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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十九回 寵胥童晉國大亂 誅岸賈趙氏復興
제59회: 서동을 총애하여 진나라가 혼란해지고 도안고를 죽여서 조씨가 부흥하다
話說,楚中軍元帥公子側平日好飲,一飲百觚不止,一醉竟日不醒。楚共王知其有此毛病,每出軍,必戒使絕飲。今日晉楚相持,有大事在身,涓滴不入於口。是日,楚王中箭回寨,含羞帶怒。公子側進曰:「兩軍各已疲勞,明日且暫休息一日,容臣從容熟計,務要與主公雪此大恥。」公子側辭回中軍,坐至半夜,計未得就。有小豎名穀陽,乃公子側貼身寵用的。見主帥愁思勞苦,客中藏有三重美酒,煖一甌以進。公子側嗅之,愕然曰:「酒乎?」穀陽知主人欲飲,而畏左右傳說,乃詭言曰:「非酒,乃椒湯耳。」公子側會其意,一吸而盡,覺甘香快嗓,妙不可言!問:「椒湯還有否?」穀陽曰:「還有。」
한편, 초나라의 중군 원수 공자 측은 평소에 술을 좋아했다. 그는 한번 마시면 백 잔이 되어도 그만두지 않아서 취하여 하루종일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초공왕은 그의 주벽을 알고 출군할 때마다 반드시 경계하여 술을 못 마시게 했다. 오늘 진(晉)나라 군사와 초나라 군사가 대치하여 공자 측은 대사가 자신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날 초공왕은 화살을 눈에 맞고 진영으로 돌아와서 부끄럽고 분함을 참지 못했다. 공자측이 나와 말하기를, “이미 두 나라 군사들은 피로에 지쳤습니다. 내일 하루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신은 주공의 치욕을 씻을 계책을 조용히 숙고해 보겠습니다.” 했다. 공자측이 중군으로 돌아와 밤이 깊도록 앉아서 계책을 생각했으나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자 측에게 시중드는 곡양(穀陽)이라는 동자가 있었는데, 공자 측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주인이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 객지에서 보관하고 있던 세 번 빚은 좋은 술을 사발에 데워 드렸다. 공자 측이 냄새를 맡아 보고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술이 아니냐?” 하니, 곡양이 술을 마시고 싶은 주인의 마음을 알고 좌우에서 말을 퍼뜨릴 것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대답하기를, “이것은 술이 아니라 후추탕입니다.” 했다. 공자측도 그 뜻을 짐작하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술맛이 달고 향기로우며 상쾌하여 형언할 수 없었다. 공자측이 묻기를, “후추탕이 더 없느냐?” 하니, 곡양이 말하기를, “더 있습니다.” 했다.
穀陽只說椒湯,只顧滿斟獻上。公子側枯腸久渴,口中只叫:「好椒湯!豎子愛我!」斟來便吞,正不知飲了多少,頹然大醉,倒於坐席之上。楚王聞晉令雞鳴出戰,且魯衛之兵又到,急遣內侍往召公子側來,共商應敵之策。誰知公子側沉沉冥冥,已入醉鄉,呼之不應,扶之不起。但聞得一陣酒臭,知是害酒,回復楚王。楚王一連遣人十來次催并。公子側越催得急,越睡得熟。小豎穀陽泣曰:「我本愛元帥而送酒,誰知反以害之!楚王知道,連我性命難保,不如逃之。」時楚王見司馬不到,沒奈何,只得召令尹嬰齊計議。
곡양은 다만 후추탕이라며 큰 사발에 가득 따라서 바쳤다.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못한 공자 측은 입으로 오로지 외치기를, “후추탕이 맛있구나. 네가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했다. 술을 가지고 오는 대로 다 마셔서 얼마를 마셨는지 알지 못하고 대취하여 비틀거리다가 자리에 쓰러졌다. 그때 초공왕은 진나라 군사들이 닭이 울 무렵에 출전할 계획이며 노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도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내시를 보내 공자 측을 불러서 응전할 대책을 상의하려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공자 측이 술에 깊이 취하여 잠들었으니 시종들이 부르고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자 측의 입에서 술 냄새를 맡은 내시가 과음이라는 것을 알고, 초공왕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초공왕이 계속해서 십여 차례나 사람을 보내 재촉했지만, 공자 측은 재촉할수록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자 곡양이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본시 원수님을 생각하여 술을 갖다 바쳤는데 도리어 원수님을 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초공왕이 알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도망가느니만 못하리라!” 했다. 그때 초공왕은 사마인 공자 측이 오지 않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영윤 영제를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嬰齊原與公子側不合,乃奏曰:「臣逆知晉兵勢盛,不可必勝,故初議不欲救鄭,此來都出司馬主張。今司馬貪杯誤事,臣亦無計可施。不如乘夜悄悄班師,可免挫敗之辱。」楚王曰:「雖然如此,司馬醉在中軍,必為晉軍所獲,辱國非小。」乃召養繇基曰:「仗汝神箭,可擁護司馬回國也。」當下暗傳號令,拔寨都起,鄭成公親帥兵護送出境,只留養繇基斷後。繇基思想道:「等待司馬酒醒,不知何時?」即命左右便將公子側扶起,用革帶縛於車上,叱令逐隊前行,自己率弓弩手三百人,緩緩而退。
공자 영제는 원래 공자 측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에 아뢰기를, “신은 진(晉)나라 군세가 강하여 반드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나라를 구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사마가 주장한 탓에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 사마가 술을 탐하여 일을 그르쳤으니 신 역시 별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밤을 타 조용히 군사를 거두어 회군하면 패전의 치욕만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초공왕이 말하기를, “일이 비록 이렇게 되었으나 사마가 술에 취해 중군에 있소. 반드시 진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힐 것이니, 그 치욕도 작지 않을 것이오.” 하고, 곧 양요기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의 귀신같은 활을 믿으니 사마를 호위하여 귀국하게 하시오.” 했다. 초공왕은 즉시 조용히 명령을 하달하여 영채를 모두 거두어 퇴군하고, 정성공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 밖에까지 호송했다. 다만 양요기가 남겨 배후를 끊게 했다. 양요기가 생각하기를, “사마가 술에서 깨어나기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하고, 즉시 좌우에 명하여 공자 측을 부축하여 일으켜 가죽끈으로 수레 위에다 묶고, 군사들에게 먼저 떠난 군사들의 뒤를 쫓아가게 하였다. 양요기 자신은 궁노수 300명을 인솔하고 천천히 후퇴했다.
