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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평선 氷平線
사쿠라기 시노 소설집
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18년 초판
안개 고치
霧繭
안개 고치 창밖이 유백색으로 탁해져 있었다. 시마다 마키는 해마다 빠짐없이 찾아오는 해무를 거실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유월에 접어든 지도 일주일이 지났건만 아직 한 번도 해님을 못 뵈었다. 옆집 앞 화단에서는 키 작은 튤립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바다가 느릿느릿 토해낸 실로 고치를 만들고 있는 누에처럼 느껴졌다. 문득 시선을 올리자 옆집 처마 밑으로 연보랏빛 나뭇가지 끝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라일락꽃이다.
어제저녁부터 시작한 후리소데 바느질을 새벽녘에야 끝냈다. 주방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 주위가 거뭇거뭇했다. 그래도 삼십분 전보다 부기는 빠진 것 같았다. 눈꺼풀을 가볍게 누르자 눈 속에서 둔중하게 통증의 뿌리가 느껴졌다. 어둠침침한 주방에서도 흰자위에 탁한 핏발이 선 것이 보였다. 천천히 기지개를 켰더니 등과 목 관절이 으드득 마른 소리를 올렸다.
이런 일감은 일년에 한 번뿐이면 좋겠네.
어깻죽지를 빙빙 돌렸다. 양어깨의 근육을 번갈아 쭉쭉 펴면서 거실을 나와 마키는 작업실 장지문을 열었다. 두 평 반짜리 공간의 정면 벽 가득히 하얀 등나무 꽃가지 문장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방금 바느질을 끝낸 후리소데였다. 윗부분의 옅은 복숭앗빛에서부터 끝자락을 향해 서서히 연보랏빛으로 진해져가는 비단 위에 하얀 등나무꽃이 소매에서부터 몸판까지 가득 피어 있었다.
어제 오후에 지급으로 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하룻밤 만에 마무리했다. 문지방 옆에 선 채로 그 반나절을 되짚어보았다. 바느질에 헛손질은 없었다. 집중력도 끊긴 적이 없다.
쓰케사게, 호몬기 등의 급한 일감은 몇 번 받아 온 적이 있지만 후리소데를 이렇게 급하게 지어본 것은 처음이다. 스승 모리 지요노는 마키에게 옷감을 내주는 참에 두 번이나 다짐을 했다. 이틀 이상의 시간이 허락되는 일감은 그저 급한 일일 뿐이다. 내가 지급 이라고 할 때는 다음 날 아침까지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요노는 이 길에 들어선 지 70년째가 되는 기모노 침선장이다. 시내에 크고 작은 곳을 합해 이십여 군데의 전통 포목점 거의 대부분에서 이 옷만은 반드시 지요노 침선장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최고급 옷감을 몇 필씩이나 떠맡고 있었다. 단지 올해 85세인 지요노가 받을 수 있는 일감은 그 양이 한정적이어서 최근 몇 년 동안은 포목점에서 건너오는 일의 70퍼센트를 마키가 바느질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마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모리 지요노 기모노 연구소 에 들어가 5년 동안 기숙하면서 수업을 받았다. 바늘을 손에 든 지 3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10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 한 차례 결혼을 했었지만 이년 만에 헤어졌다. 그 이후 결혼 생활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철거하고 새로 지었을 친정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쓰던 시마다 기모노 연구소 간판을 올렸다. 30년이 넘은 이 단층집은 심장병으로 사망한 마키 아버지의 보험금으로 지었다. 그 일로 몇 차례 친척들이 찾아온 기억이 있지만, 보험금 분배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당시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마키가 알 리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친척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긴 것을 보면 서로 간에 차마 들어줄 수 없는 말들도 오갔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마키는 어머니가 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키의 어머니는 이 도시에서 지요노와 일감을 양분하던 기모노 침선장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바느질의 길을 택한 마키는 어머니의 강력한 권고로 지요노 밑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지요노의 일솜씨를 누구보다 존경했던 어머니의 말은 마키가 나이가 들수록 그 무게감이 점점 더해갔다.
안타깝지만 부모는 일을 가르쳐줄 수 없는 법이야. 꾸지람을 하는 쪽도 꾸지람을 듣는 쪽도 느슨해지게 마련이니까. 지요노 씨 연구소에 들어가 똑똑하게 제 몫을 해내는 바느질쟁이가 되도록 해. 일하는 방식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마키의 스승은 지요노 씨니까 나는 일절 참견하지 않을거야. 그 대신 거기서 배워서 제대로 네 몫을 못 할 것같으면 이 일은 깨끗이 포기해.
상인방 기둥에서 기모노 옷걸이를 내려 청초한 등나무꽃 후리소데를 벗겨냈다. 전용 포장지를 펼쳐놓고 그 위에서 꼼꼼히 접는다. 비단 천의 바느질이 잘되었는지 아닌지는 접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마키가 바느질한 옷은 겹친 부분이 정확히 맞물리면서 차분히 가라앉아 한 장의 판자처럼 얇아진다. 손에 들어보면 그 얇은 천에서는 상상도 못 할 묵직함이 느껴진다.
값비싼 옷감을 받아 올 때의 긴장감이 아직도 이어지는지 그리 졸리지는 않았다. 교토에 사는 작가가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라고 들었다. 옷감의 압도적인 박력에 기가 눌리려 할 때는 태어나 처음으로 바느질한 기모노를 펼쳐보곤 한다. 이제는 쳐다보기도 창피한 서툰 한 땀 한 땀을 보면서 일부러 가슴속에서 또 다른 긴장감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묵직한 무게를 두 팔로 확인했다. 마키는 자신의 기술도 이 등나무꽃처럼 지금이 한창 좋은 때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제자로 입문한 첫날, 재채기 참는 연습을 하라는 지요노의 말에 더럭 겁이 났던 일이 생각난다. 침방울이 튀면 옷감에 얼룩이 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요노는 항상 두 자짜리 자를 곁에 두고 마키가 조금이라도 순서를 틀릴 때마다 손등을 찰싹 때렸다.
주위에서는 바느질하는 아이를 여러 명 들이라고 누차 권했지만 지요노는 한 사람밖에 제자를 두지 않았다. 여러 명이면 자신의 일도, 가르치는 내용도 어중간해진다는 이유였다. 마키가 제자로 입문하기까지 몇 명인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제 몫을 할 만큼까지 크지 못했다. 기모노 바느질 방법만 얼른 배워서 요령껏 지요노 휘하를 떠난 사람이 한 명, 그다음은 모두 반년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들었다. 직업으로서 바느질집 간판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현재로서는 마키 한 사람뿐이다.
지요노에 의하면 모두가 제자 입문 당일에는 입을 맞춘 듯이 바느질을 생업으로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요노는 곧잘, 그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마키뿐이라면서 웃었다.
