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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영국 공수부대원들)
우스터비크 마을에서의 긴박했던 전투 상황
영국 제1 공수사단의 잔존병력은 서쪽으로 퇴각하여 우스터비크에 집결하여 이곳에 배수의 진을 치고 결사 항전을 다짐합니다. 마을 동쪽에 방어진을 구축한 제1, 제3 그리고 제11 공수대대는 독일군의 공격에 격렬하게 대응하였습니다. 한편 마을 서쪽에서 방어하는 제4 공수여단의 경우는 보다 강력한 독일군의 공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숲속에 매복하였던 이들에게 독일군은 박격포와 자주포, 탱크 그리고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하여 밀고 들어왔고 화력의 열세로 인해 그날 오후에 지원을 위해 제10대대 병력이 도착했을 때는 고작 60여명만이 생존해있었습니다. 숲속에서 후미에 배치되었던 156 공수대대의 경우 소총에 대검을 착검하고 용맹하게 돌격하여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전멸을 면할 수 있었지만 최종 남은 병력은 고작 75명이었습니다.
(우스터비크에서 교전 중인 독일군 보병부대)
네이메헌 대살육
네이메헌의 경우 전날 요청했던 보트가 그때까지 도착하지 않자 제대론 된 보트 없이 고무 보트를 이용해서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제3대대 1,500명이 전면에서 공격을 하는 동안 504 연대가 고무보트에 나뉘어 타고 도하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나마 노도 부족하여 소총 개머리 판을 이용하여 노를 젓는 최악의 조건에서 배를 움직여야 했으나 강 건너편에 독일군의 포화를 뚫고 무사히 강을 건너간 병력은 고작 절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 위에 보트들을 향해 무차별로 쏟아지는 포격과 총격들에 노출된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구멍난 보트와 함께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네이메헌 전투에 투입된 판터 탱크)
생존 병력들은 강을 건너자 200m에 달하는 개활지를 독일군의 사격을 뚫고 달려가서 교량 북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드디어 교량 점거에 성공한 후에 영국 기갑부대 탱크들과 미군 공수부대가 다리를 건넜고 무려 나흘만에야 네이메헌에서의 전투가 끝을 맺게 됩니다ㅣ.
훗날 이 전투를 가리켜 "리틀 오마하"라고 불렀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최악의 살육전이었던 오마하 해변 상륙 상황에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101 공수사단이 바로 TV 미니 시리즈 "밴드 오브 브러더스"에 이지 중대가 소속된 공수사단입니다.
사진은 "밴드~"에 한 장면)
하지만 아른헴의 경우는 독일군의 공격이 좀 더 강력했습니다. 1차 아른헴을 수중에 넣은 독일군은 미국과 영국군의 협공으로 일시적으로 후퇴를 하였지만 곧바로 탱크를 동원하여 아른헴 교량을 재탈환하게 됩니다. 아른헴이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북쪽에 연합군 공수부대들과 남쪽에 지상군 제30군단은 완전히 분리되어 결국 북쪽에 공수부대들은 독일군에게 포위되버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른헴에서 포로가 된 영국 공수부대원들)
다행히 남쪽에 미군 101 공수사단이 공격을 시작하여 북쪽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막고 서있던 독일 판터 전차들을 무력화시키게 됩니다.
Day 5 (1944년 9월 22일)
드디어 마켓 가든 작전 개시 후 5일째 되는 날이 밝았습니다. 영국 제1 공수사단의 잔존 병령 3,600명은 우스터비크 주위에 건물과 숲 속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교량을 사수하며 제30군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후퇴했던 독일군은 전열을 정비한 후에 이번에는 거의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백병전까지 불사하는 결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방어 병력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며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상황이 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남쪽에 제30군단 소속 64 포병 연대와 무선 연락이 연결되어 제1 공수사단은 귀중한 화력 지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망명 폴란드 정부군 강하와 비운의 시작
날씨로 인해서 이틀이나 강하가 지연되었던 망명 폴란드 정부군 소속 공수여단은 이날 오후에 제1 공수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으로부터 강을 건넌 지역에 강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강하된 보급 물자들은 영국 공군의 실수로 그들이 낙하 지점에서 무려 15km나 떨어진 곳에 떨어지게 됩니다. 애초에 강하 후에 공급된 보트를 사용하여 도하 후에 영국 제1공수사단과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계획은 낙하된 보트들이 고지대를 점령한 독일군에게 발견되어 포격을 당하는 바람에 대부분 파괴되어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폴란드 공수연대 지휘관 스타니슬로 소사보우스키 장군)
게다가 더 끔찍한 일은 강하된 3개 대대 병력들 중에서 2개 대대가 독일군 점령 지역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독일군들은 강하하는 폴란드 공수부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폴란드군은 투입 병력의 25%를 그날 전사자로 기록하게 됩니다. 깅 건너에 영국 1공수사단을 지원하기 위한 애초의 목적은 고사하고 폴란드군은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후퇴해야 했습니다.