黎明,晉軍開營索戰,直逼楚營,見是空幕,方知楚軍已遁去矣。欒書欲追之,士燮力言不可。諜者報:「鄭國各處嚴兵固守。」欒書度鄭不可得,乃唱凱而還。魯衛之兵,亦散歸本國。卻說,公子側行五十里之程,方纔酒醒。覺得身子繃急,大叫:「誰人縛我?」左右曰:「司馬酒醉,養將軍恐乘車不穩,所以如此。」乃急將革帶解去。公子側雙眼尚然朦朧,問道:「如今車馬往那裏走?」左右曰:「是回去的路。」又問:「如何便回?」左右曰:「夜來楚王連召司馬數次,司馬醉不能起。楚王恐晉軍來戰,無人抵敵,已班師矣。」
날이 밝자 진(晉)나라 군사가 진영을 열고 싸움을 걸려고 초나라 진영으로 곧바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빈 막사를 보고 초나라 군사가 이미 달아나 버린 것을 알았다. 난서가 추격하려고 했지만 사섭이 불가하다고 간곡히 말렸다. 첩자가 보고하기를, “정나라가 각 요처에 군사를 배치하고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했다. 난서는 정나라를 함락시킬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개선가를 부르면서 돌아갔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들도 역시 자기 나라로 되돌아갔다. 한편, 공자 측은 50리쯤 와서 비로소 술이 깼다. 그리고 자기 몸이 단단히 묶여 있음을 알고 크게 외치기를, “어떤 놈이 나를 묶었느냐?” 하니, 좌우에 있던 군사들이 말하기를, “사마께서 술에 취하여 양요기 장군께서 수레 위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이렇게 결박했습니다.” 하고, 급히 가죽끈을 풀었다. 공자 측은 두 눈이 아직도 몽롱하여 묻기를, “이 수레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니, 좌우의 군사들이 말하기를,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했다. 공자 측이 또 묻기를, “어찌하여 돌아가느냐?” 하니, 좌우의 군사들이 말하기를, “지난밤에 초공왕께서 계속해서 사마를 불렀으나, 사마께서는 취하여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초공왕께서 진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면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여 퇴군하는 것입니다.” 했다.
公子側大哭曰:「豎子害殺我也!」急喚穀陽,已逃去不知所之矣。楚共王行二百里,不見動靜,方纔放心。恐公子側懼罪自盡,乃遣使傳命曰:「先大夫子玉之敗,我先君不在軍中﹔今日之戰,罪在寡人,無與司馬之事。」嬰齊恐公子側不死,別遣使謂公子側曰:「先大夫子玉之敗,司馬所知也。縱吾王不忍加誅,司馬何面目復臨楚軍之上乎?」公子側嘆曰:「令尹以大義見責,側其敢貪生乎?」乃自縊而死。楚王嘆息不已。此周簡王十一年事。髯仙有詩言酒之誤事。詩云:「眇目君王資老謀,英雄誰想困糟邱?豎兒愛我翻成害,謾說能消萬事愁。」
공자 측은 대성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동자 녀석이 나를 망쳤구나!” 하고, 급히 곡양을 불렀으나 이미 도망쳐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초공왕이 2백 리를 가서 추격군의 동정이 없자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초공왕은 공자 측이 자기의 죄를 두려워하여 자살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사자를 보내 명령을 전하기를, “옛날 대부 자옥이 성복에서 패했을 때 성왕께서 군중에 없었기 때문에 자옥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죽었소. 오늘의 싸움에서는 죄가 과인에게 있으니, 사마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오.” 했다. 공자 영제는 공자 측이 죽음을 면할 것을 걱정하여 따로 사람을 시켜 공자 측에게 말하기를, “옛날 대부 자옥이 패하여 어떻게 했는지는 사마도 알고 있는 일이오. 비록 대왕께서 그대를 주살하지 않았지만 사마는 무슨 면목으로 다시 초나라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겠소?” 하니, 공자 측이 한탄하기를, “영윤이 대의로 나를 책망하니 내가 어찌 삶을 탐하겠는가?” 했다. 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초공왕이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이것은 주간왕 11년의 일이었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술 때문에 일을 망친 것을 읊기를, “애꾸눈 군주가 불러 계책을 묻고자 했으나, 영웅이 지게미 더미에 빠져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동자는 주인을 생각하여 오히려 목숨을 잃게 만들었으니. 술이 만 가지 근심을 없앤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했다.
話分兩頭。卻說晉厲公勝楚回朝,自以為天下無敵,驕侈愈甚。士燮逆料晉國必亂,鬱鬱成疾,不肯醫治,使太祝祈神,只求早死。未幾卒,子范匄嗣。時胥童巧佞便給,最得寵幸,厲公欲用為卿,奈卿無缺。胥童奏曰:「今三郤並執兵權,族大勢重,舉動自專,將來必有不軌之事,不如除之。若除郤氏之族,則位署多虛,但憑主公擇愛而立之,誰敢不從?」厲公曰:「郤氏反狀未明,誅之恐群臣不服。」胥童又奏曰:「鄢陵之戰,郤至已圍鄭君,兩下並車,私語多時,遂解圍放鄭君去了。其間必先有通楚事情。只須問楚公子熊茷,便知其實。」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진여공(晉厲公)은 초나라를 이기고 돌아오자,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교만하고 사치해졌다. 사섭이 진나라에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답답함이 병이 되어 의원의 치료를 거부하고 태축(太祝 ; 제사 기도 담당)을 불러 자기를 빨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했다. 그리하여 얼마 되지 않아 죽고, 그의 아들 범개(范匃)가 직위를 이었다. 그때 진나라에서는 서동(胥童)이 교활하고 아첨하여 진여공의 비위를 맞춰 가장 총애를 받았다. 진여공이 서동을 경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빈자리가 없어서 시킬 수가 없었다. 서동이 아뢰기를, “지금 세 극씨(郤氏)가 병권을 잡고 있어, 그 종족의 세력이 너무 커져 거동이 제멋대로이니 앞으로 틀림없이 모반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금 제거하여야 합니다. 만약 극씨 종족을 제거하면 자리가 많이 빌 것이니, 그때 주군께서 아끼는 신하들을 가려서 임명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진여공이 말하기를, “극씨들의 반역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잡아 죽인다면 여러 신하가 아마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했다. 서동이 또 아뢰기를, “언릉 싸움에서 극지가 정성공을 포위하여 두 사람이 전차에서 내려 오랫동안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눈 후 마침내 포위를 풀어 정성공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틀림없이 먼저 초나라와 내통하려는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포로로 잡혀있는 초나라 공자 웅패(熊茷)에게 물어보면 사실을 알 것입니다.” 했다.