하다주반, 나가주반, 유카타, 고몬, 쓰무기, 호몬기, 코트, 쓰케사게, 상복, 도메소데, 후리소데. 그런 모든 것을 지요노가 만족할 만큼 지어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일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은 최근 5년 정도의 일이다. 서른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정성껏 접은 후리소데를 포장지에 넣고, 남은 천은 가지런히 시침용 실로 한데 모아 챙겼다. 어머니 대부터 참 오래도 쓰고 있는 한 필짜리 감색 보자기로 감싸자 지요노에게 가지고 갈 준비는 끝이 났다. 후박나무로 만든 길이 일곱 자에 두께 한 치 닷 푼의 마름질판 주위에는 천 조각 하나 실 부스러기 한 줄도 없었다. 오래도록 애용해온 마름질판의 연한 갈색 나이테도 반들반들 빛을 내며 한숨 쉬고 있었다.
마키는 회색 니트 정장으로 갈아입고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를 묶었던 고무줄을 풀었다. 헤어밴드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올리고 립스틱을 살짝 바른 뒤에 집을 나섰다. 구시로 강변길을 걷고 있으려니 강 아래쪽에서 스멀스멀 진한 안개가 올라왔다. 100미터 건너편의 강 언덕은 안개에 뒤덮여 전혀 보이지 않았다. 15분쯤 걸어가 모리 지요노 기모노 연구소 라는 낡은 간판 앞에서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수업실과 작업실을 겸한 이층 방으로 들어서자 지요노는 벌써 바늘을 손에 들고 있었다. 마키는 방 입구에서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날씨가 이리 찌무룩한 참에 또 그런 쥐색 옷을 입었구나. 상복이 외려 더 화사하겠다. 아예 검은색으로 입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니?
지요노는 모스그린색 바탕에 회색 세로줄 무늬가 들어간 멋스러운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단정한 얼굴 생김새에 잘 어울렸다. 가녀린 몸매와는 딴판으로 지요노의 눈에는 항상 주위를 압도하는 번뜩임이 있었다. 마키는 이 자그마한 노파의 첫인상이 말을 뱉자마자 크게 변해버리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포목점에서 나온 신입 직원들은 반드시 한 번씩은 지요노의 오만한 대응에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하지만 곧바로 윗사람에게 혼이 나고 터덜터덜 사과를 하러 왔다. 고객들의 어떤 무리한 주문도 다 받아주는 바느질 명인의 심기를 포목점의 신입 직원이 거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지요노가 화를 내는 것은 치수를 애매하게 재 오거나 지식이 부족해 겹옷의 안감을 잘못 골라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협 따위는 결코 용서치 않는 일솜씨로 착실히 쌓아온 지요노의 신용은 그 밑에서 배운 마키에게도 이어졌다.
짧은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마키가 다시 친정에 돌아와 일감을 받겠노라고 보고했을 때도 지요노는 그러게 내가 목을 더 파라고 했지? 라고 쓴소리 한마디를 날렸다. 목을 판다 는 것은 기모노 옷깃을 한껏 뒤로 젖혀 목덜미와 등의 살이 보이도록 허술한 틈을 만든다는 뜻이다. 어이없다는 듯한 그 말투에서는 애제자가 다시 바느질로 돌아온 것에 대한 반가움도 진하게 묻어났다.
선생님, 후리소데가 다 됐습니다.
저기에 걸어봐.
지요노가 바늘 든 손을 멈추고 눈앞에 내민 전용 포장지의 매듭을 풀면서 말했다. 마키는 시키는 대로 정면 벽에 달린 횃대에 후리소데를 걸었다. 지요노의 등 뒤에 자리한 창문을 통해 비쳐 드는 약간의 빛 앞에서도 등나무꽃은 아름답게 흐드러졌다. 마름질판 두 개에 바느질 도구밖에 없는 세 평 다다미방은 마키의 시장 뛰는 소리가 들려올 것처럼 고요히 가라앉았다. 몇 분 뒤 지요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들어오는 바느질은 모두 다 시마다 연구소에 부탁하마. 이 후리소데는 가노코야 포목점에 갖다드려라.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기는 했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대물림 통고에 마키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느질 중이던 천을 무릎에 내려놓았던 지요노가 다시 바늘을 들었다. 마키는 퍼뜩 정신이 들어 두 손을 무릎 앞에 대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지요노가 낳은 두 딸은 모두 침선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마키는 어머니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내 자식을 다른 직인에게 맡기는 것은 제 손으로 딸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보다 훨씬 더 참을성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드디어 네 어머니에게 얼굴을 들 수 있게 됐구나.
지요노는 다시금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마키는 지요노의 손맡에 있는 하얀 모슬린 주반을 보았다. 동정 두 장을 겹쳐서 꿰매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실을 빼는 것만으로 완전히 새 동정이 나온다. 주반은 지요노 자신의 것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현관 옆의 전화로 택시를 부르는데 야요이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야요이는 마키가 독립해서 나간 후, 지요노가 15년 만에 맞아들인 제자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반년 동안 일했던 미용실을 그만두고 작년 가을부터 지요노 연구소에 입주해 수업 중이었다. 말수가 적고 자기 얘기는 통 하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다고 지요노는 말했다. 마키는 자신도 남들에게 그것과 똑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주 제자의 생활은 휴대전화도 없고 흡족하게 쉴 시간도 없다. 그런 부자유한 생활에 자진해서 뛰어든 스무 살 아가씨가 남들과 관계를 맺는 데 능숙할 리 없다. 야요이는 화장기 없는 창백한 뺨에 긴장한 빛을 띠며 마키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이 건강 상태에 대해 무슨 말씀 없으셨습니까?
건강 상태라니, 무슨 일 있었어?
야요이의 시선이 마키의 어깨쯤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녀가 몇 초 동안 입가를 일그러뜨린 뒤, 작은 목소리를 좀 더 낮췄다.
선생님께서, 어제저녁 마키 씨가 집에 가신 뒤에 쓰러지셨어요. 곧바로 구급차를 불렀는데, 링거 한 대만 맞고는 집에 돌아가시겠다면서 영 말을 안 들으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빈혈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자세한 검사를 해보자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던데 기어코 집에 가시겠다고 해서…….
빈혈이라니, 어떻게 된 거야?
야요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즉시 연락해달라고 당부하다가 퍼뜩 생각나서 왜 어제저녁에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이 마키 씨께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옷감을 마름질하기 전에 다림질부터 끝내고 어젯밤에는 밤샘을 각오하고 작업실에 들어갔다. 지요노의 눈에는 마키의 움직임이 하나에서 열까지 뻔히 다 보였을 게 틀림없다.
말하지 말라고 하셔도 다음에는 꼭 나한테 연락해줘. 부탁한다.
야요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현관 앞에 택시가 도착했다. 마키는 서둘러 구두를 챙겨 신고 야요이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부탁한다고 말하고 현관을 뒤로했다.
가노코야 포목점이 자리한 역 앞 거리에는 문 닫은 노포 상점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번화가라고 해도 이 도시가 어업과 탄광으로 한참 번창하던 시절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편도 삼차선 국도도 이제는 하얀 선만 눈에 두드러질 뿐이었다. 홋카이도 지역의 소도시는 하나같이 역 앞 상점가의 쇠퇴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고, 가노고야 역시 거품이 꺼진 후에 밀려든 경기 침체에 타격을 입은 포목점 중의 하나였다.
