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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말씀(복음)속에는 뚜렷한 대속의 사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대속신앙 대신에 예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함으로, 즉 진리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의 길로 들어감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는 진리를 따르는 길을 좁은 문으로 비유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험난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적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또한 산상수훈에서는 구원의 표시인 천국을 소유하는 길을 겸손 즉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마음)을 비우는 일로 말씀했다. 그리고 물과 성령(진리의 영)으로 완전히 거듭날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마5:3).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5:8).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마5:9).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
사도 바울의 속죄신앙이 담긴 로마서는 AD 50년대 중반에 기록된 것이며,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은 AD 90-100년경의 것으로, 사도 바울이 이해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의 피 공로에 의한 속죄신앙은 약 40년이 지난 후 사도 요한에 의해서 진리에 의한 인간의 질적(전적) 변화 신앙으로 그리고 진리를 깨달음에 의한 영원한 생명과 참 자유를 획득하고 참여하는 신앙으로, 그리고 진리의 성령에 의한 완전한 성화와 참(완전한) 자유의 실현(성취) 사상으로 발전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너희가 내 말에 따라 살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말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는 예수의 기도 내용이다. 여기서 예수는 나의 피로, 즉 나의 피의 공로로 저들이 지은 죄(원죄)로 인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노예가 된 자들을 풀어주고 해방시켜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속죄 사상(신앙)이 자취를 감추고 대신에 진리에 의한 성화신앙(sanctification by truth)으로 대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속죄 신앙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진리에 의한 성화 혹은 영성화(spiritualization by truth or the Spirit of truth) 사상 혹은 신앙으로 진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예수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에 대해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능력위주의 성령관과는 매우 상이한 어떤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었다. 즉 요한복음이 보여 주는 성령관 특히 예수 자신이 직접 언급한 성령이해에 따르면, 성령은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분출되어(파생되어) 나오는 신비한 영으로서, 이것은 우리를(인간을) 진리의 사람 되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며, 진리의 삶을 살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지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정의내린 것이다. 우리 인간이 진리의 영(성령)으로 채움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자연히 거짓이 사라지게 되며, 악한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이 뿌리 뽑히게 되며, 사랑으로 충만해 져서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고 어려운 일을 잘 참게 되며 곤궁한 이웃(여기에는 인간 밖의 다른 피조물 곧 자연도 포함된다)을 돌보게 되며 자신을 숭고한 일에 헌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예수가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성령을 다 "진리"로 표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복음 곧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진리"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가르침에 의한 기독교를 필자가 "진리의 종교" 곧 진리교(religion of truth)라고 명명해 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그리스도인들)가 진리를 올바로 깨닫고, 진리의 사람들이 되고, 또한 우리들의 교회가 모든 거짓과 위선을 떠나 진리를 담고 있는 교회(진리의 교회)들이 될 때 우리 기독교가 "진리의 종교"로서의 참모습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다석 류영모는 "그리스도인이란 진리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내린바 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진리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말이다. 다석의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인 즉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가 설파한(전파한) 종교는 바로 진리의 종교, 진리를 위한 종교, 그리고 진리를 향한/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류의 정신사 혹은 종교사에 끼친 중요한 공헌은 바로 참됨/공의/정의의 하나님(God of righteousness/justice) 곧 "진리의 하나님"에 대한 발견과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은 공의/곧 진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모든 불의함 곧 거짓됨을 떠나서 참됨 곧 공의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선지자들이 외친 공의나 정의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근원적으로 "의"(義/righteousness)의 하나님 곧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첫째도 나중도 다름이 아닌 바로 그 "의로움"(진실됨) 곧 "진리"이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의 바탕은 진리 곧 진실됨/의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로 참됨(의로움) 곧 진실됨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교(하나님의 백성들)가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그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불의함/거짓됨과 부패(타락)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 용납되거나 묵인 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패한 상태에서의 예배나 성사들(종교행위들)은 하나님께 상달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는 일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친 것이다:
내가 너희의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
나니....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
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진리)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
라(암5:21-24)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
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
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
이라(호4:1,2)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한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
이로다. 그들이 여호와(진리의 하나님)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업신여기고 멀리 물러갔도다(사1:4)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진리의
