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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빛내림
제1부
먼저 당시 고려의 정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997년 성종이 후사 없이 죽자,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난 개녕군 송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모후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는데, 천추태후는 외척 김치양과 함께 국사를 좌지우지, 막강한 권세를 떨칩니다. 김치양은 황해도 호족의 후손으로, 성종 시절부터 천추궁에 출입하며 천추태후(헌애왕후 황보씨)와 불륜 관계를 맺습니다. 이에 철저한 유교 윤리로 무장하고 있던 성종은 왕실의 스캔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김치양을 불러다 장을 치고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당시 배우자와 사별한 여인의 재가가 법적으로 금지된 일도 아니었고, 실제 왕실의 공주들(헌애왕후 황보씨 또한 왕건의 손녀로, 경종과는 사촌지간입니다. 경종의 어머니는 대목왕후 황보씨인데 광종과는 이복누이간으로 혼인합니다-_-;;) 또한 공공연하게 재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성종의 조치는 당대 풍습상 다소 과한 조치이기는 했습니다.
성종이 죽고 헌애왕후가 천추태후로 승격, 실권을 잡자 유배지에 있던 김치양은 개경으로 화려하게 복귀, 우복야 겸 삼사사의 직위를 받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릅니다. 300여 칸의 대저택을 짓고 공공연하게 인사 청탁을 받는 등 부정을 일삼던 김치양은, 천추태후와의 관계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드디어 목종의 권좌까지 위협하게 됩니다. 목종은 당시 나름대로 선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펼쳤습니다. 전시과를 개정하고 1004년에는 과거시행법을 개정하는 등 왕권 확립과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목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가까운 혈족이라고는 헌정왕후 황보씨(천추태후의 친동생)가 역시 시숙 왕욱과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 대량원군뿐이었습니다. 이에 김치양은 자신과 천추태후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고자 대량원군을 승려로 삼아 강제로 출가시킵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고 독을 타 대량원군을 죽이려 시도하지만, 주지승의 기지로 목숨을 건집니다.
서기 1009년 목종은 병에 걸려 자리에 눕습니다. 그리고 김치양 일파의 왕권 탈취 계획은 이 때 본격화됩니다. 목종은 자신이 죽으면 왕권이 김치양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왕궁을 호위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강조는 '임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말을 듣고 개경으로 진군하던 도중, 이번에는 '목종이 죽었다'라는 소식을 접합니다. 이에 강조는 김치양의 당을 몰아내고 대량원군을 무사히 옹립하고자 개경으로 진군하는데, 도착해 보니 목종은 죽지도 않았을뿐 아니라 병도 그리 위중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입장이 난처해진 강조는 부하들과 의논하여, '지금 군주는 유약하고 재능이 없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없다'며 목종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대량원군을 옹립, 새로운 군주로 받듭니다. 이 대량원군이 바로 현종입니다.
강조는 곧바로 중대사(中臺使)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김치양, 유행간 등의 세력을 모두 척결합니다. 퇴위한 목종은 양국공(讓國公)에 봉했는데, 이후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유배보냅니다. 이 때 목종은 스스로 태후의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귀양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강조는 1009년 사람을 보내 목종과 천추태후를 결국 시해합니다.
고려를 침략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요 성종은 이 소식에 쾌재를 부릅니다. 바로 1년이 지난 1010년(현종 1년), 요 성종은 신하의 몸으로 국왕을 시해한 강조를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침공을 개시합니다. 이 때의 병력 규모가 40만 명이라고 했는데, 1차 침공 때와는 달리 요 황제의 친정이었다는 점을 볼 때 과장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정에서는 강조를 즉시 행영도통사로 삼아 30만 대군을 통솔하여 맞서 싸우게 합니다. 요군은 먼저 홍화진(의주)을 공격하지만 장군 양규의 선전으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통주로 이동, 공격을 개시합니다. 고려 주력군을 전부 이끈 강조는 부장 이현운과 함께 통주에서 적을 맞아 첫 전투에서 요군에 대승 거둡니다. 그러나 이후 강조는 거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책을 범하게 됩니다. 바둑을 즐기던 강조는 거란의 선봉장 야율분노가 통주성의 전진기지인 삼수채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입 안에 음식물이 많이 들어온 뒤 씹어야 한다'며 계속 바둑만 두고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율분노의 부대는 본진까지의 고려군을 무너뜨리며 강조의 영채까지 들이닥치는데, 야사에 따르면 목종의 귀신이 나타나 강조를 꾸짖자 강조가 두려워하여 엎드리니, 거란군이 몰려와 강조를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강조가 이끈 고려의 주력 30만 대군은 통주성에서 궤멸되고 사령관 강조는 사로잡힙니다.