인구 이십만이 채 못 되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경기가 좋으면 즉각 수도권의 대기업 포목점이 시장을 휩쓸어버린다. 경기가 바닥을 치는 가운데 여자 손 하나로 여태껏 포목점을 지켜온 여주인의 장사 수완은 기모노 업계뿐만 아니라 이 도시 전체 상업계에서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마키는 보자기를 가슴에 껴안고 긴장한 채 가노코야 포목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서 와요, 마키 씨.
반갑게 맞아준 것은 2대째 여주인 히나코였다. 동그란 얼굴에 야무지게 그려 넣은 가느다란 눈썹 끝을 쭉 올리면서 히나코는 기모노 옷자락에 일절 흐트러짐이 없는 세련된 종종걸음으로 마키 앞으로 다가왔다. 차분한 회색 오시마 쓰무기 기모노에 길쭉한 눈에 그려 넣은 아이라인과 얇은 입술에 바른 빨간 립스틱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방금 지요노 선생에게서 연락받았어요. 사정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우리 쪽에서 두 분께 인사도 드릴 겸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마키 씨가 원하지 않는 한 그런 번거로운 절차는 필요 없다고 하시네? 대물림받은 축하 인사를 이렇게 가게 안에 서서 하다니, 가노코야 포목점이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지 뭐야.
히나코 역시 모친 때부터 대를 이어 지금까지 일을 함께해 왔다. 마키보다 일곱 살이 많지만 선대를 일찌감치 보낸 탓에 이십 대 중반부터 줄곧 기모노 포목점 업계에서 활동했다. 일년에 한 번 치러지는 기모노 축제조차 웬만해서는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키를 히나코는 항상 구제할 길 없는 일중독이라고 놀리곤 했다.
히나코에 관해서는 그때그때 교제하는 남자에서부터 처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화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 큰 실수를 해버린 침선 직인을 한껏 위로해준 끝에 그 자리에서 웃으면서 계약을 해지하겠노라고 말했다는, 정말이지 거짓말인지 모를 일도 두고두고 업계의 얘깃거리가 되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소문이 언제까지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끊임없이 상냥한 웃음 속에 히나코라면 정말로 그럴지 모르다고 생각되는 공기가 감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히나코가 마키의 손에서 후리소데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앞으로 가노코야에서는 마키 씨의 바느질은 확인 작업을 안 할 거예요. 그게 지요노 선생과 우리 가게가 여태껏 해온 거래 규칙이에요. 오늘부터는 마키 씨가 가노코야 최고의 전속 직인이에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게 머리를 숙인 히나코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뛰어들어 왔다. 마키도 마찬가지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자세를 원래대로 되돌릴 즈음에는 히나코의 말투도 평소의 편안한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옷감이 진짜로 좋았지?
그만큼 기분 좋은 긴장감을 맛봤죠.
가노코야 포목점에 들르면 반드시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가게 안쪽의 접객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둘이 찾아오면 선대 여주인이 매번 과자가 든 불룩한 주머니를 내주곤 하던 곳이다. 작은 다실 같이 꾸민 한 평 남짓한 공간에는 항상 거문고 소리가 나지막하게 흐르고 도코노마를 본뜬 벽 선반에는 자잘한 전통 침선 장식물이 줄줄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키는 대합 모양의 작은 주머니를 손에 들었다. 바닥에 작은 글씨로 1천 엔이라고 손수 써넣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거, 예쁘지? 가격표를 딱 붙여두면 오히려 고객과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니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가격표대로 돈을 받아. 가노코야에서는 여주인의 장사 수완도 주요 상품 중의 하나야.
히나코는 고개를 끄덕이는 마키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보이고 내선으로 고객 담당 부장 야마모토에게 후리소데를 고객에게 배달하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마친 히나코가 냉큼 이쪽으로 돌아앉았다.
그 뒤로 야마모토 씨와는 어떻게 됐어?
마키는 대합 모양의 주머니를 선반에 다시 내려놓고 애매한 미소를 띠며 고개만 갸우뚱했다. 건네준 찻잔은 흙의 촉감을 그대로 살려 손으로 빚은 것이고, 안에는 소금에 절인 벚꽃 잎이 하늘하늘 떠 있었다. 여주인 히나코와 야마모토가 과거에 5년이나 사귀던 사이라는 것은 반년 전쯤에 처음으로 알았다. 마키가 알고 있는 한, 주위에서 쑥덕거리는 히나코의 교제 상대 중에 야마모토의 이름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은 마키가 야마모토와 처음으로 몸을 합했던 날 밤이었다.
야마모토와는 가을 초입부터 세 번쯤, 바느질일과 관계없이 만났었다. 정초에 성인식에 입고 나갈 예복의 바느질을 마무리한 뒤, 함께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야마모토의 집에 들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 거라는 예감은 있었다. 몸과 마음 어느 쪽이 먼저 야마모토와 맞닿고 싶었는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몸이었던 듯한 느낌도 들었다. 격정적인 감정을 주고받는 번거로움 없이 편하게 흘러가는 관계가 기분 좋았다.
야마모토와 몸을 합하면 고급 비단으로 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성 고객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동안에 몸에 배어버린 유연한 거동과 본래 그가 갖고 있는 어눌하고도 성실한 내면과의 격차에 호감을 품었다. 그날 밤 마키는 야마모토와 히나코 사이의 과거 따위,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스토브 불길에 비춰진 그의 등에 똑같은 간격으로 튀어나온 뼈를 바라보며, 솔직한 고백을 들었으면서 왜 지금 그런 얘기를, 이라고 중얼거렸다. 히나코와의 관계는 끝났고 이제 상사와 부하 이상의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마키와의 관계도 제대로 형식을 갖춰 여주인에게 보고하고 싶다, 라고 야마모토는 말했다.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야마모토가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뭔가 자신이 비난받는 듯한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마키는 그날 밤의 차가움이나 비뚤어진 심성이 자신의 본질이 아닌가 짐작했다. 살을 맞댄 그날 밤에 생겨난 아주 작은 틈새는 마키 쪽에서 연락을 취하지 않으면서 자꾸자꾸 벌어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을 합했을 때의 기억은 선명해졌지만 그건 미련이라는 것과는 뭔가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그냥 그의 몸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쉽다, 라고 인정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야마모토에게도 반년 전과는 다른 메마른 태도를 요구해야 한다. 마음은 몸처럼 무겁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입 밖에 내서 말할 수는 없었다.
마키는 가노코야 최고의 전속 직인으로서, 히나코는 이 지역 직인들을 통솔하는 가노코야의 여주인으로서, 야마모토는 그 여주인의 오른팔로서, 앞으로 세 사람은 각자의 마음만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될 터였다.
히나코가 마키의 몸짓에 그래, 라고 턱을 끄덕였다. 그리고 마키의 대각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말의 내용과는 어긋나는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사랑과 일 중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는 둘 다 내버리고 싶어져. 그래서 항상 양쪽 다 확실하게 손에 넣을 방법만 생각하려고 해.
당돌한 히나코의 말에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마키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지금의 가노코야로서는 야마모토와 마키 씨, 둘 다 잃을 수 없어. 그 사람하고의 관계, 망설여지는 정도라면 단칼에 잘라주는 게 좋아.
