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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기불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호잔
PATICCASAMUPPADA
DEPENDENT ORIGINATION
연기법
(의존적 발생의 법)
Talked by Buddhadasa Bhikkhu
Translated by Steve Schmidt from the Thai to the English
붓다다사 빅쿠 법문
스티브 슈미트에 의해 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
It was my original intention to write a detailed explanation for the study of the book Paticcasamuppada in the Words of the Buddha. But in the end, for reasons of health as well as other matters, I was not able to do so. As it happened, there was a talk I had given on another occassion which more or less fit just the purposes I wanted. That talk also appears in another book of this series, entitled Idappaccayata (The Law of Conditionality). It will prove quite useful for those studying Paticcasamuppada because, in fact, they are the very same thing. The only difference is that Idappaccayata is broader in scope. In any case, the student of Paticcasamuppada should use these explanatory notes as a starting point for his or her study.
'붓다의 말씀 속의 연기법'이란 책을 공부하기 위한 상세한 설명서를 쓰려고 했으나, 건강과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원하는 목적에 어느 정도 맞는 법문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법문 내용은 '이답빳짜야따(조건법)'라는 제목으로 이 시리즈의 다른 책에 나와 있습니다. '조건법(이답빳짜야따)'은 연기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사실 연기법과 조건법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건법이 연기법보다 더 범위가 넓습니다. 아무튼 연기법을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를 시작할 때 이 주석(조건법 설명서)을 이용해야 합니다.
The study of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or Paticcasamuppada is important and necessary for followers of the Buddha as is shown in the following passage from the Pali Scriptures:
“There are two doctrines (dhamma) well taught by the Exalted One who knows, the Awakened One who is free from all defilements and perfectly enlightened by Himself. All bhikkhus should study these two doctrines well and there should be no division or contention concerning them. In this way this Holy Life (religion) will long stand firm. Those two doctrines will be for the great benefit of all mankind, for the well being of the world, and for the advantage of great beings and human beings. What are those two doctrines? They are :
(1) Skillful understanding concerning the sense bases (ayatana-kusalata), and
(2) Skillful understanding concerning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paticcasamuppada-kusalata). [Sangiti Sutta, Digha-nikaya]"
연기법(의존적 발생의 법)에 대한 공부는 불자에게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팔리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고상한 아는 자이고 오염원에서 해방된 깨달은 자이며 스스로 완전히 깨달은 자께서 가르치신 두 가지 교의(담마)가 있다. 모든 수행승은 이 두 가지 교의를 잘 공부하여 이 교의와 관련한 불화나 언쟁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이 신성한 생활(종교)은 오래도록 견고하게 지속될 것이다. 이 두 가지 교의는 온 인류를 크게 이롭게 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위대한 존재(천신)와 인간을 유리하게 할 것이다. 이 두 교의는 무엇인가? 이 두 교의는,
(1) 감각 기초에 관한 능숙한 이해 (아야따나-꾸살라따)와,
(2) 연기법에 관한 능숙한 이해 (빠띠짜사뭅빠다-꾸살라따)이다." [상기띠 숫따, 디가 니까야]
This passage shows us that we should try to help each other to understand correctly Dependent Origination for our own benefit, for the benefit of the religion and for the well being of all great beings and humans. Most especially, we must strive for mutual understanding in order to eliminate divisive bickering amongst the followers of the Buddha, which leads to problems in putting Dependent Origination into practice. We must take advantage of any means which help us to arrive at that mutual understanding. This present exposition is not intended to establish complex argumentative conditions. Rather, this work is offered in the hope of helping to eliminate any contentiousness which may exist among teachers and students of Paticcasamuppada, as well as for any other groups of people who may be interested in studying this doctrine.
이 구절은 우리 자신의 이익과 종교의 이익과 모든 위대한 존재(천신)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연기법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서로 도우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자 사이의 불화를 일으키는 말다툼을 제거하기 위해 서로 함께 이해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불화를 일으키는 말다툼은 연기법을 실천하는 데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는 서로 함께 연기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는 데 모든 수단을 이용해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연기법을 설명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는) 논쟁 상황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설명은 이 교의를 공부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 뿐만 아니라 연기법에 대해 교사와 학생 사이에 있을 지도 모를 불화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서 행합니다.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is a deeply profound subject. It may properly be called the heart or the essence of Buddhism. And so it necessarily gives rise to problems which in turn become a danger to Buddhism in so far as the followers of the Buddha will derive no advantage from this essential teaching. When the Venerable Ananda said to the Buddha that he, Ananda, thought that Dependent Origination was an easy and a shallow matter, the Buddha replied:
"Ananda! Ananda! Don't say such a thing! Don't ever say such a thing! Paticcasamuppada is a profound teaching. Its characteristic feature is that it is profound. The various groups of sentient beings don't understand what we teach about this; they are not able to penetrate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and so their minds are befuddled just like a ball of twine which becomes all tangled up and knotted; just like a disorderly pile of tangled pieces of short threads; just like an untended thicket of grass or reeds which become all interwoven and entangled - just so are those beings ensnared and unable to free themselves from the wheel of existence, the conditions of suffering, the states of hell and ruin."
This passage shows us that Dependent Origination is not a play thing. Rather we must make a firm resolution and utilize our intellectual faculties to their fullest in the diligent study of Paticcasamuppada.
연기법은 매우 심오한 주제입니다. 연기법은 불교의 심장 또는 진수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심오하므로 연기법은 불자들이 이 불교의 진수에서 아무 이득도 얻을 수 없는 한, 이번에는 불교에 위험이 되는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붓다께 자신이 생각하건대, 연기법은 쉽고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한번이라도 그렇게 말하지 말라! 연기법은 심오한 가르침이다. 심오하다는 것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다. 다양한 유정체의 그룹에서는 우리가 가르치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연기법을 꿰뚫어 볼 수 없으므로, 얽히고 매듭지어진 실뭉치 같이, 엉킨 실조각들이 무더기로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것 같이, 돌보지 않은 풀과 갈대의 덤불이 혼합되어 얽혀 있는 것 같이, 그들의 마음은 바로 그와 같이 혼란되어 있다. 바로 그래서 그들은 존재의 바퀴, 고통의 조건, 비참하고 타락한 상태에 얽매여 해방될 수 없다."
이 말씀은, 연기법은 놀이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은 결심을 하고 지적 능력을 최대로 이용하여 연기법을 꾸준히 공부해야 합니다.
The average person, the ordinary householder, believes that he possesses a personal, lasting self. Such people know only the doctrine of eternalism: the doctrine that mind and/or body eternal (sassata-ditthi). These people will find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too profound to understand easily. For such people, Paticcasamuppada becomes a matter of deeply convoluted philosophy that gets all tangled up like the ball of twine mentioned in the Sutta. These people will spend much effort in debate and dispute just as with the blind men who could come to no agreement concerning what an elephant was like because each had felt only a single different part of the elephant.
일반 재가자인 보통 사람은 개인적이고 영속하는 자아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 및/또는 몸이 영원하다는 견해(사싸따-딧티)인 영원주의의 견해만 압니다. 이 사람들은 연기법이 너무나 심오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연기법은 경전에서 언급된 실뭉치 같이 완전히 얽히게 된 깊고 복잡한 철학적 문제가 됩니다. 이 사람들은 코끼리의 서로 다른 부분을 만져 보았기 때문에 코끼리가 어떠한 지에 대해 견해가 일치할 수 없는 여러 장님과 같이 토론과 언쟁에 많을 노력을 하게 됩니다.
For the arahat, however, a fully enlightened person, Dependent Origination becomes like second nature or plain science, similar to something which can be casually examined while resting in the palm of one's hand. And this knowledge of the enlightened person does not depend on a knowledge of names or words. What this means is that the arahat, or enlightened person, knows things so well that he doesn't grasp at, cling to or become attached to anything at all. He has no craving or desire (tanha), or attachment (upadana), no matter what kind of emotions beset him, because the enlightened person has completely perfected mindfulness. Such a person can completely extinguish suffering by following the order of extinction of Dependent Origination. But it is not necessary that an enlighted person know the names of the eleven conditions of Dependent Origination. He may not be able to teach anyone about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in detail or may not even be able to say anything at all about it.
그러나 완전히 깨달은 아라한에게는, 연기법은 손바닥에 놓여 자유롭게 수시로 검토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습관 또는 일상과학과 같이 됩니다. 깨달은 사람의 이 앎은 명칭이나 말로 아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인 아라한은 사물을 잘 알므로 어떤 것에도 전혀 애착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어떤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전적으로 완전한 마음챙김을 유지하므로 어떤 종류의 감정이 몰려 오더라도 갈망(땅하)하거나 집착(우빠다나)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연기법에서 고(둑카)가 소멸되는 순서에 따라 고를 완전히 소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에게는 연기법의 11가지 상태의 명칭을 아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연기법에 대해 누군가에게 상세히 가르칠 수 없을 수도 있고 (연기법에 대해) 전혀 어떤 것 조차도 말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This is what is meant when it is said that Paticcasamuppada is a deeply profound matter. Dependent Origination is so profound that even the Perfectly Enlightened Buddha had to use his full intellectual faculties to discover it and to set out a teaching suitable to all people. Nonetheless, it is still a difficult matter to understand, which is why the Buddha, just after his enlightenment, was at first inclined not to teach it to anyone at all. This was so because the Buddha saw that it might be a wasted effort - there would be so few capable of understanding such a difficult teaching. But, finally, the strength of his compassion compelled the Buddha to bear with the difficult task of teaching this deeply profound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He felt compassion for those few beings in the world who would be able to understand this teaching. We must appreciate the great problem which faced the Buddha in trying to explain this teaching, which is not easily understood by ordinary people.
