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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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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청암서원 이야기
관보 추천 0 조회 43 11.12.19 15: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청암서원(淸巖書院)
소 재 지 :  상주시 공검면 예주리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예주리)
건 축 주 :  지방 유림
건축시기 :  1700년(숙종 24)

건축 배경
청암서원은 1700년에 처음 청암사(淸巖祠)로 창건하였다. 1752년 도계(陶溪)의 신안서당(新安書堂- 도계정사)과 아곡리사(雅谷里祠) 두 곳의 위패를 합사하여 경현사(景賢祠)를 세우고 서원으로 승원하였다. 이때에 서원의 원호를 청암으로 하였다.배향 선현이 열 한분으로 경북의 서원 가운데에 배향위차가 가장 많은 서원으로 유명하다.

고종 때에 훼철되어 단소만 설치하여 내려오다가, 1960년 단장과 유사를 선임하여 운영하였다. 1978년에 서원 강당을 건립하고, 4년 후에 향례를 실시 하였다. 1991년에 후손들이 지역 유림의 힘을 얻어 묘우와 강당을 새롭게 복원하였다.

건축 특징
묘우는 경현사(景賢祠)이며, 강당은 청암서원이다. 왼쪽이 묘우이고, 강당이 오른쪽에 배치한 좌묘우학의 일자형 배치구조이다. 각각의 담장 안에 위치하며, 강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왼쪽이며, 그 옆에 묘우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일자형으로 되어 있다.

건축 구성
청암서원의 배치 형태는 교육 시설인 강당이 오른쪽에 위치하며, 위패를 봉안한 묘정이 왼쪽에 위치하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의 형태이다.

- 경현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묘우 안은 널마루이다. 안에 유포(柳砲), 유달존(柳達尊), 박눌(朴訥), 이겸(李謙), 유종인(柳宗仁), 홍약창(洪約昌), 남영(南嶸), 정윤해(鄭允諧), 박성민(朴成敏), 이영갑(李英甲), 남근명(南近明) 열한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강당은 묘우의 우측에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가운데 2칸은 마루이며, 양쪽으로 온돌방이 시설되어 있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 외삼문은 강당의 좌측에 있으며, 솟을대문이다. 서원의 정면이 아닌 담장이 꺾이는 곳에 바로 위치한다. 내삼문과 일직선상 담장이라 여백이 마땅하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 내삼문은 솟을삼문으로 묘우의 우측에 설치되어 있다.

현판
경현사(景賢祠)
굵직하고 탄탄하며 그저 편안한 해서체이다. 사당의 이름으로 현인을 공경한다는 의미이다. 묘우 중앙 처마 아래에 걸려 있다.
청암서원(淸巖書院)
서원의 처마 가운데에 걸려있는 원호이다.

내력과 기능

향사일
춘기향례(春期享禮)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이고
추기향례(秋期享禮) 는 지내지 않는다.

향례(享禮)
봄철 한 차례 추모하는 제사인 향례를 갖는다. 봄에 하는 춘기향례(春期享禮)는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지내고 가을에 지내는 추기향례(秋期享禮)지내지 않는다. 향례 절차는 홀기에 따르면 비교적 간단하다. 향례일 전날 장찬자는 묘우에 들어가 제수를 진설한다. 축관은 묘우에 가서 축문을 닦아 놓는다. 행사 시작 전에 제 집사는 모두 묘우 밖의 자리에 선다. 삼문 밖에서 자리하며 행사가 시작된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로는 11현의 문집 이외에 약간의 문헌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4,000평과 임야 3정보 및 대지 1,000평 등이 있다.



관련유물
- 흥학비(興學碑)
서원 입구에는 당시의 함창현감 남근명(南近明)이 학문을 부흥시킨다는 목적으로 세운 비석이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주향자
-류포(柳砲)
1375(우왕 1)~1448(세종 30). 관향은 진주(晋州)이다. 자는 자구(子句)이며, 호는 가촌(嘉村)이다. 학행으로 지역 사회의 교육에 힘썼다. 효행이 특출하여 경산(慶山) 현령에 발탁되었다. 그 효행은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실려 있고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 졌다. 의성군 비안면 백천서원(白川書院)에 봉향 되었다.

-류달존(柳達尊)
1395(태조 4)~1466(세조 12). 류포(柳砲)의 아들이다. 자는 백삼(백삼)이며, 호는 대암(臺巖)이다. 함창으로 입향하였다. 학문이 높았으며, 효행이 뛰어났다.