마키는 그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벚꽃 차를 다 마시자 찻잔을 가만히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 히나코가 조금 전의 선언 따위는 까맣게 잊은 듯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푹 자고, 앞으로도 멋진 솜씨를 보여줘. 가노코야가 전면적으로 후원할 테니까. 비단실 타래를 닥종이 염낭에 넣어 건네줄 때, 마키의 손등을 살짝 감싸는 몸짓이 선대와 빼닮아 있었다.
야마모토와는 이제 끝이 났다, 라고 왜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을까. 신호등 앞에 멈춰 설 때마다 생각했다. 아침에 바느질을 끝낸 옷감만큼 가치가 있는 관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주제에 몸판과 소매를 싹둑 잘라내는 것처럼 단호하게 잘라지지는 않는다. 설령 끝난 관계라고 해도 아직 압 밖에 낼 만큼 모두 다 잘라낸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야마모토의 고백에서 느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비참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점심때가 되어갈수록 기온이 올라가 바다에서 흘러드는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한숨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떼어내다시피 일어났다. 낮 시간의 생활로 돌아가자면 최소한 이틀은 걸릴 것이다. 다시 자리에 눕기 전에 냉장고 안에 넣어둔 캔맥주에 손을 댔다. 반절쯤 마시고 나면 다시 수마가 덮쳐줄 것이다.
두 모금을 마신 참에 거실 구석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야마모토였다. 고객분이 아주 좋아하셨어요, 라고 그가 말했다.
오늘, 다실 쪽에 나왔을 때, 봤어요. 지요노 선생이 일을 물려주셨다는 얘기도 들었고,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는 마키 선생이라고 불러야겠군요.
한 번에 1천만 엔까지 쇼핑을 해 가는 손님 앞에서도, 화학섬유의 기성복을 사 가는 손님 앞에서도 야마모토의 태도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노코야 포목점의 무기라고 히나코는 말했다. 여주인에 대해서도, 그리고 마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리라. 야마모토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어떤 사명 같은 것에 휘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올곧음 탓에 신용을 얻은 것이지만, 지나칠 정도의 성실함도 특히 남자와 여자의 문제일 때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야마모토의 온화한 말투가 전화를 건 진짜 목적을 말할 때는 약간 급해졌다.
마키 씨만 괜찮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서 찬찬히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어려울까요?
몇 초의 침묵 끝에 야마모토는, 좋은 대답을 기다리지요, 라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바느질 일은 가노코야를 빼고서는 해나갈 수 없다. 일단 히나코의 기분을 거스른다면 설령 지요노의 제자라고 해도 일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마모토의 입장에서도 일부러 오늘을 골라 전화를 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만날 수 없습니다, 라고 한마디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럼 이만, 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는 야마모토 쪽에서 끊겼다.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불통음을 들으면서, 마키는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는 둘 다 내버리고 싶어진다고 말했던 히나코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 한쪽만으로 만족할 만한 것들을 놓고 비교를 한다는 건 뭔가 잘못되었다. 하지만 마키와 히나코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다음이었다. 히나코는 선언했던 대로, 잘라내지 않는 한 둘 다 확실하게 손에 넣을 것이다. 위협도 아니고 허풍도 아니고, 히나코만의 방식으로 선명하게.
지요노가 입원했다는 연락이 온 것은 이쓰쿠시마 축제로 북적거리는 7월 셋째 주 주말이었다. 그 전날 오후에 축제 날에 맞춰서 입고 싶다는 갑작스러운 일감이 들어와 유카타 한 장을 만들어냈다. 오랜만에 무명천 바느질을 한 탓에 손가락 끝이 딱딱해졌다. 오늘 하루는 바늘 잡는 손을 쉬자고 마음먹은 아침, 야요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선생님도 금세 집에 돌아가겠다는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마키 씨에게 연락드린다고 미리 말씀드리고 전화하는 거예요. 지금부터 자세한 검사에 들어간대요. 간병인은 큰따님이 알아봐주신다고 했습니다. 제가 곁에 있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싫다고 하셨어요.
마키가 시립종합병원 10층의 병실로 달려가자 지요노는 1인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가의 침대로 다가갔더니 시선이 천천히 마키에게로 향했다.
병원 건물은 시내에서도 특히 안개가 짙은 것으로 알려진 하루토리 호수 옆이다. 10층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모든 것이 유백색으로 흐려져 건물이 통째로 구름 속을 떠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축제의 장식 수레가 아까 이 아래 도로를 지나갔어.
사람 깜짝 놀라게 하지 마세요, 선생님.
근데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 올해의 이쓰쿠시마 신사 축제는 소리뿐이구나. 영락없이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아.
마키가 입을 다물자 지요노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일을 배우던 바느질 방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용하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야요이가 병실 입구에 서 있었다. 노란 체크무늬 셔츠가 눈부셨다.
방금 야요이에게도 얘기하던 참이었어. 저 아이를 제 몫을 할 때까지 키워내지 못한 것은 참말로 안타깝지만, 그런 칠칠치 못한 소행이 있으니 외려 좀 더 살아야 될 것 같구나.
그런 마음 약한 말씀을 하시면 안 되지요. 확실히 나을 때까지 치료를 잘 받으세요, 제발.
운 좋게 낫는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 분명해. 이것만은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 근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여기서 이렇게 한심한 꼴로 누워 있으니까 주위 사람들이 내가 어떤 부탁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마음이 솔솔 드는 게 아주 재미있어. 병들어 얻은 깨달음인가.
아니면 늙어서 얻은 깨달음인가, 라고 중얼거리는 지요노의 시선은 분명하게 마키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키도 지요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어떤 부탁이시냐고 물어보았다.
너를 맡았을 때, 네 어머니는 내 딸에게 모리 지요노가 사는 방식까지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하더구나. 그걸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어.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자신이 없다는 말은 차마 못 하지. 처음 네가 나한테 왔을 무렵에는 주말에 네가 바느질하던 일감을 들고 집에 돌아갈 때마다 너무 두려워 잠이 오질 않았어. 네 어머니 시마다 유키라는 사람은 나한테 그런 존재였어.
지요노가 입을 다물자 병실은 고요히 가라앉았다.
지난번 그 후리소데, 참말로 바느질이 훌륭하더라. 이 아름다운 직선이 동그란 여자 몸을 아름답게 감싸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감사한 마음이 자꾸 들었어. 70년을 기모노 바느질을 해왔지만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 나는 내 일에 만족했다. 이제 마지막 일감을 떳떳하게 네 어머니에게 보고할 수 있게 됐어.
마키는 꼼짝도 못하고 기름기 없이 메마른 지요노의 손가락 끝만 바라보았다.
야요이를 잘 부탁한다. 앞으로 5년만 지나면 일을 썩 잘하게 될 게야.
병실 입구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갔는지 야요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키는 지요노의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키가 병실을 나서는데 지요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마키도 윗실 아랫실의 조정을 참말로 잘하게 되었구먼.
이틀 뒤, 야요이가 신변 용품을 챙겨 시마다 기모노 연구소로 찾아왔다. 고향 집은 시내 번화가에서 50킬로미터쯤이나 떨어진 어촌이라고 했다. 시내에는 잠자리를 의탁할 만한 친척도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주 제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궁리 끝에 야요이에게 지금까지 작업실로 쓰던 현관 옆의 작은방을 내주기로 했다. 야요이의 기량을 감안하면 도저히 저 혼자 살 집을 얻을 만한 수입은 바랄 수 없었다. 당분간 두 사람분의 생활비를 마키가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요이가 당당한 일손으로 시마다 연구소의 일감을 받을 수 있기까지 앞으로 최소한 일년은 걸릴 터였다.