요 성종에게 끌려간 강조는 기개가 출중하고 능력이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성종이 몸소 결박을 풀어주며 '너와 같은 걸출한 인재를 살리고 싶으니, 나의 신하가 되는 것이 어떤가?' 라고 묻자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라고 거부합니다. 이에 화가 난 성종이 부장 이현운에게 '너는 어떠하냐?'라 묻자 이현운은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되새기겠습니까?' 라며 투항합니다. 그러자 강조는 벌떡 일어나 이현운에게 침을 뱉으며 '어찌 고려의 장수로써 그런 말을 하는가?' 라며 꾸짖습니다. 성종은 결국 강조를 죽이고 맙니다.
주전력은 궤멸당하고 강조는 죽었습니다. 이제 개경까지의 길은 뻥 뚫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침략군을 이끄는 이는 당대 동아시아 최고 영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요 성종입니다. 고려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합니다.
제2부
요 성종(聖宗) 야율융서는 12살에 황제로 즉위, 먼저 다음해 겨울 발해 유민의 후예 정안국을 멸망시킵니다. 중원으로의 진출을 다시 꿈꾸던 성종에게, 자신들을 배척하며 등 뒤에서 송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는 고려는 입 안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왕은 태조 왕건의 손자인 성종(成宗)이었습니다. 최승로 등 뛰어난 유학자들을 등용하여, 유교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설정한 성종은 고려 내부의 관제를 개혁하여 3성 6부, 사헌부, 중추원 등 중앙 관청들을 재정비했을 뿐 아니라, 전국을 12목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목사를 파견하여 지방에 웅거하던 호족 세력들에 대한 통제에도 성공했습니다. 고려의 '소프트웨어'를 설계한 군주는 다름아닌 성종이었습니다. 또한 고려는 이전부터 북방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여러 대비책들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정종은 무려 30만에 달하는 광군(光軍)을 조직했는데, 광군사라는 중앙 기구가 이들을 통제했습니다. 다만 이 광군은 항시 유지되던 상비군이라기보다는, 지방의 모든 군 병력과 예비군들, 지방 호족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까지 포함한 조직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993년 드디어 요 성종은 고려에 선전포고, 동경유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 압록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이 80만 대군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보통 요나라의 경우, 황제의 친정군이 30만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그리고 15만 이상의 병력을 통솔하는 경우, 중신을 도통으로 임명하여 통솔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소손녕에게는 '도통'의 직함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직책이 동경유수였던 것으로 보아, 요나라 동경 지방의 지방군이 이동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숫자는 6만에서 많아야 15만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80만은 군세를 부풀려 손쉽게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고자 하는 노림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소손녕은 사신을 보내,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내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합니다. 80만이라는 군세에 놀란 고려 조정의 중론은 요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으로 기울고, 실제 성종은 옛 고구려 땅인 서경 이북을 요나라에게 떼어줄 것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요나라에게 군량미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경에 비축된 곡식들을 모두 대동강에 버리라는 명령까지 내립니다. 고려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정세는 흘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고려에는 서희가 있었습니다. 서희는 당시 중군사(中軍使)로 고려의 최고사령관이었는데, 북계(北界)를 방어하다가 서둘러 개성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태조께서 늘리신 땅을 한 뼘이라도 빼앗길 수 없다'는 논리로 성종을 설득, 마침내 전권을 위임받고 소손녕과의 협상에 나섭니다. 이 때 소손녕의 사정도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엄청나게 부풀려 놓은 병력 때문에 함부로 운신하기 힘들었을 뿐더러, 고려의 답변이 늦어지자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공격한 안융진에서는 대도수가 지휘한 고려군에 참패하고 맙니다. 이후 소손녕은 더이상 고려 땅으로 진공하지 않고 계속 사신만을 보내 협박만을 일삼습니다. 요 군영으로 들어간 서희는, 생각했던 것보다 군사 수가 많지 않고 대다수가 군량미 부족으로 괴로워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요의 군세가 그리 강하지 않음을 직감합니다.
