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마고우
한동네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6년을 함께 다녔던 친구가 둘이 있다. 나하고 셋이 함께 항상 붙어 다녔다. 옆집에 사는 인석이 친구 집에서 고개 넘어 종태 친구가 올 때까지 등교 시간이 늦어져도 기다렸다가 꼭 함께 다녔다. 학교 가는 길목에 마을 입구와 언덕 위에는 5백 년 묶은 정자나무가 있었다. 정월 대보름 날에는 할머니들이 정자나무 아래에 음식을 장만하여 놓고 고사를 지낸다. 그런 날 등교할 때는 우리들은 횡재를 만난 기분이다. 요즈음은 쳐다도 안 보겠지만 6.25 전쟁 후 끼니 거르기가 다반사인 시절이라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였다. 돌 징검다리가 있는 냇가를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오면 무릎까지 물이 넘쳐 검정 고무신을 벗어들고 책보는 어깨에 둘러메고 건너다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하교길에 냇물에 벌거벗고 뛰어들어 물싸움을 하기도 하고 흑진주 같은 알을 꼬리 안쪽에 실하게 품은 가재를 잡아 구워 먹으며 허기도 달랬다.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하면 몰래 칼로 끓어놓고 도망치는가 하면 냇가 둑방 길 양쪽에 길게 자란 풀잎을 묶어 놓아 모르고 걸어가다 넘어지는 아이들을 보며 즐기던 개구쟁이 삼총사였다.
저녁이면 인석이 집에 자주 모여 화투 놀이를 하며 놀았다. 성냥개비가 판 돈이었다. 섯다를 하여 잃기도 하고 따기도 하는데 많이 잃어봐야 성냥개비 20개 안팎인데 그럴 때면 기분이 몹시 상했다.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자정이 가까워 끝내고 집에 가면 대문과 중문 모두 굳게 닫혀있다. 전화기도 없던 시절이니 집에서 연락도 할 수도 없지만 집안 어른들도 아예 찾을 생각도 하지 않으셨다. 제 놈이 가봐야 뻔한 곳에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도둑처럼 집 뒤편 담을 넘어 몰래 기어들어 가곤 하였다. 가끔 늦은 시간에 끝나면 아예 인석이네 건넛방에서 셋이 한 이불을 덮고 자고 다녔다. 인석이네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키우고 계셨다. 귀찮게 하는 자식 친구들을 한번도 나무라지 않으셨다. 끼니때는 고구마도 삶아 주시는 등 따뜻한 애정을 듬뿍 퍼 주시었다. 국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앨범용 사진을 촬영한다고 하여 반 전체 사진을 쩍고 나서 우리 셋이 따로 한 장을 찍었다. 키가 작은 내가 나무 걸상에 앉고 뒤에 친구 둘이 서서 찍은 사진이 유일한 추억 앨범 사진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나는 큰 형님이 근무하시던 국민학교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고향에 성묘 갈 때나 행사 때나 친구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친구에 대한 정이 멀어져 갔다. 제대 후 서울로 올라와 객지 생활 하면서 외롭고 힘들 때면 어릴 적 개구쟁이 친구들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고 하였다.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았는데 모두 고향을 떠나 인석이는 대전에 종태는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모두 직장생활에 바빠 자주 만나기가 힘들어 전화 통화로 안부를 묻고 지냈다. 인석이는 출장 가는 길에 만나 식사하면서 고향 이야기하다 헤어지고 하였다. 종태는 서울이라 가끔 만나며 지냈는데 인석이가 치매에 걸려 고생한다고 연락받았다고 한다. 전화를 하니 여동생이 대신 받는데 어릴 적 무척이나 귀찮게 굴었던 60년 전 오빠 친구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빠를 바꾸어 달라고 하여 친구한테 내 이름을 알려주고 말을 해도 누구냐고 자꾸 되묻기만 한다. 그리고 2년 전에 저세상으로 갔다. 한 이불속에서 뒹굴며 장난 치던 옛 생각에 한층 더 가슴이 미어졌다.
인석이가 떠난 후 종태와는 지주 만나자고 하였다. 종태도 전립선 수술 후 상태가 좋지 않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지난 오월에 연락이 되는 고향 몇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하고 11월에 내가 사는 이천에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날 다소 힘든 얼굴이었으나 그렇게 심각할 정도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헤어진 후 가끔 전화를 하여도 받지 않아 혹시 또 병원에 입원 했나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태 부인으로부터 암세포가 뇌에 전이되어 병원에서 치료받다 요양병원으로 옮긴다고 연락이 왔다. 상태가 악화하여 다시 입원하였는데 더 이상 치료 효과가 없다고 하여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요양병원을 요즈음은 고려장병원이라고 한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는 곳이다. 병실에는 중증 환자들이 누워 침묵만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였다. 종태도 병상에 누워 눈만 껌뻑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는데 한 마디도 못하였다. 손을 잡을 힘도 없었다. “종태야! 너는 곧 일어날 거야”하고 말하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가슴이 울컥하며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를 보며 개구쟁이 어릴 적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되돌아오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 마주한 지 열흘 후 세상 떠났다고 부고가 왔다. 아들 상주한테 전화하여 장례 절차 등을 묻는데 웃으며 답하는 것이 아닌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병치레 삼 년에 효자 없다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빈소를 찾아가니 부인과 자식들 외에 조문객이라고는 몇 안 되어 영정 사진 속의 친구가 한층 더 쓸쓸해 보였다. 좋은 곳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임종을 한 번도 지켜 본적은 없다. 어머니도 시골 요양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폐렴으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15일 계시다 85세에 돌아가셨다. 가슴이 아프지만 고령이고 또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었다. 요양원에 종태를 보러간 날이 임종을 지켜본 것 같았다. 친구가 꿈속에도 나타나는 등 병문안 갔을 때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부모님 돌아 기셨을 때보다 삶에 대한 허무함이 더욱 머리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죽마고우가 다 떠나고 이제 내 차례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얼마를 더 이 세상에 몸담고 갈지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보건소에 가서 아내가 여러 번 이야기해도 못 들은 척했던 연명치료 동의서부터 내러 가야겠다.
첫댓글
어린시절의 시골 동네 친구들과의 장난, 먼 훗날 다시 만나고, 뒷날에는 노인요양원, 심지어는 장례식장에서 문상도 하셨군요.
사람의 인생여정이 시대별로 이어지는군요.
글이 끝난 하단에 고향 주소를 남기면 더욱 좋겠지요.
엄지 척! 합니다.
정말로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