지금까지 한 달에 열다섯 필 전후, 그리고 이틀에 한 벌의 속도로 마감을 했기 때문에 마키 혼자서는 그리 큰 사치만 부리지 않으면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양의 일감을 처리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느긋하게 내다보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유카타와 주반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라고 야요이는 말했다. 하지만 매번 그런 간단한 바느질만 하고 있어서는 기술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시기를 봐서 겹봉까지 가르치지 않으면 설령 십년이 걸리더라도 생업이 되지 못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옷감이 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으니까 네가 제 몫을 할 때까지는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할 거야. 지요노 선생님과는 일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5년을 목표로 자신 있는 바느질쟁이가 될 수 있도록 나도 마음을 다잡고 뒷받침을 해줄 생각이야. 힘든 일도 많겠지만 잘 따라와줘.
강한 눈빛으로 야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긴장한 것을 얼버무리듯이 마키는 우선 작업실을 정비하는 작업을 거들어달라고 지시했다. 주방이 딸린 다섯 평의 거실을 작업실로 만들기 위해 우선 잠깐 눈을 붙일 때 편리했던 낡은 소파를 버렸다. 스토브와 텔레비전만 남은 방에 마름질판 두 개를 옮겨 왔다. 마주하고 나란히 놓자 갑자기 긴장감이 흐르는 방의 모습이 갖춰졌다. 수없이 마음먹었다가 귀찮아서 자꾸 뒤로 미루기만 했던 작업실 이동이 생각지도 못한 일로 실현되었다.
자신이 아직 수입을 낼만 한 일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야요이는 밥 짓기와 청소도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마키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하루 세 끼를 아무리 제자라지만 남의 손에 내맡기고 바느질을 하는 생활이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번갈아 하자는 것도 크게 양보한 타협점이었다.
마키는 새삼 야요이에 관해 지요노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노코야 포목점과의 관계에 더해 새로운 생활은 어딘지 불안한 출발을 하게 되었다.
여름 내내 짙은 안개 때문에 햇빛이라고는 보이는 날이 더 적은 도시지만 9월부터는 여름에 뒤처진 것을 만회하려는 듯 해가 쨍쨍 내리쬐기 시작했다.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커튼으로 조절하기로 했다. 작업실은 옷감을 탈 없이 보관하는 환경이 최우선이다. 카펫도 바늘을 줍기 쉽게 루프형에서 털을 짧게 자른 커빙매트로 바꿨다. 스토브를 주방 쪽으로 밀어놓았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공간이 생겼다.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모두 마친 것은 정리를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점심때였다. 바람이 불어준 덕분에 오랜만에 흐릿한 해님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거실은 작업실로서의 기능을 시작했다. 무표정한 야요이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노상 이쪽 눈치를 살피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우선 시월에 가노코야 포목점 주최로 거행되는 기모노 축제 때 입을 자신의 고몬을 바느질해보라고 했다.
홑것 두 장을 맞대서 꿰매니까 겹봉이야. 본뜨기와 시침질만 정확히 해주면 내 손으로 한 작업이 그다음 작업을 도와주게 돼. 노트와 연필은 반드시 옆에 지니고 있다가 생각난 것이나 나한테 들은 것은 모두 다 적어두도록 해. 이건 지요노 선생님 댁에서 했던 것과 똑같아.
마키가 젊은 시절에 사들여 여태껏 묵혀두었던 옷감을 내주었다. 헤어진 남편을 만난 무렵에 구입한 하늘색 바탕에 자잘한 꽃들이 흩어진 무늬의 천이다. 자신을 위해 뭔가 바느질을 해보자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국은 옷감 상태 그대로 해를 묵히고 말았지만, 미숙한 행복을 이야기해주는 그 꽃무늬를 보면서 이 옷감을 골랐던 나날들이 행복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떤 허리 장식 띠를 갖다 맞춰봐도 지금의 마키에게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옷감을 건네받은 야요이는 짧은 감사 인사를 했을 뿐,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너무 과장되게 기뻐하는 것도 난감하지만 이런 식으로 반응이 희박한 것도 신경이 쓰였다. 마키는 치수를 재면서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고몬의 꽃무늬, 마음에 안 들면 말해. 장롱 속을 뒤져보면 또 뭔가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뚝뚝한 대답에 그럼 왜, 라고 되묻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야요이의 노트에 측정한 어깨 치수를 써넣었다. 마키는 아무 꾸밈없이 지극히 평범한 그 대학 노트를 손에 들고 무심코 책장을 넘겼다. 노트에는 작은 글씨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마키의 어깨 너머에서 다가온 팔이 살그머니 노트를 빼앗아갔다. 올려다보니 야요이가 반쯤 눈을 흘기듯이 마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춤하는 마키를 보고는 퍼뜩 정신을 차린 기색으로 죄송합니다, 라고 마리를 숙였다.
아냐, 미안해. 말도 없이 들여다본 내가 잘못이야.
그날은 대화도 길게 이어지지 않아서 저녁 식사를 끝내고 야요이가 제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내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밤에 혼자가 된 뒤에 마키는 전화 받침대 아래 서랍 안에 있던 낡은 대학 노트를 꺼냈다. 처음 독립했을 때 이것만큼 도움이 된 것도 없었다. 지요노 기모노 연구소에서 수업한 5년 동안 바느질했던 500필이 넘는 옷감의 온갖 체형과 치수가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지금 키와 몸무게만 알면 순식간에 치수가 떠오르는 것도 이 노트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한 장 두 장 넘겨보는 사이에 무늬를 맞추느라 무진 고생을 했던 반야 얼굴 문양의 기모노 부분에서 손이 멈췄다. 키 150㎝/몸무게 80㎏ / 전통 무용 발표회 / 월말 마감 / 완성되는 대로 가노코야의 야마모토에게 연락 이라고 노트 구석에 자잘한 메모가 있었다. 결코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제 펼쳐봐도 그 즉시 바느질 장면에서부터 그때 있었던 일들까지 다시 생각나곤 했다. 한 권 한 권이 견습생 시절의 일기이기도 했다.
무늬 맞추기인가. 주방에 놓인 식탁의 의자에 앉아 작업 공간이 된 거실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왠지 야요이가 손대기 힘든 옷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욱더 겁을 내서는 안 된다. 마키는 내일부터 그녀가 따라올지 말지 일일이 염려해가며 대하는 짓은 관두자고 마음먹었다. 혹시 따라오지 않더라도 그쪽에서 질문이나 행동을 해 오기 전에 자신이 앞서서 격려하고 등 떠미는 짓은 피하자고 생각했다. 도망갈 것을 두려워해서는 자신도 야요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배우기보다 훔치는 기술이 더 많다는 것도 손재주로 먹고 사는 자의 길이다. 생활의 기본을 모두 다 스승에게 맞춰나가는 것은 기술을 얻는 데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지요노도 말했었다. 마키가 할 수 있는 일은 야요이의 힘겨운 몇 년이 반드시 보답을 받도록 노력하는 것뿐이다.