厲公即命胥童往召熊茷。胥童謂熊茷曰:「公子欲歸楚乎?」茷對曰:「思歸之甚,恨不能耳!」胥童曰:「汝能依我一事,當送汝歸。」熊茷曰:「惟命。」胥童遂附耳言:「若見晉侯,問起郤至之事,必須如此恁般登答。﹍﹍」熊茷應允。胥童遂引至內朝來見。晉厲公屏去左右,問:「郤至曾與楚私通否?汝當實言,我放汝回國。」熊茷曰:「恕臣無罪,臣方敢言。」厲公曰:「正要你說實話,何罪之有?」熊茷曰:「郤氏與吾國子重,二人素相交善,屢有書信相通,言:『君侯不信大臣,淫樂無度,百姓胥怨,非吾主也。人心更思襄公,襄公有孫名周,見在京師。他日南北交兵,幸而師敗,吾當奉孫周以事楚。』獨此事臣素知之,他未聞也。」
진여공이 즉시 서동에게 명하여 웅패를 불러오게 했다. 서동이 웅패에게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초나라에 돌아가고 싶습니까?” 하니, 웅패가 대답하기를, “매우 돌아가고 싶으나 할 수가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했다.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부탁한 일을 한 가지 해주면, 마땅히 그대를 귀국시켜 주겠습니다.” 하니, 웅패가 말하기를,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했다. 서동이 마침내 귀에 대고 말하기를, “만약 주군을 뵐 때 극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이러이러하게 대답하면 됩니다.” 하니, 웅패가 응락했다. 서동이 마침내 웅패를 이끌고 조정에 나아가 진여공을 알현했다. 진여공이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웅패에게 묻기를, “극지가 일찍이 초나라와 내통을 했는지 네가 마땅히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그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겠소.” 하니, 웅패가 말하기를, “신에게 죄를 주지 않는다면 신이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했다. 진여공이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하라고 해놓고 어찌 죄를 주겠소?” 하니, 웅패가 말하기를, “극지와 우리나라의 자중(공자 영제)은 이전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여러 번 편지도 주고받았는데, 편지에 말하기를 ‘군주께서 대신들을 믿지 않고 과도하게 음란한 즐거움에 빠져, 백성들이 원망하여 임금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진양공(晉襄公)을 사모하여, 진양공의 손자 주(周)가 주나라 도읍에 있는데, 후일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울 때 다행히 진나라가 지면, 우리는 양공의 손자 주를 받들어 초나라를 섬기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저만 알고 있는 사실이며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했다.
(按晉襄公之庶長子名談,自趙盾立靈公,談避居於周,在單襄公門下。後談生下一子,因是在周所生,故名曰周。當時靈公被弒,人心思慕文公,故迎立公子黑臀。黑臀傳獳,獳傳州蒲。至是,州蒲淫縱無子,人心復思慕襄公。故胥童教熊茷使引孫周,以搖動厲公之意。)熊茷言之未已,胥童接口曰:「怪得前日鄢陵之戰,郤犨與嬰齊對陣,不發一矢,其交通之情可見矣。郤至明縱鄭君,又何疑焉?主公若不信,何不遣郤至往周告捷,使人窺之,若果有私謀,必與孫周私下相會。」厲公曰:「此計甚當。」遂遣郤至獻楚捷於周。
(살펴보면, 옛날 진양공(晉襄公)의 서장자 담(淡)은 조돈이 영공(靈公)을 추대하자 주나라로 몸을 피신하여 선양공(單襄公)의 문객이 되었다. 후에 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주나라에서 낳았다고 해서 이름을 주(周)라고 했다. 그때 진영공이 시해되자 백성들이 문공의 치세를 그리워하여 공자 흑둔(黑臀)을 맞이하여 진나라 군주로 세웠다. 흑둔은 진경공(晉景公) 유(獳)에게, 진경공 유(獳)는 진여공(晉厲公) 주포(州蒲)에게 군위를 전하여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진여공 주포(州蒲)가 황음무도하고 자식을 낳지 못하자 진나라 사람들이 다시 진양공(晉襄公)의 치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동이 웅패에게 교사하여 양공의 손자 주(周)를 데려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위증하여 진여공의 마음을 흔들게 했다.) 웅패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서동이 중간에 나서서 말하기를, “지난번 언릉 싸움에서 또 이상한 일은 극주(郤犨)와 영제(嬰齊)가 대치하고 있는 중에도 화살 한 발 쏘지 않았으니, 그들이 서로 내통한 정황을 알 수 있습니다. 극지(郤至)가 정나라 군주를 놓아준 것은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주공께서 만약 믿지 않으신다면 어찌하여 극지를 주나라에 보내어 승첩을 올리고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과연 음모를 꾸민다면 반드시 공손 주(公孫周)와 사사로이 만날 것입니다.” 했다. 진여공이 말하기를 “그 계책이 매우 합당하다.” 하고, 즉시 극지를 주나라에 보내 초나라에 이긴 승전보를 올리게 했다.
胥童陰使人告孫周曰:「晉國之政,半在郤氏,今溫季來王都獻捷,何不見之?他日公孫復還故國,也有個相知。」孫周以為然。郤至至周,公事已畢,孫周遂至公館相拜。未免詳叩本國之事,郤至一一告之,談論半日而別。厲公使人探聽回來,傳說如此。熊茷所言,果然是實。遂有除郤氏之意,尚未發也。一日,厲公與婦人飲酒,索鹿肉為饌甚急。使寺人孟張往市取鹿,市中適當缺乏。郤至自郊外載一鹿於車上,從市中而過。孟張並不分說,奪之以去。郤至大怒,彎弓搭箭,將孟張射死,復取其鹿。
서동이 몰래 사람을 보내 공손 주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 정사의 절반은 극씨(郤氏)들에게 있습니다. 지금 온계(溫季 ; 극지)가 왕도에 가서 언릉 싸움의 승첩을 천자께 올리려 하니, 어찌 만나보지 않겠습니까? 후일에 공손께서 고국에 돌아오실 때를 대비하여 서로 알아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했다. 공손주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극지가 주나라에 도착하여 공무가 끝나자 공손 주가 공관에 가서 서로 인사를 했다. 공손 주는 본국의 일을 상세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고, 극지는 하나하나 대답하여 반나절이나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진여공이 보낸 사람이 그 일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웅패가 한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마침내 극지를 제거할 뜻을 굳히고 아직 그 뜻을 밝히지 않았다. 어느 날 진여공이 부인과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사슴고기 요리를 찾았다. 내시 맹장(孟張)을 시켜 시장에 가서 사슴을 구해 오라고 했다. 시장에도 마침 구할 수 없었다. 그때 극지가 성 밖에서 잡은 사슴 한 마리를 수레에 싣고 성안으로 들어와 지나갔다. 맹장이 설명할 것도 없이 그 사슴을 빼앗아 갔다. 극지가 대로하여 화살을 쏘아 맹장을 죽이고 사슴을 되찾았다.