이것이, '연기법은 깊고 심오한 문제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너무 심오하여 완전히 깨달은 붓다께서도 그것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가르침으로 상술하여 보여주는 데 모든 지적 능력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법은 아직 이해하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붓다께서 깨달은 바로 후, 처음에 어떤 누구에게도 전혀 가르치시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같이 어려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헛된 노력만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붓다의 측은지심은 이 깊고 심오한 연기법의 교의를 가르치는 어려운 일을 떠 맡도록 했습니다. 붓다께서는 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소수의 존재를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 가르침을 설명하는 노력에서 붓다께서 봉착하셨던 큰 어려움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One profound fact concerning this matter is that, in the difficult task of making his teaching known, the Buddha had to use two languages at the same time. He spoke in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in order to teach morals to people still befuddled with the idea of eternalism - those who feel that they are selves, that they possess things. Such people feel this way to the point that they habitually cling to these ideas and become attached to them. But the Buddha also spoke in the language of ultimate truth in order to teach those who had only a little dust in their eyes so that they could come to an understanding of absolute reality (paramattha-dhamma). The teaching of absolute reality was designed to free people from their long held and cherished theory of eternalism. So it is that there are these two kinds of language.
이 문제와 관련한 한 가지 뜻깊은 사실은, 붓다께서는 가르침을 펴는 어려운 일을 하실 때 동시에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영원주의'의 개념에 푹 빠져 있는 사람, 즉 자신이 자아이고 사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도덕률을 가르치시기 위해 상대적 진리의 언어(일상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습관적으로 이 개념(영원주의)에 집착하는 사고방식으로 느끼고 이것(도덕률)에 애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또한 오염이 덜 된 사람을 가르쳐 궁극적 진리(빠라마타-담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하도록 궁극적 진리의 언어(담마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 진리의 가르침은 오랫동안 영원주의의 이론을 붙들고 소중히 간직해온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 뜻을 두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두 종류의 언어가 있습니다.
As far as Dependent Origination is concerned, it is a matter of ultimate truth and must be spoken of in terms of the language of ultimate truth. It is the complete opposite of morality. How can it be, then, that Dependent Origination can be spoken about by using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which is used in talking about morality? If the common language is used, then it is not possible to speak about Dependent Origination. And if the language of ultimate truth is used, listeners who lack right understanding will interpret everything in terms of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and so not understand anything at all, or they will understand incorrectly. They may understand the exact opposite of what is meant. This is the source of the difficulty in teaching about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Which at first led the Buddha to be disinclined to teach what he had discovered in his enlightenment. Even after the Buddha decided to teach, there was still misunderstanding, as in the case of Bhikkhu Sati, the fisherman's son (see below). And there is still misunderstanding among all of us at present. In teaching, speaking about and discussing Paticcasamuppada, we tend to do so with misunderstanding. Having been taught, we are not able to put it into practice, or we practice more and more incorredtly as we go along. So it is that Dependent Origination is a difficult topic to teach.
연기법에 관해서는, 궁극적 진리의 문제이므로 당연히 궁극적 진리의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도덕률의 말씀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도덕률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상대적 진리의 언어(일상 언어)로 어떻게 연기법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면, 연기법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 진리의 언어(담마 언어)를 사용한다면, 올바른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모든 것을 상대적 진리의 언어(일상 언어)로 해석하여 (연기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릇되게 이해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연기법이) 의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해할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을 가르칠 때 어려움의 근거이고, 붓다께서 깨달으신 것을 처음에 가르치시기를 주저하시게 한 것입니다. 붓다께서 (담마를) 가르치시기로 작정하신 후에도, 어부의 아들인 사띠 수행승의 경우처럼 여전히 그릇된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 중에는 여전히 그릇된 이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릇된 이해로 연기법을 가르치고 말하고 논의하기 일쑤입니다. 그릇된 이해로 가르쳐졌기 때문에, 연기법을 실천(수행)에 적용할 수 없거나, 이에 따른 실천은 더욱 더 그릇된 실천으로 이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가르치기가 (가장) 어려운 담마입니다.
When teaching morality, it is necessary to speak as if sentient beings existed, as if persons, selves, and even the Ththagata, existed. It is even necessary, in teaching morality, to go so far as to teach that people should make merit, so that when they die they will receive the results of that merit. But when teaching the ultimate truth, the Buddha spoke as if sentient beings, persons, even the Tathagata himself, did not exist. There are only those interdependent events which arise for a moment and then pass away. Each of those events is called paticca-samuppanna-dhamma (events which arise by reason of the law of conditionality) and are called Paticcasamuppada when they are connected together in a chain or string of events. There is no way to say "who" or "self" in any of those moments, even the present one, so there is no one born and no one to die and receive the results of past deeds (karma), as in the case of the theory of eternalism. Moreover, it is not a matter of dying and disappearing altogether, as in the theory of annihilationism (uccheda-ditthi), because there is no one to be annihilated after this moment. Being here now is Dependent Origination of the middle way of ultimate truth, and it goes together with the noble eightfold path - the middle way which can be used even in matters of morality.
도덕률을 가르칠 때는 유정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 자아, 그리고 따타가따(붓다)도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도덕률의 가르침에서 사람들에게 공덕을 짓도록 가르치고, 죽을 때 공덕의 결과를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한에 있어서, (이러한 말은)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 진리를 가르칠 때, 붓다께서는 유정체, 사람, 그리고 따타가따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한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상호 의존적 사건들만 있습니다. 그 사건들의 각각을 '빠띠짜-사뭅빠다-담마'(인과 관계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라고 부르며, 그것들이 함께 연결되어 사건의 고리 또는 끈이 될 때 '빠띠짜사뭅빠다'(연기 또는 연기법)이라 부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물론이고 어떤 순간에도 '누구' 또는 '자아'라고 부를 만한 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자도 없고 죽는 자도 없고 과거 행위(깜마)의 결과를 받는 자도 없습니다. 이는 영원주의가 아닙니다. 또한, 모두 완전히 죽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절멸주의(우쩨다-딧티)도 아닙니다. 이 순간 후에 절멸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궁극적 진리로서 중도인 연기(법)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연기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팔정도)과 함께 하며, 도덕률의 면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중도입니다.
Usually, ordinary people cling to the way of morality in order to have minds that are peaceful because of the goodness that they do. This state can last for as long as the causes and conditions of their goodness do not change. But when those causes and conditions change, or manifest their uncertainty and selflessness (anatta) and become dissatisfactory (dukkha), because clinging has arisen, then a knowledge of morality alone will not be able to serve as a refuge. And so it becomes necessary to turn to ultimate truth, such as Dependent Origination, in order to alleviate the feeling of dissatisfaction which becomes greater and greater. That is, it is necessary to have a mind which is above the idea of having a self or of anything belonging to a self, a mind which is even above the ideas of good and bad, merit and demerit, pleasure and pain, In this way it is possible to eliminate completely dissatisfaction or suffering. Teaching Paticcasamuppada in such a way that there is a self persisting over a series of lives is contrary to the principle of Dependent Origination and contrary to the principles of the Buddha's teaching, which teaches people to eliminate the feeling of self, to be completely above the feeling of being a self. Therefore Dependent Origination is in no way conderned with morality, which must depend upon a theory of eternalism, a theory that depends upon the existence of a self.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은 선행으로 마음이 평화롭도록 도덕률에 집착합니다. 이 평화로운 상태는 선행의 원인과 조건이 변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과 조건이 변하거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자아가 없으며 불만족하다는 것이 드러나면 집착이 일어나므로 도덕률을 알고 지키는 것만으로는 피난처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점 더 커지는 불만족감을 경감하기 위해 연기법 같은 궁극적 진리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즉, 자아가 있다는 개념이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 있다는 개념을 초월하는 마음, 선과 악, 장점과 단점,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한 개념을 초월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불만족과 괴로움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연속되는 삶에 영속하는 자아가 있다는 식으로 연기법을 가르치는 것은 연기법의 원리에 상반되고 붓다의 가르침에 상반됩니다. 붓다께서는 사람들이 자아의 느낌을 제거하고 자아가 되는 느낌을 완전히 초월하는 상태가 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도덕률과 관련된 점이 없습니다. 도덕률은 반드시 영원주의와 자아의 존재를 기초로 합니다.
In any case, we can say that there may be two kinds of Paticcasamuppada. The first kind is inflated or incorrectly explained so that it cannot be practiced. Such an incorrectly explained theory has been taught for a thousand years. The second or correctly explained kind of Paticcasmuppada is explained according to the Buddha's intentions. It can be practiced here and now. Results can be had here and now. This second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teaches us to be careful whenever there is contact between the senses and their objects. Feeling must not be allowed to brew up or give rise to craving. Indeed, such practice is being done in many places without calling it ""Paticcasamuppada"" and the results are always satisfying. People interested in this matter, however, must take care to follow the correct version of the Buddha's Dependent Origination since there are these two versions mixed up with each other. The real Dependent Origination of the Buddha is not annihilationism, which, as people who like to argue are quick to point out, leads people to not doing good, not accepting responsibility or not loving their country. Furthermore, the real Dependent Origination of the Buddha is not eternalism, which causes people to become obsessed with the self or country or anything which is seen as "me" or "mine."
아무튼, 두 종류의 연기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종류는 부풀려지고 그릇되게 설명되어 실천할 수 없는 연기법입니다. 그릇되게 설명된 연기법을 1000년 이상 가르쳐 왔습니다. 두 번째 종류는 바르게 설명되어 붓다께서 의도하신 바와 일치하는 연기법입니다. 바르게 설명된 연기법은 지금 여기에서 실천할 수 있으며 그 결과를 지금 여기에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종류의 연기법은 감각 기관과 대상이 접촉할 때마다 주의깊게 알아차리라고 가르칩니다. 느낌이 갈애로 진전되어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실로 이러한 실천(수행)은 '연기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많은 곳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그 결과는 항상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붓다의 연기법이 바르게 설명된 것에 따르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두 가지로 설명된 연기법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 원래 가르치신 연기법은 절멸주의도 아니고 영원주의도 아닙니다. 논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연기법 중에서) 바로 지적하는 절멸주의는 선행도 하지 않고 책임감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도 않게 합니다. 영원주의는 사람들이 '자아'나 '나라' 또는 '나' 또는 '내 것'으로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게 합니다.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is not simply a matter of inflated study and memorizing as most people tend to say. Rather, it must be a matter of skillful practice: mindfulness must be present to control feelings when sence contact arises. Craving and attachment must not be allowed to arise. And in this practice, it is not necessary to use the word "Paticcasamuppada," which is merely a very technical term.
