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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장
혈수마룡 진세개. 백산일행이 환히 보이는 곳에 은신하고 있던 진세개의 눈에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하고 있는 냉추렴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다 격정에 못 이겨서 하는 입맞춤으로 보였다.
남자의 손이 엉덩이를 더듬대도 가슴을 움켜쥐어도 더욱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피가 머리끝으로 몰렸다.
"저런 화냥년 같으니. 요조숙녀처럼 굴더니 강호에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남자를 만들어? 그런 년이 나를 거부해?"
석숭의 예상대로였다. 극도로 흥분한 진세개가 저들을 치러왔다는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린 채 소리를 질렀다.
"죽여버린다. 냉추렴이고 뭐고 전부다 죽여버린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광기에 찬 눈을 하고 있는 진세개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질투였다.
자신을 거부하고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냉추렴에 대한 질투가 살기로 바뀌어 사방으로 퍼져갔던 것이다. 이래서 남자의 질투는 여자의 그것보다 무섭다고 했는가.
"순무! 준비해라. 다 죽여라.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여버리란 말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는 순간 자신들을 향해서 날아오는 검은 물체 세 개가 보였다.
쭈뼛!
무인의 본능인가. 거의 이성을 잃고 있는 상태에서도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이 밀려왔다.
"피해랏!"
재빨리 몸을 날리며 은신한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한발 늦고 말았다.
콰앙! 콰앙! 콰앙!
다섯 번의 폭발음이 구화산에 울려퍼지고 그들이 있던 곳과 또 다른 한 곳에서 붉은 화마(火魔)와 함께 피를 동반한 인육이 튀어오르며 처절한 비명소리가 따랐다.
"으악!"
"으아악! 살려줘…."
떨어진 팔다리가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지고 뜯겨진 목이 튀어 올랐다. 그들이 있었던 곳이 순식간에 피 비가 내리는 아비규환 참상으로 변해버렸다.
'이럴 수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었기에….'
진세개가 망연자실 넋을 잃었다. 이곳에 은신해 있던 백여 명의 혈마군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사지를 잃고 허우적거리는 인물들, 앞을 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자들, 자신을 믿고 따랐던 자랑스러운 혈마군의 정예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군주님! 절반정도가 당했습니다."
참담한 얼굴을 한 순무의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로지 절반이라는 말만 생생하게 들려왔다.
치욕스러움이다. 무인이 무공에 의해서 패한 것이 아니라 폭약에 의해서 검을 놓고 말았다.
"갚아주어야지. 아주 철저하게… 인원을 모아라!"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흥분했기에 위치를 들켰고 그것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진세개였다.
지금 이곳에 자신들 말고도 세 개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두 곳에만 폭약이 날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저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그런 일을 벌였고 어이없게 자신이 걸려들었다는 뜻이 된다.
순무가 인원을 소집하고 있을 때 또 다른 곳에서는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신들이 숨어있던 자리를 이탈하여 백산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서 움직여갔다.
구가대(求家隊).
황보세가의 마지막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처지도 진세개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두 개의 광천뢰가 그들이 은신해있던 곳에 터졌고 순식간에 육십 여명 이상이 고혼이 되어 사라졌다. 이제 남은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형제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을 쳐서 다음을 도모하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고 이미 저승으로 간 형제들과 같은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이다.
"여러분, 그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각자의 길로 가십시오."
한숨이 흘러나왔다. 철이 들 무렵부터 같이해온 이들이다.
이미 멸망해 버린 가문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삼십 년 동안 모든 노력을 다했다.
성도 이름도 모두 버리고 오직 구가대 일원이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소걸영 구소운의 암살이 옳지 않을 일인 줄 알면서도 가문을 위해서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도의마저 져버리고 말았다. 건너지 말아야 강을 건너버렸음이다.
"더 이상 가문이라는 것 때문에 여러분을 희생시킬 수 없소."
이제는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다섯이란 나이에 가문을 잃었고 서른 다섯이 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더라면 무엇인가를 이루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어 번듯한 가문으로 시작하려 한 것이 강호상에 하루라도 빨리 황보세가가 살아있음을 알리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자신들이 암습을 가했고, 또 다시 암습하려던 불빛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복면도 벗었다. 죽을 때만큼은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천으로 죽고 싶었다.
그의 뒤를 이어서 남아있던 이십여 명의 인원이 황보천과 같이 복면을 벗어던지며 따랐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혈마군주인 진세개도 황보세가를 막기 위해서 와 있던 비마군도 천무맹의 화인걸도 용지만 쳐다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들 이십 명의 실력으로는 마차에 있는 인물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숨기고자 했던 신분마저 드러내며 나서고 있다 함은 이미 죽을 결심이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인으로 마지막 가는 길을 방해하기가 싫어서인지 아니면 저들의 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는지는 자신들도 알 수 없지만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나서려는 것을 막고 있었다.