厲公聞之,怒曰:「季子太欺余也!」遂召胥童夷羊五等一班嬖人共議,欲殺郤至。胥童曰:「殺郤至,則郤錡郤犨必叛,不如並除之。」夷羊五曰:「公私甲士,約可八百人,以君命夜帥以往,乘其無備,可必勝也。」長魚矯曰:「三郤家甲,倍於公宮,鬥而不勝,累及君矣。方今郤至兼司寇之職,郤犨又兼士師,不如詐為獄訟,覷便刺之,汝等引兵接應可也。」厲公曰:「妙哉!我使力士清沸魋助汝。」長魚矯打聽三郤是日在講武堂議事,乃與清沸魋各以雞血塗面,若爭鬥相殺者,各帶利刀,扭結到講武堂來,告訴曲直。
진여공이 듣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계자(극지)라는 놈이 나를 몹시 업신여기는구나!” 하고, 곧 서동과 이양오(夷羊五)등 여러 총신을 불러 극지를 죽일 것을 의논했다. 서동이 말하기를, “극지를 죽이면 극기(郤錡), 극주(郤犨)가 반드시 반역을 할 것입니다. 한꺼번에 제거하는 게 좋습니다.” 하니, 이양오가 말하기를, “궁궐 군사와 사병이 약 800명인데, 주군의 명으로 밤에 거느리고 가서 준비가 안 된 극씨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했다. 장어교(長魚矯)가 말하기를, “극씨 세 집안의 사병이 궁궐의 갑사보다 두 배가 더 많아서 싸우면 이길 수 없습니다. 화가 주군께 미치게 됩니다. 얼마 전에 극지가 사구(司寇)의 직을 겸했고, 극주가 또 사사(士師)를 겸했습니다. 우리가 거짓으로 송사를 벌여서 그들에게 나아가 기회를 보아서 찌르고 그대들이 군사를 이끌고 접응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묘한 계책이다! 나는 장사 청비퇴(淸沸魋)를 시켜 너희를 돕겠다.” 했다. 장어교는 그날이 바로 극씨들이 강무당(講武堂)에 모여 일을 의논하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그는 청비퇴와 함께 각기 닭 피를 얼굴에 바르고 각자 날카로운 칼을 지니고 마치 서로 죽이려고 싸우는 사람처럼 서로 엉켜서 강무당에 이르러 옳고 그름을 판결해 달라고 고소했다.
郤犨不知是計,下坐問之。清沸魋假作稟話,捱到近身,抽刃刺犨,中其腰,撲地便倒。郤錡急拔佩刀來砍沸魋,卻是長魚矯接住,兩個在堂下戰將起來。郤至捉空趨出,升車而逃。沸魋把郤犨再砍一刀,眼見得不活了,便來夾攻郤錡。錡雖是武將,爭奈沸魋有千觔力氣的人,長魚矯且是年少手活,一個人怎戰得他兩個人過,亦被沸魋擉倒。長魚矯見走了郤至,道:「不好了!我追趕他去。」也是三郤合當同日并命,正走之間,遇著胥童夷羊五引著八百甲士來到,口中齊叫:「晉侯有旨,只拿謀反郤氏,不得放走了!」
극주가 그 음모를 모르고 자리에 앉아 물었다. 청비퇴가 거짓으로 고하는 척 하며, 몸이 극주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뽑아 극주를 찔렀다. 극주는 허리에 칼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곁에 있던 극기가 급히 칼을 빼서 청비퇴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장어교가 달려들어 극기를 가로막아 두 사람이 강무당 아래에서 싸웠다. 극지가 그 틈을 타서 뛰어나가 수레를 타고 달아났다. 청비퇴가 극주를 다시 한번 칼로 찔러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극기를 협공했다. 극기는 비록 무장이었으나 천근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청비퇴와, 젊고 손이 빠른 장어교 두 사람을 자기 혼자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었다. 극기도 역시 청비퇴의 칼에 찔려서 쓰러졌다. 장어교가 도망치는 극지를 보고 말하기를, “이거 야단났소! 내가 저놈을 추격해야겠소.” 했다. 세 극씨가 같은 날 죽게 될 운명이었던지 극지가 수레를 타고 달아나다가, 마침 8백 명의 무사를 이끌고 오는 서동과 이양오와 마주쳤다. 그들은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기를, “주군의 명이다. 모반한 극씨를 잡아라. 놓쳐서는 안 된다.” 했다.
郤至見不是頭,回車轉來,劈面撞見長魚矯,一躍上車。郤至早已心慌,不及措手,被長魚矯亂砍,便割了頭。清沸魋把郤錡郤犨都割了頭,血淋淋的三顆首級,提入朝門。有詩為證:「無道君昏臣不良,紛紛嬖倖擅朝堂﹔一朝過聽讒人語,演武堂前起戰場。」卻說,上軍副將荀偃,聞本帥郤錡在演武堂遇賊,還不知何人。即時駕車入朝,欲奏聞討賊。中軍元帥欒書,不約而同,亦至朝門,正遇胥童引兵到來。書偃不覺大怒,喝曰:「我只道何人為亂,原來是你鼠輩!禁地威嚴,甲士誰敢近前?還不散去!」胥童也不答話,即呼於眾曰:「欒書荀偃,與三郤同謀反叛,甲士與我一齊拿下,重重有賞!」
극지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수레를 돌리자 장어교와 마주치게 되었다. 장어교가 몸을 솟구쳐 수레에 뛰어올랐다. 극지가 이미 황망하여 미쳐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장어교의 칼에 무수히 찔렸다. 장어교는 극지의 목을 잘랐다. 청비퇴도 극기와 극주의 목을 잘라서 가지고 왔다. 그들은 피가 뚝뚝 흐르는 세 사람의 수급을 들고 궁궐로 들어갔다. 증거하는 시에 이르기를, “무도한 혼군에 망나니 신하로다. 못된 총신들이 조당을 함부로 어지럽히니, 어느 날 아침에 참소하는 말을 듣고, 연무당(演武堂) 앞을 전쟁터로 만들었구나!” 했다. 한편, 상군 부원수 순언(荀偃)은 상군 원수 극기가 연무당에서 도적을 만나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누가 그랬는지 모르고 있었다. 순언은 즉시 수레를 몰아 입조하여 주군께 아뢰고 도적들을 토벌하려고 했다. 중군 원수 난서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서로 만나 조문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서동이 이끄는 군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난서와 순언이 부지중에 크게 노하여 꾸짖기를, “나는 어떤 놈들이 변란을 일으켰나 했더니 바로 쥐새끼 같은 네 놈들이었구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위엄 있는 곳에 감히 갑사들을 데리고 가까이 오다니, 빨리 군사들을 해산시키지 못하겠느냐?” 하니, 서동이 대답하지 않고 즉시 무사들을 향하여 소리치기를, “난서와 순언은 세 극씨와 같이 반역을 꾀한 자들이다. 우리가 잡으면 큰상이 있을 것이다.” 했다.