(마켓가든 작전 투입 직전 탑승 대기 중인 폴란드
공수연대.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비운의 전쟁터였습니다.)
전날 네이메헌을 간신히 점령한 후에 도강에 성공한 영국 기갑부대는 황당하게도 그 이후 18시간 동안 전혀 진군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몽고메리 장군 휘하에 마이크 홀록스 장군이 네이메헌 전투로 인해 혼란에 빠진 부대들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82 공수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한 탱크는 절반뿐이었습니다. 또한 전진과 보급 모두 라인 강을 따라가는 고속도로에 의존한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뜻밖에 "교통 체증"으로 인한 지체가 발생하곤 하였떤 것입니다.
(네이메헌 교량 점령 직후에 강을 건너는 영국 기갑부대의 셔먼 탱크)
이런 연합군의 문제는 방어하는 입장인 독일군에게는 아른헴에 튼튼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귀중한 시간을 제공해준 셈이었습니다. 결국 뒤늦게 전진해온 영국 기갑부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독일군의 견고한 방어선이었습니다. 결국 영국군은 지원 병력인 제43 사단을 요청했는데 또다시 고속도로의 교통 체증으로 43사단은 이날 도착하지 못하게 됩니다.
(네이메헌에서 휴식 중인 영국군 기갑부대와 미국이 제공한 셔먼 탱크)
이제 독일군은 연합군에 대해서 확실히 공격의 우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연합군의 본진인 제30군단에 대해서도 기습 공격으로 타격을 주었고, 선봉인 영국군과 미군 제101 공수사단은 독일군의 강력한 공격에 맞서서 힘겨운 전진을 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상황은 1500대의 연합군 수송기들이 82사단을 위해 공급 물자를 낙하시켰고 네덜란드 시민들의 혐조에 힘입어 물량의 60% 이상이 82사단에 의해 회수되었습니다. 어쨌든 이제 강을 건너기는 했지만 지독한 비효율과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로 고속도로 상에서 치열한 교전이 거듭되었습니다.
(네이메헌 전투 직후에 폐허가 된 교량 근처 건물들)
Day 6 (1944년 9월 22일)
6일째 날이 밝자 독일군은 고립된 제1공수사단을 상대로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건물 속에 숨어 방어를 하는 영국군을 독일군은 건물 하나 하나를 목표로 포격을 가하여 파괴하기 시작하였지만 영국군이 폐허 속에 엄폐한 대전차포를 사용하여 독일군의 자주포와 탱크들에게 타격을 가한 덕분에 방어를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비록 전날 강하 후에 도하를 못해서 제1공수사단과 합류는 못했지만 강 건너편에 있는 폴란드 공수연대가 독일군에게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고속도로를 막고 남쪽에서 전진 중인 연합군을 막아내고 있는 제10 무장 친위대 기갑 사단을 폴란드 연대가 공수하면 남쪽에 연합군과 협공을 받는 셈이 되므로 제1공수사단을 공격하던 독일군 병력에서 2,400명을 띠어 폴란드 연대를 추격하기로 결정합니다.
(마켓가든 작전 당시 연합군이 사용한 도하용 보트, 천으로 만들어진
취약한 구조였기 때문에 총알 몇발만 맞더라도 물에 가라앉았습니다.)
한편 폴란드 공수 연대는 남쪽에서 올라오던 제30군단의 정찰대와 접촉에 성공하게 됩니다. 한편 뒤늦게 도착한 43사단은 독일군에게 발견되어 포격을 받게 되는데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폴란드 연대와 합류하게 됩니다.
