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 소리 _ 문순태
1
방울재 허칠복(許七福)이가 고향을 떠난 지 삼 년 만에 미쳐서 돌아와 징을 두들기며, 댐을 막은 뒤부터 밀려드는 낚시꾼들을 쫓아 댔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징을 두들기는 칠복이의 모습은 나무탈을 쓴 도깨비 같다고들 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고향을 잃은 서러움, 아내를 빼앗긴 원한 때문이라고들 했다.
|생략 부분 줄거리| 힘세고 성깔이 왁살스럽던 칠복이는 바보처럼 물렁해진 모습으로 징을 쳐 대며 호숫가를 겅중거린다. 여섯 살 난 칠복이의 딸은 징 소리에 맞춰 춤을 추듯 옴죽거린다. 난데없는 징 소리에 화가 치민 낚시꾼들은 칠복이를 꼬나본다.
“이봐, 빨리 꺼지지 못해?”
앙바틈한 체구에 챙이 길쭉한 빨간 운동 모자를 비뚜름하게 눌러쓴 낚시꾼 하나가 실팍한 돌멩이를 집어 들고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를 치자, 칠복은 잽싸게 참나무 뒤로 몸을 피하고 잠시 조용해지더니, 이내 다시 징채가 부러지도록 힘껏 휘둘러 댔다. 그 때 징 소리는 징징징 우는 것이 아니고 와글바글 사뭇 방울재 골짜기의 너덜겅을 호수로 허물어 내리는 듯싶었다.
“저 미친놈이 끝내 훼방이여!”
낚시꾼들 대여섯 명이 당장 칠복이를 잡아 물 속에 처박을 기세로 각시바위 쪽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칠복이는 참나무를 끼고 이리저리 피하며 잠시도 징채를 멈추지 않았다.
단숨에 칠복이를 붙잡지 못한 낚시꾼들은 더욱 화가 치밀어 씩씩거렸고, 칠복이는 칠복이대로 신이 나서, 딸아이마저 팽개친 채 두레패 상쇠놀음 하듯 고개까지 까닥거리며 겅중겅중 뛰었다.
빨간 모자의 낚시꾼이 긴 작대기를 후려치는 바람에, 칠복이는 헉 외마디 소리와 함께 아기다복솔 위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작대기에 허리를 얻어맞고 쓰러진 칠복이는 징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슴에 꼭 안았다.
칠복이가 꼬꾸라지자 대여섯 명의 낚시꾼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발길로 엉덩이를 걷어차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의 품에서 징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그는 솔가지에 얼굴을 묻고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 올린 채 고슴도치처럼 몸을 도사렸다.
아비를 따라다니며 징 소리에 맞춰 깡총대던 딸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리자, 그들은 비로소 발길질을 멎었다.
“미친 사람이니 용서해 줍쇼!”
그 때, 호숫가에 가건물을 지어 놓고 낚시꾼이나 댐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을 상대로 술이며 매운탕을 끓여 파는 방울재 남자 셋이 허위허위 뛰어올라와서 칠복이를 가로막아 서며 사정을 했다.
“아는 사람이우?”
낚시꾼이 물었다.
“한 마을 사람이구먼유.”
검적검적 점이 많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술이 오른, 삐쩍 마른 봉구는 연신 허리를 굽적거렸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란 말이우?”
“없어졌지라우.”
“없어지다니, 뭐가요?”
“방울재가 없어졌지라우. 몽땅 물에 쟁겨 뿌렸어유. 남은 것이라고는 저 뒷골 감나무뿐인갑네유.”
봉구는 황새처럼 목을 길게 뽑아 그들이 서 있는 발부리 아래, 찰랑찰랑 허리가 물에 잠긴 채 빨갛게 익어 가고 있는 접시감나무를 가리켰다.
|생략 부분 줄거리| 봉구는 낚시꾼들에게 칠복이의 사연을 들려준다. 댐 건설로 마을을 수몰되자, 아내와 함께 도회지로 나갔던 그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도망을 간 후 반쯤 실성한 채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봉구는 푸우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멀고 회한에 가득한 눈으로 산자락 모퉁이 옛날 창평 고씨(昌平 高氏) 제각이 있던, 펀펀한 곳에 즐비하게 늘어선 매운탕집 주막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봄까지만 해도 선산을 버리고는 죽어도 방울재를 떠나지 않겠다면서 처음부터 집을 뜯어 옮기고 그대로 눌러앉은 박팔만이네를 제하고, 다섯 집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열한 집으로 늘어났다.