"황보천이요. 오늘 하루였지만 여러분들께 미안하게 되었소."
이미 각오를 했는지 검집도 버리고 백산 일행의 삼 장 앞에 멈추어 서며 입을 열었다.
"황보세가의 후예인가? 왜 이런 짓을 했나. 누가 지시를 했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석숭이 백산일행을 대표해서 나섰다. 황보천이란 말을 듣는 순간 황보세가의 후예임을 알 수 있었고 백산일행과 오천맹의 관계를 알기에 이들을 구해주고 싶었다.
"비겁한 짓을 했지만 무인으로 죽고 싶소이다."
모든 것을 버린 눈동자였다. 더 이상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사라진 공허한 눈빛이었다.
비록 더러운 짓을 했지만 자신들을 보살펴준 제갈세가에 대한 의리만은 지키고 싶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무인(武人)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취익!
"무인이라고 했나? 너희들 무인은 다 그런 놈들인가.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을 죽이려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왔다가 동료들이 다 죽어가니까 이제야 무인이 되고 싶다고 하는 거냐.
너희들이 말하는 무인이란 그런 것이냐? 무슨 짓을 해도 마지막 죽을 때는 멋있게 죽고 싶은 것인가."
또다시 화가 난다. 도대체 무림인이란 놈들이 무엇인가.
온갖 야비한 짓은 다 해놓고 그게 안 되니까 이제 와서 무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런 것이 명예라 생각하고 있는 족속들이다.
"너의 부하들이 저곳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놈들처럼 많이 남아있다면 그래도 이렇게 나왔을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이다. 잘못되었다고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있었고."
"아니야. 너는 말을 잘못하고 있어. 잘못했다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게 끝나있었던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끝나니까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야.
가문? 웃기지 마. 그것은 핑계일 뿐이야.
다 너희들을 위해서 네놈들의 영달을 위해서 그런 것뿐이야. 네놈들은 무인도 뭐도 아니야. 가라! 죽이지는 않으마. 허나 다음에 또 보면 그때는 죽인다."
백산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쏟아져나왔다. 먹고살기 위해서 도둑질을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는 것은 그나마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과 저기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자들은 뭔가, 힘이 있는 자들이다. 어찌 보면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없는 자들이 아닌가.
열 개를 가진 놈들이 조금 더 가지기 위해서 아옹다옹 아귀다툼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석숭이 황보세가의 후예라 했기에 살려주는 것이다. 사부와 장 노인이 겪었던 그런 아픔을 겪었다고 생각했기에 동정심도 생겼다.
"맞소이다. 세우고 싶었소이다.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가문을 세우고 싶었소이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소. 그것만이…."
황보천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 청년의 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럴싸한 가문을 세우겠다는 욕심이, 과거의 영화를 다시 찾겠다는 욕망이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
결코 가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유일하게 자아를 찾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자신, 바로 황보천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새로이 주신 목숨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황보천의 뒤에 있는 노인 한 명이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울먹였다.
"갑시다. 가주님! 다시 시작합시다. 처음부터 하나씩 해봅시다."
황보천을 부축하며 그들이 멀어져갔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세상에서 잊혀진 황보세가의 운명처럼 검집 없는 검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빚만 해결하면 되나?"
그러나 황보세가가 떠나갔다 해서 백산일행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백산일행이 있는 곳의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 혈수마룡 진세개가 자신의 남은 수하들을 이끌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이 가 있는 곳은 일행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인 백산이 아니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냉추렴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받았던 것을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 비록 기습에 의해 백 오십이 희생되었지만 남은 인원이면 저들을 충분히 처리하고도 남는다.
백 명은 뒤에 있는 놈들을 경계하고 냉추렴이 있는 저들은 자신과 오십의 인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냉추렴! 내 앞에서는 요조숙녀처럼 굴더니 강호에 나오니까 본색이 나오더냐? 화냥기 말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냉추렴만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을 차버리고 기껏 잡은 놈이 저런 놈이었다는 사실이 더욱더 화나게 하고 있었다.
생긴 것도 없고 무공도 별로 인 것처럼 보이는 털옷을 입은 놈, 낮에 보여주었던 것은 저놈이 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착각했던 터였다.
그리고 그 정도는 자신도 얼마든지 해 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취익!
"언니, 저 새끼야? 언니를 괴롭혔던 놈이?"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무엇인가에 잔뜩 기분이 나빠 있던 소운이 백산이 하는 모양새를 그대로 따라하며 진세개를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도 미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지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냉추렴을 쳐다보던 소운이 일행이 뒤로 넘어갈 폭탄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우! 저 새끼는 내 밥이야. 누구든지 건들면 죽어. 알았어?"
