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니트는 공원에 앉아 있었다. 이제 갓 공사를 끝낸 것 같은, 듬성듬성 심어져있는 어린 나무들과, 먼지가 거의 없는 벤치, 조그맣게 고여 있는 연못이 공원의 전부였다. 놀이기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곳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엄마들이 하나 둘 모여 자식들의 장래나 행동에 대해 서로 수다를 떨었겠지만, 주택가에서 먼 까닭에 외면당한 그런 외딴 공원이었다. 며칠째 니트는 수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공원에서 돌아갈 때 가로등이 만들어준 그림자를 질질 끌고 가는 것처럼 무거웠다. 몇 번이고 떨쳐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마땅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혼자 앓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형광등을 켰다. TV를 켜고 눈이 가는 대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10분을 보다가 체인지, 10분을 보다가 체인지. 그렇게 두 시간여를 TV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계속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어서 그랬던 건지, 니트는 무척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어지는 것들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잠이 들면 사라질 생각들에 신경 쓸 여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니트는 희한한 병에 걸려 있었다. 혼자서 대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시작하는 정신과 의사의 말에서 니트 자신이 인정하지 않고 나와 버렸기에 걸린 병이라고 마리는 생각했다.
-그냥 의사에게 맡겨 버리지 그래. 편해지잖아.
그 말은 니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니트는 스스로 그 곳에 갇히기를 원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도, 또 니트 스스로 타인에게 이야기를 해 봐도 통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 보았자 소용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그런 니트를 보아도 조금도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넌 누구지?
타국의 언어처럼, 니트는 마리가 무엇을 말하고, 또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방바닥에 누워 손바닥으로 형광등을 가리면서, 새어 나오는 빛을 주시하며, 니트는 들리지 않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니트는 두 번째 상담을 받으러 병원을 찾았다. 전날 의사가 말하기도 전에 뛰쳐나온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도저히 이대로는 있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니트는 일기장을 의사에게 펼쳐 보였다. 의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한 장 한 장을 읽어나갔다.
-이건 무슨 병 같은 게 아니에요. 다만 니트 씨가 너무 과도하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죠.
-하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놈은 날 잡아먹으려 하고 있다고요.
의사는 이런 타입의 사람에게 익숙하다는 듯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간혹 그런 분들이 계시죠.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느낌으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짧게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현재 니트 씨가 병이라고 생각하시는 것들은, 주위의 상황이 본인에게 편안하지 못하고, 특정한 것에 너무 집착하셔서 생긴 것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니트 씨 자신이 왜 그러시는지를 아실 겁니다. 그런 종류의 것들은 반면 치료가 무척이나 쉬워요. 집을 공기가 맑고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가신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집안 환경을 바꿔 보세요. 가능한 녹색 식물이 많게요. 녹색 식물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죠. 진정제를 드리지요. 하루에 한 번만 드시고, 식후 30분입니다. 의사는 그 말을 끝으로 다음, 을 불렀다. 니트는 마치 법을 어겨서 항변도 하기 전에 판결을 받은 범죄자처럼 터덜터덜 병원을 걸어 나왔다. 공황상태 같은 마음도 진정 시킬 겸, 니트는 종종 찾곤 했던 그 공원으로 향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니트가 서 있던 맞은편의 벤치에는 꼬마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 낮의 태양은 그 꼬마에게 너무 가혹해 보였다.
-꼬마야, 여기서 뭐하니.
니트는 꼬마가 위압감을 느끼지 않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지만 꼬마는 말없이 니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한 꼬마라고, 내버려 둘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니트는 어떻게든 꼬마의 엄마를 찾아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엄마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적해서 주부들이 거의 안 오긴 하지만 일단은 공원이니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저녁이 되도록 엄마는 오지 않고, 아이는 앉아 있던 자세 거의 그대로 있었다. 그 사이에 니트는 다리가 아파서 쪼그려 앉아 보기도 하고, 아이 앞에서 앉은 채로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조그만 몸의 꼬마 아이를 내버려 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완전한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이 켜졌다. 점점 니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꼬마야, 일단 집에 가자. 집에 가면 전화가 있으니까 네 엄마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니트는 꼬마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이 아이가 아픈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서둘러 니트는 꼬마를 일으켜 세웠다. 굳건히 한나절을 지키고 앉아 있던 그 뚝심에 비해 꼬마는 쉽게 일어섰다. 니트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 꼬마 아이를 데리고 공원 출구로 향했다. 니트가 사는 주택가로 가기 위해서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꼬마의 몸은 무거웠다. 꼬마아이의 몸은 멈춰 섰다. 니트는 살짝 힘을 주어 손을 잡아 당겼다.
-왜 그러니 꼬마야.
꼬마아이는 말없이 서 있었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여자아이가 이렇게 힘이 셀까 혀를 차고 있던 니트를, 오히려 꼬마아이가 잡아당겼다. 니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다시 공원으로 끌려 들어왔다.
