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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의 옷 입는 스타일을 보면,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실감이 날 때가 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가르마를 '촌스럽다'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 있나? 회개하건데, 난 그런 적이 있다. 7:3 가르마는 당연 90년대 샐러리맨의 상징이오, 5:5 가르마는 7:3이 보기에도 답이 안나올 정도로 시대에 뒤쳐졌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지, 요즘 머리는 모히칸, 투블럭 등 여러 머리를 거쳐 다시 개량된 가르마로 가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결국 유행이란 다시 돌고 돈다는 것이 실감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취업이 힘들어지는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발산 되는 것인가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유행이 돎에도, 아직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은 유행이 있다. 아니, 유행이라고 해야되나, 헤어스타일이 있다.
그렇다. 댕기머리와 상투다. 남성이 이 머리스타일을 땋기만 하면 어떤 시대든 근대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이 머리는 옛 시절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사극의 영향이 크리라.
하지만 이 머리모양이 사라진 것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 근대화 시절이라면 150년도 더 된 옛날 아니냐고? 유감이지만 아니다. 이 머리가 사라진 것은 50년대, 반중국전쟁으로 조선반도가 대전까지 밀리면서 거의 모든 사회체계, 부의 분배가 붕괴한 순간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사족들은 상투나 댕기머리를 (부의 상징이므로) 자르기 시작했으며, 몇년 후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그 머리를 기르는 사람은 여러분도 아는 청학동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장장 2000년동안 길러오던 조선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잘리는 역사적인 때이다.
왕당파들이 자신들의 권력기반인 미국을 따라 하나둘 자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인들의 머리는 새로운 권력의 기회를 잡기위해-그 시절 벼락부자와 기회주의자는 어찌 그리 많았는지-, 혹은 윗사람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그리고 (참으로 줏대없이) 모두가 자르니까 등, 여러 이유를 통해 잘겨나갔다. 그 시절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던 양학을 통해 머리를 자른다는 것에 부담감이 옅어진 것도 배경에 들어갈 수 있겠다. 어찌됐든 조선인들의 머리는 점점 서양인들과 비슷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자를 수는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쉽게 자른다는 것이 그들의 뿌리, 기반이 잘려나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의 패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후 수십년을 반동세력의 우두머리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근기지방과 충청지방 명문 사족들이었다.
지난 시간, 우린 고종이 서양식 교육기관을 조선에 설치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했었다.
당시 조선의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일본에 비해 느린 편이었는데, 이는 란가쿠로 다져진 일본의 습득속도와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내 혁명 탓이었다.
이미 기반이 잡힌 그들이 양학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조선이나 청에 비해 빠름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마 조선은 반정을 겪으며 양학을 배우는 자세가 완전 달라졌다는 것이 청에 비해 희망적인 편이었다.
미국과의 교역이 진행되면서, 점차 조선에서 수제작을 하던 장인들은 먹고 살 길이 궁해졌다. 어찌해야할까, 이들의 고통을. 당시 그들의 삶에 대해 신하들이 고종에게 간언한 것들은 실록에 자세히 적혀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힘든 과정을 겪음에도 그들은 조상 대대로 가져온 직업을 바꿀 생각이 거의 없었기에, 이들의 고통은 앞으로도 수십년을 이어가게 된다. 이들중 일부는 이후 반동주의에 가담하게 된다.
고종의 권력기반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할 수 있는 1853년 3월 30일, 고종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그렇다. 드라마에서 늘 5~10분은 잡는 간지폭풍 연설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근대화 추진 선언.
이 당시를 기록으로 살펴보면 상당히 많은 신하들이 그의 결정에 반대를 한다. 그들중 태반이 이미 미국의 간섭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그들이 서학에 매진하고 있어도 전통을 바꾸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이 말한 것들을 보면, 차마 미국을 오랑캐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 어찌 오랑캐의 관습을 따르려고 하냐는 처절한 반대의 몸짓이 느껴진다.