"혀, 형수님!"
모든 일행의 입이 뜨악하게 벌어졌다. 소살우의 입에서 나왔을 때 가장 어울리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던 그 말이 소운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소운의 기분을 알고 있고 냉추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서가 문제였다.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앞에 있으니 소운이 화가 날만도 했다.
그러나 저 말투며 하는 행동이란. 원래 건달이었던 광견조원들을 질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하등의 이상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소걸영 구소운, 한마디로 개방의 거지다.
아무리 여자라고 하지만 거지들 틈에서 자랐고 무공도 배웠다. 보는 눈도 있고 해서 그동안 조신하게 지냈을 뿐이었지 그녀의 성격도 한가락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이쿠, 여협 나셨군. 소걸영 구소운? 너도 그것을 알아야지. 천무맹에서 너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저기 숨어있는 놈도 마찬가지일걸? 몸조심하라고."
구소운이 자신에게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진세개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도대체가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곳에 그녀를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같은 편인 천무맹에서조차 죽이려 나와 있지 않은가. 그러한 와중에도 저리 당당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해 보였다.
"좌우지간 네놈은 나에게 죽어. 그리만 알고 있으면 돼, 새끼야!"
챙!
허리의 연검을 뽑음과 동시에 소운의 몸이 앞에 있는 진세개를 향해 번개같이 퉁겨나갔다. 순식간에 오 장여 거리를 단축하며 진세개의 목을 노리며 일검을 휘둘렀다.
얼굴 가득 비웃음을 담은 진세개가 자신의 검을 들어 거칠게 소운의 연검을 쳐갔다. 몸과 함께 단숨에 갈라버리려는 심산이었다.
느닷없는 소운의 행동에 깜짝 놀란 백산이 뛰어나가려 하자 조천영이 백산의 팔을 잡아끌며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지금은 그냥 둬요, 백랑. 저 애도 화풀이하고 싶을 대상은 있어야죠. 평소에 잘해 주었으면 동생이 저렇게 하지 않잖아요."
"나야 뭐… 누님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제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백랑만 하겠어요? 지금만 해도 그래요. 동생의 무공수준도 모르고 있잖아요."
조천영의 말은 전혀 틀린 게 없었다.
소운은 팽무도가 복용시켰던 마령호 내단을 갈태독의 도움으로 이미 녹여서 자신의 것으로 내공화 했다. 거의 삼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내공면으로는 석두나 광견조보다 위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갈태독에게 배운 것은 의술뿐만이 아니었다. 무공도 전수 받고 있었다.
소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것은 백산뿐만 아니라 진세개도 마찬가지였다. 만상투인루에 가기 전의 구소운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파앙!
진세개의 검과 소운의 연검이 부딪쳤으나 불꽃만 튀었을 뿐 진세개의 의도대로 잘리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진세개의 검이 밀리고 있었다. 내공이 소운보다 낮은 것이다.
"너는 내 밥이라 했잖아, 짜샤."
팽팽하던 소운의 연검 끝이 그대로 구부러지며 진세개의 얼굴을 향해서 퉁겨졌다.
"억!"
얼굴에서 오는 극렬한 통증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진세개의 신형이 뒤로 밀렸다.
손을 들어 얼굴 왼쪽을 만져보았다. 살이 있어야 할 부분에서 뼈가 만져졌다. 냉추렴에게 당해 흉터가 있던 부분의 살점이 움푹 떨어져나가 광대뼈가 드러나보였다.
"이익!"
"그것은 언니를 욕한 벌이야, 임마. 이제 나의 빚을 갚아!"
소운의 검에서 백색 검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일장 길이의 완전한 검강이 튀어나와 진세개의 목을 향해 겨누어졌다.
"소운아 그만, 그만해라. 남편 있는 아녀자가 손에 피를 묻히면 되겠냐?"
백산이 뒤에서 소운을 껴안으며 말렸다.
"놔! 저 자식 죽여버릴 거야…."
소운의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백산이 소운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읍! 으읍!"
"일단은 이 정도만. 나머지는 나중에, 응?"
소운이 얼굴을 가리고 조천영 곁으로 도망쳤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났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창피하다는 생각보다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백의 적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저 녀석 바람둥이가 다 되었구먼?"
갈태독의 말에 그곳에 있던 일행 모두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웃지 못 할 백산의 행동에 일행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분위기가 다소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목전의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공격해라! 다 죽여.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전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진세개가 소리쳤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그의 눈에서 오직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만이 감돌았다.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던 개방의 거지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한 꼴이지 않는가.
