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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들 대표 겸 산악 시인 권경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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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장 아끼는 등산장비 중 하나였던 '피켈'을 들고 자택에서 포즈를 취한 권경업 시인. 김경현 기자 view@ |
한편으로 생각하면 무모함 그 자체였다. 한국 도심도 아닌, 히말라야 고산 오지 마을에 자선병원을 짓겠다는 구상부터가 일종의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8년 전 처음으로 히말라야 자선병원 건립을 상상한 뒤, 한 사람 두 사람 의기투합할 지인들을 불러모았고, 마침내 2010년 10월 31일 인도 콜카타 항을 거쳐 네팔로 향하는 첫 컨테이너를 선적한다. 그리고 11월 10일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 발대식, 11월 12일 선발대 출발, 12월 10일 공사 시작이라는 지난한 여정을 거쳐 2011년 10월 14일 마침내 병원 준공식을 가졌다.
부산 사람이 중심이 돼 세운 네팔 체풀룽(Chheplung·2,660m)의 '토토 하얀병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앞으로 더 할 일이 있다면 안정적인 병원 전력 공급을 위한 초소수력 발전소 건립과 현지에 장기 체류할 의료진을 구하는 일이다.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의 단장이자 '토토 하얀병원'설립의 일등 공신인 권경업(59·㈔아름다운 사람들 대표) 시인을 따라 나섰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네팔 오지로 이끌었고, '이 시대의 협객'을 꿈꾸게 만들었을까.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의 의미
부산을 출발해, 네팔 현지에 이르는 동안 원정대원들이 아주 열심히 입고 다닌 파란색 조끼 등판엔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라고 쓰여 있다. 굳이 따진다면 어법도 맞지 않지만 이 이름을 처음 생각해 낸 이는 권경업 시인이다. 그들의 의지와 의미만큼은 이보다 더 함축적일 수 없을 게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마을 체풀룽에, 가장 낮아지는 마음을 담아 자선병원을 짓겠다는 염원을 담은 셈이다.
권 시인은 루크라공항에서 체풀룽에 이르는 산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쓴 시 '산길'을 손수 읊어주기도 했다. "길섶, 키 낮은 것들에게도/고개 숙이고/경배의 허리를 굽히는 이여//꽃향기는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스스로 낮아지다 보면 아름다운 '꽃향기'는 저절로 얻어진다는 뜻이리라.
권 시인이 이처럼 네팔 산간 오지 자선병원 건립에 목을 매는 이유는 뭘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부산 최초로 히말라야 등반을 나섰을 때 만났던 한 셰르파에 대한 기억이다.
"당시 산 정상을 밟은 뒤 하산하던 중이었는데 함께 올랐던 셰르파가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에 빠져 목숨이 위중한 상황이 되었어요. 어렵게 구조활동을 펼쳐 다리만 다친 채 살아나오긴 했지만 그가 가슴에서 꺼낸 건 뜻밖에도 정상에서 찍은 우리들의 사진이었죠. 사진이 없으면 안된다는 걸 알았기에 그 셰르파는 목숨을 걸고 지켰던 거죠."
자선병원은 그에 대한 일종의 보은이었다. 당시 셰르파에 대한, 혹은 한국 산악대원들과 함께 끊임없이 험난한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네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작은 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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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등반을 즐기던 젊은 시절의 권경업 시인. 권경업 제공 | # 세상의 노인들이 굶고 있다는데…
권 시인의 '베풀고 사는 인생'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2년을 거슬러 올라가 성지곡 어린이대공원에서 결식노인을 대상으로 한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때 권 시인은 형제들이 십시일반으로 차려준 국숫집 경영으로 돈도 좀 만지기 시작할 때였다. 처음으로 내 장사를 하다 보니 권 시인은 신이 났다. 하루에 잠을 세 시간, 네 시간도 안 자고 일했더니 1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 또 1년을 하게 되니까 자동차와 집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보, 우리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하지도 않잖소. 세상에 돌려주고 삽시다. 성지곡에 물 뜨러 갔다가 노인들을 만났는데 참 안됐습디다. 그네들은 돈이 있어도 굶고, 없으면 없는 대로 끼니를 거르기도 합디다. 우리가 무료 급식소를 운영해 보는 게 어떻겠소?"
'세상의 노인들이 굶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권 시인이 마침내 무료급식을 위해 발벗고 나선 순간이었다. 그는 이들 노인들이야말로 질곡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냈으며, 성장을 이룬 주인공이었지만 어느 순간 역사의 그늘이 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성지곡 한 곳에서 시작한 무료 급식은 현재 구포역 앞 부랑인 대상 무료 급식소와 주말에만 여는 수영사적공원 내 노인 무료 급식소 등 세 군데로 늘어났다. 특히 성지곡은 18개 팀이 한 달에 한 번꼴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대기팀만 20여 개에 이른다.