서희를 처음 본 소손녕은 '대국의 대신에게 소국의 신하가 절하는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서희는 '너희 군주에게는 절하는 것이 예이겠으나 대신끼리 절한다는 예는 듣지 못했다'고 강경하게 반발하며 협상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물러나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초강수였지만, 그리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지 못하던 소손녕은 협상이 시작 전부터 깨질 것을 우려, 오히려 굽히고 들어옵니다. 서희가 협상의 전초전에서 승리,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서로 예를 갖추고 협상장에 들어선 서희와 소손녕은 치열한 설전을 벌입니다. 먼저 소손녕이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우리 거란이 멸망시켰으니 고구려의 옛땅은 우리 발해의 것이다. 고려는 신라를 이었으니 대동강 이남으로 물러나라'고 공세를 폅니다. 그러나 서희는 '고려야말로 고구려의 후신이니,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려면 귀국 동경 또한 우리 고려의 땅이다'라고 반격합니다. 이에 소손녕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이 공방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을 떠올리게 하는 거란의 생떼에 서희는 역사의 정통성을 내세워 공박하는데, 거란 측에서도 이를 '합리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 소손녕은 '왜 가까이 있는 거란을 멀리하고 바다 건너 송나라와만 교류하는가?'라고 따집니다. 이에 서희는 오히려 협상의 판도를 전혀 다른 쪽으로 끌고 가는 절묘한 답을 내놓습니다. '여진이 길을 막아 고려와 거란의 통교를 막으니, 오히려 바닷길이 편할 수밖에 없다.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이남의 땅을 우리 고려에게 넘겨주면 거란과 통교하겠다'. 여진족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오히려 압록강 이남의 땅을 떼어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소손녕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책임을 미루자 '그렇다면 귀국 군주께 표를 올려 답을 청하고 기다리는 것이 어떠한가?'라며 다시 쐐기를 박습니다. 소손녕으로써도 요 성종의 확답을 받아두는 편이 후일을 위해서도 안전했으므로 수락하고 서희를 위해 7일이나 잔치를 벌입니다.
요 성종으로써도 서희가 내민 패를 잡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등뒤의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기보다는 '우리 편'으로 다독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자진해서 외교 관계를 맺겠다는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의 땅에는 이미 여진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기에, 그 구역의 관할권을 고려로 넘기면 고려와 여진 간의 전쟁을 유도, 둘의 힘을 빼놓을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 성종은 소손녕에게 서희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명령하고, 소손녕은 군사를 돌려 거란으로 돌아갑니다. 서희의 담판 한번으로 거란의 대군은 물러났고 영토는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고려는 요와 교류하고 송에 사신을 보내지 않으며, 요의 통화(統和) 연호를 사용합니다.
이후 994년 평장사로 승진한 서희는 군대를 이끌고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 정벌에 나섭니다. 장흥진, 곽주, 안의진, 선주 등 6곳에 성을 쌓고 방어기지로 삼았는데 이를 강동 6주라고 합니다. 이로써 고려의 강역은 청천강 이남에서 압록강 이남까지 확장되었는데, 이는 후일 요 성종의 2차 침입의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려와 거란의 '불안한 동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북벌이 국가의 신조였던 고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요와의 교류를 끊고 송과 교류를 재개합니다. 문제는 또다시 국제 정세가 요나라에 유리해진 데서 터집니다. 서기 1004년 거란 전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친 요 성종은 곳곳에서 송군을 격파하고 개봉부를 압박합니다. 탁월한 무장이던 송 태조, 송 태종과는 달리 유약했던 송 진종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요나라에 매년 막대한 양의 재물을 보내고 형제국의 예를 갖추는 굴욕적인 화의인 '전연의 맹'을 맺습니다. 이는 송나라에 대한 요나라의 일방적인 판정승이었습니다. 중원을 사실상 손 안에 넣은 요 성종의 분노는 약조를 어긴 고려를 향합니다. 그리고 당시 고려의 내부 사정 또한 어지러웠습니다. 서기 1009년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전횡에 분노한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변방의 5천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점령, 국왕 목종을 내쫒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한 것입니다. 좋은 핑계거리를 잡은 요 성종은 다시 한 번 고려와의 전쟁을 결심합니다.