주변에 있는 수백의 무리들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다 보았을 것이다.
천마맹의 혈마군 군주인 진세개가 하찮은 것들에게 당해서 물러났다는 소문이 강호상에 퍼져나갈 것은 분명한 일이다. 결국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저들을 다 제거하는 길밖에 없다.
애초에 그리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더욱 절실해져버린 것이다.
오십 명의 혈마군이 일제히 몸을 날리며 백산 일행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런 혈마군을 바라보고 있던 백산일행의 진영도 이상한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마차를 중심으로 해서 혈마군이 날아오는 최전방에 갈태독이,
그의 양옆 삼 장씩 떨어진 곳의 약간 뒤쪽으로 석두와 소살우가 자리를 했으며 갈태독과 일직선으로 용지를 등지고 백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사이로 두 명씩의 광견조원들이 배치되어있고 내부에 있는 마차 양옆으로 두 명씩 들어있었다.
마치 쌍모진(雙眸陣: 마름모꼴진)을 옆으로 뉘어놓은 모양이었다.
"갈 선배님, 곤(坤) 방향으로 이 보(二步)."
백산 일행이 어떤 진식을 구축했는지 진의 중심에서 남궁지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남궁지우의 한마디에 일행 전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전방에 있던 칠 명의 장과 검 그리고 도에서 일제히 그들만의 무공이 펼쳐졌다.
천장지옥마공의 '혈파'가 앞으로 달려들던 흑의인 다섯 명을 가루로 만들고 석두의 창궁혈해탄이 전방의 공간과 함께 흑의인을 찢어발겼다.
더불어 오른 쪽에서는 소살우의 '혈극참'과 석숭의 '구룡신공'이 달려드는 흑의인을 향해서 뿌려지며 허공에 피 무지개를 그려내었다.
피비(血雨)가 내리며 전방에서 달려들던 혈마군의 선두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진(二陣) 휴문(休門)과 사문(死門) 교대!"
이번에는 낭랑한 음성이 진(陣)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남궁미령이었다. 남궁 부녀 두 사람이 진(陣)의 가운데서 조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절대 사문을 형성하고 있는 네 부분의 모서리를 제외한 나머지 광견조원 전원이 자리를 바꾸었다.
"삼재현신(三才現身)!"
다시 남궁지우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중간에 있던 광견조원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의 사이사이로 끼어들며 일곱 개의 삼재진을 만들어낸다.
적의 이인 합격술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차륜전을 쓰려는지 혈마군들이 두 사람씩 조를 이루어 죽음을 도외시 한 채 달려들었다.
앞사람의 죽음을 발판삼아 뒤쪽에 있는 자가 동시에 검을 찔러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만의 헛된 몸부림일 뿐이었다.
맨 앞줄에 있던 광견조원 한 명이 먼저 들어오는 혈의인을 베어냄과 동시에 옆으로 빠지고 그 공간을 뒤에 있던 다른 광견조원이 도를 휘두르며 메우고 있었다.
완벽한 조화였다. 이곳에 와서 잠시 가르쳤던 검진을 광견조원들이 완벽한 호흡으로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광견조원들의 무서움이었다. 진의 모용을 완벽하게 살릴 수 있는 운용은 불가능했지만 한 곳에 고정되어있으면서 적을 방어하는 기술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이른바 조직력이다. 언제나 같이 행동하고 생활했던 이들이었기에 한 마음으로 움직여야하는 일은 너무 수월하게 해내고 있었다.
"사문 발진!"
남궁지우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지고 전방에 서있던 일행의 입에서 거대한 함성이 뒤따랐다.
"멸파!"
"창궁혈해탄!"
"혈극참!"
또 한 번 앞에서 달려들던 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엄청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위치만 조금씩 바꾸며 인원으로 밀어붙이는 혈마군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일장 앞으로만 다가오면 그대로 도륙하고 있는 것이다.
진세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찮은 무지렁이로 보았던 놈들이 전부 도강을 구사하는 고수였다.
그제야 저들이 보여주었던 무공이 생각났다. 냉추렴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 자신과 비교했을 때 결코 낮은 무공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무! 경계인원 전부를 앞으로 돌려라!"
다른 곳의 기습에 대비해 뒤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혈마군 모두가 백산 일행이 있는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놈들…! 끝장을 본다. 이 진세개가 누구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마. 전부 죽여버린단 말이다.'
강한 자들이지만 결코 자신이 지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천마맹의 정예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들에게 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일어날 수도 없는 사실인 것이다.
두 편의 혈전을 지켜보고 있던 인물들 중에 진세개보다 더 놀라는 인물이 있었다.