甲士奮勇上前,圍裹了書偃二人,直擁至朝堂之上。厲公聞長魚矯等幹事回來,即時御殿。看見甲士紛紛,倒喫了一驚,問胥童曰:「罪人已誅,眾軍如何不散?」胥童奏曰:「拿得叛黨書偃,請主公裁決!」厲公曰:「此事與書偃無與。」長魚矯跪至晉侯膝前,密奏曰:「欒郤同功一體之人,荀偃又是郤錡部將。三郤被誅,欒荀二氏必不自安,不久將有為郤氏復仇之事。主公今日不殺二人,朝中不得太平。」厲公曰:「一朝而殺三卿,又波及他族,寡人不忍也!」乃恕書偃無罪,還復原職。書偃謝恩回家。長魚矯嘆曰:「君不忍二人,二人將忍於君矣!」即時逃奔西戎去了。
무사들이 용기를 내어 덤벼들어 난서와 순언을 에워싸서 조당으로 끌고 갔다. 진여공이 장어교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어전에 나가서 무사들이 떠드는 것을 보고, 놀라서 서동에게 묻기를, “죄인들이 이미 죽었는데 무사들을 왜 해산시키지 않는가?” 하니, 서동이 아뢰기를, “반역자의 일당인 난서와 순언을 잡아 왔습니다. 주공께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했다. 진여공이 말하기를, “이번 일은 난서와 순언과는 무관한 일이다.” 하니, 장어교가 진여공 앞에 무릎을 꿇고 몰래 아뢰기를, “난서와 극씨들은 공을 함께 세운 한 몸 사이이며 순언 또한 극기의 부원수입니다. 세 극씨가 모두 주살되었으니 난서와 순언도 반드시 불안함을 느껴 머지않아 극씨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주공께서 오늘 두 사람을 죽이지 않으신다면 조정은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진여공이 말하기를, “하루아침에 삼경을 죽였는데 또다시 다른 종족에게 파급시키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즉시 난서와 순언은 죄가 없다며 용서하고 원래의 직을 유지시켜서 돌려보냈다. 난서와 순언은 은혜에 감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장어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주군이 두 사람을 차마 죽이지 못했으나, 두 사람은 주군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하고, 즉시 서융으로 달아나 버렸다.
厲公重賞甲士,將三郤屍首,號令朝門,三日,方聽放葬。其郤氏之族,在朝為官者,姑免死罪,盡罷歸田。以胥童為上軍元帥,代郤錡之位,以夷羊五為新軍元帥,代郤犨之位,以清沸魋為新軍副將,代郤至之位。楚公子熊茷釋放回國。胥童既在卿列,欒書荀偃羞與同事,每每稱病不出。胥童恃晉侯之寵,不以為意。一日,厲公同胥童出遊於嬖臣匠麗氏之家。家在太陰山之南,離絳城二十餘里,三宿不歸。荀偃私謂欒書曰:「君之無道,子所知也。吾等稱疾不朝,目下雖得苟安,他日胥童等見疑,復誣我等以怨望之名,恐三郤之禍,終不能免,不可不慮。」
진여공이 무사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세 극씨의 시신을 조문에 늘어놓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장례를 지낼 수 있게 했다.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극씨 종족들은 겨우 죽음을 면하여 모두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내려갔다. 서동이 상군 원수가 되어 극기의 자리를 대신하고, 이양오가 신군 원수가 되어 극주의 자리를 대신했으며, 청비퇴가 신군 부원수가 되어 극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초나라 공자 웅패도 석방하여 초나라로 돌려보냈다. 서동이 육경 중의 한 명이 되니, 난서와 순언이 그와 함께 일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매번 병이라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서동은 진여공의 총애를 믿고 못하는 짓이 없었다. 하루는 진여공이 서동과 함께 총신 장려씨(匠麗氏)의 집으로 놀러 갔다. 그 집은 태음산(太陰山) 남쪽에 있는데, 강성(絳城)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진여공이 거기에서 3일 밤을 자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순언이 몰래 난서에게 말하기를, “주군의 무도함은 그대도 알 것이오. 우리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아서, 지금 당장은 연명하고 있지만, 후일 서동 등이 의심하여 다시 우리가 원망하고 있다고 모함하면, 세 극씨가 당한 화를 끝내 면하지 못할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소.” 했다.
欒書曰:「然則何如?」荀偃曰:「大臣之道,社稷為重,君為輕。今百萬之眾,在子掌握,若行不測之事,別立賢君,誰敢不從?」欒書曰:「事可必濟乎?」荀偃曰:「龍之在淵,沒人不可窺也,及其離淵就陸,童子得而制之。君遊於匠麗氏,三宿不返,此亦離淵之龍矣,尚何疑哉?」欒書嘆曰:「吾世代忠於晉家,今日為社稷存亡,出此不得已之計,後世必議我為弒逆,我亦不能辭矣!」乃商議忽稱病愈,欲見晉侯議事。預使牙將程滑,將甲士三百人,伏於太陰山之左右。二人到匠麗氏謁見厲公,奏言:「主公棄政出遊,三日不歸,臣民失望,臣等特來迎駕還朝。」厲公被強不過,只得起駕。胥童前導,書偃後隨。
난서가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순언이 말하기를, “대신의 도리에는 사직이 중하고 군주는 가볍습니다. 지금 우리 진(晉)나라 백만대군을 그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상할 수 없는 일을 일으켜 어진 군주를 세우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소?” 했다. 난서가 말하기를, “일을 일으키면 틀림없이 성공하겠소?” 하니, 순언이 말하기를, “용이 연못에 있으면 아무도 엿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연못을 떠나 뭍에 나오면 삼척동자라도 용을 잡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주군이 장려씨 집에 놀러 가서 3일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연못을 떠난 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일이 성공하기를 의심하겠소?” 했다. 난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종족은 대대로 진(晉)나라에 충성했는데, 오늘 사직의 존망을 위해서 부득이 이 계책을 내었으나, 후세에 반드시 나를 주군을 죽인 자라고 할 것이니, 나 또한 어쩔 수 없구나!” 했다. 그들은 상의한 후에 문득 병이 나았다고 칭하고 군주를 뵙고 중요한 일을 의논해야겠다고 했다. 미리 아장 정활(程滑)을 시켜 무장병 300명을 태음산 좌우에 매복시켰다. 두 사람이 장려씨의 집에 이르러 진여공을 뵙고 아뢰기를, “주공께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놀러 나와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시니 신하와 백성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 등이 특별히 와서 주군의 어가를 모시고 조정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하니, 진여공이 억지를 부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어가를 타고 출발했다. 서동이 앞에 서고 난서와 순언이 뒤따랐다.