제3부
먼저 당시 고려의 정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997년 성종이 후사 없이 죽자,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난 개녕군 송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모후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는데, 천추태후는 외척 김치양과 함께 국사를 좌지우지, 막강한 권세를 떨칩니다. 김치양은 황해도 호족의 후손으로, 성종 시절부터 천추궁에 출입하며 천추태후(헌애왕후 황보씨)와 불륜 관계를 맺습니다. 이에 철저한 유교 윤리로 무장하고 있던 성종은 왕실의 스캔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김치양을 불러다 장을 치고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당시 배우자와 사별한 여인의 재가가 법적으로 금지된 일도 아니었고, 실제 왕실의 공주들(헌애왕후 황보씨 또한 왕건의 손녀로, 경종과는 사촌지간입니다. 경종의 어머니는 대목왕후 황보씨인데 광종과는 이복누이간으로 혼인합니다-_-;;) 또한 공공연하게 재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성종의 조치는 당대 풍습상 다소 과한 조치이기는 했습니다.
성종이 죽고 헌애왕후가 천추태후로 승격, 실권을 잡자 유배지에 있던 김치양은 개경으로 화려하게 복귀, 우복야 겸 삼사사의 직위를 받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릅니다. 300여 칸의 대저택을 짓고 공공연하게 인사 청탁을 받는 등 부정을 일삼던 김치양은, 천추태후와의 관계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드디어 목종의 권좌까지 위협하게 됩니다. 목종은 당시 나름대로 선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펼쳤습니다. 전시과를 개정하고 1004년에는 과거시행법을 개정하는 등 왕권 확립과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목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가까운 혈족이라고는 헌정왕후 황보씨(천추태후의 친동생)가 역시 시숙 왕욱과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 대량원군뿐이었습니다. 이에 김치양은 자신과 천추태후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고자 대량원군을 승려로 삼아 강제로 출가시킵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고 독을 타 대량원군을 죽이려 시도하지만, 주지승의 기지로 목숨을 건집니다.
서기 1009년 목종은 병에 걸려 자리에 눕습니다. 그리고 김치양 일파의 왕권 탈취 계획은 이 때 본격화됩니다. 목종은 자신이 죽으면 왕권이 김치양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왕궁을 호위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강조는 '임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말을 듣고 개경으로 진군하던 도중, 이번에는 '목종이 죽었다'라는 소식을 접합니다. 이에 강조는 김치양의 당을 몰아내고 대량원군을 무사히 옹립하고자 개경으로 진군하는데, 도착해 보니 목종은 죽지도 않았을뿐 아니라 병도 그리 위중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입장이 난처해진 강조는 부하들과 의논하여, '지금 군주는 유약하고 재능이 없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없다'며 목종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대량원군을 옹립, 새로운 군주로 받듭니다. 이 대량원군이 바로 현종입니다.
강조는 곧바로 중대사(中臺使)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김치양, 유행간 등의 세력을 모두 척결합니다. 퇴위한 목종은 양국공(讓國公)에 봉했는데, 이후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유배보냅니다. 이 때 목종은 스스로 태후의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귀양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강조는 1009년 사람을 보내 목종과 천추태후를 결국 시해합니다.