연기법은 대부분의 사람이 흔히 많이 공부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능숙한 실천적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감각 접촉이 일어날 때 느낌을 통제하기 위해 마음챙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실천(수행)에서 '연기법'이란 말을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말은 단지 기교적인 용어입니다.
One thing that we must help each other to be careful about is not to explain Dependent Origination, the heart of Buddhism, in terms of animism, which teaches that there is a mind or a spirit or a soul or some such thing which is like a ghost - a "self" that is born or is in the body all the time after birth. In this age of atoms, space and pingpong, there are university students and educated westerners who would laugh at such a concept of the "ghost in the machine." Let us rigorously help save the face of Thai Buddhists. Don't take the teachings or morality in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the language of eternalism, and mix it with the teaching of ultimate truth, Dependent Origination, which uses the language of the highest right views. The practice of Dependent Origination is the middle way of ultimate truth. In the sutta, it is said that the highest right view, supramundane right view, is the view that is neither eternalism nor annihilationism, which can be had by the power of understanding Dependent Origination. Dependent Origination is in the middle between the ideas of having a self and the total lack of self. It has its own principle: "Because there is this, there is that; because this is not, that is not." It is this principle which makes Buddhism neither eternalism nor annihilationnism. Look carefully. Don't teach a new Buddhist theory of Paticcasamuppada. Don't teach Hinduism or Brahmanism. For eternalists there can be no such thing as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because it is the exact opposite of their theory. To teach Dependent Origination in terms of eternalism is to destroy Dependent Origination. This is what we must be careful about.
우리는 (연기법을 이해하도록) 서로 도와야 하지만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을 애니미즘의 면으로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니미즘은 영속하는 마음이나 정신 또는 영혼이나 유령 같은 것, 즉 (다시) 태어나거나 태어나서 항상 몸에 거주하는 자아가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원자 시대, 우주 시대 그리고 주고받는 (협력의) 시대에, 대학생이나 교육받은 서양인들에게는 '움직이는 것에는 유령(영혼)이 있다'는 그러한 개념은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태국 불교에서 외형을 제외하고는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엄격하게 취급하여 서로 도웁시다. 영원주의 언어인 상대적 진리의 언어로 설명하는 도덕률의 가르침을, 고차원적 바른 견해의 언어를 사용하는 연기법이라는 궁극적 진리의 가르침과 섞지 마십시오. 연기법에 따라 실천하는 길은 궁극적 진리의 중도입니다. 경(숫따)에서는, 고차원적 바른 견해 또는 초세속적 바른 견해는 영원주의도 아니고 절멸주의도 아닌 견해이며 이 견해는 연기법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을 때 생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연기법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와 자아가 전혀 없다는 견해의 중간을 취합니다. 연기법에는,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다.(역주: 빠알리 원 경전에 따라 '이것'으로 번역)"는 그 자체의 원리가 있습니다. 불교를 영원주의도 아니고 절멸주의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 원리 때문입니다. 주의깊게 바라보십시오. 연기법에 대한 새로운 불교 이론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힌두이즘이나 브라마니즘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영원주의자에게는 연기법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연기법은 영원주의 이론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을 영원주의의 면으로 가르치는 것은 연기법을 파손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If we examine the original Pali Scriptures, the teachings as given by the Buddha himself, we will see that they are clearly divided into matters of morality, for those still attached to an eternalist view, and matters of ultimate truth, which are intended to eliminate both the eternalist and the annihilationist points of view. Later on, during the time that the commentaries were being composed, there arose a widespread tendency to explain matters of ultimate truth in terms of the eternalist theory, including such matters as Paticcasamuppada. Whenever the opportunity arose, explanations were given in terms of the same person who died. Sometimes everything was explained in terms of gross materialism. For example, hell was explained as a place beneath the ground and a place that a person went to only after death. No reference was made to the hell that arises in the flow of Dependent Origination, a more fearful kind of hell which is present in this life. If any reference was made to hell as arising from feeling according to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it was usually located under the earth after death.
붓다께서 직접 설하신 가르침을 담고 있는 초기 빠알리 경전을 조사해 보면, 가르침은 두 부분으로 확연히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영원주의의 견해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위한 도덕률의 가르침과, 영원주의와 절멸주의의 견해를 모두 없애기 위한 궁극적 진리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주석서가 편찬되던 후대로 오면서 연기법 같은 그런 사항을 포함하여 궁극적 진리에 관한 사항을 영원주의의 견지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널리 펴졌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일한 사람이 죽는 (그리고 태어나는) 견지로 설명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완전히 물질주의의 견지로 설명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지옥은 지하에 있는 곳으로서 사람이 죽은 후에만 가는 곳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연기법에 따라 일어나는 지옥, 즉 이 삶에서 겪는 더욱 두려운 지옥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습니다. 연기법에 따라 느낌에서 일어나는 지옥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항상 죽은 후에 지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In studying Dependent Origination, it is necessary to take the original Pali Scriptures as a foundation. Don't surrender to the commentaries with your eyes and ears closed. Don't submit yourself one hundred persent to later works, such as the Visuddhimagga. Indeed, it is believed that the author of the Viduddhimagga is the same person who collected all the commentaries together, so that total blind acceptance of the commentaries will allow only one voice to be heard, giving rise to an intellectual monopoly. We must guard our rights and use them in a way consistent with the advice given by the buddha in the Kalama Sutta and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mahapadesa as given in the Mahaparinibbana Sutta. According to this principle of mahapadesa, anything which in not in accord with the major part of the Dhamma-Vinaya (the teaching and the discipline) should be regarded as heard incorrectly, remembered incorrectly, explained incorrectly, or taught incorrectly, as the case may be. In this way we will be protected against later works which slip into eternalism. With the principle of mahapadesa in hand, we can choose what is correct from the large pile of rubbish which has been smoldering in those works. And we will find a lot that is correct. It's not that there is nothing of value at all in the commentaries, but that we must be rigorous in choosing what to accept, using the Buddha's own guidelines to separate out what is not correct. A recent scholar, Somdet Phra Maha Samanachao Krom Phraya Vachira Nyanna Varorot, adivised that we should investigate carefully, as mentioned above, even the carefully memorized Pali dissertations. I have been a faithful disciple of his all along. As far as Paticcasamuppada is concerned, there is weighty evidence to dismiss both the theory of eternalism and the theory of annihilationism. To teach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with reference to one individual spanning three lives cannot be accepted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mahapadesa.
연기법을 공부할 때에는 초기 빠알리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눈과 귀를 막은 채로 주석서에 (모든 것을) 내맡기지 마십시오. 청정도론 같은 후대의 저작물에 자신을 완전히 따르게 하지 마십시오. 청정도론의 저자는 모든 주석서를 집대성한 사람과 동일하다고 믿어지므로 주석서를 맹목적으로 받아 들인다는 것은 단지 한 목소리만 듣게 하여 지적인 독점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권익을 지켜야 하며, (그러므로) 깔라마 경에 언급된 충고에 따르고 마하빠리닙바나 숫따(대반열반경)에 언급된 마하빠데사의 원칙에 따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마하빠데사의 원칙에 의하면, 담마와 위나야(가르침과 규율)의 대부분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경우에 따라, 잘못 듣고, 잘못 기억되고, 잘못 설명되고, 잘못 가르쳐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여, 영원주의에 물든 후대의 저작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마하빠데사의 원칙을 지닌다면, 이런 저작물의 연기나는 쓰레기 더미에서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올바른 것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석서 전체가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르지 않은 것을 분리하여 버리기 위해 붓다께서 말씀하신 (안내) 지침을 사용하여, 수용할 것(올바른 것)을 선택하는 데 엄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학자인 '솜데트 프라 마하 사마나차오 크롬 프라야 바찌라 냔나 바로로트'는 신중하게 기억되는 빠알리(원)문 조차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의깊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권고하였습니다. 나는 줄곧 이 분의 충실한 제자입니다. 연기법에 관한 한, (경전에는) 영원주의와 절멸주의의 양자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 유력한 증거가 있습니다. 한 개체가 3생에 걸쳐 관련되는 것으로 연기법을 가르치는 것은 마하빠데사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The following principles are concerned with Dependent Origination:
아래 원리는 연기법에 관한 것입니다.
(1). Every time there is sense contact without wisdom concerning liberation, there will be becoming (bhava) and birth (jati). To put it another way: when there is only ignorance present at the point of sense contact,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is put into motion.
(1). (오염원에서) 해방되는 지혜가 없이 감각 접촉이 일어날 때는 항상 '되어짐(바와)'과 '탄생(자띠)'이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감각 접촉이 있을 때 무지가 나타나면 연기법이 작용합니다.
(2). In the language of Paticcasamuppada, the words "individual", "self", "we", and "they" do not appear. There in no "person" who has suffering or extinguishes suffering or flows about in the whirlpool of rebirth, as Bhikkhu Sati, the fisherman's son, held.
(2). 연기법의 언어에서, '개인', '자아', '우리', 그리고 '그들'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어부의 아들인 수행승 사띠가 품고 있는 것과 같은, 괴로움을 받거나 괴로움을 소멸하거나 재탄생의 소용돌이에서 떠도는 사람은 없습니다.
(3). In the language of Paticcasamuppada, the word "happiness" does not appear. Only "suffering' and the "complete cessation or extinction of suffering" appear. This is so because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does not intend to talk about happiness, which is a corner stone of eternalism. In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however, it can be accepted that the absence of suffering is happiness. But this is only useful in the teaching of morality, such as when it is said that "Nibbana is the highest happiness."