무료 급식도 처음엔 내 호주머니를 털어 나눠주는 식이었지만 어느 순간 혼자서는 안되겠다 싶어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부산시에 등록하고, 다 함께하는 발걸음으로 변모시켰다.
그러자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평생을 낭인으로 살다 보니 골치아픈 건 딱 질색인데, 특히 다른 사람의 돈을 받아쓰고 뒤처리를 한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방법을 바꾸었다. "현금 지원은 절대 안 받고, 현물 지원만 받으며, 수혜자에게 직접 전달할 것! 대신 영수증 처리는 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편해졌다. 보람이라는 열매도 다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법인에선 조직의 관리 감독만 제대로 하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 시스템 자원봉사의 정착이었다.
# '좌파 아버지'와 '행상 어머니'
5남매 중 막내인 권 시인은 돌아가신 부친이 57세에 낳은 늦둥이였다. 한 나라의 국운이 쇠할 때였긴 해도 아버지는 진보운동의 거두셨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민주 독립 운동에 사재를 거의 다 털어넣다시피 했지만 좌파라는 이유로 그의 행적은 거의 안 알려졌다. 해방 이후엔 다시 정적이 생겼고 결국 부산으로 도망온다. 하지만 그게 가족에겐 족쇄나 다름없었다. 가산은 탕진하고 집안은 몰락했다. 평생을 쫓기는 신세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굶어죽을 지경인 데도 행상을 하면서도 다섯 자식 교육만은 철저히 시키셨다. 순전히 권 시인의 학비 마련을 위해서 둘째 누나는 부산사대 대신 2년제 부산교대를 선택하기도 했다. 중학시절 권 시인은 누나의 부임지를 따라 경북 안동중 길안분교를 다니기도 했다. 먹는 입 하나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권 시인은 "아마도 평생의 서정은 그 시절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며 오히려 행복한 소년 시절로 회고했다.
후에 권 시인이 '산악시인'이란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이렇게 시골에서 보내면서 쌓았던 성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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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체풀룽 '토토 하얀병원'에서 대원들과 함께 작업 중인 권경업 시인. 김은영 기자 | 사실 권 시인은 정식 등단 절차를 밟은 적이 없는 시인이다. 다만, 자비출판이 대세이던 시절, 별도의 인세와 신경림 선생 해설까지 받아가며 첫 시집 '백두대간1'을 발간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 고교 재수를 하면서 클라이밍계에 입문 권 시인이 등반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교 입시에 떨어지고 난 뒤 재수 시절이다. 안동에서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성적은 형편 없었다. 그러던 중 동네 선배를 따라 부산대 뒤편 솔숲 캠핑을 다니다가 암벽등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때의 활동은 '부산클라이머스'라는 산악회 활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권 시인은 선배 산악인들이 욕심을 나타낼 정도로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1970년 부산 등산계의 '총아였다'는 말로 전해진다. 1977년엔 부산합동대원 중 한 명이 되어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국내 두 번째로 오르는 데 성공한다. 당시 부산서 설악산까지는 버스 타고 17시간씩 걸렸고, 얼음이 잘 얼지 않는 부산에 살다 보니 얼음덩어리를 사다가 아이스하켄을 박는 연습을 할 때였다.
그래도 뒤늦게 철이 든다고 대학교수와 교사를 하고 있던 누나와 형의 조언으로 부산의 한 공업전문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대학졸업 후엔 한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에 취직해 몇 년간 잘 다녔다. 하지만 1981년 사표를 내고 만다. 히말라야를 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히말라야는 목숨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였습니다. 무급휴가를 회사 측에 요청했지만 묵살돼 과감히 사표를 던져 버렸죠." 그런데 1982년 부산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등반은 그에게 오히려 더 큰 삶의 전환점을 맞게 해 주었다. 1억 5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간 히말라야 등반이 과연 바람직한가 라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당시 산 정상을 밟기 위해 쓴 포터(짐꾼)만 200~250명. 하루 인건비 300원이 안 될 때였는데 그 돈을 이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쓴다면 엄청날 건데 싶었다. 그래서 히말라야 등반은 한 번으로 끝내고 "세상을 살자"고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내 삶부터 탄탄히 다지기 위해 돈을 벌기로 작정 했다. 이후 80여 일에 걸친 백두대간 종주 제안이 들어왔을 때도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1년간 백수를 할 수 있으면서 글발도 있고 산 타는 실력도 갖춘 사람'이라는 조건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권 시인은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비로소 산 가치관을 새로 정립하게 된다. "우리 산을 앞으로 더 다녀야겠다"는. # 기발하면서도 엉뚱한 사람 다시 하얀병원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권 시인에게 물었다. 의료장비와 의약품만 갖추면 뭣하나, 의료진 확보가 안되고 있는데. 그러자 권 시인이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의사와 간호사 지원을 해 달라고 하면 누가 해 주겠나. 일단 병원이라는 형태와 설비를 갖춰놓고 정말 자물쇠만 따고 들어갈 수 있을 상황이 되면 의사 구하기가 한층 쉬워질 것이다." 사실, 권 시인을 아는 이들은 그랬다. '기발하면서도 엉뚱한 사람' 혹은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사람.' 결국은 그의 열정과 추진력을 높이 산 또 다른 표현일 테지만. 권 시인의 한 시집에 발문을 썼던 최영철 시인의 글이다. '유토피아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자리를 접고 물구나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가능해지는 세계이다.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높고 높은 하늘은 깊고 깊은 바다가 되어 있고, 거기 험난한 파도를 넘어온 노을진 단풍나무 한 그루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게 자리를 바꾸어 희망의 새 이름을 달아주는 것, 그들을 일일이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일이야말로 잠시도 멈출 수 없는 권 시인의 과업이 아니겠는가.' 딱 들어맞는 말이다.