백의천룡 화인걸이었다. 용지 건너에서 그들의 싸우는 모습을 직시하고 있던 그의 놀라움은 진세개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가 노리는 인물들이 펼치고 있는 검진 때문이었다.
모양은 쌍모진(雙眸陣) 이었지만 내부에 별도의 삼재진(三才陣)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진식, 전면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삼재진을 이용해서 강화시켜주고,
서로 서로 교차하면서 상대를 격살하고 있는 저 진식은 무공을 배울 때 무수히 많이 들었던 어느 한 가문의 독문검진이었던 것이다.
"저것은 청풍검진(淸風劍陣)? 어떻게 저들이 남궁세가의 청풍검진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경 오십 년 동안을 봉문해 있었고 과거 오천맹의 일당이었던 남궁세가의 검진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가 배운 청풍검진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구축되었을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고 약점은 허리 부분이라 하였다.
그러나 저 검진은 서책으로 배운 것과는 너무 달랐다.
맹에서 배울 때의 청풍검진은 중간에 삼재진 하나만 들어가는 형식이었는데 지금 있는 것은 한 면에 세 개의 삼재진이 만들어져있다.
즉, 가장 약점이라 했던 허리 부분을 더 강하게 보강하는 강력한 힘을 새로이 창조해낸 것이다.
내부에서 꾸준히 형성되고 있는 삼재진이 검진의 약점이었던 부분을 강점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검진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들을 격살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가 아닌가.
"군무해! 맹에 전서를 보내라. 남궁세가의 검진이 출현했다고."
대 사건임에 틀림없기에 맹에 서둘러서 전서를 보내야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남궁세가의 검진의 출현이다. 어쩌면 이 싸움보다 더 중요한 정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강지(馬鋼智), 내말 들어라. 잠시 후 전면적인 공격을 시도한다. 임무는 알고 있겠지?'
화인걸이 대주로 있는 백의대는 전원이 속가제자로만 구성이 되어있는 조직체이고 열정적으로 맹주를 지지하는 자들이다.
전부 오 조로 구성되어있으며 각 조장 휘하 백 명씩, 총 인원 오백이다. 그중 육합검자(六合劒子) 불리는 마강지는 삼 조의 조장을 맡고 있었다.
'네, 대주!'
전음으로 오간 대화였지만 사전에 지시가 되어있었는지 즉각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구소운의 추살과 냉추렴의 납치가 그들의 주요 임무였던 것이다.
"공격하라! 목표는 천마맹의 혈마군이다."
화인걸의 명령에 따라서 백의대 소속 오백여 인물들이 일제히 몸을 날리며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군주님, 어떻게 할까요? 천무맹인물로 보이는 자들이 전권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무면마룡 암사월의 진영이었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황보세가와 혈마군 사이로 천무맹의 백의대와는 일직선으로 마주 보이는 지점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진세개가 있는 혈마군의 진영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는 수백의 인물들이 보였다.
암사월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스런 얼굴로 장내를 쳐다보았다.
저 무리들 속에 같은 동료라 할 수 있는 혈마군이 포함되어있다. 그 속에서 적을 찾아서 죽인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임무는 소걸영 구소운의 보호다. 저 검진에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적일 수밖에 없다. 공격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마음을 굳혔는지 암사월의 입에서 공격을 알리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쳐라!"
암사월의 외침과 함께 삼백여 명의 비마군이 달려오는 천무맹의 인물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뛰어나갔다.
난전(亂戰), 혼전(混戰). 피아(彼我)를 구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천무맹과 천마맹 두 세력 천여 명의 흑의인들이 서로 엉키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죽이려는 자들과 살리려는 자들 간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여기 살고자하는 자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양쪽에서 날아오는 무수한 인물들을 보고도 환한 미소로 응수하고 있는 자들.
중앙에 모닥불을 하나 두고 남궁세가의 청풍검진을 구축하고 있는 백산과 광견조 일행이었다.
"지휘할 수 있겠느냐?"
남궁지우가 딸을 쳐다보며 하는 소리였다.
조천영을 가운데 두고 냉추렴 구소운 그리고 남궁미령과 찍새가 사방 한 방위씩을 맡고 있었다. 그들이 해야할 일은 단 한 가지 조천영의 보호였다.
"걱정 마세요, 아버님. 저도 남궁세가의 여식입니다."
백산일행과 같이 오면서 전염이 되었는가, 천여 명에 가까운 적들이 몰려오고 있는데도 별로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좋다. 우리는 이보다 더한 일도 겪었다."
형제의 가슴에 검을 박았던 자신들이었다. 적을 죽이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지우가 백산이 있는 뒤쪽의 약한 부분으로 이동을 하여 후위를 보강하고 이제 진의 지휘자가 된 남궁미령이 뒤쪽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쳐다보았다.