새로 생긴 방울재 매운탕집들 앞으로는 아카시아 숲이 휘움하게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고, 아카시아 숲 너머로는 호남 고속 도로와 연결되는 좁장한 신작로가 뻗쳐 들어오고, 그 길을 따라 낚시꾼들이 타고 온 자가용차들이 집 둘레 여기저기에 번쩍번쩍 햇빛을 쪼개어 날렸다. 봉구의 눈에는 모든 것이 슬프고 어줍잖게만 보였다.
말이 보상금이지, 보상 가격을 책정해 놓고도 일이 년 뒤에야 지불을 받고 보니, 이미 인근 농토 값은 몇 배로 뛰어올라 대토(代土) 잡기에 어려웠고, 도회지로 나가서 살자 해도 전셋방을 얻고 나면 자전거 하나 사기도 힘든지라, 아무 짓도 못 하고 솔래솔래 곶감꼬치 빼먹듯 하다가는 두 손바닥 탈탈 털고 영락없이 알거지가 되고 만 집이 어디 한두 사람인가.
봉구 그 자신도 보상금 받아 가지고 읍에 나가서 버스 정류장 옆에 가게를 얻어 쌀집을 냈으나 어찌 된 셈인지 남는 것은 없고 옴니암니 본전만 까먹게 되어 전셋돈이나마 가까스로 건져 다시 방울재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지붕 위에서 낚시질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빨간 모자 낚시꾼은 뚜벅뚜벅 곧잘 말을 걸어왔다.
“사람들꺼정 한꺼븐에 잼겨 뿐 거이 더 마음 아프구먼유.”
“누가 빠져 죽었나요?”
“죽은 거나 매한가지라우. 수십 년 동안 얼굴 맞대고 정 붙이고 살아온 방울재 사람들을 시방 어디에 가서 찾을 겁니까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몇 집 안 되지라우.”
“예끼 여보슈, 난 또 무슨 소리라구!”
“선생님들은 우리 속 몰라유.”
“땜이 원망스럽겠군요.”
“으째서유?”
“고향을 삼켜 버렸으니까요.”
“워디 가유. 아무리 배우지 못혔어도 우리가 그러키 앞뒤 꽉 맥힌 멍충이들이란가유? 땜이 생겨서 많은 농민들이 가뭄 모르고 농사 잘 짓는 거이 을매나 잘헌 일인가유? 우리도 그 정도는 압니다유.”
“그렇다면 됐습니다.”
“그래도 고향이 없어져 뿔고 정든 사람들이 뿔뿔이 풍지박산되야 뿐졌는디 으찌.”
“딱하게 됐습니다.”
“그라니께 우리는 뿌리 없는 나무여라우. 우리헌티 땅이 있소, 기술이 있소?”
빨간 모자가 대꾸를 해 주지 않자, 봉구는 고개를 들어 다시 매운탕집들 위로 내리뻗은 고속 도로를 바라보았다. 자동차들이 바람처럼 쌩쌩 내달았다.
2
호수 위에 검실검실 어둠이 내렸다. 호수를 한아름 보듬은 산 그림자가 칙칙하게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하늘의 구름들이 낮게 흐르더니 바람이 드세어지고 수면이 거칠어졌다.
어둠이 두꺼워지고 바람이 거칠어지자 낚시꾼들은 하나 둘 돌아가 버렸다.
어둠이 무겁게 짓누르는 호수에는 휘휘하고 음산한 그림자들이 일렁이는 듯싶었다. 마치 방울재 사람들의 그림자 같았다.