다음 날, 소매 다는 순서를 틀린 야요이의 손등을 마름질판 너머에서 잣대로 내리쳤다. 조금이라도 거리낌이 있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앉아 있던 야요이의 상반신이 머리 하나만큼 쭉 늘어났다. 평소에는 표정이 부족하던 그녀도 그때만은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평생 똑같은 순서로 해야 돼. 오늘도 십년 후에도 항상 똑같아.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더라도 계속 두 눈 똑바로 뜨고 해야 돼. 무서운 건 자기 식대로 하는 것.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익숙해지는 것. 나는 그렇게 배워왔어.
그래도 잣대를 집어 들 때는 일순 망설였다. 마키가 바느질 하던 옷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주말이면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던 지요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을 다잡기 위해 공연히 말투가 더 엄격해졌다. 하지만 한순간의 분함 따위는 가닿지 못할 만큼의 존경심이 마키의 노트에도 야요이의 노트에도 넘쳐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8월. 봄부터 내내 해무가 뒤덮여 있던 도시가 이따금 환하게 트이는 때가 나타난다. 가노코야의 일감 의뢰도 순조로웠다. 마름판질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옷감이 항상 붙박이장의 반절쯤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모두 다 바느질하는 데는 한 달이 걸린다.
야마모토의 전화는 그때 한 번뿐, 더 이상 걸려오지 않았다. 차례차례 해내야 할 일거리 덕분에 깊은 생각에 잠길 시간이 없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야요이가 입주 수업을 시작하고 한 번도 고향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게 귀찮은 것은 서로 마찬가지다 싶어서 굳이 물어보지 않은 채 넘어갔다. 기모노 축제 때 입히려고 바느질을 지시했던 고몬도 열흘이라는 시간을 들여 마무리해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나날을 위로해줄 생각으로, 이대로 내다 팔아도 되겠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야요이가 마키 앞에서 처음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글썽였다.
마키가 내준 고몬 옷감은 헤어진 남편과 둘이서 고른 것이었다. 그 사랑은 어머니를 잃은 마키에게 처음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해준 것이었다.
바느질은 용돈 벌이 정도로만 하고 항상 집에서 나를 기다려주면 좋겠어.
일에 좌절감을 느끼던 때이기도 했다. 먹고살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두 장 세 장 기모노 바느질만 하다가 끝나버린 어머니의 일생을 되짚어보는 고통에서도 그가 있으면 도망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머니가 이 도시에 남겨준 기모노 연구소에 짓눌려 사는 하루하루는 결혼을 하면서 한때 마키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남편이 가정적인 게 아니라 가정적인 것을 동경하는 남자라는 걸 깨달은 것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일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아이와 아내가 기다리는 따뜻한 가정을 갖고 싶어.
마키가 임신이 되지 않았다. 말끝마다 손자와 성묘 이야기를 꺼내는 노친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그 사람 나름의 변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을 무렵에는 벌써 다른 여자의 배 속에 남편의 아이가 있었다.
이혼이라는 결과가 안타깝기는 했지만, 자신의 인생에 매듭 하나가 지어진 것에 안도했다는 것도 솔직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결혼했을 때의 기분과 아주 흡사했다. 아기라는 천진무구한 존재 덕분에 주위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별수 없었다, 라는 이유가 생긴 것은 다행이었다. 이혼극은 주위에서 놀랄 만큼 짧은 기간에 수습되었다.
결혼과 이혼을 거쳐 마흔을 코앞에 두고 보니, 힘겨울 때 혼자서 뚫고 나가겠다는 각오만 단단히 해두면 의외로 힘든 일 따위 찾아오지 않는 법이라는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액운도 재앙도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불러들이는 거야. 이제야 그것이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차를 준비하러 주방에 나갔던 야요이가 아앗 하고 높은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키 씨 잔이 이가 빠져버렸어요. 손에는 파란 꽃무늬 머그잔이 쥐어져 있었다.
커플 머그잔인데, 어떡해요?
그거, 버려도 돼. 이혼할 때 가져온 거라 벌써 오래되기도 했고, 괜찮아.
야요이의 눈 깜빡임이 빨라졌다. 뜻밖인가, 라고 눈으로 물었다.
결혼하신 적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여태 쓰고 계셨어요?
이혼한 적이 있다, 라고 말하지 않는 점이 그녀다운 면일 터였다. 곤혹스러운 표정에서 평소에는 별로 느낀 적이 없는 젊음이 떠올랐다. 커플 머그잔은 야요이가 들어왔을 때 오랜만에 짐 상자에서 꺼내 온 것이었다. 야요이는 빨간색, 마키는 파란색으로 정하고 매일 차나 커피를 마실 때마다 썼다. 남편 곁을 떠나오는 참에 이런 걸 남기고 가면 두고두고 번잡스러운 기분이 들 거라는 생각에 자신의 짐 속에 던져 넣은 것이었다.
이상한가, 그런 걸 가져온 게?
아뇨, 이상할 것까지는 없지만…….
없지만, 뭐?
안 좋은 일도 날마다 생각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러다보면 웬만한 일에는 상처 입지 않게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요이가 곧바로 다른 잔을 준비해 담담한 몸짓으로 인스턴트커피를 탔다. 마키는 그 손맡을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키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그 잔을 사용할 때마다 헤어진 남편을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무리하게 잊으려고 하면 도리어 선명해지는 기억에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지려고 했던 것이라고 한다면 반론은 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야요이가 말하는 안 좋은 일이란 대체 뭘까 궁금해졌다.
이혼이 안 좋은 일이었다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아. 미련도, 아마 없는 것 같아. 싫지 않았어, 그 사람. 내가 어중간했던 거지. 매사에 귀찮아하는 사람이란 게 이런 거야. 내가 무신경한 모양이야, 아마.
그렇다면 야마모토와의 관계는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 해도 제대로 대답할 말은 없었다. 히나코에 대한 경쟁심도 야마모토에 대한 미련도 아니고,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고 있던 야요이의 입매가 미소로도, 혹은 곤혹스러움으로도 보이는 모양으로 삐뚜름해졌다.
괜찮다면 왜 바느질 일을 선택했는지 얘기해줄 수 있어?
잔을 들고 있던 야요이의 손이 멈추고 시선이 테이블 위에서 출렁 흔들렸다. 마키는 야요이의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한 척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일부터 가노코야에서 가져온 팥 색깔 고몬을 부탁한다. 오늘의 기쁨을 잊지 않도록 잘 간직해. 남의 것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지은 옷을 입을 때 고객이 똑같이 기뻐할 만한 바느질을 해야지. 내 손이 편했던 일에는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고 지요노 선생님이 자주 얘기하셨어. 나도 똑같은 생각이야.
네, 하고 야요이가 대답했다. 마키는 그녀가 스스로 토해낸 실의 고치 속에 다시 틀어박힌 걸 느꼈다.
