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을 돌이켜 볼 나이는 아직 안되었지만 현재의 나라는 존재가 있기까지 수많은 멘토(Mentor)가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고향의 사랑방에서 늘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풍부한 교훈을 전해 주셨던 할아버지가 그 첫 번째 멘토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잔소리처럼 들려주셨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수양하는 일이 먼저이며, 그 다음에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직업을 소개해 주셨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말씀은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을 테지만 분명히 할아버지는 나의 멘토였음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멘토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멘토(Mentor)라는 말의 기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왕인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떠나며, 자신의 아들인 텔레마쿠스를 보살펴 달라고 한 친구에게 맡겼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바로 멘토(라틴어로는 '멘토르'라고 발음된다)였다. 그는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텔레마쿠스의 친구, 선생님,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그 후로 멘토라는 이름은 지혜와 신뢰를 가진 이가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 멘토가 상담하는 활동을 멘토링(Mentor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향의 품을 떠나 대도시로 진학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가르침만으로는 내 삶의 좌표를 단순하게 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하는 질풍노도와 같은 시절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목로주점에서 밤새도록 토론을 해도 도대체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군에서 제대하고 다시 대학 3학년에 복학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는 계기가 있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에리히 프롬의 명저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라는 책을 접하고 나서였다.
먼저 이 책을 쓴 에리히 프롬의 약력을 소개해보겠다.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 저자의 생애를 알지 못한다면 보다 정확한 책의 이해를 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900년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훗날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다양한 삶의 역사를 갖고 있다. 프롬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 사회학, 철학을 전공했다. 그의 스승은 알프레트 베버, 카를 야스퍼스, 하이리히 리케르트 등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 수 있는 학자들이었다. 학위를 받은 그는 프리다 라이히만 밑에 들어가 다시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다음 프랑크루프트 연구소에서 마르쿠제, 노이만 등과 함께 연구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이라는 전쟁으로 그는 독일을 떠나야 했고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 교수활동을 했으며 멕시코를 거쳐 말년에는 스위스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친 스승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였다. 그는 프로이트에게서 인간의 심층적 심리학을 배웠고, 마르크스에게서 사회구조를 배웠다. 이런 사상적 흐름 속에서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해 보려고 한 것이다.
나는 지적활동이 가장 왕성할 시절이어서 그런지 이 책을 접하자마자 밤을 새워 읽어버렸다. 어느 소설보다도 더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며 그 때 가졌던 흥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양식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는 대학생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프롬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 후 프롬이 쓴 책은 모조리 구해 읽으면서 군사독재 시절 암울하게만 보였던 내 삶에 한 줄기 무지갯빛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이 책에서 규정한 삶의 양식은 책 제목 그대로 두 가지로 대별된다. 먼저 소유적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일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한다. 소유를 중시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고, 소유욕이라는 것은 그 한계가 없는 무한증식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채울수록 더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소유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게 된다. 어찌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심리상태를 한 마디로 정의해 주는 단어가 바로 이 소유적 양식이라고 꿰뚫어본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수없이 가르치셨던 사랑방 교육에서 나는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며 살았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소유적인 삶의 양식을 추구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30세의 나이에 출가(出家)를 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 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는가? 바로 프롬이 역설하는 두 번째 삶의 양식인 "존재하는 삶'이었다. 이 삶은 더 지고한 완성을 추구하기에 평화롭고, 소유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매사에 당당할 수밖에 없다. 마치 젊은 날에 즐겨 불렀던 "사노라면"의 가사내용처럼 말이다. 심지어 자신의 삶조차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프롬의 이런 주장은 이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경전(經典)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인류의 보편적 진리가 가득한 이 경전들(불경, 성경, 사서삼경, 노자, 장자 등)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접하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이다.
어느 하나의 경전이 특정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고 대하면 순수한 그 뜻을 알아듣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예수는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가르쳤다. "하느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 여기서 하느님이 그리스도교의 신으로만 국한시켜 알아듣는 이상 참다운 뜻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이미 인간세상의 삶의 양식이 어떠한지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한 마디로 소유하는 삶을 끝까지 따라가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늘도 일을 하고 공부를 한다. 그런데 일하고 공부하는 자체는 결코 중요하지 않고 종국에 가서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느냐에 궁극적인 목적이 맞추어져 있다.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양식은 그 자체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비인간적인 삶의 행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유하는 삶의 양식이 잘못임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에리히 프롬의 예언적인 가르침이 들어있는 이 책은 진정한 멘토(Mentor)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 책을 접하고 난 후의 30여 년간의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나는 존재하는 삶의 추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남은 삶 속에서도 비록 소유하는 삶의 양식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목 : 소유냐 존재냐
저자 : 에리히 프롬
옮긴이 : 차경아
출판사 : 까치
첫댓글 나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손자를 사랑하시는 할아버지의 구순한 말씀 꺼치른 손으로 쓰다듬어 주시는 손길은 참 편안합니다.
신부님~전 할아버지와 거의 젊은 시절을 함께 공유했는데.....참 행복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신학교에서 이렇게 뵙게 되어서....
우리의 삶을 성숙시키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독서라고 하네요. 독서야 말로 시공을 초월한 방식으로 돌아서서 자신을 성찰하고 삶을 배우는 중요한 일인 것같습니다. 무한 증식의 삶에서 조금이나만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개구리 소리가 한창인 농촌의 들녘 책읽기에 좋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행운이라는 편이 더 나을지도....노력해서 얻어질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서는 그런면에서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인간 의지의 산물일 수 있지요. 감사합니다.
소유적 삶 존재적 삶... 용기가 없어 버리지도 못하고 날마다 갈등하며 살아가는 어리석고 작은 사람 입니다. 좀 더 성숙해지면 담담히 살아갈 수 있을까요...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지향을 갖고 살고 싶습니다....지금 그 도상에서 갈등과 긴장 속에 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함께해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