고려를 침략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요 성종은 이 소식에 쾌재를 부릅니다. 바로 1년이 지난 1010년(현종 1년), 요 성종은 신하의 몸으로 국왕을 시해한 강조를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침공을 개시합니다. 이 때의 병력 규모가 40만 명이라고 했는데, 1차 침공 때와는 달리 요 황제의 친정이었다는 점을 볼 때 과장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정에서는 강조를 즉시 행영도통사로 삼아 30만 대군을 통솔하여 맞서 싸우게 합니다. 요군은 먼저 홍화진(의주)을 공격하지만 장군 양규의 선전으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통주로 이동, 공격을 개시합니다. 고려 주력군을 전부 이끈 강조는 부장 이현운과 함께 통주에서 적을 맞아 첫 전투에서 요군에 대승 거둡니다. 그러나 이후 강조는 거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책을 범하게 됩니다. 바둑을 즐기던 강조는 거란의 선봉장 야율분노가 통주성의 전진기지인 삼수채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입 안에 음식물이 많이 들어온 뒤 씹어야 한다'며 계속 바둑만 두고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율분노의 부대는 본진까지의 고려군을 무너뜨리며 강조의 영채까지 들이닥치는데, 야사에 따르면 목종의 귀신이 나타나 강조를 꾸짖자 강조가 두려워하여 엎드리니, 거란군이 몰려와 강조를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강조가 이끈 고려의 주력 30만 대군은 통주성에서 궤멸되고 사령관 강조는 사로잡힙니다.
요 성종에게 끌려간 강조는 기개가 출중하고 능력이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성종이 몸소 결박을 풀어주며 '너와 같은 걸출한 인재를 살리고 싶으니, 나의 신하가 되는 것이 어떤가?' 라고 묻자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라고 거부합니다. 이에 화가 난 성종이 부장 이현운에게 '너는 어떠하냐?'라 묻자 이현운은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되새기겠습니까?' 라며 투항합니다. 그러자 강조는 벌떡 일어나 이현운에게 침을 뱉으며 '어찌 고려의 장수로써 그런 말을 하는가?' 라며 꾸짖습니다. 성종은 결국 강조를 죽이고 맙니다.
주전력은 궤멸당하고 강조는 죽었습니다. 이제 개경까지의 길은 뻥 뚫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침략군을 이끄는 이는 당대 동아시아 최고 영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요 성종입니다. 고려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합니다.
제4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고려 조정은 일단 몽진(왕실과 조정의 피난)을 결의합니다. 이에 현종과 대신들은 나주로 피난길에 나서게 되고, 좌사낭중 하공진과 호부원외랑 고영기 등을 거란 진영에 파견하여 평화협상의 타결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이 때 거란군은 통주에서 대승을 거두고 곽산, 안주 등을 연이어 함락시킵니다. 이어 삽시간에 내달아 개경에까지 이르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서경 등의 큰 성들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개경을 직공한 데 있었습니다.
보통 거란족은 9~12월 사이 전쟁을 감행하며 장기전을 피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는 곡식 수확을 마치고 저장에 들어가는 9월쯤 출병해야 현지에서의 식량 확보가 쉽고, 12월 쯤에는 다시 회군해야 방목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종이 고려를 친 시점은 11월이었습니다. 한 달 안에 신속하게 진격하여 고려 조정의 항복을 받고 물러나는 것이 목표였던 요나라는, 양규와 강조의 예상 외로 완강한 저항 때문에 시간을 까먹었고 이제 후방 병참선마저 차단되어 식량 조달이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게다가 흥화진의 양규는 북방의 고려군을 규합, 평안도 일대에 남겨둔 거란의 후방 부대들을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요 성종으로써도 상당히 골치아픈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고려 조정에서 협상을 위해 보낸 하공진과 고영기는 거란군의 어려움을 알고 적극적인 교섭에 나섭니다. 이들은 현종이 직접 요 성종에게 친조할 것과, 자신들을 볼모로 삼을 것을 제안하는데 성종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1011년(현종 2년) 1월, 성종은 거란군과 함께 1만여 명의 고려 백성들을 거란 땅으로 끌고 회군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는 길은 쉬웠어도 가는 길은 절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거란의 후방을 끊임없이 교란하던 고려의 명장 양규는 동북계의 고려군들을 모아 철군하는 거란군을 귀주 부근에서 기다리다가, 김숙흥 등과 함께 무려 7번이나 기습 공격을 감행, 7천여 명의 거란군을 죽이고 잡혀가던 고려 백성들을 구해냅니다. 그러나 애전으로 이동하여 전투를 벌이던 양규는, 1000여 명의 거란군을 죽이지만 곧 거란군 본진의 대부대에 포위당해 김숙흥 등과 함께 전사합니다. 이외에도 서경을 지키던 탁사정이 거란 기병 1천 명을 베는 등, 퇴각하던 거란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후 요나라 땅으로 돌아간 성종은 하공진을 연경(북경)에, 고영기를 중경에 각각 두고 거란인 부인을 맞이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공진은 겉으로는 성종에게 충성을 다하면서도 계속해서 여러 필의 준마를 준비하는 등, 고려와의 접선을 시도하고 고려 땅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봅니다. 이후 이 사실이 발각되자 성종은 분기탱천하여 하공진을 친국하는데,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포기하지 않으며 언사가 점점 씩씩하고 불손해지자, 결국 살해당합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후 거란 군사들이 앞다투어 하공진의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고 합니다. 충신 하공진은 진주 하씨의 시조가 됩니다.