어쨌든 폴란드 연대는 영국군 제1공수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도하를 해야 하는 본래의 작전 목표를 위해서 다시 한번 시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강 건너에 독일군에게 관측되어 집중 포격과 총격을 받으면서 또 다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됩니다, 다음 날 새벽까지 도하 시도가 중단되었을 때 고작 52명만이 강 건너편에 도착하였고 나머지 병사들의 피는 강물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Day 7 (1944년 9월 23일)
독일군은 폴란드군의 도하를 막아내면서 동시에 폴란드군이 도하를 하는 경우에 맞기 위한 영국군의 강가 위치 확보를 방해하기 위한 양방향의 공격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의 접전에서 돌파를 성공한 제30군단의 기갑부대들이 속속 강 건너 편에 도착하게 되자 상황은 연합군에게 조금씩 유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무장 친위대 기갑 사단 - 비록 전쟁 내내 친위대가 저지른 끔찍한 악행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지만, 독일내 최강 엘리트 병력으로 그들은 연합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과 캐나다군 공병부대들이 도착하고 교량을 만들어서 이날 밤에 폴란드군은 추가로 150명을 도하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제 제30군단의 본진도 아른헴에서 불과 몇킬로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속도로 상에서 독일군의 기습 공격은 아직까지 멈추지 않았고, 강 건너에서 제1공수사단과 대치하는 독일군의 방어도 여전히 굳건했습니다.
Day 8 (1944년 9월 24일)
비록 강 건너에 제30군단의 병력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독일군의 도하 제지로 인해서 제1공수사단은 여전히 위기에 봉착해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날 영국 육군 소속 돌셋샤이어 연대 소속 2개 중대 병력이 도하를 시도하는데 문제는 지리를 잘못 파악하여 엉뚱하게 독일군 지역으로 도하하는 바람에 총 315명의 병력은 도하와 동시에 독일군의 공격으로 괴멸 직전에 이르게 되고 75명만이 간신히 제1공수사단에 도착하여 합류하게 됩니다. 결국 나머지 병력중에 생존자들은 고스란히 독일군의 포로가 되버립니다. 이 실패로 제30군단 지휘부는 제1공수사단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합니다.
Day 8 (1944년 9월 24일)
이날 새벽 제1공수사단은 그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사수했던 현재 위치를 포기하고 제30군단 본진이 있는 강 건너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게 됩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도 쉬운 상황은 아니었고 심지어 독일 무장 친위대 전투부대의 공격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게 되지만 다행히 강건너 64 포병연대의 포격 지원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결국 이날 영국군과 캐나다군 공수부대의 가교 설치로 제1공수사단 잔존 병력 중에 2,398명은 도하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북쪽에 300명은 결국 독일군의 방해로 포로가 되고 맙니다.
제1공수사단은 총원 10,600명 중에서 1,458명이 전사하고 6,414명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고, 전체의 1/3이 부상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네미메헌의 경우는 10월까지 공수부대들에 의해 교량이 방어되었고 11월에 캐나다 군에게 인계되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2월 본토 공격시 북부 아른헴 대신 독일 방면의 코스를 선택하게 됩니다.
참담한 결과
마켓 가든 작전 기간 중에 독일군은 2,000명의 전사자와 8,000명의 부상자를 낸 반면 미군은 3,664명의 사상자를 냈고 폴란드군은 전사 102명, 부상 276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영국군의 경우 마켓 작전에서 1,130명, 가든 작전에서 5,354명 도합 6,484명의 전사자와 851명의 실종자, 6,450명의 포로를 합하면 무려 13,785명의 손실을 입게 됩니다.
결국 연합군의 손실은 독일군의 두배에 달하는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투가 이루어진 지역이 도시 시가전이었으므로 연합군에 합세한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조차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훗날 마켓 가든 작전에 대한 혹독한 비판의 소리가 드높은 이유들 중에 몇가지를 열거하면,
첫째, 그 많은 교량들을 일거에 공수부대들이 점령한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나 현실성이 결여된 무모한 작전이었고, 그나마 애초에 지정된 낙하 지점들의 상당 부분이 점령 목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둘째, 제30군단은 굼뜬 움직임도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첫날 "바보들의 행진"이라고 제가 불렀을 만큼 말도 안되는 이동과 5일째 네이메헌을 간신히 점령하고도 기갑부대의 휴식을 무려 18시간이나 주었던 결정은 이해가 가지 않는 바보짓이었습니다.
세째, 아른헴 교량 점령이 과연 그렇게 꼭 필요한 작전 목표였던가 입니다. 아른헴에서 서쪽으로 25킬로 떨어진 레흐넌 교량의 경우 아른헴처럼 독일군의 방어가 철저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곳을 점령했다고 해도 연합군의 전진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분석입니다.