칠복이는 조금 전 빨간 모자 낚시꾼이 앉았던 자리에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으로 턱을 받쳐 들고 앉아서 우두커니 수면 위에 우줄거리는 칙칙하고 휘휘한 그림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딸아이가 두 팔로 아비의 세운 무릎을 껴안고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호수에서 사각사각 나락 베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들렸다. 방울재와 방울재 사람들의 모습이 한눈에 죄 보였다. 금줄을 두른 마을 앞 윗당산의 늙은 팽나무와, 방울재에서는 칠복이 혼자만이 들어올린 큰 들독이 보였고, 이엉을 입힌 돌담과 판놀이네 탱자나무 울타리, 군데군데 말라붙은 쇠똥이 널린 고샅들, 빨간 고추가 널린 초가 지붕이며, 두껍다리 옆 그의 집도 보였다. 외양간에 매여 있는 송아지가 음매 하고 우는 소리, 꿀꿀대는 돼지, 꼬꼬댁 꼬꼬 닭이 알 낳는 소리, 바람 모퉁이 공터에서 아이들이 공치기를 하며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시끌시끌한 소리, 고샅이 쩡쩡 울리도록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소리, 이 자식 저 자식 죽일 놈 살릴 놈 욕을 퍼부어 대며 싸우는 소리들이 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생략 부분 줄거리| 도회지로 나가 살자는 아내 순덕이를 애써 달래던 차에 마을이 수몰되자 칠복이는 할 수 없이 도회지로 이사한다. 농사일밖에 모르는 칠복은 도시에서 직장을 구하고 살아가는 일이 어렵기만 하다. 허드렛일을 전전하던 칠복은 아내에게 귀농을 강권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아내의 간통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아내는 집을 나간다.
아내를 찾아다니느라고 시골에서 벌어 온 돈마저 모두 까먹어 버리고, 얼마 안 남은 산동네 사글세 방값마저 찾아 쓴 칠복이는, 방울재에서 나올 때 나눠 가진 굿물인 징 하나만을 들고 거렁뱅이 신세가 되어 떠돌음했다.
칠복이는 거렁뱅이 신세가 되어 떠돌음하면서도 방울재에서 가지고 나온 징을 마치 그의 딸아이만큼이나 애지중지하였으며, 밤에 잠을 잘 때는 꼭 그 징을 베고 잤다. 그런데 그 징을 베고 잘 때마다 이상하게 그 징에서는 마치 방울재 할미산 너덜겅이 와르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귓속이 먹먹하게 들려오기도 하고, 또 어찌 들으면 방울재 사람들의 한 사람 한 사람 우는 소리가 아슴하게 흐느껴 오곤 했다.
그 때마다 방울재에 살던 시절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칠복이는 징에서 고향 사람들이 그를 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뒤 딸아이를 업고 꼬박 하루를 걸어 방울재에 닿았다.
“아빠, 배고파잉…….”
잠이 든 줄로만 알았던 딸아이가 부스럭부스럭 상반신을 출썩거리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천벌을 받을 녀언…….”
칠복이는 다시 돌멩이를 집어 호수에 던지며 욕을 퍼부어 댔다.
“아빠…… 배고파아.”
“그려그려, 마을로 내려가자.”
칠복이는 딸을 업고 일어서며 별 없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따금씩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졌다. 그 때마다 그의 정신은 더욱 맑아졌고, 정신이 맑아질수록 고향과 아내를 잃어버린 큰 슬픔이 목울대에 꽉 차올랐다.
“우리 집으로 가아…….”
“우리 집? 물 속에 있는 집으로?”
“아빤 늘 그 소리뿐이네!”
“그러믄 어떤 집 말이냐?”
“순자네 집 같은 거!”
순자는 봉구의 딸이다.
“그래, 그러믄 순자네 집으로 가자.”
“순자네 말고, 우리 집으로 가아…….”
“바보 멍충아, 이 세상이 다 우리 집이라고 생각혀!”
칠복이는 딸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검정 우단에 보석 몇 알이 흩어진 듯 불빛이 반짝이는 매운탕집들 쪽으로 내려갔다. 바람이 드세고 빗방울까지 비쳐 밤낚시꾼들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칠복이가 후미진 솔수펑 모퉁이를 돌아 불빛이 출렁이는 매운탕집들 가까이 왔을 때 빗방울이 후두둑 떡갈나무 잎들을 요란하게 두들겼다.
3
봉구네 집에는 매운탕집을 하는 방울재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은 장사가 안 되는 날이면, 옛날 방울재 윗당산머리 봉구네 사랑방에 모여 놀던 버릇대로 밤만 되면 찾아왔다.