"후위, 휴문을 사문으로 전환."
남궁미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전면에서 삼재진을 형성하며 움직이던 네 명의 광견조원들이 재빨리 후위로 물러나며 후방 삼재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앙의 백산 쪽을 제외하고 두 사람 사이로 한 명씩 서서 삼각형을 만들고
또한 백산의 뒤쪽에는 남궁지우가 서서 약해지는 부분을 보강하는 여섯 개의 삼재진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전방을 향해 그 살기를 뿜어냈다.
"사문(死門), 회진(回陣)!"
또다시 남궁미령의 지시가 떨어지고 중앙의 백산과 양끝의 석두와 소살우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회전을 하면서 전방을 향해서 도강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떨어진 인육이 난무하고 그 사이로 피 무지개가 모닥불 빛에 반사되어 퍼지고 있었다.
소살우 옆에서 진을 구축하고 있던 금령의 검이 한 인형의 목을 잘라가며 곧바로 진의 안쪽으로 몸을 옮기고 안쪽에서 움직이고 있던 송곳이 전방으로 나오며 다른 상대를 베어내고 있다.
찌르기는 필요 없다. 오로지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서 칼을 휘두르며 적을 베고 있었다.
여섯 개의 붉은 비도가 춤추고 있었다. 육 촌 정도의 비도에서 솟아나온 일 장 크기의 도강들이 허공을 유린하였다.
'광풍노산' 시뻘건 도강의 벽이 다가오는 흑의인들의 모든 것을 절단해내고 있다.
무기와 육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달려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토막을 내버린다.
"카악!"
한 무더기의 분노가 뱉어지고 여섯 개의 비도에 솟아있던 도강들이 하나씩 분리되며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사라진다.
붉게 변한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잘려진 육신의 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물줄기만이 비가 아니었다. 인간의 육신도 잘게 잘리니 비처럼 떨어지는 것이었다. 한 여름에 내리는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한천팽무도법의 이 초인 혈극폭.
몸과 연결되어있는 뇌룡사 때문에 이기어도가 안 된다며 백산이 만들어낸 도강의 폭풍.
비도 앞에 솟아나와있는 각각의 도강을 절단하여 상대방을 향해서 쏟아내는 잔인한 무공. 그 무공이 첫선을 보이며 천무맹의 인물들을 주살하고 있었다.
도강기보다 한 단계 위라 할 수 있는 도탄기와는 또 다른 경지였다.
육합검자 마강지,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있었다.
나머지 네 개조는 천마맹의 인물들을 주살하기로 되어있었고 자신들의 임무는 검진 속에 침투하여 여자들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오판이었고 자신들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세 명이 돌아가면서 움직이는 삼재진, 두 개를 만드는데 여섯 명이 필요한 삼재진을
다섯 명이 형성하여 하나로 묶고 그것들이 회전을 하며 자신들 앞으로 다가오는 천무맹의 인물들을 무슨 물건을 치우듯이 베어내고 있다.
두 번의 칼질도 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부하들을 잘라내며 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중앙에서 이상한 것을 휘두르고 있는 저 자. 그에 대한 첫 느낌은 공포였다.
하나의 검에다 강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엄청난 고수라 칭하는데 일장 크기 여섯 개의 붉은 도강이 허공을 난무하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잘라내고 있다.
어도술도 아닌 도강의 폭풍 이건 아예 도살이다.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들의 앞에 시체가 쌓이고 그 시체의 벽을 만들고 있는 자들이 바로 자신의 부하들이다.
그러나 한번 내려진 명령은 천명, 속가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해야한다.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전원 공격하라!"
마강지를 비롯한 백의대 삼 조 잔여인원 오십여 명이 후위진을 향해서 육탄으로 돌진해 들었다. 이미 정의니 뭐니 하는 신념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광기의 발산일 뿐이다.
죽어가는 동료들의 몸을 보고 찢어진 얼굴을 보며 더 이상의 이성이라든가 감성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복수, 오직 복수라는 한마디만을 간직한 채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뛰어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연못에서 무엇인가 번쩍 하는 것이 백산 일행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암습이었다. 백의대 오십 명이 몸을 날린 순간 그들 사이의 조그마한 틈을 타고 비도가 날아든 것이다.
"윽! 억! 큭!"
네 마디의 비명소리와 함께 금령 한 명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으며 모사, 도치, 송곳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우뚝 섰다.
찰나의 순간에 회진하던 삼재진이 멈춘 것이다.
"후위 사진(死陣) 전방 멸(滅), 출(出)!"
그것을 보고 있던 남궁지우의 입에서 다급한 일성(一聲)이 터지고 진 안쪽에 있던 나머지 금령 한 명과 세 명의 광견조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검과 도를 전방으로 날렸다.
