 동인지 [창조]에 <낭인의 봄>, <그리워>, <야(夜)의 우적(雨滴)>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 1922년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 [개벽]지에 <진달래꽃>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 유일한 단편소설 <함박눈>, 시<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먼 후일>, <개여울> 등을 <개벽>에 발표.
* 1923년 배재고보 졸업. 일본 도교상대(東京商大)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개벽]에 <임의노래>,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산(山)>등을 발표.
* 1924년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약. <산유화>등을 발표.
* 1925년 시집 <진달래꽃>(시 127편)을 매문사(賣文社)에서 출간.
* 1926년 소학교 교사를 거쳐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경영. <잠>등을 [조선문단]에 발표.
* 1934년 32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아편을 먹고 자살.
* 1939년 스승인 김억(金億)에 의해 유고 시집 [소월시초(素月詩抄)](시 80편, 시론 1편) 간행.
* 1981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김소월 시비, 시제는 '진달래꽃'>
<서울 성동구 행당동 왕십리 김소월 시비, 시제는 '왕십리'>
* 왕십리(往十里) /김소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진잘래꽃 초판본 한성도서>
*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문학작품 첫 문화재 등록
2012년 2월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근대시기에 출판된 문학 작품으로는 최초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2종 4점을 문화재로 등록한다.
이번에 등록되는 시집은 시인 김소월(金素月, 본명 廷湜, 1902.8.6~1934. 12.24)이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에서 발간한 초간본 시집으로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 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초혼’ 등 토속적인 정서를 절제된 가락 속에 담은 주옥같은 127작품이 수록돼 있다.
시집 ‘진달래꽃’은 총 판매소에 따라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과 중앙서림 총판본 두 가지 형태로 간행됐다. 본문내용과 판권지의 기록(간행시기, 발행자, 인쇄소, 발행소 등)은 일치하나, 한성 도서본은 표지에 꽃그림이 있고 본문에 편집오류로 보이는 오탈자가 여러 군데 발견됐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의 등록예고 기간(2010.9.13~10.12) 중 표지의 꽃그림 도안과 ‘꽃’의 표기가 1920년대에 찾기 어렵다는 일부 소장가의 의견이 제기됐다. 문화재청은 이를 검토하기 위해 문화재위원, 서지학자, 이의 제기자, 서적 판매자, 국어학자 등 관계전문가 1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검토회의를 개최해 그 결과를 토대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개최했다.
그 결과 1920년대 우리나라 문학작품의 출판물에도 화려한 표지와 ‘꽃’표기가 사용된 점이 확인돼 판권지의 간행시기 및 발행자 기록 등을 객관적인 자료로 인정했다. 동일원판을 사용해 출판한 시집 ‘진달래꽃’이 희소성이 있으면서 근대기 우리나라 문학작품의 출판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해 문화재로 등록하기로 했다. (윤용환/기자, 아주경제)
<인천시 중구 개장항 문화지구 한국근대문학관>
◇ 시집 [진달래꽃]과 김소월
김소월 시인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전통적 율조와 정서를 성공적으로 시화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ㆍ눈물ㆍ정한 등을 주제로 하며,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 독특하고 울림이 큰 표현을 이룩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 생활 동안 그는 154편의 시와 시론(詩論)인 <시혼(詩魂)>을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은 “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당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극찬하고 있다. <2013년 이프리북스 발간, 김소월제1시집 [진달래꽃]의 책 소개 글에서>
김소월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은 김소월을 추천하면서 ‘민요풍의 시인’으로 평가했다. 훗날 김소월은 이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드러낸다. 아마도 김소월 자신은 ‘민요풍’이라는 표현이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시의 운율을 ‘7ㆍ5조’라고 규정하며 민요풍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 ‘7ㆍ5조’는 우리 민요가 아니라 일본 민요의 운율 특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김소월은 서구 문화가 문학 영역에도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적 정서를 노래한 민족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가 이러한 민족적 정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여성 화자의 태도를 취하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서정적 작품을 창작한다. 사랑, 이별, 아픔, 그리움 등이 작품의 주된 정조였다. 그러나 1922년 ‘진달래꽃’ 발표 이후 그의 작품에도 사회적 자각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옷과 밥과 자유’, ‘밭고랑 위에서’ 등의 작품에서 참여적이고 남성적인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북한 문학에서는 이러한 후기 시들을 언급하며 해방 이전 조선 문단의 민족시인으로 칭송하기도 할 정도이다.
그러나 김소월의 이러한 변화는 그의 작품 창작에 오래도록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변화가 감지될 즈음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김소월[金素月](1902~1934)은 본명이 김정식[金廷湜]이지만, 소월이라는 호로 더 많이 알려진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다. 그는 가정 문제로 어려서 조부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이때 숙모인 계희영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토속적 민족문학의 자양분이 이루어지게 된다(1970년에 숙모 계희영이 《소월 선집》과 《내가 기른 소월》을 장문각에서 간행하기도 한다). 그 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소월의 인생에 있어서 큰 변화를 만드는 주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오산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에게서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의 이름 이니셜을 제목으로 하는 시도 짓는다. 또한 그를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시키는 문학적 스승 김억을 만나게도 된다.
광산업에 손댔다가 실패한 그는 처가인 구성군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열게 되지만, 이것이 그의 마지막 현실적 사업이었다. 이 사업마저도 실패하고, 생활인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며 술과 비탄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결국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음독자살한다. 여린 영혼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사회적 문제를 자각하게 되지만, 그 벽을 넘거나 부수기에 그의 영혼은 너무 여렸기 때문일 것이다. <2013년 이펍코리아 발간, 김소월시선집 [진달래꽃]의 책과 저자 소개 글에서>
♣ 진달래꽃 - (노래) 마야
http://www.youtube.com/watch?v=x2jYHSSA1n8&list=RDx2jYHSSA1n8&feature=share
♣ 진달래꽃 - (노래) 임정희
첫댓글 사실 소월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르다. 감정이 풍부한 천재 시인임은 분명하나, 그의 시는 현실의 아픔을 표현했을 뿐이며 희망이 없다. 결국 '유리창에 갗힌 호랑나비'처럼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살한 패배자(loser)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연을 하면 한편에서 용기가 생기는 것처럼 인생을 관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