-박눌(朴訥)
1448(세종 30)~1528(중종 23). 본관은 함양이다. 자는 여우(如愚)이며, 호는 행정(杏亭)이다. 안동김씨 정헌공(正憲公)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을 지냈으며 사후(死後) 병조참판(兵曺參判)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의 증직(贈職)이 내려졌으며 중종이 묘(墓)에 사제(賜祭)하였다. 다섯 아들의 급제로 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예천 금당실의 금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이겸(李謙)
1452(문종 2)~1507(연산 8).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위광(위광)이며, 호는 취수헌(醉睡軒)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보고 모든 과업을 접고 축대를 쌓고 화초를 가꾸며 오직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류종인(柳宗仁)
1516(중종 11)~1545(인종 1).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자는 사원(사원)이며, 호는 취미헌(翠薇軒)이다. 덕행으로 세상에서 소안자(小顔子)라 칭하였다. 30세에 죽어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홍약창(洪約昌)
1535(중종 30)~1592(선조 25).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자는 도원(度遠)이며, 호는 구촌(龜村)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참여하여 군기유사를 맡아 분전하다 순절하였다.

-남영(南嶸)
1548(명종 3)∼1616(광해군 8). 본관은 의령이다. 자는 사수(士秀)이며, 호는 고산(孤山)이다. 은(誾)의 5대손이며, 부사과 예석(禮錫)의 아들이다. 류성룡(柳成龍)의 천거에 의해 1601년(선조 34) 50여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나가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고, 1603년에 장흥고직장이 되었다.
의관(醫官)으로 활약하였으며, 1605년 오위장과 진천현감을 거쳐 이듬해 양성현감이 되었다가 다시 어의(御醫)로 근무하였다. 그 뒤 마전군수,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1616년에 음죽현감으로 나갔다가 임소에서 죽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646년(인조 24)에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정윤해(鄭允諧)
1553(명종 19)~1618(광해 10). 본관은 청주이다. 자는 백유(伯兪)이며, 호는 서귀자(鋤歸子)이다. 련(璉)의 아들로, 탁(琢)의 장조카이다. 정구와 조목의 제자이다. 조목(趙穆)에게 근사록(近思錄) 한 권을 선물 받고, "진실로 선비의 나아갈 길이 이 책에 있다."라고 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문장이 뛰어났고, 성리학에 깊이 통달하게 되었다.
성품이 우아하고 청렴결백하여 벼슬에 별로 욕심을 내지 않았지만 정구의 추천으로 영릉 참봉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1597) 때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하여 3등공신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여러 가지 혼란한 정치를 보고 사표를 제출하여 벼슬을 버리고 함창으로 내려왔다.
함창군수 남이걸이 집 한 채를 지어주려 하니 사양하여 말하기를, "어찌 관청의 도움으로 개인 집을 짓겠습니까? 집이란 비바람만 피하면 족한 것입니다."라고 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문집과 가곡(歌曲) 50여 수가 전한다.

-박성민(朴成敏)
1603년(선조 36)~1666년(현종 7). 본관이 함양(咸陽)이다. 자는 성수(聖?) 이며, 호는 수묵재(守默齋)이다. 행정(杏亭) 박눌(朴訥)의 5대손이고, 부친은 영선(榮先)이며, 모친은 진주 강씨이다. 함창의 우거(寓居)에서 과거응시를 겸한 학문연마에 힘쓰고 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 강화가 성립하자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는 함창의 청암에 재실을 짓고 수묵이라 편액하였다. 여기에서 고황제의 충효절의 네 자를 병풍으로 만들어 조석으로 삼가 바라보면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평생토록 무명지(無明指)를 펴지 않고 지내면서 강화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영갑(李英甲)
1622(광해 14)~1676(숙종 2).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선명(선명)이며, 호는 야옹(야옹)이다. 문과 급제로 정랑과 도사를 역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모부인이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효성을 가졌으며,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남근명(南近明)
1676(숙종 2)~1734(영조 10).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자는 계광(季光)이며, 호는 수운(峀雲)이다. 함창현감을 재임하였으며, 재임 중에 선정을 베풀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마을이야기

상주 > 북동권 > 공검면 예주리
- 1919년 공갈못의 이름을 따서 공검면이라 칭하고 상주군에 편입하였다. 동쪽에는 함참읍과 사벌면의 접경이고, 서쪽은 은척면, 남쪽은 외서면, 북쪽은 이안면과 접하고 있다.
과 상업이 적절히 조화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김천과 문경을 잇는 경북선 철도와 국도 3호선(4차선)이 시원하게 통과하고 있다.

예주리(曳舟里)

이안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데, 옛날에는 강물이 많아서 예천군 풍양면까지 소금배가 왕래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주리를 구성하고 있는 마을은 아래와 같다.

-새마-검사(儉沙)

임진왜란 뒤 마을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검사-내검사(來~)-홍촌(洪村)-안마

새마 북쪽에 쑥 들어가 있는 마을이다. 450년 전부터 홍씨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홍촌>이라고도 불린다.

-아랫터

새마의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아랫터>라고 한다.

-예주목(曳舟木)

이안천을 따라 이 마을까지 들어온 배들이 정박할 때 매에 두던 큰 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을 <예주목>이라고 한다.

-별실-빛실-벽실-광곡리(光谷里)

임진왜란 때 김동원이라는 사람이 정착하여 마을을 열었다.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햇빛이 잘 드는 마을이라 <빛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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