(3). 연기법의 언어에서, '행복'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완전한 그침 또는 소멸'이라는 말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연기법은 영원주의의 기초가 되는 행복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진리의 언어로 말할 때 '괴로움이 없으면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닙바나는 최상의 행복이다.'라고 말 할 때처럼 도덕률의 가르침에서 유용할 뿐입니다.
(4). The kind of rebirth consciousness (patisandhi vinnana) which is a self does not appear in the language of Paticcasamuppada. therefore, the word "consciousness" (vinnana) in Dependent Origination is taken to refer to the six kinds of consciousness which arise with sense contact. But if you try to pull a fast one and call this sixfold consciousness "rebirth consciousness", it can also be accepted as part of the sixfold sense base analysis which gives rise to mentality/materiality, the six sense bases, contact, feeling, becoming and birth on to the end of the process of Paticcasamuppada. But the Buddha never called anything rebirth consciousness and he never explained it as such because it was his intention that we view consciousness in the usual way. The word "rebirth consciousness" only came to be used in later works and it re-introduces the theory of eternalism in an indirect way. This is a corruption of Buddhism which will nibble away at Buddhism until it is gone. We have six kinds of consciousness as usually understood and we have Dependent Origination for which it is not at all necessary to bring in the word "rebirth consciousness"
(4). 연기법의 언어에서 자아인 재생의식(빠띠산디 윈냐나) 같은 종류는 없습니다. 연기법에서 말하는 '의식(윈냐나)'은 감각 접촉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6가지 종류의 의식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속이고자 하여 이 6가지 의식을 '재생의식'이라고 한다면, 정신/물질, 6가지 감각 기초, 접촉, 느낌, 되어짐과 탄생이 순차적으로 일어나 연기법 진행과정의 끝에 이르는 6가지 감각 기초 분석방식의 일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붓다께서는 그 어떤 것도 '재생의식'이라고 하지 않으셨고 그와 같이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붓다께서는 우리가 의식을 통상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재생의식'이라는 말은 후대의 저술에서만 사용되었고 이 말은 간접적으로 영원주의 사상을 다시 도입합니다. 이것은 불교를 부패시키고 불교가 없어질 때까지 갉아 먹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6가지 종류의 의식이 있고 의존적 발생(연기)이 있습니다. '재생의식'이란 말을 도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5). In the process of Dependent Origination there are only paticca - samuppanna - dhamma, that is events which depend on other events to arise, and which arise for just a moment in order to condition the arising of a further event. This symptom of conditioning is called Dependent Origination. Don't think in terms of self. Don't be an eternalist. And don't think in terms of the opposite of self so that there is nothing at all, which annihilationism. Rather, stay in the middle, the middle way, where there are only events which arise because of previous conditions.
(5). 연기(의존적 발생)의 진행 과정에서는 '빠띠짜 사뭅빤나 담마'만 있습니다. '빠띠짜 사뭅빤나 담마'는 다른 사건(또는 사물)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사건(또는 사물)이고, 또 다른 사건(또는 사물)을 일으키는 조건이 되도록 잠깐 동안 일어나는 사건(또는 사물)입니다. 이 조건화의 자국(또는 징후)을 연기(의존적 발생)라고 합니다. 자아의 면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원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아의 정반대로 생각하여 '어떤 것도 전혀 없다'는 절멸주의가 되게 하지도 마십시오. 이 영원주의와 절멸주의를 벗어나서, 여러가지 조건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또는 사물)만 있다는 중간 견해, 즉 중도에 머무르십시오.
(6). In terms of karma, Paticcasamuppada seeks to show karma which is neither black nor white, which is neither the karma of evil or good deeds. This is possible because paticcasamuppada is the end of both black and white karma. This is done by seeing all three, merit, demerit and imperturbability (anenja), as being characterized by suffering. It is necessary to be above all three of these in order to completely extinguish suffering. In this way there is no place for attachment to arise in the sense of a self or a theory of eternalism.
(6). 까르마(깜마, 업)의 면으로 볼 때, 연기법이 추구하여 나타내는 업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업, 즉 악업도 아니고 선업도 아닙니다. 연기법은 악업과 선업을 끝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합니다. 유익하거나 해롭거나 흔들림 없는 3가지 행위를 모두 괴로움의 특징이 있는 것으로 봄으로써 선업과 악업을 모두 끝낼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이 3가지 행위를 모두 초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초월)방식에서는 집착이 자아 또는 영원주의 사상의 느낌으로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7). A principle of Buddhism is that of sanditthiko: here and now, the actual present reality. Interpreting Paticcasamuppada in such a way that one turn of its wheel covers three lives (according to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is not in keeping with this principle. Each and every one of the eleven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 must always be in the present for it to be Dependent Origination as taught by the Buddha.
(7). 불교의 원리는 산디티꼬, 즉 지금 여기, 현재의 실재 그것입니다. 연기법을 (상대적 진리의 언어에 따라) 3생에 걸치는 바퀴의 한 회전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불교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연기법에서 11 연결고리의 각각은 붓다께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의존적으로 발생하여 항상 현재에 있어야 합니다.
(8). The various Suttas which discuss Paticcasamuppada talk about it in many different ways. there is, for example,
(a) the direct order (anuloma) from ignorance to suffering;
(b) the reverse order (patiloma) from suffering to ignorance;
(c) the way of cessation which may be done in both the forward and the reverse orders;
(d) the way starting with sensation and then giving rise to consciousness, contact, and feeling. This is done without mentioning ignorance;
(e) the way starting with feeling and ending with suffering;
(f) finally, there is perhaps the strangest way of mixing the way of arising with the way of cessation at the same time. That is, it is explained that ignorance gives rise to mental formations, consciousness, mentality/materiality, up to craving, and then it changes to the cessation of craving, attachment, up to the cessation of suffering. The implication seems to be that, even if Dependent Origination has gone up to the point of craving, it is still possible that mindfulness will arise to stop the arising of clinging and, strange to say, "flip over" into the stream of the cessation of suffering.
If we take all the discourses that deal with Dependent Origination and examine them together, it will be clearly seen that it is not at all necessary for Dependent Origination to cover three lifetimes (according to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8). 여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연기법을 다양하게 다른 방식으로 언급합니다.
(a) 무지에서 괴로움까지 순방향으로 일어남(아누로마)을 언급합니다.
(b) 괴로움에서 무지까지 역방향으로 일어남(빠띠로마)을 언급합니다.
(c)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그침을 언급합니다.
(d) 감각에서 시작하여 의식, 접촉 및 느낌이 순차적으로 일어남을 언급합니다. 이 방식은 무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e) 느낌에서 시작하여 괴로움으로 끝나는 일어남을 언급합니다.
(f) 마지막으로, 일어남과 그침을 섞어 동시에 언급하는 매우 기묘한 방식이 있습니다. 즉, 무지에서 정신적 형성, 의식, 정신/물질, 그리고 갈애(갈망)까지 순차적으로 일어난 후, 갈애의 그침으로 바뀌어 집착의 그침, 그리고 괴로움의 그침에 이르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이 방식이 의미하는 바는, 연기가 갈애까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마음챙김이 일어나 집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기묘하게도 괴로움이 그치는 길로 뛰어 넘어 갈 수 있는 듯합니다.
연기를 다루는 모든 설명을 종합하여 검토해 보면, 연기는 (상대적 진리의 언어에 따라) 3생에 걸쳐 있는 것으로 설명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9). Paticcasamuppada is a momentary and sudden (khanika-vassa) matter, not an eternal matter. Therefore, the word jati, to be born, must refer to the birth in the moment of one revolution of Dependent Origination in the daily life of ordinary people, which is to say when mindfulness is absent and when there is sense contact as explained in point 1 above, It's easy to know: when greed, anger, or delusion arise, then the self is born in one "life" already. If anyone still likes to talk in terms of "this life" and "the next life", that's all right, If "life" is understood in this momentary sense. Such language is in accord with reality and the principle of being in the present. Moreover, it is more useful than talking in terms of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i.e., each birth means issuing forth from the mother's womb) which is not the language of Paticcasamuppada which reflects the momentary. To use the word "birth" as used in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will be an obstacle to understanding. We should preserve that sense of "next life" which is within our reach and which can be dealt with as we want. Such a "next life" is better than one which we can't locate or see.
(9). 연기법은 영원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순간(카니까-와싸)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남을 뜻하는 '자띠'는 보통사람의 일상생활에서 연기 과정이 한 바퀴 이루어지는 순간에 태어남을 지칭합니다. 이 연기 과정은 위 1번 항목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음 챙김이 없이 감각 접촉이 있을 때 진행됩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일어날 때, 벌써 자아가 한 생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삶'을 이와 같이 순간적인 면으로 이해할 때는 '현생'이나 '내생'으로 여전히 (습관적으로) 말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이런 (순간적 의미의) 말은 실재와 부합되고 현재의 존재 원리와 일치합니다. 또한 순간을 나타내는 연기법의 언어가 아닌 상대적 진리의 언어(즉, 각 태어남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것을 의미) 면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유익합니다. 태어남(탄생)이라는 말은 상대적 진리의 언어에서 쓰는 것처럼 사용한다면 (연기법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생'을, 달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는 의미로 유지(사용)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내생'은, 찾아낼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10). Mere talking about Paticcasamuppada is philosophy in its worst sense. It is not necessary and it doesn't have a lot of value in itself. True Dependent Origination is the practice of not allowing suffering to arise by establishing awareness at the six sense doors when there is sense contact. This is done by bringing the faculties of mental development to bear on the six sense doors so that the taints (asava) do not arise. this is Dependent Origination perfected in the order of cessation. Even if this process were called by a different name, it would still be the same thing. This kind of Paticcasamuppada is called the Right Way (samma-patipada).
(10). 단순히 연기법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몹시 나쁜 의미에서 철학입니다. 이러한 철학은 필요 없으며 그 자체로는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참된 연기법은 감각 접촉이 있을 때 6가지 감각의 문에서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실천은 '정신 계발의 기능(믿음, 기력, 마음챙김, 집중, 지혜)'을 6가지 감각의 문으로 돌려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침'의 상태로 언급하는 완전한 연기법입니다. 이 과정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하더라도 동일한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연기법을 '바른 길(삼마 빠띠빠다)'이라 합니다.