行至太陰山下,一聲砲響,伏兵齊起。程滑先將胥童砍死。厲公大驚,從車上倒跌下來。書偃吩咐甲士將厲公拿住。屯兵於太陰山下,囚厲公於軍中。欒書曰:「范韓二氏,將來恐有異言,宜假君命以召之。」荀偃曰:「善。」乃使飛車二乘,分召士匄韓厥二將。使者至士匄之家,士匄問:「主公召我何事?」使者不能答。匄曰:「事可疑矣。」即遣心腹左右,打聽韓厥行否。韓厥先以病辭。匄曰:「智者所見略同也。」欒書見匄厥俱不至,問荀偃:「此事如何?」偃曰:「子已騎虎背,尚欲下耶?」欒書點頭會意。
행렬이 태음산 아래 이르렀을 때 포 소리가 한번 울리더니 복병이 일제히 달려 나왔다. 정활(程滑)이 먼저 서동을 베어 죽였다. 진여공이 크게 놀라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난서와 순언이 무사에게 분부하여 진여공을 잡아오게 했다. 태음산 아래에 영채를 짓고 진여공을 군중에 가두었다. 난서가 말하기를, “범씨(范氏)와 한씨(韓氏) 두 집안 사람들이 앞으로 다른 소리를 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군주의 명령을 가장하여 부릅시다.” 하니, 순언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이오.” 했다. 이에 날랜 수레 두 대를 보내어 사개(士匄 ; 범개)와 한궐 두 장수를 부르러 보냈다. 사자가 사개의 집에 도착하니, 사개가 묻기를, “주공께서 무슨 일로 나를 부르시는가?” 했다. 사자가 대답을 못하자, 사개가 말하기를, “수상한 일이로구나!” 하고, 즉시 심복을 보내 한궐이 갔는지 어떤지 탐문하게 했다. 한궐은 먼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고 했다. 사개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의 의견은 대략 같다.” 했다. 난서가 사개와 한궐이 모두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순언에게 묻기를,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순언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는데 어찌 내리려고 하시오?” 하니, 난서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 뜻을 알아들었다.
是夜,命程滑獻酖酒於厲公,公飲之而薨。即於軍中殯殮,葬於翼城東門之外。士匄韓厥驟聞君薨,一齊出城奔喪,亦不問君死之故。葬事既畢,欒書集諸大夫共議立君。荀偃曰:「三郤之死,胥童謗謂欲扶立孫周,此乃讖也。靈公死於桃園,而襄遂絕後,天意有在,當往迎之。」群臣皆喜。欒書乃遣荀罃如京師,迎孫周為君。周是時十四歲矣,生得聰穎絕人,志略出眾。見荀罃來迎,問其備細,即日辭了單襄公,同荀罃歸晉。行至地名清原,欒書、荀偃、士匄、韓厥一班卿大夫,齊集迎接。
그날 밤에 정활에게 명하여 진여공에게 짐주(독주)를 바쳤다. 진여공이 그것을 마시고 죽었다. 곧 군중에서 염을 한 후에 익성(翼城)의 동문 밖에 장사지냈다. 사개와 한궐은 진여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이 성을 나와 문상을 하였으나 임금이 어떻게 죽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진여공의 장례가 끝나자 난서가 여러 대부들을 모아, 누구를 군주로 세워야 하는지를 의논했다. 순언이 말하기를, “세 극씨가 죽은 것은 공손 주를 모셔다 군주의 자리에 앉히려 한다고 서동이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영공이 도원에서 죽자 진양공의 후사는 마침내 끊어졌습니다. 하늘의 뜻이 (공손 주에게) 있으니, 마땅히 가서 모셔 와야 합니다.” 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기뻐했다. 난서는 즉시 순앵을 주나라 도읍에 보내 공손 주를 모셔와서 진(晉)나라 군주로 세우기로 했다. 그때 공손 주는 나이가 14살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지략이 출중했다. 순앵이 모시러 온 것을 보고 국내 사정을 자세히 물어본 후, 그날로 선양공(單襄公)을 하직하고, 순앵과 함께 진(晉)나라로 돌아왔다. 공손 주의 행렬이 청원(淸原)이라는 곳에 이르자, 난서, 순언, 사개, 한궐 등의 대부들이 모두 모여 영접했다.
孫周開言曰:「寡人羈旅他邦,且不指望還鄉,豈望為君乎?但所貴為君者,以命令所自出也。若以名奉之,而不遵其令,不如無君矣。卿等肯用寡人之命,只在今日,如其不然,聽卿等更事他人。孤不能擁空名於上,為州蒲之續也。」欒書等俱戰慄再拜曰:「群臣願得賢君而事,敢不從命!」既退,欒書謂諸臣曰:「新君非舊比也,當以小心事之。」孫周進了絳城,朝於太廟,嗣晉侯之位,是為悼公。即位之次日,即面責夷羊五清沸魋等逢君于惡之罪,命左右推出朝門斬之,其族俱逐出境外。又將厲公之死,坐罪程滑,磔之於市。嚇得欒書終夜不寐。
공손 주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과인은 타국에서 생장한 사람이며 그렇다고 고국에 돌아오기를 원한 것도 아니오. 그러니 어찌 군주가 되기를 바랐겠소? 군주가 존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오. 만일 이름뿐인 군주로 받들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군주는 없는 편이 낫소. 경 등이 과인의 명령을 따르겠다면 오로지 오늘 중에 결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아서 모시기 바라오. 나는 허울뿐인 이름을 갖고 있었던 주포(州蒲 ; 진여공)처럼 되지는 않겠소.” 했다. 난서 등이 모두 몸을 떨면서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여러 신하는 어진 임금을 받들어 모시기를 원하옵니다. 감히 전하의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했다. 공손 주 앞에서 물러 나와서 난서가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새 주군은 옛날 진여공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마땅히 조심해서 모셔야겠습니다.” 했다. 공손 주가 신강성에 입성하여 태묘에 고하고 진(晉)나라 군주 자리를 이었다. 이가 진도공(晉悼公)이다. 즉위한 다음 날, 즉시 이양오와 청비퇴 등을 불러다 임금을 잘못 모신 죄를 꾸짖었다. 좌우에 명하여 조문 밖으로 끌어내어 참수하게 하고, 그 종족들은 모두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 또한 진여공을 죽인 죄를 정활에게 물어 시장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도록 하였다. 난서가 깜짝 놀라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次日,即告老致政,薦韓厥以自代。未幾,驚憂成疾而卒。悼公素聞韓厥之賢,拜為中軍元帥,以代欒書之位。韓厥託言謝恩,私奏於悼公曰:「臣等皆賴先世之功,得侍君左右。然先世之功,無有大於趙氏者。衰佐文公,盾佐襄公,俱能輸忠竭悃,取威定伯。不幸靈公失政,寵信奸臣屠岸賈,謀殺趙盾,出奔僅免。靈公遭兵變,被弒於桃園。景公嗣立,復寵屠岸賈。岸賈欺趙盾已死,假稱趙氏弒逆,追治其罪,滅絕趙宗,臣民憤怨,至今不平。天幸趙氏有遺孤趙武尚在,主公今日賞功罰罪,大修晉政,既已正夷羊五等之罰,豈可不追錄趙氏之功乎?」
다음날 그는 늙었다고 벼슬을 그만두고 한궐을 자기의 후임으로 천거했다. 오래지 않아 놀라고 근심하여 병이 들어 죽었다. 진도공이 평소에 한궐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한궐을 중군 원수로 삼아 난서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한궐이 감사의 말을 드린다는 핑계로 도공에게 몰래 아뢰기를, “신 등은 모두가 선대의 공로에 힘입어 군주의 좌우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대의 공로로는 조씨보다 큰 집안이 없습니다. 조쇠가 진문공을 보좌했고, 조돈이 진양공을 보좌하여 모두 충성을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나라에 위엄을 갖추게 하여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진영공께서 실정을 하고 간신 도안고를 총애하여 조돈을 죽이려고 하자, 달아나 겨우 면했습니다, 진영공은 군사들의 반란을 맞아 도원에서 피살되고, 진성공, 진경공이 이었으나 역시 도안고를 총애했습니다. 도안고는 조돈이 이미 죽었으므로 조씨에게 시역의 죄를 덮어씌워 그 죄를 다스린다고 조씨 종족을 멸절시켜 버렸습니다. 신하와 백성들이 그 일을 원망하여 지금도 불평합니다. 천행으로 조씨의 유복자 조무(趙武)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주공께서 지금 공을 상주고 죄를 벌하여 진나라 정사를 크게 고치시니. 이미 이양오 등의 죄는 벌하여 바로 잡으셨으면서 어찌 조씨의 공로에 대해서는 추가하여 살피지 않으십니까?” 했다.