태풍이 일기예보보다 하루 빠르게 지나가서 기모노 축제 당일은 여름을 되찾은 듯 화창한 날씨의 덕을 보게 되었다. 야요이는 하늘색 고몬에 복숭앗빛 나고야 허리띠를, 마키는 어머니가 남겨준 감색 바탕의 오시마 쓰무기 기모노에 붉은색 허리띠를 맸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까지 바늘을 손에 들었던 마키의 어머니가 이 오시마 쓰무기를 입어볼 기회는 없었다. 흰 버선과 동정 외에 다른 장식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 조합이었지만, 역시 여주인 히나코도 한층 더 수수한 은회색 오시마 쓰무기를 입고 있었다. 연회장은 평소에 결혼식장으로 사용되는 호텔 대형 홀이었다. 500명 수용 가능한 공간에는 통로만 남긴 채 촘촘히 다다미가 깔리고, 자리가 비좁을 만큼 각종 옷감과 눈부시게 화려한 기모노가 임시로 시침질만 한 상태로 진열되었다.
오늘은 다도와 꽃꽂이 등 이 도시에서 전통을 지키는 취미나 일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축제 날이다. 평소 자주 드나드는 포목점에서 자신에게 어떤 수준의 옷감을 권해줄 것인지, 고객 쪽에서 긴장하며 스스로의 격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는 날이기도 했다. 애초에 가격 따위는 있으나 마나 한 경우도 많았다. 설령 허리띠를 거의 공짜나 마찬가지로 내놓더라도 전체적인 계산에서는 결코 손해를 보지 않는 게 포목점 도매 장사였다.
오늘의 매상에 따라서는 마키와 야요이도 연말까지 내내 쉬는 날 없이 일해야 한다. 해마다 기모노 축제가 끝나면 상자 단위로 일감이 들어왔다. 지요노의 고객을 모두 다 떠맡게 된다면 작업 예정이라고는 짜볼 도리도 없을 터였다.
예전에는 과도한 장식의 이런 들뜬 축제 분위기가 영 내키지 않았지만, 지요노가 없는 올해는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오지 못하는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은 처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고객 담당 부장 야마모토도 여주인과 똑같은 은회색 쓰무기를 차려입고 총지배인으로서 쉴 새 없이 여기저기 돌아보고 있었다. 정확히 7대 3으로 가른 앞머리가 한 줄기 가느다랗게 이마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오늘은 가노코야 여주인 히나코의 오른팔인 그가 어떻게 상담을 지휘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야마모토는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세워둔 병풍 뒤쪽에서 일이 들어올 때마다 세세한 협의며 도매점과의 상담에 쫓기고 있었다. 히나코는 연거푸 허리띠 틈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야마모토를 호출하고 미리 준비한 후리소데를 확인하게 했다. 눈썹이 평소보다 약간 치켜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마키를 뒤따라오던 야요이도 여느 때 없이 들썽들썽 불안해하고 있었다.
뭔가 엄청난 세계네요.
괜찮아. 우리가 하는 일은 옷감을 바느질하는 것. 그것만 마음에 새기고 자신감을 가지면 이런 분위기에 먹혀들 일도 없어.
야요이의 등이 꼿꼿해졌다. 바로 며칠 전에, 마름질을 하면서 가위를 잘못 넣는 바람에 몇 년 치 일감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바느질쟁이의 얘기를 해준 참이었다. 수입은 물론이고 그때까지 착실히 쌓아온 신용을 단숨에 잃어버린 직인들이 적지 않다. 설령 그 자리에서는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고 해도 일감 앞에서 소극적이 되어버리는 기분만은 어떻게도 할 수 없다. 아무리 숙련된 직인이라도 어느 순간엔가 뜻하지 않게 얼굴을 내미는 공포감이 있었다.
오전의 전통 무용 무대에 맞춰서 찾아온 손님들로 연회장은 거의 만원 상태가 되었다. 누구라도 알 만한 쉬운 레퍼토리를 준비해달라는 히나코의 말에 기분이 상했던 무용가들도 이만큼 손님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즈음이었다. 무스메도조지 의 연기를 마친 무대에 박수를 보낸 뒤, 히나코는 더욱더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옷자락 하나 흐트러짐 없는 세련된 종종걸음으로 단골손님을 찾아 달려가곤 했다. 오늘은 소품 한 개만 사고 말자고 결심했던 손님도 히나코의 웃는 얼굴에 이끌려 옷감을 집어 들고 있었다.
고객의 질문은 대부분 지요노의 병에 대한 이야기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마키에게로 대물림이 된 것을 미심쩍어하는 모습은 없었다. 85세라는 나이도 원만한 세대교체에 고개를 끄덕이는 요인이 된 것 같았다.
마키가 완전히 마음에 들었는지 한 고객이 축하도 할 겸, 이라면서 이번 행사의 가장 중요한 상품인 무지개색 쓰지가하나 를 맡아달라는 말을 꺼냈다. 가노코야가 뒤에 있지 않았다면 다른 도매점의 시샘을 받을 만한 이야기였다. 상담이 성립되자 히나코는 직원들을 호출하고 주위 손님들까지 끌어들여 한 건 낙착! 이라는 선언의 구호를 함께 외쳤다.
오호, 제법인데?
그 고객의 축하도 할 겸 이라는 말은 바느질 공임 이외에 중간 마진도 마키에게 건네겠다는 뜻이었다. 즉 무지개색 쓰지가하나는 마키가 가노코야 포목점을 출입하는 소매업자로서 판매한 셈이 된다. 히나코가 나 위로해주는 술자리는 마키 씨가 내야 해 라면서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쳤다.
그날 밤, 연회장에서의 뒤풀이가 끝나고 야요이와 함께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인사하러 다니느라 분주했을 터인 히나코가 불쑥 나타나 마키의 팔을 부여잡았다.
진짜로 술값 내라고 안 할 테니까 이차 모임에도 꼭 참석해야 해.
아침부터 익숙지 않은 접객에 술까지 조금 들어가서 이제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했지만, 히나코는 자신도 술에 취했다면서 영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가노코야만의 모임이야. 마키 씨가 참석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지. 참석하고 싶지 않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면 또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마키는 기모노 축제 회장에서 5분 남짓한 거리를 히나코와 나란히 걸었다. 둘 중 누구도 말을 건네는 일 없이 그저 자박자박 인도를 나아갔다. 이차 모임을 청했을 때와는 다르게 히나코는 걸음새가 반듯했다.
야마모토가 예약했다는 이차 모임은 가노코야 뒤편에 자리 잡은 다다미 손님방 하나의 조촐한 요리점이었다. 히나코와 마키, 야요이, 그리고 야마모토와 그 밑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직원 세 명이었다. 요리점 안에 들어서자마자 젊은 직원 하나가 유난히 야요이에게 말을 붙이는 바람에 야마모토가 나서서 주의를 주었다. 그럴 줄 알았다, 라면서 다른 두 직원이 킥킥거렸다.
일곱 개의 좌석은 좌우로 네 개와 세 개가 마주 보게 마련되어 있었다. 야마모토가 자리를 안내하기도 전에 히나코가 먼저 마키의 옷소매를 끌었다. 냉큼 다다미 손님방 안쪽으로 들어가 앉더니 자기 옆의 방석을 탁 치며 마키를 불러들였다. 세 개가 나란한 좌석은 히나코, 마키, 야요이의 순서로 채워지고 맞은편에는 젊은 직원 세 명, 그리고 맨 가장자리에 야마모토가 앉았다.