All of the above are principles to use in testing to see what the real Dependent Origination is. Briefly put, the real Paticcasamuppada is a practical matter that leads directly to the cessation of suffering. Suffering arises because once there is a defilement (kilesa), then there will be one turn of the wheel of Dependent Origination. It may seem as if there were two rounds of birth because when an outer sense base comes into contact with an inner sense base, then consciousness arises; if, at this moment, ignorance is present, there arises consciousness, mentality/materiality, and the sense bases, which heretofore, it can be said, did not exist because they were asleep. The consciousness at this point is what the eternalists call patisandhi vinnana or rebirth consciousness. When the power of contact causes feeling to arise, then defilement (kilesa) will arise directly. Grasping and attachment will give rise to becoming and birth, which is another birth - the birth of the "self' idea, "I" or "mind", which will taste the fruit of suffering in the form of problems which arise from birth, old age, death, sadness, lamentation, suffering, grief, tribulation, or, as these are collectively known, the five aggregates of clinging (pancupadana-khandha) which are suffering. In one turning of the cycle of Dependent Origination there seems to be two births as explained above, but it is not necessary to die and enter a coffin to die or be born. That kind of death is concerned with the body and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not with Paticcasamuppada as taught by the Buddha.
위에서 언급한 것들(10가지)은 참된 연기법이 무엇인지 알아보는데 기준이 되는 원리입니다. 간단히 말해, 참된 연기법은 바로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실천적 문제입니다. 괴로움은 오염원(낄레사)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연기법의 한 바퀴가 형성됩니다. 외부의 감각기초(형색, 소리, 냄새 등 감각대상)가 내부의 감각기초(눈, 귀, 코 등 감각기관)와 접촉하면 의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치 두 번의 '태어남'이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 순간에 무지가 있으면 의식, 정신과 물질, 및 감각기초가 순차적으로 일어나는데, 여기까지는 잠들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의식을 영원주의자들은 빠띠산디 윈냐나, 즉 재생의식이라 합니다. (감각대상과 감각기관 사이의) 접촉력이 느낌을 일으키면, 오염원이 즉각 일어납니다. 그리고 움켜쥠과 집착은 '되어짐'과 '태어남'을 일으키는데, 이 '태어남'은 다른 태어남, 즉 '자아'라는 개념, '나', '나의 것'의 태어남입니다. 이러한 태어남은 이로 인해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 즉 늙음, 죽음, 슬픔, 한탄, 괴로움, 비탄, 고뇌 등 한마디로 말해 '다섯가지 무더기에 대한 집착(오취온)'으로 괴로움을 겪게 합니다. 연기법의 한 바퀴에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두 번의 '태어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죽거나 죽어 관 속에 들어가거나 재탄생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죽음은 붓다께서 가르치신 연기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몸과 상대적 진리의 언어에 관한 것입니다.
Clearly, the benefit intended by the Buddha from Dependent Origination was to banish the theory of selfhood, or to eliminate the importance of the self. Simply analyzing the five aggregates to see that neither this aggregate nor that one is self is not sufficient. It is necessary also to show that these aggregates only arise when all the eleven conditions of Paticcasamuppada arise, according to the cause and effect principle: “Because there is this, there is that; because this is not, then that is not." This will enable us to see selflessness more clearly - selflessness in the defilements, in deeds (karma) and in karmic results (vipaka); or, to put it another way, selflessness in every cause and effect without any interval. If this is not clear from the elements of Dependent Origination, simply hearing the five aggregates explained as selfless may lead to a rather ridiculous vacillation as described in the Parileyya Sutta, where it is said : "Respected sirs ! Have you heard that the five aggregates are selfless? How, then, can all the deeds (karma) done by the selfless have an effect on the self?" This opinion indicates only a partial understanding of selflessness, namely that the five aggregates are selfless. That is easy enouth to see. When it comes to karmic actions and results, however, there is a jump in taking those results as belonging to a self, be it a result characterized by pleasure (sukha) or suffering (dukkha). This causes a kind of funny situation to arise. But if there is a clear perception of the matter in terms of the elements of Dependent Origination, then such a mistake cannot arise.
연기법을 통해 붓다께서 의도하신 바, 우리가 얻는 이득은 자아 사견을 완전히 떨어버리거나 자아의 중요성을 없애는 것이 확실합니다. 다섯가지 무더기(오온: 몸, 느낌, 인식, 의도 형성, 의식)을 단순히 자아가 아닌 것으로 보는 분석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가지 무더기는 원인과 결과의 원리,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원리에 따라 연기법의 11가지 조건이 모두 일어날 때에만 일어난다는 것을 보는 것이 또한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아없음, 즉 오염원이나 행위(깜마)의 결과에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각 원인과 결과에는 자아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연기법의 각 요소로부터 이것을 명확히 보지 못하고 단순히 오온에 자아가 없다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는 삐리레야 경에 기술된 다음 질문과 같이 좀 어처구니 없이 갈피를 못잡게 합니다. "존경하는 분이시여, 오온(다섯가지 무더기)이 무아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무아가 한 모든 행위가 어떻게 자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오온이 무아라는 것만 듣고 무아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오온이 무아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적 행위와 결과(업과 과보)에 대해 말하면, 그 결과가 즐거움(수카)이든 괴로움(둑카)이든 자아에 속하는 것으로 비약된 견해를 취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우스운 상황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의 요소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면 그러한 잘못된 견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For people who clearly understand the principle of Dependent Origination in a momentary sense, there will be nothing to take on the role of a self in the story above. Nonetheless, it is still possible to have this life and the next life; there can be places of suffering such as hell, the animal state, the realms of hungry ghosts and fallen angels, the human state, heaven and the realms of the Brahmas; even the Buddha, the Dhamma, and the Sangha. All these can appear in the process of Paticcasamuppada by means of the constructive power of the volitional formations (abhisankhara) of merit, demerit and imperturbablity, which we have already discussed above. If that constructive power is successfully completed when feeling or birth arises, and if the mind is in a state of agitation and anxiety, then a state of being in hell arises.
연기법을 순간적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위 이야기에서 자아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생'과 '내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스런 지옥계, 동물계, 아귀계 및 아수라계, 인간계, 천상계, 색계 및 무색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붓다, 담마 및 상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유익하거나 해롭거나 흔들림 없는 행위를 하는 의도 형성(아비상카라)의 힘에 의해 연기법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느낌과 탄생이 일어날 때까지 의도 형성의 힘이 이어지고 마음이 동요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으면, 지옥의 상태가 됩니다.
In the Third Discourse, Saccasangyutta, the Buddha called it Mahaparilaha (great fever) hell, and elsewhere he called it chapassayathanik hell, the hell belonging to the sixfold sense sphere wherein everything perceived through any of the six sense doors is seen as repulsive and a source of misery. These are real hells, more frightful then than those hells beneath the ground that eternalists believe in. In the same discourse, further on, the Buddha similarly speaks of a heaven called Chapassayathanik, or the heaven belonging to the sixfold sense sphere wherein everything perceived through any of the six sense doors was seen as delightful and a source of pleasure. This is a real and true heaven, even more so than those heavens in the sky of the eternalists.
삿짜 쌍윳따 세 번째 법문에서, 붓다께서는 이 지옥을 '마하빠리라하(대 열병) 지옥'이라 부르셨고, 다른 곳에서는 '빠싸야타닉 지옥'이라 부르셨습니다. 이 지옥은 6가지 감각의 문을 통해 인식되는 모든 것이 역겹고 비참함의 근원으로 보이는 6가지 감각계에 속합니다. 이 지옥은 영원주의자가 믿는 '지하의 지옥' 보다 더 무섭고 실제적입니다. 또한 동일한 법문에서 붓다께서는 6가지 감각의 문을 통해 인식되는 모든 것이 유쾌하고 즐거움의 근원으로 보이는 6가지 감각계에 속하는 천상을 '차빠싸야타닉 천상'이라 부르셨고 지옥과 유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상은 영원주의자가 믿는 '하늘의 천상'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천상입니다.
If feeling or suffering is full of fear, then the state of the asura (fallen angels) arises. If there is hunger to the point of death, then the state of peta (hungry ghosts) arises. If there is stupidity, then the state of being an animal arises; if there is just a modicum of suffering as with humans, then the state of being human arises; if there is sensual pleasure of a variety of kinds and intensities, then one of the heavenly states arises; when there is a sense of being filled with pleasurable feeling or an equanimous feeling as with the various rupa-jhanas (fine material states of meditative absorption), and arupa-jhanas (immaterial states of meditative absorption), then one of the various Brahma states arises. All of these states are more real than those talked about which will be experienced after entering th coffin. This misunderstanding has arisen because the meaning of "opapatika" in Buddhism has been misinterpreted.
느낌 또는 괴로움(고)이 두려움으로 가득하면 아수라(타락한 천사)의 상태가 됩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면 아귀(허기진 유령)의 상태가 됩니다. 우둔하다면 동물의 상태가 됩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는 정도의 괴로움이 있다면 인간의 상태가 됩니다. 다양한 종류와 강도의 감각적 즐거움이 있으면 천상 중의 한 상태가 됩니다. 여러가지 색계 선정(루빠-자나)이나 무색계 선정(아루빠-자나)으로 즐거운 느낌이나 평온한 느낌이 가득하다면 여러가지 브라만 상태 중의 하나가 됩니다. 이 모든 상태는 (몸이) 죽은 후에 겪게 될 것으로 이야기하는 여러가지 상태보다 더욱 실제적입니다. (재탄생에 대한) 오해는 불교에서 '오빠빠띠까(화생 : 부모 없이 바로 태어나는 것)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In the order of cessation of Dependent Origination, we can find the real Buddha, the real Dhamma, and the real Sangha. They are sanditthiko (immanent ; here and now) and paccatang veditabbo vinnuhi (that which the knower knows for himself through direct experience). And these three can be found more truly than in the triple gem of the eternalists which is absent-mindedly chanted to the point of meaninglessness - mere lip service. This life means the cycle of Dependent Origination ; the next life means the next cycle of Dependent Origination, and so on. To consider it in this way is still to see this life and the next life in a way that is more real than life as understood by the eternalists, which is defined in terms of a physical birth from the mother's womb and entering the coffin. This definition comes from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or the language of children still sucking their thumbs ; it is not the language of the Buddha's teaching of Paticcasamuppada. This correct understanding is the best aid in teaching about the Buddha's Paticcasamuppada, not the Paticcasamuppda of the eternalist teachers, who made it up themselves in later ages and handed it down to the present.
