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k4uPzQ0OYdE?si=HH4hALMxD9Ybm5x9
창세기 강론 58
창세기 21:8-21
이삭과 이스마엘
본문은 아브라함이 종을 통해 얻은 아들로 인해 가정사가 얼마나 복잡하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 는가를 교훈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육신에 의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 일어나는 일을 통해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에 대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생명이 주어지는가를 언약으로 계시하는 말씀이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8절). 고대 근동지방의 사람들에게는 아이의 젖을 떼는 것이 출생한 후 수개월 내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통 남자아이는 4-5살, 많게는 7살 때까지 젖을 먹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말씀하는가? 젖을 떼는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젖을 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씀하기 위해서이다(참고 삼상 1:22).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
여기서 “밥”으로 번역된 말의 헬라어 ‘브로마’는 ‘먹을 것, 양식’이라는 뜻이다(마 14:15, 눅 3:11, 9:13). 이렇게 보자면 “젖”이란 먹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바울 사도는 육신에 속한 자에게는 먹을 것, 곧 “신령한 음식”(고전 10:3)을 주어도 먹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서 육에 속해 있다면 진리의 말씀을 먹을 것으로 주어도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라고 하면서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딤전 4:3)이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삭이 젖을 떼었다는 것은 진리를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하늘의 양식을 먹는 것을 잔치로 표현한 것이다. 이삭이 스스로 그렇게 하였다거나 진리를 아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그렇게 만드신다는 뜻이다. 그것을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어 보내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육에 속한 젖을 떼고 진리의 양식을 먹을 것으로 먹는 하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계시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9-10절). “사라가 본즉”이라는 말은 육에 속한 눈이 벗겨지고 나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이 보인다는 뜻이다. “놀리는지라”라는 말의 ‘차하크’는 넓은 의미로 웃는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희롱한다’라는 뜻이다.
육에 속한 자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다는 것은 율법의 문자에 매여 있는 자가 약속의 아들을 희롱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율법의 문자에 매여 있으면 희롱을 희롱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율법을 문자적으로 좇는 종교심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비웃었던 것처럼(17:17), 금송아지를 여호와의 형상으로 놓고 그 앞에 뛰어노는(차하크)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조롱하게 되는 것이다(출 32:6). 그러나 육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그러기에 진리의 말씀이 들어와 먹을 것을 제대로 먹게 되면 율법의 문자가 죄인에게 영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사라는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라고 하면서 결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라는 말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약속의 아들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비유하면서 오직 약속의 아들에게 유업이 주어진다는 선언한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28-31)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우리의 겉 사람이며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속 사람이다. 이처럼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함께 있지만 속 사람이 겉 사람의 희롱을 인식하게 되면 율법의 문자적인 행위를 거부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찾아오신 성령께서 그렇게 만드신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8:2)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11절)라고 하였다. 이 일은 아브라함에게 근심이 되었다. 말씀은 육신의 산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자들을 언약 안에서 십자가 은혜를 확인하도록 만드신다. 그것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세상의 근심을 끊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나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교체되는 것이기에 나의 근심이란 없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2-13절).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씨”(히, ‘제라’)는 명확하게 단수로 표현하였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그러나 하나님은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단수로 말씀하신 “씨”를 통해 이루어지는 “씨”가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참고 갈 3:29).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7-9)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유일한 후손으로 보내셔서 씨를 뿌리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후손으로 만드시는 것이 언약의 완성이다. 이스마엘을 통해 바로 이 언약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결국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14-15절). 하갈의 어깨에 메워진 것은 “떡과 물 한 가죽부대”이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좇겨난다는 입장에서 보면 언약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므로 하갈에게 주어진 것은 한정된 것이다. 곧 문자적인 율법, 육체의 예수를 아는 정도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곧 고갈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라고 말씀한다. “브엘세바”는 ‘일곱 우물’이라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집을 떠난 상태를 하나님의 언약의 물을 알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는 광야의 노정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말씀한 것이다.
“관목덤불”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시아흐’이다. 욥기 30:4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거리를 삼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떨기나무”가 ‘시아흐’이고 “대싸리”가 ‘레템’이다. 열왕기상 19:4에 보면 엘리야가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하였다. 떨기나무나 로뎀나무는 광야에서 뜨거운 햇빛을 잠시 피할 수 있는 정도이다. 즉 죽음의 상태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두고”라는 말 ‘샬라크’는 ‘던지다’라는 뜻이다. 14살이나 된 남자 아이를 하갈이 물리적으로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출애굽기 32:19에서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샬라크) 깨뜨리니라”라는 말씀에서 쓰인 단어이다(참고 창 37:24). 그렇다면 하갈은 이스마엘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던져버렸다는 뜻이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16-18절).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바라보기 쉬운 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활”(케세트)이란 언약의 용어로 율법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진리를 마주하도록 만들어 가시겠다는 뜻이다.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라는 말씀은 이미 16장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으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죽음 가운데서 진리를 볼 수 있는 상태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19절)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어떻게 이끌고 계신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주시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율법이 문자적인 것에 충실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20-21절).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3-27)
(202311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