이어서 터지는 통렬한 외침.
"혈극폭!"
하나의 검과 세 개의 도가 하늘을 비상하고 있었다. 어검술과 어도술이었다.
검을 쥔 자, 도를 쥔 자, 손에 무기를 든 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경지. 꿈의 경지라는 어도술과 어검술이 이 이름 없는 자들에 의해 펼쳐지며 오십 명의 천무맹 무인들을 잘라가고 있었다.
붉은 강기를 머금고 있는 세 개의 도와 백색으로 빛나는 하나의 검이 사방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백의대를 도살하며 날았다.
육합검자 마강지가 본 것은 새하얀 강기에 휩싸인 검이었다. 막아보기 위해서 자신의 검으로 내리쳤으나 그것마저 잘리며 정신이 아득해 져 왔다.
'이들은 너무나 강해. 우리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마강지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을 때, 백산이 몸은 번개같이 움직이며 한 명의 목을 틀어쥐었다.
흑립, 흑면, 흑의로 대변되는 흑객. 천사맹의 청부를 받아들인 흑막의 살수인 영객(影客)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절대적인 순간에 비도를 발출 했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두 번째 비도는 날리지 못했다. 중앙에 있던 놈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자신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네놈 때문에 지금껏 저곳에서 죽치고 있었던 거야."
흑객의 목을 틀어쥐면서 내뱉는 소리였다.
갈태독을 최전방에 두고 백산이 후위로 왔던 이유였다. 뭔지 모를 이질감이 뒤통수를 때리고 있는데도 좀처럼 위치를 잡아낼 수가 없었다.
백산에게 경각심을 줄 정도로 최고의 은신술이었다. 달려드는 상대를 주시하면서도 모든 감각을 개방한 채로 끊임없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도와 함께 나타난 흑의인, 지체 없이 달려들면서 그의 비도를 쳐냈고 목을 잡았다.
그리고 입이라 생각되는 부분에 반쯤 들어가 있는 붉은 비도하나, 박히지는 않고 입안에서 그대로 떠 있었다. 왼손에 있는 비도중의 하나인 풍천비였다.
"괜찮냐?"
비도를 맞은 광견조와 어검술과 어도술을 날리고 입가에 피를 흘리 채 힘겨워하며 쓰러져있는 나머지 광견조원들과 금령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어도술과 어검술이 무리인지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백산도 비도가 날아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비도가 아래쪽을 노리고 있었기에 약간은 방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은신술의 대가인 살수를 잡기 위해서는 한쪽을 포기해야 했고 광견조의 실력이면 비도에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흑객을 먼저 덮친 것이었다.
그러나 영객의 노린 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장애물은 죽여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목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만큼 자리만 이동하게 하면 되는 거였다.
다리 쪽으로 날아오는 암기를 피하기 위해 움찔하는 그 순간 회전하던 삼재진이 멈출 것이고 그 사이로 비도를 날리려 했었다.
장애는 최소한의 힘으로 목표는 최대한의 힘으로 하는 것이 살수의 기본이다.
장애물을 치우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오늘 그의 할 일인 목표물에 비도를 날리지 못했다.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바로 이자 때문이다. 그리고 복면을 뚫고 입안에 들어와 있는 붉은 색의 비도 하나, 온몸에서 힘이 사라져버렸다.
"네놈에게는 물어볼게 좀 있으니 저쪽에 처박혀있어야겠다."
차가운 백산의 말과 함께 영객의 입안에 있던 풍천비에서 붉은 바람이 일더니 순식간에 모든 이빨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이어서 그의 발이 단전을 향해 나아갔다.
"으으윽!"
살수의 임무는 무조건 죽음과 연결이 되어야한다. 목표물이 죽던지 노출되었을 경우 자신이 죽던지, 특히 노출되었을 때 자신이 죽는 것이 더 중요하다. 비밀 유지 때문이다.
살수란 무엇인가, 청부업자란 말이다. 요컨대, 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죽여주는 살인 청부업이 직업인 자들을 가리킨다. 돈 때문에 원수를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자신들의 본거지를 비밀로 해야하고 청부를 했던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도 비밀로 해야하는 그야말로 철저한 신용이 있어야 무림이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영객에게는 그런 신용을 지킬 시간이 없었다.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놈이 순식간에 내공의 파괴시켜 버리고 이빨을 가루로 부셔버림으로써 자결할 기회마저도 박탈해버린 것이었다.
"남궁 대협, 이 자식 좀 잡고 있으쇼."
"백랑!"
남궁지우 앞으로 영객을 집어던지는 백산을 조천영이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금 분노해버릴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누님! 참으라 이거죠? 찍새야, 도 좀 줄래?"