고려 조정 또한 거란과의 약조를 전혀 지키지 않습니다. 현종은 거듭되는 요나라의 친조 요구를 묵살했고, 강동 6주를 반환하라는 요청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013년에는 거란과의 국교를 끊고 송나라와의 교류를 재개합니다. 이에 분노한 요 성종은 다시 한 번 고려에 대한 응징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2차 침공 때 입은 피해가 막심하고, 중원의 송나라를 견제해야 했기에 3차 침공은 계속 지연됩니다. 그리고 1018년 12월, 요의 대신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합니다. 소배압은 성종의 아버지 경종의 사위로, 성종과는 처남 매부지간입니다. 몽골을 정벌하는 데 대공을 세웠으며, 성종 4년에는 하북 땅을 침략한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등 당대 거란의 명장이었습니다. 2차 고려 침공 때에도 사령관으로 호종한 경험도 있어 성종은 큰 걱정 없이 10만 대군을 소배압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에는 명장 강감찬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제5부
강감찬은 오늘날의 서울대 부근인 봉천동에서 948년 태어났으며, 983년(성종 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거란의 2차 침입 때에는 중신들의 항복 의견을 뿌리치고 하공진을 거란 진영으로 보내 협상을 시도, 성공합니다. 이후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한림학사, 이부상서, 서경유수, 평장사 등을 역임합니다. 1018년 거란군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자, 강감찬은 서북면 행영도통사 겸 상원수가 되어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 일흔이었습니다.
이 때 강감찬이 통솔한 고려군은 20만 8천 명이었는데, 이는 한 번에 모은 대군이라기보다는 당시 고려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북방으로 밀어올려 배치한, 한 마디로 고려의 총력을 기울인 전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감찬은 이 병력을 곳곳에 적절하게 분산시켜 촘촘한 포위망을 완성합니다. 반면 거란군을 통솔하는 소배압의 기본적인 전략은, 역시 지구전이 아닌 속도전이었습니다. 유목민족인 거란족의 특성상 길어야 석 달 안에 전쟁을 끝내야 했기에, 소배압 역시 2차 침공 때처럼 개경 직공의 전략을 선택합니다.
1018년 12월 압록강을 건넌 소배압의 군대는 흥화진에서 고려군의 첫 공세에 맞닥뜨립니다.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 명을 선발하여 산중에 매복시키고, 소가죽을 꿰메어 성 동편 하천에서 물을 막고 대기하다가, 거란군이 도하하는 때를 노려 물을 터놓고 돌격, 서전을 승리로 장식합니다. 그러나 이는 살수대첩 수준의 거대한 수공 작전이 아니었으며 거란군의 손해 또한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거란군은 이후에도 빠른 속도로 남하를 계속합니다. 주변 성들은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개경만을 향해 진군했는데, 강민첨이 자주에서 요격을 시도했지만 역시 진군을 저지하지는 못합니다. 이외 내구산, 마탄에서도 고려군의 요격을 받았지만 거란군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고려 군사보다 지독한, 고려의 청야전술이었습니다. 거란군은 기마민족이며 속도전에 능하기 때문에, 식량을 조달하는 긴 병참선을 유지하기보다는 전투 현지에서 식량을 약탈하여 조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에서는 이를 알고 성 밖의 모든 식량들을 불태우거나 우물에 던져버린 뒤 백성들은 성 안으로 피신시키는 청야전을 펼쳤는데, 그 결과 거란군 대부대는 식량을 얻지 못하여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리게 됩니다.