悼公曰:「此事寡人亦聞先人言之,今趙氏何在?」韓厥對曰:「當時岸賈索趙氏孤兒甚急,趙之門客曰公孫杵臼程嬰,杵臼假抱遣孤,甘就誅戮,以脫趙武﹔程嬰將武藏匿於盂山,今十五年矣。」悼公曰:「卿可為寡人召之。」韓厥奏曰:「岸賈尚在朝中,主公必須秘密其事。」悼公曰:「寡人知之矣。」韓厥辭出宮門,親自駕車,往迎趙武於盂山。程嬰為御,當初從故絳城而出,今日從新絳城而入,城郭俱非,感傷不已。韓厥引趙武入內宮,朝見悼公。悼公匿於宮中,詐稱有疾。明日,韓厥率百官入宮問安,屠岸賈亦在。悼公曰:「卿等知寡人之疾乎?只為功勞簿上有一件事不明,以此心中不快耳!」
진도공이 말하기를, “그 일에 대하여는 나도 역시 선친에게서 들었소. 지금 조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한궐이 대답하기를, “당시 도안고가 조씨고아를 아주 급하게 찾았지만, 조씨의 문객 공손저구와 정영이 조씨고아를 구하고자, 공손저구는 정영의 갓난아이를 안고 스스로 도안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무를 위급한 지경에서 빼내었습니다. 정영이 고아 조무를 데리고 우산(盂山)에 가서 숨은 지 이제 15년이 되었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경이 과인을 위해서 그들을 불러오시오.” 하니, 한궐이 아뢰기를, “도안고가 아직 조정에 있으니, 주공께서는 반드시 이 일을 비밀에 부치셔야 합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알겠소!” 했다. 한궐이 진도공에게 인사를 드리고 궁문을 나가서 몸소 수레를 몰아 우산으로 조무를 맞이하러 갔다. 15년 전에 정영이 수레를 몰아 강성(絳城)을 나갔다가, 지금 신강성(新絳城)으로 돌아오니 성곽이 모두 달라서 정영의 마음은 감상에 젖었다. 한궐이 조무를 데리고 내궁으로 들어가서 진도공을 뵈었다. 진도공은 조무를 내궁에 감춰두고 자기는 거짓으로 병이 났다고 했다. 다음날 한궐이 백관들을 인솔하고 궁궐에 들어가서 문안을 올렸다. 도안고 역시 백관들 중에 있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경들은 내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아시오? 조정의 공적부에 분명치 않은 일이 있어 그 일로 불쾌하여 병이 났소!” 했다.
諸大夫叩首問曰:「不知功勞簿上,那一件不明?」悼公曰:「趙衰、趙盾,兩世立功於國家,安忍絕其宗祀?」眾人齊聲應曰:「趙氏滅族,已在十五年前,今主公雖追念其功,無人可立。」悼公即呼趙武出來,遍拜諸將。諸將曰:「此位小郎君何人?」韓厥曰:「此所謂孤兒趙武也。向所誅趙孤,乃門客程嬰之子耳。」屠岸賈此時魂不附體,如癡醉一般,拜伏於地上,不能措一詞。悼公曰:「此事皆岸賈所為,今日不族岸賈,何以慰趙氏冤魂於地下?」叱左右:「將岸賈綁出斬首!」即命韓厥同趙武,領兵圍屠岸賈之宅,無少長皆殺之。
여러 대부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묻기를, “공적부에 분명하지 않은 일이 무엇입니까?” 하니, 진도공이 말하기를, “조쇠, 조돈 부자는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어찌하여 그 집안의 종사가 끊어졌소?” 했다. 여러 사람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조씨 집안이 멸족된 것은 이미 15년 전 일입니다. 이제 주공께서 비록 조씨 집안의 공로를 추모하여 상을 주시려고 해도 그 후손이 없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즉시 조무를 불러내어 여러 신하에게 두루 인사를 드리게 했다. 여러 신하가 묻기를, “이 젊은이는 누구입니까?” 하니, 한궐이 말하기를, “이 젊은이가 이른바 조씨고아 조무입니다. 지난날 죽은 조씨고아는 바로 조씨 집안의 문객 정영의 아들이었습니다.” 했다. 도안고는 이때 넋이 나가고 얼이 빠져서 아무말도 못하고 땅에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도안고가 저지른 일이오. 지금 도안고를 족멸(族滅)하지 않고는 어찌 지하에 있는 조씨들의 원혼을 위로할 수 있겠소?” 하고, 좌우에 외치기를, “도안고를 결박해서 밖으로 끌고 나가 참수하라!” 했다. 즉시 한궐에게 명하여 조무와 같이 군사를 끌고 가서 도안고의 집을 포위하여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라고 했다.