젊은 직원들이 차례차례 히나코와 마키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야마모토는 주문한 모둠회와 튀김 요리를 받아주고 술병이 비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느긋하게 앉아 있을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야요이가 술병이 늘어선 쟁반을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마키 씨?
히나코가 마키의 얼굴을 아래쪽에서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리고 허리띠 끈의 매듭을 꾹 누르며 한차례 크게 숨을 토해냈다.
성황리에 끝났네요.
당연하지. 시간도 돈도 엄청나게 들였는데.
눈 끝의 아이라인이 흐트러지고 립스틱도 살짝 벗겨졌지만 히나코는 온몸에 주위를 압도하는 자신간이 흘렀다.
아까부터 상당히 마셨으면서 마키 씨는 얼굴색이 전혀 벼하지 않았어.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섭다니까.
머릿속에 약간 이내가 서린 느낌은 있지만 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탁자 맞은편에서는 긴 술병을 상에 내려놓는 야요이를 젊은 직원이 잡아 앉히고 있다. 야마모토는 카운터에서 가게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아직도 긴장이 덜 풀린 것 같다고 대답하는 마키를 향해 히나코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히나코 씨, 시비 거는 술로 바꿔서 마셨나 봐요.
그럴싸한 말을 하네. 시비를 걸어본 참에 내가 한 가지 알려줄까? 지난번에 바느질한 그 최고급 후리소데에 관해 야마모토에게서 아무 말 못 들었지?
미간을 좁히는 마키에게 히나코가 말을 이었다.
그거, 죽은 딸에게 몸이 남아 있는 동안에나마 입혀주고 싶다는 손님에게서 내가 받아 온 일감이야. 그런 값비싼 예복을 입혀 화장하다니, 라는 생각이 들지? 물론 지요노 선생에게도 사정을 이야기했어. 마키 씨에게는 야마모토가 말하기로 했고, 근데 그 사람, 마키 씨에게 그런 얘기 안했지?
네, 못 들었어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설령 처음부터 알았다고 해도 완성도나 그날의 집중력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거야. 마키 씨는 우리 야마모토 부장에게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는 거. 이런 얘기쯤에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여자라는 걸 아직도 모른다니까. 이제 슬슬 마음을 접게 해주는 게 어때? 그러는 게 나도 일하기 편할 것 같은데.
히나코는 베이지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끝을 가만히 바라본 뒤에 반쯤 남아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마키 씨, 좋은 여자란 평생 주인공은 될 수가 없어. 주인공은 언제든 어리석은 여자야. 잘 기억해둬.
칭찬해주시는 건가요?
이런 바보, 내 자랑을 한 거야.
히나코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면서 마키의 귓가에 속닥였다.
한 시간쯤 뒤에 모임은 드디어 끝이 났다. 요리점을 나선 히나코가 비틀거리며 눈앞의 전봇대를 부둥켜안았다. 흥이 오른 젊은 직원들은 합창이라도 하듯이 야마모토를 향해 삼차 술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고했다. 야마모토가 적당히 좀 하라고 달래고 있었다.
짧은 인사를 건네고 마키와 야요이는 택시를 잡으러 큰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야마모토는 좀체 전봇대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히나코에게 어쩔 줄 모르는 기색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20미터쯤 걸어간 참에 마키는 걸음을 멈췄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줄래?
야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키는 빙글 우향우를 한 뒤 옷자락을 주의해가며 요리점 앞으로 돌아가 야마모토에게 말을 건넸다. 야마모토가 히나코의 술주정에 쩔쩔매는 표정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남녀 관계를 맺었던 짧은 기간, 마키가 가장 좋아했던 눈빛을 하고 있었다.
히나코 씨가 분명 내일도 술을 마실 것 같네요. 모레도 마시려고 하면 부장님이 말려주세요.
야마모토의 시선이 마키의 어깨쯤에서 출렁 흔들렸다. 히나코는 아직도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 전봇대를 껴안고 있었다. 긴 침묵 끝에 야마모토의 시선이 마키의 눈동자에서 멈췄다.
네, 알겠습니다. 이래저래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머리 숙인 야마모토의 뒤에서 히나코가 고개만 돌린 채 혀를 쏙 내밀었다. 마키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서둘러 야요이가 기다리는 길모퉁이로 돌아왔다.
히나코 씨 괜찮을까요?
응, 괜찮아, 술 취한 거 아니야.
역시 그렇죠? 히나코 씨가 야마모토 부장님을 좋아하나 봐요, 틀림없이.
어른스럽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스무 살 아가씨의 옆얼굴을 마키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선을 눈치 챈 야요이가 후훗 하고 수줍게 웃었다. 마키도 따라 웃었다. 택시는 좀체 오지 않았다. 안개가 사라진 거리에 슬슬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빌딩 사이로 깜빡이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야요이가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용실에 견습생으로 들어갔었어요. 연수생부터 인턴, 기술 스태프까지 여러 단계가 있고 인원수도 꽤 많은 미용실이었죠. 기술 스태프와 연수생은 반드시 남녀가 한 팀. 남자끼리 여자끼리면 어쩐지 서로 견제한다면서 사장이 그런 방침을 세운 모양이에요. 근데 거기, 성폭행당하고 그만두는 여자애 따위, 전혀 상관 안 해요. 한 사람 그만둬도 다시 그다음 사람이 오니까.
마가목의 조붓한 잎사귀가 빙글빙글 나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마키는 고개를 숙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겨우겨우 샴푸를 맡게 되었는데 수업이라는 이유로 밤늦게까지 남으라고 하더라고요. 나도 친구도 똑같은 꼴을 당했어요. 그때 도망치다가 뛰어 들어간 의상실에서 그 가게의 자랑거리였던 지요노 선생님의 우치카케에 흠집을 내버렸어요. 어떻게든 수선을 좀 해주실 수 없을까 하고 찾아갔더니 지요노 선생님이 어떤 사정인지 말을 해야 옷 수선을 해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얘기를 했죠.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꼭 미용사가 되고 싶으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지요노 선생님, 억울하다면 이 바늘 하나로 복수를 해주라고……. 그 말씀, 엄청 감사했어요.
야요이는 다시 수줍게 웃었다. 마키는 한차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토해냈다.
무기는 바늘 하나야? 엄지동자 같네.
마키는 야요이의 웃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10월 말, 첫눈이 희끗희끗 내리는 오후에 시마다 기모노 연구소 현관에 소포 두 개가 배달되었다. 보낸 사람은 모리 지요노 였지만 주소는 멀리 홋카이도 남쪽 지역에 사는 딸 집 것이었다. 소포를 열어보니 하나는 눈에 익은 지요노의 마름질판, 또 하나는 오동나무 상자에 담긴 히토쓰몬 옷감이었다. 기모노 두 장 분량이고, 둘 다 몸판에 연하게 다마무시오리의 그러데이션이 들어가 있었다. 가짓빛 감색은 마키, 환한 붉은색은 야요이 것인 모양이다. 어디를 뒤져봐도 편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마키는 히토쓰몬을 손에 들었다. 차분한 무게감이 있었다. 고급 본견이다.
활짝 편 기모노 등판에는 지요노가 좋아하는 벚꽃이 수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