괴로움이 그치는 순서에서 참된 붓다, 참된 담마, 및 참된 상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내재하고(산디티꼬) 아는 자가 스스로 직접적으로 경험하여 아는 것(빳차땅 웨디땁보 윈누히)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는 영원주의자가 멍하니 의미없이 단순히 입으로만 소리내어 칭송하는 삼보보다 더 진실한 것입니다. 현생은 연기법의 현재 순환을 의미하고 내생은 연기법의 다음 순환을 의미하는 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서 관 속에 들어가는 육체적 탄생으로 한 생을 정의하고 생각하는 영원주의자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실제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영원주의자의 이런 정의는 상대적 진리의 언어, 또는 아직 손가락을 빠는 어린애의 언어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언어는 붓다께서 가르치신 연기법의 언어가 아닙니다. 이런 올바른 이해는 붓다의 연기법을 가르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영원주의자가 가르치는 연기법은 후대에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내려온 그릇된 것입니다.
There are many things which can help us to understand the fact that the language of Dependent Origination (the language of the highest dhamma) is not the same as the language of the relative truth, which must always be diluted with a dash of eternalism. An example can be seen in samma-ditthi or right view. Right view which is spoken of in the language of realtive truth for ordinary people says that there exists a present world and a future world, fathers and mothers, hell and heaven, deeds and the doers of deeds, this life and the future life. All of this is said according to the idiomatic vernacular, as understood and clung to by ordinary people.
연기법의 언어(최상의 담마 언어)는 상대적 진리의 언어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상대적 진리의 언어는 영원주의가 유입되어 언제나 묽어져 있습니다. 그 예를 삼마 딧티, 즉 바른 견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상대적 진리로 말하는 바른 견해에서는 현 세상과 미래 세상, 아버지와 어머니, 지옥과 천국, 행위와 행위자, 현생과 내생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고 집착하는 것과 같이, 관용적인 고유어(자국어)에 따라 말합니다.
When we come to the middle level of right view, however, as it manifests itself as one of the eightfold path, we find that things are not talked about as on the lower level. There is only talk about suffering and the complete cessation of suffering. There is no mention of the person who suffers, or of the person who extinguishes suffering. And yet this is also called right view. Finally we come to right view on the highest level - the level of the supramundane, which is the view that sees real Dependent Origination. There is no leaning to the view that there is a self (atthita) and there is no leaning to the view that there is no self (natthita), because the middle path is clearly seen, which is to say the flow of Dependent Origination is seen. That flow consists of the conditionality expressed by the phrase: "because there is this, that exists; because this is not, that does not exist." There is nothing which is the self or a person in any sense, even if you talk about hell and heaven. This view point is called the real middle way because it doesn't at all lean towards either eternalism or annihilationism.
그러나 중간 단계의 바른 견해에서는 팔정도의 하나로 나타냅니다. 중간 단계에서는 사물을 낮은 단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말하지 않고, 단지 고(둑카)와 고의 완전한 그침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나 괴로움을 소멸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견해도 바른 견해라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최상의 단계, 즉 초세속 단계에서 말하는 바른 견해는 실제적인 연기를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자아가 있다(앗티따)'는 견해에 치우치는 것도 아니고 '자아가 없다(낫티따)'는 견해에 치우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중도를 명확히 보기 때문입니다. 즉, 연기의 흐름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흐름은 다음 구절로 표현된 조건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다(역주: 빠알리 원 경전에 따라 '이것'으로 번역)". 비록 지옥과 천국을 말하더라도 어떤 면에서도 자아 또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견해를 실제적 중도라고 합니다. 영원주의나 절멸주의의 어느 곳으로도 전혀 치우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Please notice that when speaking about right view in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it is said that there is a self, but no self can be found in the right view in the language of ultimate truth or in the language of Paticcasamuppada. And yet both of these are right view in Buddhism.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is for the teaching of morality to ordinary people; the language of ultimate truth is for teaching absolute reality to those who have only a little dust in their eyes, so that they may become noble disciples. The Buddha had to speak in two languages like this all the time. Paticcasamuppada is a matter of the highest ultimate truth; it is not a matter of morality. There is no self travelling from life to life and no need to say that one cycle of Paticcasamuppada must cover three lifetimes, as understood in the language of realtive truth.
상대적 진리의 언어에서 바른 견해를 말할 때는 자아가 있다고 하지만, 궁극적 진리의 언어 또는 연기법의 언어에서 바른 견해를 말할 때는 자아가 없다고 한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불교에서는 바른 견해입니다. 상대적 진리의 언어는 보통 사람에게 도덕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궁극적 진리의 언어는 눈에 먼지가 적게 낀 사람에게 절대적 실재를 가르쳐서 성자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항상 이 같이 두가지 언어로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연기법은 최상의 궁극적 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연기법은 도덕률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자아는 없습니다. 그리고 연기법의 한 순환이 상대적 진리의 언어에서 이해하는 것과 같은 3생에 걸쳐야 하는 것으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Finally, we must consider for what purpose Paticcasamuppada was explained in terms of three lifetimes.
마지막으로, 무슨 목적으로 연기법을 3생에 걸치는 것으로 설명했는지 검토해 보겠습니다.
It is explicitly understood that the teaching of Dependent Origination in this manner comes, clearly in parts and not so clearly in parts, from the Visuddhimagga of Buddhagosa. This is so because, as far as there is written evidence to judge from, there are no works older than the Visuddhimagga which offer such an explanation. My critical review, then, centers in on that work, or on the person believed to be the author of that work. But when stated accurately, my critical review here is not a criticism of Buddhagosa, because Paticcasamuppada is a part of the Buddhism that we must help each other to study and practice in the correct way - in a way that is useful. We are not satisfied with someone's explanation which is seen to be inconsistent with the Buddha's aim. Therefore, critical reviews don't really criticize anything. They are merely showing the reasons for inviting a renewed examination of the original Pali Scriptures concerning Paticcasamuppada, so that each individual can know and see for himself how it is without believing me or anyone else, which would be contrary to the spirit of the Kalama Sutta. To blindly accept something, as warned against in the ten headings of the Kalama Sutta, cannot be useful at all. We must use what is called "the eye of the norm" as a tool for making decisions in problems like this.
3생에 걸치는 방식으로 연기법을 가르치는 것은 확실히 부분적으로,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붓다고사의 청정도론에서 유래된 것임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문자화된 것에서 판단해 볼 때, 그렇게 설명한 책으로서는 청정도론보다 더 오래된 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검토 비판은 청정도론 또는 이 책의 저자라고 믿어지는 사람에게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연기법은 불교의 한 부분이고 우리는 연기법을 바른 방법으로, 즉 유익한 방법으로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서로 도와야 하므로 이 검토 비판은 붓다고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붓다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는 설명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어떤 것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들이 연기법에 관한 빠알리 초기 경전을 다시 검토하게 하는 이유를 보여서, 각자가 '나'나 '다른 사람'을 믿지 않고 어떻게 하든 스스로 알고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나 '다른 사람'을 믿는 것은 깔라마 경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깔라마 경에서 10가지 목록을 들어 주의한 바와 같이,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전혀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문제를 결정하는 도구로서 이른바 "규준 지침(the eye of the norm)"을 사용해야 합니다.
Suppose I were really to consider the merits and demerits of Buddhagosa critically. I would criticize the Visuddhimagga ("The Path of Purity") of Buddhagosa in the sense that it is merely a collection of tales and an analysis of scriptural terms used to cover and enclose the book Vimuttimagga ("The Path of Liberation"), which had already been written. Such a critisism could get blown up into a large affair, but at this time, all I want to do is to direct the interest of those of us who love the Buddha more than any other particular person back to the explanations of Dependent Origination given by the Buddha himself in so many places. I want to redrict this interest no matter how difficult it is. It is simply a matter of dedicating and sacrificing oneself in order to make that which the Buddha intended to benefit all sentient beings become an actual benefit to all sentient beings, rather than letting it sleep fruitlessly as it is now, good only for useless argumentation.
나는 정말로 붓다고사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붓다고사의 청정도론(위숫디막가)은 단순히 (그 당시의) 이야기를 모으고 그 당시에 이미 저술되어 있던 해탈도론(위뭇띠막가)을 장식하는데 사용된 경전 용어를 분석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비판합니다. 이런 비판은 큰 추세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지만, 이번에 하고자 하는 것은, 붓다께서 직접 수많은 곳에서 언급하신 연기법의 설명에 의지하는 어떤 다른 특별한 사람보다도 붓다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기법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입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관심을 다시 불러 일으키고자 합니다. 이는 붓다께서 단지 모든 유정체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일이 모든 유정체에게 실제적인 이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논쟁에만 좋을 뿐, 지금과 같이 결실이 없도록 놓아 두는 것보다 낫습니다.
Since Buddhagosa's explanation is not composed of enough reason to withstand the method of proof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Buddha's teaching in many expositions of the Pali Suttas, then, with the power of the Kalama Sutta, for example, the lever of Buddhadasa will raise up the log of Buhhagosa according to the power of mindfulness. Whether a not it delights anyone else, I take great delight in knowing that a correct view will come into the realm of study of Dependent Origination, which is the heart of Buddhism, as described in the Sangiti Sutta, Digha-nikaya, Which was quoted at the beginning of this introduction.