이에 대해 고종이 한 말은 참으로 유려하지만, 그 것은 직접 읽어보는 것이 나을테니 여기에는 간단하게 적겠다. 변법. 그의 단어는 파격적이었다. 그는 유가에서 멸시해온 진나라와 그에 맞섰던 조나라의 예를 들며 그들에게 맞섰다. 진나라의 상군이나 조나라의 호복이 가져온 부국강병을 예로 든 그는, 현재 자신들의 상황이 그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특히 일본의 강성을 눈여겨본 그는, 사람들에게 반정 당시 그들이 가졌던 무기를 생각해보라며, 이제 그 무기가 일본에게 가게 된다면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을 했다.
이후 신하들이 수그러든 것을 보면 어쩌면 반대를 무마시키기 위한 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고종의 의지였다.
시대는 다가왔다. 변법의 시대가.
당연하지만 그의 발언이 모두의 지지를 얻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특히 얼마전까지 권력을 쥐고 있었던 지방의 여러 사족들에게, 이런 조치는 자신들의 조국-어떤 모양새였는지 그들에게 중요했을까- 무참히 짓뭉개져서 뿌리마저 갈리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반발기록은 이 시기부터 꾸준히 실록의 일부를 차지하는데, 이에 대해 적자면 글이 길어질테니, 언젠가 반란만 집중적으로 다루게 되면 그 때 말하겠다.
고종의 포고문은 당시 세계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포고문이었던듯 하다. 청이나 일본에 비해 얻을 것이 없던 조선-게다가 미국이 이미 찜(?)한 상태라 생각되었으니-이었기에, 열강은 조선에 그다지 간섭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양화를 한다고 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어쨌든 시장은 시장이겠다, 뭔가 팔아먹을 수도 있으며, 조선 스스로 그들에게 개방한다고 하였으니 굳이 미국에게 미안해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도 없었다.
열강의 도움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어쩔 때는 국가적으로, 어떤 때는 민간인들의 도움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조선이 자생적으로 산업화가 이뤄질 때까지 계속됐다.
이 도움은 1차적으로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도 있으나, 속으로 내포하고 있는 뜻도 있었는데, 위에 썼듯 당시 조선 시장이 다른 자들에게 열릴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는 앞으로 조선의 진로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열강의 도움과 고종의 의지, 그리고 이전부터 조금씩 양성해온 조선의 신지식인들이 모이자, 조선은 커다란 결정을 할 수 있게 됐다.
1855년 8월 6일, 조선 첫 철도가 건설된 날이었다.
당시 미국으로 유학까지 갔다온 신지식인들에게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철도였다.
근대의 상징. 교통수단의 혁명. 그 외 역사적 의미 함유에 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기차는 미국에 가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이었으며, 그들을 매료시키고도 남는 물건이었다.
물론 정신이 고고한 분들에게 이런 편안한 물건이 무슨 필요 있겠냐만, 어쨌든 그런 양반분들 외에는 누구에게나 편할 물건이 기차 아니겠는가. 이후 허수, 권동열 등 수많은 유학생들은 기차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고종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그런 중요한 기관이라면 바로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여 열강에게 나라의 근간을 내줄 수는 없다 생각하여, 우선 시험적으로 운행하기로 결심했다.
경인-영동선이 건설된 이유였다.
당연하게도 철도 만드는 기술이 없었던 조선은 미국회사에 영동선 건설권을 주는 방식을 택했다. 미국에게도 이런 기회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흔쾌히 '새크라멘토 철도회사'라는 당시 꽤 잘나가는 서부 철도 회사를 소개시켜주었다.
당시 서부에 성공적인 안착을 했던 새크라멘토 철도회사에게 이 기회는 사업을 더욱 벌릴 기회였다. 그들의 기반은 탄탄해져 갔으며, 그만큼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었기에 철도를 지을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간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조선은 당시를 생각하면 근대화가 안된 나라치고는 합리적인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새크라멘토 철도회사는 철도를 짓기 위한 부지를 '어느 정도' 제공받을 수 있었으며, 조선은 철도가 완공된 후 10년간 받을 이용료중 절반을 새크라멘토 철도회사에게 주는 것으로 비용을 대신하기로 했다.