趙武請岸賈之首,祭於趙朔之墓。國人無不稱快。潛淵詠史詩曰:「岸賈當時滅趙氏,今朝趙氏滅屠家﹔只爭十五年前後,怨怨仇仇報不差!」晉悼公既誅岸賈,即召趙武於朝堂,加冠,拜為司寇,以代岸賈之職。以前田祿,悉給還之。又聞程嬰之義,欲用為軍正。嬰曰:「始吾不死者,以趙氏孤未立也。今已復官報仇矣,豈可自貪富貴,令公孫杵臼獨死?吾將往報杵臼於地下!」遂自刎而亡。趙武撫其屍痛哭,請於晉侯,殯殮從厚,與公孫杵臼同葬於雲中山,謂之「二義」塚。趙武服齊衰三年,以報其德。有詩為證:「陰谷深藏十五年,褲中兒報祖宗冤﹔程嬰杵臼稱雙義,一死何須問後先?」
조무가 도안고의 수급을 청하여 조삭의 묘에 바쳐 제사지냈다. 나라 안의 백성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잠연(潛淵) 선생의 영사시에 이르기를, “전날에는 도안고가 조씨를 멸했는데, 이제는 조씨가 도씨를 멸했구나. 15년 동안의 세월을 다투어, 원한을 원한으로 원수를 원수로 갚았도다!” 했다. 진도공은 이미 도안고를 처형하고 즉시 조무를 조당에 불러 관을 씌워 주고 사구(司寇)로 임명하여 도안고의 벼슬을 대신하게 했다. 그리고 옛날 조씨의 전답과 녹봉을 모두 돌려줬다. 또 정영의 의리를 듣고 그를 군정(軍正 ; 군 법무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정영이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조씨를 따라 죽지 않은 이유는 조씨의 고아를 돌봐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미 조씨의 관직이 복구되고 원수도 갚았으니 어찌 내가 스스로 부귀를 탐하여 공손저구만 홀로 죽게 하겠는가? 나는 지하에 있는 공손저구에게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조무가 그 시체를 어루만지면서 통곡했다. 진도공에게 청하여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공손저구와 함께 운중산(雲中山)에 묻었다. 사람들이 그 무덤을 두 의인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조무가 정영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시가 있어 증거하기를, ”깊은 골짜기에 숨은 지 15년 만에, 바지 속에 숨겼던 아이가 문중의 원한을 갚았다. 정영과 공손저구를 한 쌍의 의로운 사람이라고 일컬으니, 한번 죽었는데 어찌 선후를 묻겠는가?” 했다.
再說,悼公既立趙武,遂召趙勝於宋,復以邯鄲界之。又大正群臣之位,賢者尊之,能者使之。錄前功,赦小罪,百官濟濟,各稱其職。且說幾個有名的官員:韓厥為中軍元帥,士匄副之﹔荀罃為上軍元帥,荀偃副之﹔欒黶為下軍元帥,士魴副之﹔趙武為新軍元帥,魏相副之﹔祁奚為中軍尉,羊舌職副之﹔魏絳為中軍司馬﹔張老為候奄﹔韓無忌掌公族大夫﹔士渥濁為太傅﹔賈辛為司空﹔欒糾為親軍戎御﹔荀賓為車右將軍﹔程鄭為贊僕﹔鐸遏寇為輿尉﹔籍偃為輿司馬。百官既具,大修國政:蠲逋薄斂,濟乏省役,振廢起滯,恤鰥惠寡,百姓大悅。宋魯諸國聞之,莫不來朝。惟有鄭成公因楚王為他射損其目,感切於心,不肯事晉。
한편, 진도공이 이미 조무를 다시 세워주고, 곧 송나라에 망명한 조승을 불러서 한단의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지위를 크게 바로잡아 어진 이는 높여서 존중하고, 재능 있는 자는 기용하며, 전날의 공로를 기록하고, 작은 죄는 용서하며, 많은 관리가 각각 능력과 자격에 따라 벼슬을 받았다. 그중에서 유명한 관원만 열거해 보면, 한궐이 중군 원수가 되고, 사개가 부원수 됐으며, 순앵(荀罃)이 상군 원수가 되고, 순언이 부원수가 되었으며, 난염(欒黶)이 하군 원수가 되고, 사방(士魴)이 부원수가 되었으며, 조무가 신군 원수가 되고, 위상이 부원수가 되었으며, 기해(祁奚)가 중군위가 되고 양설직이 부위(副尉)가 되었으며, 위강(魏絳)이 중군 사마가 되고, 장로(張老)가 후엄(候奄 ; 정찰 담당)이 되었으며, 한무기(韓無忌)는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고, 사악탁(士渥濁)은 태부(太傅)가 되었으며, 가신(價辛)은 사공(司空)이 되고, 난규(欒糾)는 친군융어(親軍戎御)가 되었으며, 순빈(荀賓)이 차우장군(車右將軍)이 되고, 정정(程鄭)이 찬복(贊僕)이 되었으며, 탁알구(鐸遏寇)는 여위(輿尉)가 되고, 적언(籍偃)은 여사마(輿司馬)가 되었다. 여러 벼슬이 갖추어지자 국정이 크게 쇄신되었다. 체납한 세금을 면제하고 부세를 가볍게 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부역을 줄여주었다. 쇠잔한 것을 일으키고 막힌 것을 뚫고, 홀아비와 과부를 돌봐 주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송나라과 노나라 등이 그 소식을 듣고 조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직 정성공만은 초공왕이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한쪽 눈을 잃은 것에 감복하여 진(晉)나라를 섬기지 않았다.
楚共王聞厲公被弒,喜形於色,正思為復仇之舉。又聞新君嗣位,賞善罰惡,用賢圖治,朝廷清肅,內外歸心,伯業將復興,不覺喜變為愁。即召群臣商議,要去擾亂中原,使晉不能成伯。令尹嬰齊束手無策。公子壬夫進曰:「中國惟宋爵尊國大,況其國介於晉吳之間,今欲擾亂晉伯,必自宋始。今宋大夫魚石、向為人、鱗朱、向帶、魚府五人,與右師華元相惡,見今出奔在楚。若資以兵力,用之伐宋,取得宋邑,即以封之,此以敵攻敵之計。晉若不救,則失諸侯矣﹔若救宋,必攻魚石,我坐而觀其成敗,亦一策也。」共王乃用其謀。即命壬夫為大將,用魚石等為嚮導,統大軍伐宋。
한편, 초공왕은 진여공이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희색이 만면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새 군주가 자리를 이어 상벌을 분명히 하고 어진 이를 기용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조정에 기강이 서고 나라 안팎으로 인심을 얻어 다시 패업(覇業)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이 수심으로 변했다.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상의하기를, 중원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진(晉)나라가 패업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 영윤 영제(嬰齊)가 별다른 계책을 내지 못하자 공자 임부(公子壬夫)가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중원의 나라 중에 오직 송나라가 작위도 높고 나라도 큽니다. 게다가 위치가 진(晉)나라와 오나라 사이에 있어, 지금 우리가 진나라의 패업을 방해하려면 반드시 송나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송나라 대부 어석(魚石), 상위인(向爲人), 인주(鱗朱), 상대(向帶), 어부(魚府) 등 다섯 사람이 송나라 우사 화원을 미워하여 지금 초나라로 도망쳐 와 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병력을 주어서 송나라를 치게 하여 송나라 도읍을 얻게 되면 그들에게 봉하겠다고 하십시오. 이것은 적을 이용하여 적을 치는 계책입니다. 진(晉)나라가 만약 구하지 않으면 제후들의 신임을 잃게 되며, 만약 송나라를 구하러 오면 반드시 어석(魚石) 등을 공격하게 되니, 우리는 앉아서 그 성패를 관망하면 되니, 또한 한 계책입니다.” 했다. 초공왕은 이에 그 계책을 써서, 임부를 대장으로 삼고, 어석 등을 향도로 삼아 대군을 거느리고 송나라로 쳐들어갔다.
不知勝負如何,且看下回分解。
승부가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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