허나, 이 날 밤 모임은 좀 달랐다. 이 날 밤에는 칠복이 문제로 모인 것이었다.
“당장 쫓아 버려야 혀. 옛정도 좋지만 살고 봐야 헐 꺼이 아닌감!”
올 봄에, 혼기가 다 찬 두 딸과 중풍에 걸려 기동을 못하는 병든 아내를 끌고 방울재로 다시 돌아온, 회갑줄에 앉은 강촌 영감이 아까부터 와락와락 성깔을 부려 가며 큰소리였다.
“차마 워치크롬 쫓아 낼 거여.”
봉구였다. 옛날에 위아랫집에서 처마 맞대고 살아온 정 때문에, 강촌 영감의 의견에 찬성을 하지 못했다.
“봉구 말도 일리가 있재잉. 고향에 찾아온 사람을 워치기 쫓아 낼 거요잉.”
덕칠이도 칠복이와 가깝게 지내 왔던 터라, 쫓아 내자는 데에는 어딘가 마음이 꺼림했다.
“제정신 갖고 먹고 살겄다고 헌담사 워떤 무지막지헌 놈이 고향 찾어온 사람을 쫓아 내자고 허겄어?”
“암, 그러고 마니!”
“옴짝달싹 못허게 묶어 놓으면 으쩌겄소?”
덕칠이였다. 그는 봉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묶어 놓으면 징을 치고 지랄 염병은 안 헐 거 아닌고?”
“자석이 말짱헐 때는 암시랑 안 허다가도 날씨만 꾸무럭헐라치면 발광이니…….”
“그랑께 미쳤재.”
“오늘 낮에도 나헌티 찾아와서는 여편네 찾으러 가겄담서 새끼를 좀 맡어 달라고 허등만.”
“그럴 때는 제정신이 든겨.”
“좌우당간에 낚시터에서 미친놈이 징 치고 훼방친다는 소문이 나면 낚시꾼이 얼씬도 안 헐 거고, 그렇게 됨사 우리는 굶어죽는 거 아닌가.”
강촌 영감은 칠복일 쫓아 내자는 의견을 조금도 꺾지 않았다.
“그눔에 징을 뺏어서 물 속에 던져 베리까?”
“그러다 살인나게?”
아무도 칠복이에게서 징을 빼앗지는 못했다. 며칠 전에도 그가 낚시꾼들 사이를 강변 덴 소 날뛰듯 하며 징을 두들기고 소리소리 질러, 방울재 사람들이 몰려가서 징을 빼앗아 감춰 버렸었는데, 그 때 칠복이는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쇠스랑을 휘두르며 징을 내놓지 않으면 찍어 죽이겠다고 어찌나 무섭게 어우르는지 그 바람에 슬그머니 두엄자리 속에 감춰 둔 것을 꺼내 주지 않았던가.
“병신 같은 놈, 제 여편네 단속을 그렇게 잘했더라면 뺏기지 않았을 것잉만!”
봉구는 램프 불 주위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벌레들을 멀뚱히 바라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걱정이 되어 한마디 뱉는다.
“오늘 밤에 당장 쫓아 베려!”
강촌 영감이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내질렀다.
|생략 부분 줄거리| 강촌 영감의 강경한 태도에 봉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칠복을 내쫓는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칠복은 울며 매달려 보지만 마을 사람들은 끝내 그를 읍으로 나가는 버스에 태운다.
“징헌 고향 다시는 오지 말어.”
봉구가 천 원짜리 두 장을 칠복이의 호주머니에 푹 쑤셔 넣어 주며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칠복이가 무슨 말인가 하는 것 같았으나 부르릉 버스가 굴러가는 바람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버스가 어둠 속에 묻히고 자동차 불빛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말없이 돌아섰다.
한사코 가기 싫다는 칠복이 부녀를 억지로 버스에 태워 쫓아 보낸 그 날 밤, 방울재 사람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후두둑후두둑 빗방울이 굵어지고 땅껍질 벗겨 가는 소리가 드세어질 무렵, 봉구는 잠결에 아슴푸레하게 들려오는 징 소리에 퍼뜩 놀라 일어나 앉았다.