하나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 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의 이런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바알종교의 물신숭배(축복신앙과 성공신앙)에 깊이 오염된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이러한 절규와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멸망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어떤 민족 어느 종교이고 진리에서 떠나고 부패하면 멸망하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만일 오늘의 한국교회가 그 길로 가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를 쇄신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활력을 상실한 교회에 새롭게 생기를 불어넣는 길은 무엇인가? 사회로부터 불신임당하고 외면당하는 길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90여년 전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그렇게 당당하던 민족의 희망이던 교회로 되돌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리고 영적 생명이 깜박거리는 오늘의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어 새롭게 살려내는 길은 무엇인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어 보인다. 즉 예수의 복음(종교)의 핵심인 진리(성)의 회복이다. 모든 허식과 꾸밈과 거짓됨을 과감하게 청산하고(단절하고) 교회를 진리 위에 서게 하는 일이다. (오늘의 교회의 불의함과 거짓 속에는 돈을 주고 교권이나 직분을 사는 행위, 하나님의 교회를 사유물처럼 생각하는 행위,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킬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돈벌이나 자신의 명예나 세력 확장을 위해서 신학교를 운영하거나 학위를 주거나 쉽게 목사안수를 주어 양산하는 행위 등도 포함될수 있다) 즉 우리의 교회/기독교를 참됨의 종교 곧 예수의 복음의 참 모습인 "진리의 종교"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예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출발한 기독교는 바로 참됨의 사람, 참됨의 삶, 참됨의 예배, 참됨의 교회를 위한 참됨의 종교 즉 진리의 종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혹은 교회는 곧 "진리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공동체)"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진리운동을 위해 세워진 교회가 진리운동을 포기하고 딴 일에만 열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 이전에 진리의 종교란 사실을 철저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 기독교를 제대로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며, 진리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없는 사랑은 위선이며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에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터 위에 서지 못한 교회나 교회의 사역들(여기에는 선교사역도 포함된다)은 아무리 많은 양과 수의 사역들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모래성(신기루)에 불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개신교)가 사회로부터 심하게 비난을 받으며 또한 여기저기에서 불미한/수치스러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심히 흔들리고 있는 이유는 바로 기독교의 본래 모습인 "진리"의 종교성을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에 굳게 서지 못한 교회는 모래위에 세워진 건물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반석위에 다시 세워놓기 위해서 모든 것에 앞서서 우리들의 교회(기독교)의 "진리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리성을 상실한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사설 이익집단 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모래위에 세운 집과 같이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산상수훈(팔복)에서 "의" 곧 진리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리고 목마름같이 하란 말씀은 모든 일에 우선하여, 최우선적으로 또는 죽을힘을 다해서 이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예수가 여기서 말한 "의"란 바로 "옳음"과 "참됨" 곧 "진리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기울여 "의로움의 회복" 곧 "진리 회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모래위에 세워진 건물처럼 허물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살리는 가장 빠르고 유효한 길은 무엇인가? 바로 "진실됨"(참됨/진리)의 회복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인들에게 해당되며 특히 진리의 복음을 신봉하고 사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필수 사항이다. 여기에는 평신도와 목회자의 구분이 없다. 아니 평신도들 보다 성직자(지도자)인 목회자들에게 더 긴급히 요구되는 사상이다. 의식있는 사람들은 오늘의 교회(개신교회)라는 거대한 건물이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리며 기울어지고(혹은 허물어지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오는 말: 진리의 사람 예수는 진리를 증거하다가 진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 곧 영원한 영적인 생명으로 부활하였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었고, 우리를 진리 안에 거하라고 말씀(촉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인간(개인)과 사회(공동체)와 전 인류가 평화롭게 살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인 예수처럼 진리의 사람이 되고 또한 우리의 교회가 모든 불의함과 허식/위선과 허상들에서 떠나 진리 위에 세워지는 진리의 교회들이 될 때 이 땅(우리 사회와 전 세계와 전 창조세계)에 진정한 평화 곧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든 대립들을 초극시키고 하나 되게 하며 불완전한 것들을 완전케 하며(완성시키며) 그리하여 모두에게 자기완성에서 오는 참 자유와 평화를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위해 부름 받은 우리들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 위에 굳게 세워지지 못하고 또한 진정한 의미의 의로움 곧 진실됨 즉 진리 위에 굳게 서지 않는 한 이 땅에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축복 곧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는 오지 않으며 올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의 친구와 제자들로 부름 받은 우리와 우리 교회들은 진리로 돌아가는 것 (진리 편에 굳게 서는 일) 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헛수고이며 헛일임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불의함과 위선위에 세워진 모든 것들은 조만간에 소돔과 고모라 도성과 바벨탑처럼 허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모든 교회는 모든 일에 앞서 진리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우리들의 교회 전체와 그리고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진리회복(recovery of truth/righteousness of every one and every church) 없이 이루어지는 교회성장이나 전도 혹은 선교는 너무나 큰 낭비이며 사상누각 즉 모래위에 신기루를 짓는 일과 다름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리를 소리 높여 부르짖는 사람, 자신이 온갖 허위와 욕심과 위선과 꾸밈(겉 치레)들과 확실하게 결별한 사람,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예수의 마음에서 설교하는 사람, 성도들에게 진리 편에 서라고 간곡하게 호소하고 설득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교회를 진리의 터(반석) 위에 확실하게 세운 사람들은 기울어져 가는 한국교회를 일으켜 세우고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는 구원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유도해 낼 수 있다. 즉 진리의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고 기뻐하시는 교회는 큰 교회 즉 대형교회가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무리 큰 교회라 하더라도 진리위에 세워지지 않는 교회는 조만간에 허물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말미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3-2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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