단, 조선은 철도를 사용함에 있어 어떤 제약도 없었다.
이렇게 완성된 철도는 고종에게 아주 만족스러웠다. 지리적 이유로 거의 분단된 것이나 다름없던 영서와 영동은 이 철도로 이전보다 몇배는 빠르게 만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세금을 조정으로 가져오는데 새나가던 양도 상당부분 줄어든다는 사실을 조정의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부지를 어느정도 제한을 두었기에 역이 좀 좁을지언정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양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뭐, 불만이야 꽤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 시기 기록을 보면 고종이 철도를 타고 인천을 다녀오면서 상당히 즐거워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즐거움은 바로 효과를 발휘했다.
1855년 8월 7일, 조선 조정은 전국에 철도를 설치할 것을 선포했으며, 이번 사업파트너는 새크라멘토 철도회사 외에 유학생들이 모여서 만든 '조선철도건설합동'이 함께였다. 새크라멘토 철도회사는 조선철도건설합동과 함경선을 공동건설하기로 했으며, 이외 경남선과 서울-평안도까지의 철도는 조선철도건설합동이 맡기로 했다. 대금은 조선 조정이 일시불로 주었으며, 땅도 조정이 일정수준 마련해주기로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도 조선의 교통수단 이용률 1위에 빛나는 조선철도가 전국으로 뻗어나가는 순간이다. 이 결정으로 조선철도건설합동이 독자적인 철도건설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실상 거칠 것이 없는 고종이었다.
매우 놀라운 실력과 예지,그리고 행운을 곁들여서 즉위 20년동안 조선을 이끈 그는, 이제 왕국의 상징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즉위 초반 그를 가로막았던 신하들이 전부 교묘하게 숙청된 후 그의 행동을 가로막을 인물들도 사실상 사라진 상태였으며, 서양식 교육을 받아들인지도 어언 10년, 그의 주위에는 그가 바라던 교육을 받은 '그의'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상태였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그는 아직 남아있던 서당 및 향교, 서원을 점차 정리하겠다는 포고를 내렸다. 그동안 조선이 불교에게 대했던 것처럼, 이제는 성리학이 그런 푸대접을 받는 날이 온 것이다.
물론 그의 근대화 정책이 늘 성공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화를 위해 다른 열강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좋았으며, 공사관 지역을 따로 만들 정도로 많은 열강들이 모이기는 했으나,
많은 자들이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기 시작했다. 하긴 몇백년을 천천히 바뀌며 살아온 세계가 하루아침에 마구잡이로 변하고 있으니 어디 안그러겠는가.
그들의 불만을 조정에서 탄압하면서, 조선과 반동주의자들의 오랜 싸움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과는 상관없이
고종이 염원하던
조선 철도는, 제주철도-지금은 관광용으로 더 쓰이는-를 마지막으로 1857년 12월 11일 완공되었다. 오스만 제국 등을 제외하면, 아시아의 숱한 국가들중에서 거의 처음 짓는 전국철도였으며, 무엇보다 열강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 철도가 완성됨으로 열강이 가장 손쉽게 이권에 개입할 수 있는 '철도 건설'이란 선택지가 사라진 것과 다름 없었으며, 이는 이후 영국령 인도처럼 조선이 열강에 흡수되는 운명을 피하는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족들은 싫어했다고 전해지지만 말이다.
철도의 반듯함이 고종을 매료시킨 것일까. 철도가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고종은 철도처럼 땅도 다시 재단하여 배분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런 것이 읽기 매력적이진 않을테니, 이 부분은 넘어가자. 의의가 있다면 대지주의 불만은 있었지만, 소작농이나 땅 한뙤기 있던 농부들의 근로의욕을 높였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이 시기의 고종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외국을 의존한다는 문제점이 눈에 띈다.
그가 권력을 쟁취하는데 미국의 지원이 컸을까? 컸을 것이다.