“아니, 이 밤중에 무신 징 소리당가?”
그는 마른 기침을 토해 내고 삐그덕 방문을 열어, 송곳 하나 박을 틈도 없이 꽉 들어찬 어둠의 여기저기를 쑤석여 보았다. 어둠 속 어디선가 딸을 업은 칠복이가 후줄근하게 비에 젖은 채 바보처럼 벌쭉벌쭉 웃으면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는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자리에 들어 아내의 툽상스러운 허리를 꼭 껴안고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땅껍질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사이사이로, 징 소리가 쉬지 않고 큰 황소 울음처럼 사납고도 구슬프게 들려 왔기 때문에 잠시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바람 소리와도 같은 그 징 소리는 바로 뒤란의 아카시아 숲께에서 가깝게 들린 것 같다가도 다시 댐 쪽으로 아슴푸레 멀어져 가곤 했다.
“바람소린지, 징 소린지.”
봉구는 벌떡 일어나 더듬더듬 담배를 찾아 성냥불을 붙였다.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몇 번인가 누웠다 앉았다 하며 담배만 피웠다. 자꾸만 귓바퀴를 후벼 파고 들려오는 징 소리가 오목가슴 깊숙이에 가시처럼 걸린 때문이었다.
이 날 밤, 팔만이도 덕칠이도 강촌 영감도 다 같이 방울재 안통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징 소리 때문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징 소리는 점점 더 가깝게, 그리고 때로는 상여소리처럼 슬프게 들렸는데, 그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 방울재 사람들은, 그게 어쩌면 그들한테 쫓겨난 칠복이의 우는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다 같이 했다. 그 생각과 함께 징 소리가 더욱 무서워졌으며 아침을 맞기조차 두려웠다.
문순태(文淳太, 1941~ )
전남 담양 출생. 1965년 <현대 문학>에 시 「천재들」 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농촌 지방의 현실에 바탕을 둔 한(恨)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작품을 썼다.
작품집으로『흑산도 갈매기』,『살아 있는 소문』, 주요 작품으로 「걸어서 하늘까지」, 「타오르는 강」 등이 있다.
작품 투시도
포인트 1 ‘징 소리’는 근대화의 이면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상징함
포인트 2 징을 ‘치는 자’와 ‘듣는 자’는 대립 관계가 아닌 공동체임
작품 해설
실향민의 아픔과 희생
이 작품은 장성(長城) 방울재라는 구체적 지명을 배경으로, 댐 건설로 인한 실향민들이 겪는 고향 상실의 아픔과 다시 고향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그리고 있다. 그 ‘아픔’과 ‘몸부림’의 절규가 곧 ‘징 소리’의 격렬한 음향으로 표상된다.
근대화의 이면에 대한 고발
1970년대의 우리 사회는 사회의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로서, 한편으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의 그늘 아래 경쟁력을 잃어 가며 근대화의 폐해를 고스란히 떠맡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작가 문순태는 주로 자신의 성장지인 전남 일대의 농촌을 주목하며,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져 가는 모습과 선량하나 무지한 민중들이 어떻게 희생되는가 하는 점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는 이 소설에서 ‘칠복’으로 대표되는 농촌 빈민(또, 그대로 도시의 빈민이기도 하다)의 삶을 통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우리 농민의 전통적 정서인 한(恨)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근대화의 부정적 이면을 고발하고 있다.
핵심 정리
갈래단편 소설, 연작 소설, 사회 소설
배경시간 - 1970년대
공간 - 전라남도 장성호 수몰 지구
시점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민과 도시 빈민의 고달픈 삶
작품 내용
소박한 농부 출신의 사내. 도시로 나갔다가 정착에 실패하고 수몰된 고향 근처를 떠도는 순박한 인물
칠복의 어릴 적 친구. 칠복을 이해하나 그를 마을에서 내쫓는 데 합류함.
칠복이와 가깝게 지내던 고향 친구로 칠복을 동정함.
고집이 세고 현실적인 성격의 인물. 칠복이가 낚시꾼을 상대로 하는 장사에 방해가 되자 마을에서 쫓아 낼 것을 강력히 주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