붓다고사의 설명은 설명은 빠알리 경의 많은 곳에 나타나 있는 붓다 가르침의 원리에 따른 증명방식으로 충분히 증명된 이유가 없으므로, 붓다다사는 깔라마 경 등에 따라 마음챙김의 힘으로 붓다고사의 통나무에 지렛대질을 할 것입니다. 이 일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 일이) 연기법의 공부에 바른 견해를 줄 것이라고 알기에 큰 기쁨을 얻습니다. 이 연기법 소개의 첫 부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디가 니까야의 상기띠 경에서는 연기법을 불교의 핵심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The word "Paticcasamuppada" is probably still a strange and uncommon one, not often heard by most people. But since it is probably not possible to use another word, we will continue using it. It behooves all of you to try to understand the word "Paticcasamuppada" to a greater and greater degree until it comes naturally to you. Those people who have become monks and studied Buddhism have heard this word a bit, but most people will be uncertain about it, which will cause them to become uninterested. In this way they will not come to understand the most important teaching of Buddhism. I think that we should use this word until, finally, it becomes a matter that is understood by most people.
"빠띠짜사뭅빠다"라는 말은 아직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자주 들어보지 못한 이상하고 친숙하지 않은 용어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말을 사용하기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겠습니다 (역주: 이 번역문에서는 '빠띠짜사뭅빠다'를 '연기법'으로 번역하여 사용했음). 여러분 모두 '연기법'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연기법'을 이해하도록 대단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승려가 되고 불교를 공부한 사람은 이 말(연기법)을 좀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 말을 확실히 모르고, 이 말이 사람의 관심을 끌지도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해하는 문제가 될 때까지 연기법이란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he reason we must talk about Dependent Origination is that it is the heart of Buddhism. When we talk about the heart of Buddhism most people think of the Four Noble Truths. Please understand that Paticcasamuppada is the fullness of the Noble Truths, it is the full measure of the Noble Truths. So let us call it the "Great Noble Truths", the heart of Buddhism. Therefore we must talk about it until it is perfectly understood.
연기법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핵심에 대해 말하면 많은 사람은 '네가지 성스런 진리(사성제)'를 생각합니다. 연기법에는 성스런 진리가 완전히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연기법은 성스런 진리의 완전한 척도(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을 '큰 성스런 진리'라고 합시다. 우리는 이 연기법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논의해야 합니다.
Paticcasamuppada is the same as the Noble Truths. If there is no one who understands the Noble Truths, then the enlightenment of the Buddha is in vain, it is of no use or value. This is even more so for Dependent Origination, because it is the fullness of the Noble Truths. For this reason, we must speak about Dependent Origination, the Great Noble Truths.
연기법은 성스런 진리와 같습니다. 아무도 성스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붓다께서 깨달으신 것은 무익하고 이용할 수 없으며 가치가 없습니다. 연기법에 대해서는 훨씬 더 그렇습니다. 연기법은 성스런 진리의 완전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큰 성스런 진리'인 연기법을 논의해야 합니다.
Something that should be understood from the start is that Dependent Origination is inside all of us almost all of the time, yet we don't know about it. We must accept the blame; it is our mistake and not the fault of the Dhamma. Because we are not interested, we do not know about that which is in us almost all of the time. A little further on I will explain how it is in us almost all of the time.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해해야 할 것은, 연기법은 거의 항상 우리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모릅니다. 따라서 잘못은 우리에게 있으며 담마의 잘못이 아니므로 우리가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의 항상 우리 내부에서 작용하는 것을 모릅니다. 어떻게 연기법이 거의 항상 우리 내부에서 작용하는지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Paticcasamuppada is a subject matter which, if understood, may be used for the cessation of suffering. In another light, we must see it as our duty to try to understand Dependent Origination and to help each other to understand also. This is our duty. This is the Buddha's wish. If we can do this, then the Buddha's enlightenment will not have been in vain.
연기법은 이를 이해할 때 고(괴로움)를 그치게 할 수 있는 화제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우리는 연기법을 각자가 이해하는 한편 이해하기 위해 서로 돕는 것을 의무로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붓다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의무를 다한다면 붓다께서 깨달으신 것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Now I would like to expound upon and clarify these ideas by raising the following topics: What is Dependent Origination about? Why must there be the subject of Dependent Origination? What is the purpose of Dependent Origination? What is the method of Dependent Origination?
이제 다음 질문을 제기하여 연기법을 상세하고 명확히 설명하겠습니다. 연기법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왜 연기법이란 화제가 필요한가? 연기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연기법을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1) If someone asks, "What is Paticcasamuppada?" the answer is : Paticcasamuppada is a detailed demonstration of how suffering arises and how suffering ceases. It also demonstrates that the arising and ceasing of suffering is a matter of natural interdependence. It is not necessary for angels or holy things or any thing else to help suffering arise or cease. It is a matter of several levels of natural interdependence. When certain factors interdependently arise then suffering arises or ceases. The word "paticca" means "grounded on, concerning, because" and the word "samuppada" means "origin, arising, genesis, coming to be, production." That which is concerned with interdependent things arising simultaneously is called Paticcasamuppada or Dependent Origination.
(1) 누군가 "연기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연기법은 고(괴로움)가 어떻게 일어나고 그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또한 자연적으로 상호의존하여 고(괴로움)가 일어나고 그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고가 일어나고 그치게 하는 천사나 신성한 사물이나 어떤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으며, 자연적으로 상호의존하는 여러가지 수준의 문제입니다. 어떤 인자(요소)가 상호의존하여 일어날 때 고(괴로움)가 일어나고 그칩니다. '빠띠짜'는 '~에 기초하는', '~에 관한', '~때문에' 등을 의미하고, '사뭅빠다'는 '발단', '일어남', '발생', '나옴', '생성' 등을 의미합니다. 함께 일어나는 상호의존적 사물에 관한 것을 빠띠짜사뭅빠다, 즉 연기라고 합니다.
Another aspect of Paticcasamuppada is that it demonstrates that there are no sentient beings, persons, selves, we's or they's here or floating around looking for a next life. Everything is just nature: arising, existing, passing away. If you understand Paticcasamuppada, you will understand that there are no sentient beings, persons, selves, we's or they's which can be called "I", When someone does not understand this, that person lets himself go according to normal feelings and thoughts which are under the sway of ignorance. And so that person feels or thinks that there are beings, persons, selves, we's and they's. This is one of the aims of Dependent Origination: to show how suffering arises and ceases in terms of interdependence which need not make any reference at all to beings, persons, selves, we's or they's.
다른 면으로 볼 때 연기법은, 여기 또는 내생을 찾아 떠도는 유정체, 사람, 자아, 우리, 그들 등이 없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모든 것은 단지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집니다. 연기법을 이해하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유정체, 사람, 자아, 우리, 그들 등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무지에 지배되어 일반적인 느낌과 생각에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유정체, 사람, 자아, 우리, 그들 등이 있다고 느끼거나 생각합니다. 연기법의 목표 중의 하나가, 어떻게 고(괴로움)가 일어나고 그치는지를 상호의존적인 면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상호의존적인 면에서는 유정체, 사람, 자아, 우리, 그들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고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Furthermore, this interdependent arising and ceasing is explosive like a bolt of lightning - it is exceedingly fast. Let everyone observe carefully how explosively fast our thoughts can arise. Anger for example, arises swiftly and explosively. Such mental behavior is as fast as lightning and causes grief in our daily lives. This is straight forward Paticcasamuppada. If you can see this, you will probably feel that it is most frightful and fearful. But if you can't see it, then it's as if there were nothing at all to be concerned with. If you ask what is Dependent Origination at the most basic level of common language, you can answer that it is mental behavior which causes suffering. It is violently swift like lightning, and it exists in our daily lives.
그리고, 이 상호의존적 일어남과 그침은 번개치는 것처럼 폭발적이고 급속히 진행됩니다. 우리 생각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급속히 일어나는지 모두 주의깊게 관찰해 보십시오. 예를 들면 화(분노)는 격정적으로 급속히 일어납니다. 이런 정신행위는 번개처럼 빠르고 나날의 삶을 비통하게 합니다. 이것은 연기가 순방향으로 바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다면 아마 가장 놀랍고 두렵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볼 수 없다면 관련된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기초적 수준의 일상언어로 말하여 연기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괴로움)를 일으키는 정신행위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정신행위는 번개같이 격렬하고 빠르게 진행되며 우리가 매일 생활하는 중에 있는 행위입니다.
(2) The second question is "Why must there be the subject of Dependent Origination?"
(2) 두 번째 질문은, "왜 연기법이란 화제가 필요한가?"입니다.
The subject of Dependent Origination is necessary for study and practice. Nowdays very few people know about Paticcasamuppada. In addition, there is wrong view, just like the wrong view of Bhikkhu Sati, the fisherman's son. This man, even though he was a monk, held the wrong view that there is "... only this soul which floats along, which travels about - nothing else ... ". This monk held that the soul was a being or a person which floated around or moved about in the whirlpool of existence, birth and re-birth. This belief, that the soul is a being or a person, the occupier of the body which floats on in the cycle of birth and re-birth, arises because the truth of Dependent Origination is not known, thereby giving rise to wrong view.
연기법이란 화제는 공부와 실천에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연기법을 압니다. 또한 어부의 아들인 수행승 사띠가 품은 견해와 같은 그릇된 견해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수행승 사띠는 승려이지만, '~ 떠돌고 이동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영혼이다.~'라는 그릇된 견해를 품었습니다. 이 승려는, '탄생하고 재탄생하는 윤회의 소용돌이에서 떠돌고 이동하는 존재 또는 사람은 바로 영혼이다'는 견해를 품었습니다. 탄생하고 재탄생하는 순환에서 떠도는 영혼이 바로 존재이고 사람이며 몸의 지배자라고 하는 이 믿음은 연기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릇된 견해가 생깁니다.