현종은 2차 침략때와는 달리 꿋꿋하게 수도 개경을 지킵니다. 소배압이 황해도 신은현에 이르자, 고려에서는 영주와 화주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 방어군 일부를 수도로 이동시켰으며, 역시 청야전을 채택하여 개경 반경 100리 내외의 삼림과 가옥을 소각/철거하고 식량은 성 안으로 모두 옮겼으며 우물과 하천에는 독을 풀었습니다. 상황이 어려운 것을 안 소배압은 먼저 화의를 제시하여, 요군이 철수하는 대신 고려군 또한 일체의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술책이었는데, 소배압은 사자 야율호덕을 보내면서 개경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300기의 척후병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 병력은 평산 근처 금교역에서 고려가 파견한 100여 명의 군사들에게 전멸당합니다. 예기가 꺾이고 군량도 얻지 못해 곤경에 처한 소배압은 결국 개경 공략은 해보지도 못하고 군대를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2차 침략 때와 마찬가지로, 회군하는 거란군에 대한 고려군의 무자비한 대공세가 시작됩니다. 황해도 신은(新恩)에서 군대를 돌린 거란군은, 청천강 부근의 연주와 위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합니다.
한편 개경에서는, 수도 방위를 위해 동북면에서 달려온 병마판관 김종현의 1만 군사를 귀주로 직파합니다. 한편 거란군의 철로에 주둔한 모든 고려군은 일제히 대반격에 나서 패잔병이 된 거란군을 신나게 두들기는데, 1월 초순경에 신은현에서 철군을 개시한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넌 것은 보름이 지난 1월 하순이었습니다. 거란군의 평소 이동 속도를 볼 때, 고려군의 공세가 얼마나 거세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강감찬은 위주와 연주에서 거란군을 연파한 후 거란으로 빠져나가는 마지막 관문인 귀주에서 전쟁을 종결짓기로 결정합니다. 거란군을 귀주로 몰기 위해 강감찬은 부원수 강민첨에게 연주 동북방의 석현에 매복하게 하여, 이 지역을 통과하는 거란군을 기습하게 합니다. 거란군을 수세에 몰아넣은 강민첨은 이들을 귀주 쪽으로 몰고 갑니다.
2월 1일 거란군은 고려군이 기다리고 있던 귀주 벌판으로 들어섭니다. 소배압은 일부러 중앙 진영을 허술하게 비워두고, 고려군이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면 양쪽에서 협격할 작전을 세워두었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의 수가 거란군에 비해 적지 않았고, 개경에서 진공한 김종현의 군대와 후방에서 추격해 온 강민첨의 군대가 삼면에서 거센 공격을 가하자 결국 거란군은 처절하게 무너집니다. 소배압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수천 기만을 거느리고 겨우 삭주 부근으로 탈출합니다. 그러나 고려군은 이들마저 철저하게 쫒아 거란의 거의 전군을 사로잡거나 죽입니다. 이 전투에서 요의 최정예 부대인 천운군과 우피실군이 전멸했고 상온, 아과달, 작고, 고청명 등 요의 명장들이 모두 전사합니다. 거란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핵펀치급 타격이었습니다.
귀환하는 소배압에게 요 성종은 "그대가 적을 가벼이 여기고 적지에 깊이 들어갔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이제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내 반드시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겠다!"고 대노합니다. 이후 요 성종은 고려를 무력으로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외교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하게 됩니다. 고려 역시 30여 년에 이르는 항쟁 기간 동안 국력이 소모되어 요가 먼저 내미는 화해의 손길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요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함으로써, 협상에 있어서도 훨씬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송과 요가 대립하고 있던 동아시아의 패권을 좌우할 수도 있는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됩니다. 반면 요나라는 대 고려전을 기점으로, 완연한 하락세에 접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