#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건… 마지막으로 권 시인에게 물었다. "더 하고 싶은 일 없으세요?"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세상에 하고 싶은 것 거의 다 해 봤어요. 물질적으로 큰 부자는 아니어도 벌 만큼 벌어 보기도, 쓸 만큼 써 보기도 하고…." 그래도 여한이 없을까? 딱 한 가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게 있다며 털어놓는다. 뜻밖에도 그는 노인문제를 다룬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단다. 앞으로 5년만 더 지나면 노인문제가 더 부각될 테고 그때는 자기도 노인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히말라야 프로젝트도 끝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당장 내년 봄까지 초소수력발전소 건립 건을 매듭지어야 하고, 여력이 된다면 네팔 노동자를 위한 직업학교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몸서리가 날 만한 병원 건립 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히말라야에 병원을 하나라도 더 열 수 있다면 좋겠어요." 도대체, 그와 같은 자신감은 어디에서 샘솟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속적 잣대로 그는 국밥집 사장일 뿐인데 말이다. 어쩌면 그가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말, 그의 긍극적인 지향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시대의 진정한 협객이라는 묘비명을 남기고 싶은 마음 간절해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체풀룽·카트만두/네팔=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그는 누구
권경업은 이 땅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한, 1970년대 부산 지역을 대표하던 산악인. 1977년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두 번째로 등반하고 1982년 부산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 등반대장을 맡았다. 이후 국내의 많은 암·빙벽길을 개척했으며 40여 차례에 걸쳐 히말라야를 탐사했다. 1989년부터 시작한 결식노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는 22년째 운영 중이며, 현재 ㈔아름다운 사람들(1998~ )과 1983년 설립된 '부산등반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다. 정식으로 등단한 적은 없지만 1990년 백두대간 연작시 60여 편을 월간 '사람과 산'에 연재하면서 '산악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저서로는 시선집 '달빛무게' '하늘로 흐르는 강' 시집 '녹아버린 얼음보송이' '내가 산이 될 때까지' '삽당령' '백두대간1'까지 모두 14권을 상재했다.
내 친구 경업이에게
이제 나이가 찰 대로 찼으니 이름을 부르기가 쑥스러워 자네 호로 불러보네. 소산! 우리는 세교가 있는 집안의 인연으로 선대의 우의를 상속받아 사춘기를 함께 보내고 약관의 시절에는 각기 자신의 살 길을 찾아 헤매다가 성가(成家)를 이룰 즈음부터 회포를 나누면서 오늘까지 나의 자랑이자 버팀이 되고 있네. 자네를 생각하면 멋과 열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네. 백구두에 모시 한복과 두루마기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산만의 풍류이고 낭만일 걸세. 1980년대 초인가 히말라야의 파빌 봉 등반대장으로, 90년대에는 백두대간을 종주하여 부산 산악인의 목소리를 높였고 , 30년 가까이나 성지곡의 노인 무료 급식으로 자랑스러운 시민임을 입증하기도 하였지. 여기에 시인으로서 열 권도 넘는 시집을 출간하기도 하였고, 요산 선생 기념사업회의 일까지 발을 걸치지 않는 데가 없을 지경이었지. 2000년께인가 서면에 풍락재라는 문화 사랑방을 열어 우리를 기죽게도 하였잖나. 그리고 내가 아는 범위에서 자네가 가장 미남이라네. 남자는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피곤을 남에게 전염시키는 이가 가장 추남이고 자네처럼 금방 쓰러질 여건인데도 의욕과 생기가 넘치고 때론 '풍'을 치기까지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미남이라네. 나는 등짐 지고 산에 올랐다가 고생만 직사하게 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등산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자네와 더불어 한 지리산 종주는 내 삶의 한 획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네. 나는 벌써 아는 사람을 줄이고 생활을 가볍게 하려고 힘쓰는데 자네는 아직도 네팔에 병원을 짓는 등 일을 키우고 벌이려고만 하니 고생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 부럽기도 하다네. 이제 작희(作戱)는 줄이고 벌인 일들 마무리를 깔끔히 한 뒤에 여유가 생기거든 지치도록 방담이나 즐겨보세. 양맹준·부산박물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