네째, 미군 공수부대는 네덜란드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영국군의 경우 이런 현지 저항 세력의 협조를 무시했습니다. 이런 배경은 과거 영국 첩보부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만 (레지스탕스 속에 독일측에 협조하는 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청됩니다.) 이런 이유로 영국군은 네덜란드 시민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통신 두절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미군은 네덜란드 시민의 지하 통신망을 활용하는 혜택을 보기도 했지만 영국군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미군 제101 공수사단과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죽을 때까지 그가 승인한 마켓 가든 작전이 절대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이 작전의 입안자라고 할 수 있는 몽고메리 장군의 경우 이 작전을 "90% 성공한 작전"이라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즉 항공기와 지상군, 필요 물자만 제 시간에 도착했더라면 날씨 탓이나, 독일 기갑사단 그리고 자신의 전술적 실수에도 불구하고 성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있습니다.
(몽고메리(좌)와 아이젠하워(중간) 이 두사람은 마켓 가든 작전이 실패였음을
죽는 날까지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이작전은 끔찍한 재앙이었고, 연합군에게 최악의 패배를 안겨준 본 헤드 플레이였습니다.
(아른헴 지역에서 발견된 영국 공수부대원의 묘지 - 1945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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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담한 이야기지만, 아침에 커피마시며 읽기 좋네요.
매번 재미있는 2차대전사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으셨으면 제게 보람입니다.
에.... 이건 뭐 완전히 졸전이네요. 이 정도로 작전이 엉망인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준만님의 이차세계대전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 개봉 박두입니다!
역시 기다리고 있던 1인입니다.^^ 형님이 한편 한편 쓰신 전사와 그 전사에 맞는 디오라마를 한편 한편 만들면 어떨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도 우리까페에서는 '글쟁이'에 속하는데 형님 '필력'에 무릅꿇습니다. 두번째 사진은 거의 드래곤인형 박스아트같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과찬의 말씀!
아마도 이 글 올리신 후에 제가 제일 먼저 읽은 것 같았는데 댓글은 무지 늦게 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휘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수한 병정들이 죽어가네요.
전쟁에서의 일이고 지휘를 받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리더를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니 잘못되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결과가 필연적이겠지만
전쟁시도 아니고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을 투표에 의해서 뽑는 제도가 있음에도 자신을 죽을 정도로 고생시킬 사람을 뽑아대는 현실이 갑갑합니다.
요 근래에 영화 'The Pianist'와 'Uprising'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오늘 밤에는 'The Great Escape(대탈주)'를 보고 잠자리에 들 계획입니다.
잔인한 전쟁. 훔~
"피아니스트"와 "업라이징" 모두 1944년 바르샤바 봉기와 1943년 같은 장소에서 게토 봉기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지요. "피아니스트"는 저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킹콩"에 출연했던 에드리엔 브로디에게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게 만든 작품이 바로 "피아니스트"지요. "대탈주"는 오래 전 영화지만 스티브 맥퀸이 철조망 속에 쳐박히는 모터사이클 체이스 씬은 영화사에 길이 남는 명장면 중에 하나입니다. 이영화 역시 2차대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즐거운 전쟁영화 감상이 되시길......
2차대전사 이렇게 정리하실려면.... 배경지식이 엄청나셔야~~~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요점만 쏙쏙 ... 학교다닐떄 수업은 땡땡이치고 열심히 수강하였던 친구 서머리노트 빌려 보는 기분이네요~~
지식이 많은 것보다는 관심이 많은 분야지요:-)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라 보자 마자 쉼없이 읽어 내려 갔습니다. 정리도 잘하셔서 이해가 아주 쉽게 됩니다. 생활도 해야 하고 글도 쓰시려면 노력을 많이 하셔야 하는데 그 열정 대단 하고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이 기대 하겠습니다.
따블오님께서 오시면 무슨 답변이 있으시겠지만 누군가가 읽고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족하고 기뻐할 형님이십니다. 당연히 그냥나가지 않고 이렇게 공치사라도 한마디 해주시는분 보면 오히려 까페를 운영하는 쥔장입장에서 더 고맙게 느껴질수 밖에 없습니다. 성철스님이나 오성철님이나^^ 득도하신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당연하지요. 제가 글을 올리는 유일한 이유는 읽는 분들께 도움이 되고 즐거움을 줄 수 있기 때뮨이지요. 읽는 분들의 댓글은 이런 제 판단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