그가 암투를 이기는데 외국인들의 도움이 컸을까? 컸을 것이다.
아마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외국인들의 영향은, 그에게 동양의 모습보다 외국에 대한 동경을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가 일본이나 외국에 직접 나가봤으면 모르되, 아마 그런 적이 없었다는 것이 그의 동경을 깨부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외교관의 동상이라니? 그에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었을까, 외교관이? 무엇이 그에게 이런 결정을 내리도록 한 것일까? 그가 외국인의 힘을 가지고 올라선 자이기에, 외국인의 힘으로 떨어질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결국 그 결정은 재정의 부족함을 가져왔으니, 오호통재라,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 허겁지겁 세제 개편을 한 것은 아마 이 동상을 짓느라 무리해서일 것이다..
심지어 대영제국은 당시 위상이 청에 버금간다 하는 신지식인들-이때는 이미 신지식인이 아닌 권력의 중추부였기는 하다만, 근대화 이전까지는 이렇게 부를테니 양해바란다.-의 조언을 듣고, 조선의 백성이 죽었음에도 대영제국으로 보냈으니, 이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두루 살피고 돌봐줘야하는 책무를 벗어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 쉰에 가까운 상태. 두려울 것이 없던 자에게 무엇이 그렇게 두렵게 하였는지.
이에 대한 해답일까, 1867년, 그가 열강들의 관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등장한다. 아니, 어쩌면 시기적절하게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열강진입이었다.
일본의 빠른 산업화는 그들을 단시간에 서양 열강들과 겨룰 수 있도록 하였으나, 제국주의 시대의 후발 주자로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식민지도 거의 없겠다, 물건을 팔 곳도 없겠다.
그래서 그들은, 물건 팔 곳을 만들기로 했다.
정한론의 대두였다.
일본이 열강에 진입한 때와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열병이 유행하자,
고종은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나라를 통제하는 방식을 개량해서라도 모두를 아우르기로 했다. 아마 정한론 이전 나라를 하나로 만들 생각이기도 하였으리라. 산업국으로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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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너무 빨리 열강 되잖아 ㅎㅎㅎ 어떡하지 저거 ㅎㅎㅎ 하면서 어이없어 했던 지난날이 떠오르네요(..)
쳐낼 것들은 거의 쳐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스샷이 많네요 ㄷㄷ 원래 근대화는 1화에 끝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근대화가 이리 걸리면 나머지는 얼마나 걸리는거지..
개인적으로 철도를 한국에 지으면서 살짝 감동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원래대로라면 강원도도 산지여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합니다만 ㅋㅋ
빅2 연대기들이 참 교육적이거나 혁신적인 것들이 많은데 그 사이에 이런 교육적, 혁신적이지 못한 연대기를 올리려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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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쟁안하시면문명화디게느려져요 ㄷ
다음에 하게 된다면 정복 해야죠 ㅂㄷㅂㄷ
평화주의 조선!
열강의 틈새에서 살아남아라!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ㅜㅜ
북부 즈리지방만 획득하신다면야 가능하십니다(소근소근)
평화적인 방법으로 근대화 하시나보군요... 조선도 마찬가지로 진출 방향이 없죠.
후발주자는 어쩔수 없더군요 ㅜㅜ
만약 1864년에 조선이 열강이 된다면!? 어떨까요? 자....... 아프리카의 땅의 70%이상이 주인도 없는 상황입니다ㅋㅋㅋ
평화주의 좋네요. 어쩔수 없이 전쟁하게 될 것 같지만,.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일본 정벌부터 하게 될 것 같더라고요 ㄷㄷ
천천히 올려주시길 ㅎㅎ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덕분에 조선은 당시를 생각하면 아주 불공정하지 편에 속하는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철도 건설 부분에 오타 있는 듯요
으앗 수정한다는게 ㅜㅜ 감사합니다 ㅋㅋ
늦게 열강되면 일단 중국부터 먹고봄.
사실 빨리 열강되도 중국부터 먹고봄.
응?
중국이 근대화되도 중국들부터 먹음.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