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자체가 모더니즘을 뛰어 넘는 것으로서 1943년 그가 탄 비행기가 러시아에서 격추되었는데 이때 타타르족(族)에 의해 구출되어 생명을 건졌다. 샤머니즘의 풍습을 지닌 타타르족은 펠트 담요와 비계 덩어리로 그를 구했다고 한다. 그는 그후 이 실존적 경험을 살려 펠트와 기름 덩어리를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1946년 말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1947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The Dusseldorf Art Academy)에 입학하여 요제프 엔젤링(Josef Enseling)과 에발트 마타레(Ewald Matare)의 조각강의를 들었다. 1950년에는 나무조각과 불에 탄 재료를 사용하여 작품을 발표하였고 1960년대에 구리·나무·펠트천·기름덩어리·뼈·꿀·밀랍 등을 소재로 작품을 발표했다. 1961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된 후 직접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운동에 적극 개입했다. 1962년부터 조지 마키우나스·백남준 등과 전위예술 단체인 플럭서스(Fluxus)에서 활동했고 1963년 이후 다양한 행위예술을 발표했다. 1960년 말부터는 조각의 개념을 정치 영역에 확대하여 '사회적 조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세웠다. 1972년 보통선거를 통한 직접민주주의 구현 운동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자 해직 무효소송을 제기하여 1978년 4월 승소했다. 197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였고 1982년 7,000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종의 행위예술을 개최하였다. 1986년 1월 23일 뒤셀도르프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How to Explain Pictures to a Dead Hare》(1965)이다. 머리에 꿀과 금박을 뒤집어쓴 채 한 발에는 펠트를, 다른 발에는 쇠로 창을 댄 신발을 신고 죽은 토끼를 안고 약 2시간 동안 미술관의 그림을 토끼에게 설명한 퍼포먼스이다. 그는 고정된 예술 개념을 거부하고 자유를 지향하였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 말은 누구든 모든 직업에서 잠재적 창조자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삶의 형태를 예술 작업의 일부로 생각하였다. 행동적인 그의 예술관은 개념미술·행위예술·환경예술을 비롯하여 독일 신표현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두이스부르크시(市)가 수여하는 빌헬름 렘브루크상(1986)을 받았고 대부분의 작품은 다름슈타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국립
현대미술관에도 4점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주요 작품으로 《흔적》(1974), 《꿀을 주세요》(1979), 《카프리 배터리》(1985),
《집합체가 놓인 책상》(1958∼1985) 등이 있다. 1963년 독일 부퍼달 파르니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1969년 미국에서 샬롯데 무어맨(Sharlotte Mooreman)과의 공연을 통해 비디오 아트를 예술 장르로 편입시킨 선구자라는 평을 들었다. 1977년 위성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하였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러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도시와 영상전(서울시립미술관, 1996), 교과서 미술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독일 비디오조각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97 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개인전(미국 국립미국미술관,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한국현대미술전-시간(호암갤러리, 1998) 등 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1996년 10월 독일《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에 들었고,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월간지 《캐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로 올랐다. 1998년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공로로 '98년도 교토상'을 수상하였고,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받았다.
3. 개념미술-조셉 코수스 1965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1967년까지 비주얼아트스쿨에서 공부하였다. 1965∼75년까지 L.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67년 노멀아트미술관을 창립하여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부터 비주얼아트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75∼76년 잡지 《폭스 The Fox》를 편집하였고, 1977∼78년 《Marxist Perspectives》의 미술편집자로 활동하였다. 초기 작품에는 어떤 사전적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1965년 이후에는 작품의 기본적 요소로 언어를 중시하였다. 언어 역시 초기에는 백과사전적 정의를 분석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텍스트로 폭을 넓혔다. 논문 〈철학 이후의 미술 Art After Philosophy〉(1969)을 썼고,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nulle and three Chairs》(1965), 《네온 전광 문자》(1966), 《흑과 백 White and Black》(1966), 《Zero and Not》(1986), 《무제 Untitled》(1997) 등의 작품이 있다.
4. 페미니즘-바바라 크루거 1964년 뉴욕 주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후 중단 1965년 뉴욕 파슨 디자인 학교에 진학, 파인아트를 전공. 이 작품을 출발점으로 현대미술과 사진을 종횡무진 휩쓸기 시작했다. 그녀의 텍스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잔략적 방법론으로 말해져 왔다. 이 작품은 1982년 독일 '카셀 도큐멘터(Kassel nulla)'에 초대되었다. - 1989년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 1989년 워싱턴 DC에서 벌어졌던 낙태법 철회와 관련된 여성 시위와 관련하여 낙태의 권리가 여성의 것임에도, 배속의 태아를 죽이고 살리는
일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과 분노로 나타난 작품이다. 신디 셔먼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남성문화, 남성위주의 주류 문화에 항거하고 여성들에게 정체성을 자각하자는 메시지를 철저하게 예술의 영역에서, 예술적 표현수단으로 말해 왔다면, 바바라 크루거는 똑같은 이슈에 대해 직접 현장에서, 정치 참여적으로 수행해 왔고, 작품에 있어서도 대중들이 있는 공공 장소의 포스트, 대중들이 보는 광고탑, 그리고 대중들이 착용하는 티셔츠 혹은 메고 다니는 가방에까지 자신의 표현 수단인 붉은 색 볼드 타입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새겨 넣어 왔다. 언어와 사진이 만났을 때의 파괴력을 간파한 그녀는 사진 못지않게 텍스트를 중요시했고,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지는가에 대해서도 소흘히 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진이 언어와 결합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효과를 강력하게 실증적으로 보여준 아트스트가 바바라
크루거였다. |
출처: 이사퍼거스 원문보기 글쓴이: 떡밥
첫댓글 백남준 타계에 즈음하여 ... 그가 속한 포스트 모더니즘과..... 그의 전위에술 단체인<Fluxus>.... 에 대하여 개념파악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다른 것은 그냥 흘러가는 이야기로 듣고.... 기억할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 이름 정도만 기억하세욤
포스트 모더니즘....음! 어렵지만 기억해 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