The other monks tried to make Sati renounce his view. When he would not they reported to the Buddha who sent for him and asked him if, indeed, he held this view. Bhikkhu Sati answered that he did, indeed, hold the view that "...the soul and only the soul moves on ....". The Buddha then asked him what his soul was. He answered : "Honored One, the soul is that which can speak, that which can feel something, and that which tastes the fruit of both wholesome and unwholesome karmic action."
다른 승려들이 사띠 승려에게 이 견해를 버리게 하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사띠 승려는 이 견해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붓다께 이 사실이 보고되고 사띠 승려가 붓다 앞에 불러가게 되었습니다. 붓다께서 사띠 승려에게 정말로 이런 견해를 품고 있는지 묻자, 사띠 승려는 '~ 영혼이고 단지 영혼만이 이동한다 ~'는 견해를 품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그 영혼이 무엇이냐고 묻자, 사띠 승려는 "세존이시여, 영혼은 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Such a view is even more of a wrong view - namely, that the soul is that which can speak, which can feel and which, in the future, tastes the fruit of karma.
이 사띠 승려의 견해는 (자아 또는 영혼이 있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더욱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간 견해로서, '영혼은 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장래에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견해입니다.
Ordinary people who don't understand will ask why such a view is wrong, because most people believe that the soul exist just like Sati believed. Ordinary people speak this way as a matter of habit, not knowing that it is wrong view.
이해하지 못하는 보통사람은 왜 이런 견해가 그릇된 것인지 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사띠 승려가 믿는 것처럼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은 그릇된 견해인 줄 모르고 습관적으로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Such talk is wrong view because it asserts that the soul is a definite and lasting thing. People believe that the soul is something that exists independently in itself, not simply a paticca-samuppanna-dhamma, or conditioned event, which arises by reason of the law of conditionality, which is to say that it is merely the result of Dependent Origination.
이런 말은 영혼이 뚜렷하고 영속하는 그 무엇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릇된 견해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믿습니다. 영혼은 인과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빠띠짜 사뭅빤나 담마', 즉 조건에 따라 형성된 사물일 뿐이며, 말하자면 단지 연기의 결과일 뿐임을 모릅니다.
In fact, the soul is merely a paticca-samuppanna-dhamma, which means that there is no self. Rather, it depends on conditions which cause it to arise for just a moment. This is what it means to see the soul as a paticca-samuppanna-dhamma, which, according to Dependent Origination, demonstrates that there is no self.
요컨대, 영혼은 자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빠띠짜 사뭅빤나 담마'일 뿐입니다. 이것은 잠깐 동안 일어나게 하는 조건에 의존합니다. 영혼을 연기법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빠띠짜 사뭅빤나 담마'로 본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In the passage quoted above, Sati, the fisherman's son, asserted that there is a self, or that the soul is a self, that it exists here and now and that it moves on to a future state. He said that it was the speaker of words, the feeler of various emotions and the receiver of the fruit of both wholesome and unwholesome karmic deeds. In other words, he held that there was a self, which he called "soul".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어부의 아들인 사띠 승려는, 자아가 있고 영혼이 자아이며 이 자아는 지금 여기에 있으며 미래로 이동한다고 우겼습니다. 사띠 승려는 이 영혼은 말하는 자이고 감정을 느끼는 자이며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띠 승려는 영혼이라 부르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So this is the reason that we must have Paticcasamuppada because the majority of people generally hold this wrong view without knowing that it is a wrong view. We must have Paciccasamuppada in order to know the truth that there is no self. The soul is not the self. If there is a soul, it is merely a series of events (paticca-samuppanna-dhamma) which arise quickly one after the other and which are dependent on the law of conditionality. There is no self anywhere. For this reason, it is necessary to study about Paticcasamuppada.
그러므로 연기법이란 화제가 필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릇된 것인 줄 모르고 이런 그릇된 견해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없다는 진리를 알기 위해 연기법이 필요합니다. 영혼은 자아가 아닙니다.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연기 원리에 따라 차례대로 급속히 일어나는 사건(빠띠짜 사뭅빤나 담마)의 연속을 말합니다. 어디에도 자아는 없습니다. 이 이유때문에 연기법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3) The next question is "For what purpose must we know about Paticcasamuppada?"
(3) 다음 질문은 "무슨 목적으로 연기법을 알아야 하는가?"입니다.
The answer is : in order to be free from the wrong view that persons exist, that they are born, and that they exist according to karma. Moreover, we must know about Dependent Origination in order to completely extinguish suffering and give rise to right view. If you are still deceived into believing that the soul is you, then you have wrong view and will experience suffering and will not be able to extinguish it.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know what the real Dependent Origination is all about. The soul is a paticca-samuppana-dhamma which arises according to the law of Paticcasamuppada. Suffering can be extinguished and extinguished completely by this right view or correct understanding. This is briefly explained in the Pali Scriptures: "...the soul is a paticca-samuppanna-dhamma, and event which arises dependent on other things. If these other things are absent, then there can be no arising of the soul..."
'사람이 존재하고, 태어나며, 업에 따라 존재한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연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고(괴로움)를 완전히 소멸하고 바른 견해를 일으키기 위해서 연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 영혼이 자기라는 믿음으로 속고 있다면, 그릇된 견해를 품는 것이며 이로 인해 고(괴로움)를 겪고 고를 소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연기법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은 연기법에 따라 일어나는 '빠띠짜 사뭅빤나 담마'입니다. 고(괴로움)는 이 바른 견해(또는 바른 이해)로 완전히 제거되거나 제거될 수 있습니다. 빠알리 경에서는 이것을 " ~ 영혼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사건, 즉 '빠띠짜 사뭅빤나 담마'이다. 이 다른 것이 없다면 영혼은 생길 수 없다 ~ "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This quote demonstrates that if the soul really existed, it would exist by itself, without having to depend on any condition. But it cannot exist by itself. There are only conditions which come together and give rise to it. But it is profoundly subtle, to the point of making us feel that it can think. It seems that this "soul" is what enables this mind/body to do anything, to speak or anything esle at all. And so we misunderstand, thinking that there is some one thing which is the self in our mind/body, which we call the soul. Dependent Origination is useful in getting rid of this wrong view and, in so doing, completely extinguishing suffering.
이 인용 구절은, 영혼이 만약 있다면 이 영혼은 어떠한 다른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함께 모여 일어나는 조건 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생각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정도로 심오하고 미묘합니다. 이 영혼은 이 '마음/몸'이 어떤 일을 하고, 말하거나 그 밖의 다른 것을 하도록 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몸'에 영혼이라 부르는 어떤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여 오해합니다. 연기법은 이런 그릇된 견해를 제거하는 데 유익합니다. 이렇게 그릇된 견해를 제거하므로써 고(괴로움)를 완전히 소멸할 수 있습니다.
(4) The next question is "In what way can suffering be extinguished?"
(4) 다음 질문은 "어떤 방법으로 고(괴로움)를 제거할 수 있는가?"입니다.
The answer is the same as we have already seen in general. Namely, the cessation of suffering can be obtained by correct practice - by correct living or right livelihood. Correct living is living in such a way that ignorance can be destroyed by wisdom, living in such a way that stupidity is destroyed by knowledge. Or to put it another way, correct living means having mindfulness all the time, especially when there is contact between the sense bases and sense objects. Please understand that "right livelihood" means living with perfected mindfulness all the time, especially when there is sense contact. When you live in this way, stupidity cannot arise and it will be possible to eliminate ignorance. Only wisdom or knowledge will be left. Living in such a way that suffering cannot arise is right living.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반적으로 이미 본 바와 같습니다. 고(괴로움)는 바른 실천으로 그칠 수 있습니다. 이 바른 실천은 바른 삶(또는 바른 생계)입니다. 바른 삶은 무지가 지혜에 의해 제거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른 삶은 어리석음이 통찰에 의해 제거되는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는 달리 말하면, 바른 삶은 항상, 특히 감각기초와 감각대상이 접촉할 때 마음챙김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른 생계'는 항상, 특히 감각접촉이 있을 때 '완전한 마음챙김'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살 때 어리석음이 생길 수 없고 무지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직 지혜 또는 통찰 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고(괴로움)가 일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바른 삶입니다.
The four main headings of Paticcasamuppada are:
(1). When asked what Paticcasamuppada is, answer that it is a demonstration of suffering which arises as fast as lightning in our minds daily.
(2). Why must we know about this? Because most people are foolish and don't know about it.
(3). What is the value of knowing about it? Knowing about it brings correct knowledge and the extinguishing of suffering.
(4). In what way can suffering be extinguished? By the method of correct practice following the principles of Paticcasamuppada - by being mindful at all times and not allowing the stream of Dependent Origination to arise.
All together, the above four connected answers are called Dependent Origination.
연기법에서 네 가지 주요 항목을 다음 문답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연기법은 무엇인가? 매일 마음에 번개처럼 급속히 일어나는 고(괴로움)를 설명한 것이다.
(2) 왜 연기법을 알아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어리석고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3) 연기법을 아는 목적(가치)은 무엇인가? 연기법을 알면 바르게 통찰하여 고(괴로움)를 소멸할 수 있다.
(4) 어떤 식으로 고(괴로움)를 소멸할 수 있는가? 연기법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여, 즉 항상 마음챙김을 유지하여 연기의 흐름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위 네 가지 관련 답변을 모두 합하여 연기법이라 합니다.
첫댓글 아주 훌륭한 법문이군요
팔정도에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엇다면 좋앗을텐데요
좀 아쉬운감이 있내요
주석서를 보면 큰일 납니다
오리무중속의 불교를 만들어냅니다
그 주석서는 붓다고사가 주워들은 말로 쓴글 입니다
붓다고사는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몇세기가 지나서 나타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붓다의 법을 정확히 이해 했을가요?
다른 사상에 물들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맞다면 윤회가 있다 없다 한다 안하다는 말들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윤회에 대한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지의 이상한 불교를 보면 말도만코 탈도 많죠?
그렇다면 저것이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