비도를 쓰지 않으려 함인가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자신의 도를 찾고 있었다. 도를 받아든 백산이 갈태독 등이 있는 전방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그곳은 아직 살육의 잔치가 끝나지 않았다. 앞에 쌓여있는 시체들로 인하여 움직이기 힘든 상황임에도 천마맹의 혈마군들은 계속해서 육탄으로 밀고 들어왔다.
엄청난 피의 향연 속에서 이성을 잃어버렸음이다.
죽음이라는 단어도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앞에 있는 적을 향해서 검만 휘둘러 대다 그렇게 죽어갈 따름이었다.
혈마군의 뒤쪽에서는 천마맹의 비마군과 천무맹의 백의대가 무수한 사상자를 내면서 밀고 밀리는 난전을 거듭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죽어간 육신들에서 나온 피가 용지로 흘러들어 그 맑음에 의해 바닥까지 보인다던 용지의 물이 떠오르는 태양 빛과 함께 붉게 물들어버렸다.
석두의 검에서 붉은 검강이 솟아나오며 자신의 동료의 몸을 밟으며 뛰어오르는 놈의 허리를 양단하고 소살우의 도가 또 하나의 흑의인의 목을 쳐내고 있다.
소살우의 도법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도를 가지고 찌르기를 하고 있었다.
단순하게 찌르는 것이 아닌 상대의 목 옆으로 가볍게 도를 밀어 넣은 다음 당기는 힘으로 목을 절단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검술에 있어서 극쾌의 찌르기와 도의 베기가 연결된 동작, 자신만의 도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저 미친놈에게 가볼까.'
백산이 미친놈이라고 하는 자. 자신의 부하들 뒤에서 넋을 잃고 있는 혈수마룡 진세개였다.
그가 본 백산 일행은 미친 살귀들이었다.
무슨 진을 만들고 있는지 자신의 위치에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부하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미친놈들이었다. 살인에 굶주린 미친 살귀들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데도 그 꿈이 깨질 않는다.
"네놈이 아까 내 부인들을 괴롭힌 놈이 맞지?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하얗게 웃으며 나타나는 털옷을 입은 놈. 자신을 향해 다가오면서 부하들을 가볍게 베어내고 있다.
두 번의 손도 쓰지 않는다. 마치 짚단을 베어내듯이 좌우로 휘두르는 도에 자신의 부하들이 몸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공포가 밀려들고 문득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치열하게 싸우던 두 세력이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봐, 진세개. 네 동료들, 아니 부하들이 기다리잖아 빨리 가야지."
놈의 일행을 공격하던 부하들도 다 죽었다.
용지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곤 저놈의 일행과 자신밖에 없었다. 모두 일렬로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씹고 있었다.
문득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고개를 들었는지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목전에 죽음이 다가와 있는데 식욕이 생기다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것이 죽기 전에 생기는 본능의 욕구인가. 웃음이 터져나왔다.
"큭큭! 푸 핫핫핫! 그래, 이 진세개가 철저하게 졌다. 사랑에서도 싸움에서도 그러나… 혼자 가지는 않는다. 크어엉!"
허탈한 웃음을 짓던 진세개가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방어는 일절 생각하지 않는 공격 일변도의 동귀어진의 수.
차앙!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멈추어 서있었다.
목을 향해 베어가던 진세개의 검이 백산의 도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었다.
"이익!"
진세개의 얼굴이 붉어지고 검이 조금씩 옆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니었다. 자신의 내공에 놈의 도가 밀리고 있다. 진세개의 얼굴이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까지였다. 계속 나아가던 검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가슴 앞에 검과 도가 비스듬히 걸쳐진 채 서있는 것이었다.
놈이 웃는 얼굴로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벌이야."
놈과 자신의 가슴 앞에 있던 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밀어내기 위해서 모든 내공을 쏟아넣고 있었지만 거대한 바위였다. 산이었고 하늘이었다.
빨리 다가오지도 않는다.
천천히 자신의 입 앞에 다가와 있는 도(刀), 벌이라고 했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공포, 죽음의 순간에 맛볼 수 있는 공포를 벌로 내리고 있었다.
꼬르륵!
입을 통해서 들어간 도가 천천히 뒤통수를 뚫고 나오며 진세개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내렸다. 하룻밤의 접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남기고 간 것은 죽음과 시체밖에 없었다. 용지가 붉게 물들어버렸고, 붉은 안개가 형성되어 구화산 정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사자(死者)들을 위한 진혼곡인가 용지에서 나오는 용음(龍音)이 유달리 구슬프게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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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 하고 갑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
감사ㅎ
즐감~~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