니트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도 꼬마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세만 다를 뿐, 표정은 아까 낮에 보았던 그 표정과 같았다. 희로애락이 없는 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 니트는 그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서서히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까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있는 힘껏 삼켰다. 그리고 꼬마아이의 손을 놓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꼬마아이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했다. 하나, 둘, 셋.
셋까지 성공하자 안심한 니트는 어색하게 꼬마에게 안녕의 인사를 건넸다. 아이가 어떻게 되는 것보다 우선 자신에게 닥친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니트가 조금씩 멀어져가자 그 아이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다음날 니트는 그 공원에 다시 가 보았다. 가기 전에 니트는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 번 가보는 게 어때.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어젯밤까지 나타나지 않던 그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니트는 애써 그것을 못 들은 체 하며 공원으로 향했다. 어제 공원에 있었던 그 아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니트는 그 아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니트가 앉아 있는 자세는, 전날 아이가 앉아 있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흡사, 그 여자 아이가 니트인 듯이 보였다.
니트에게 있어서 머리는 하나의 우주였다. 어떤 것이든 쏟아내는 화이트홀 같은 것과,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것들이 뒤섞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은 너무나 복잡해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는 곳이었다. 니트는 그것을 ‘괴물’이라고 물렀다. 자기 몸에 달린 머리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스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니트는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그 일종의 ‘세계’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그를 붙잡았던 여자아이는 그 괴물의 실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아이는 만났니.
-만나지 못했어.
-어째서. 그 여자 아이가 너를 피했니. 아니면 네가 그 아이를 피했니.
-둘 다 아니야. 난 그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고, 그 아이는 순순히 응했어. 하지만 공원을 나오려고 하는 순간 그 아이는 내가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힘으로 멈춰 섰어. 필사적으로. 공원을 나서기가 싫다는 듯이.
니트는 그 아이를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낫다.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던지, 아니면 직접 찾아가서 축귀에 대한 것들을 듣던지 해서 그 아이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보려고 시도했다. 그렇지만 그 기억이란, 정말 환경에 잘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없애려고 하면 순식간에 시각을 통해 들어온 갖가지 정보 속에 숨었다. 어떤 때는 니트가 시시각각 돌려버리는 채널 속에 숨어 한참을 나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니트는 자신을 괴롭히는 그 알 수 없는 것이 형상화한 결과가 그 여자 아이라고 믿었다. 괴물이라고.
니트는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니트는 사회학과이므로 철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니트는 용기를 내어 철학과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교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니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못 보던 얼굴인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우주를 아십니까.
교수는 니트의 말을 듣고 뭐, 저런 엉뚱한 사람이 있을까라는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처음 듣는 이론들을 듣고 나자, 니트는 적절한 타이밍을 엿보다 나가버렸다.
-네가 원하는 것은 ‘우주’야, 네 ‘자아’야.
마리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는 자신이 ‘자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트가 머릿속에서 이미지해낸 ‘괴물’도, 멋대로 규정해서 말해버린 ‘기억의 동물’도 엄청나게 힘이 세진 ‘그 여자아이’도.
-기억은 살아 움직이는 걸까.
니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리는 니트가 밀려오는 짜증을 견딜 수 없어 포기할 때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니트는 지금 ‘기억의 동물’에 집착하고 있다고 마리는 생각했다. ‘기억의 동물’이라는 것은 니트가 시각을 통해 본 것, 후각을 통해 느낀 것, 촉각을 통해 느낀 것, 미각을 통해 맛본 것들의 집합체였다. 그러니까, 변신로봇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웠다. 그리고 정말로 기억의 동물은 변신의 귀재였다. 동서양에 존재하는 모든 은신의 비법은 모두 체득한 것 같았다. 니트는 그것을 부족한 생각에 집착해 얻어낼 요량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머릿속에서 자꾸 무언가가 생겨나…….
니트는 꿈속에서 중얼거렸다.
다음날, 니트가 꿈속에서 일어났을 때, 어느새 겨울이 되어 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창밖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눈사람을 만들고, 좀 짓궂은 아이들은 처마에 매달린 날카로운 고드름을 찾아 서로 찌르면서 놀고 있었다. 니트가 그 광경을 보며 어리둥절해 있을 때, 마리가 말했다.
-여긴 기억의 동물의 뱃속이지. 네가 상상하면 그대로 될 걸.
니트는 따뜻한 이불 속을 생각했다. 그러자 니트가 있던 그 공간에 어느새 이불이 있고, 니트의 다리는 이불 속에 있었다.
-내 말이 맞지? 넌 네 의지를 스스로 조종할 수 있는 거야. 누가 어떻게 해 주는 게 아니야.
그러나 니트는 마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가끔 드는 이상한 느낌들의 정체에 대해 깔끔히 정리될 수 있어야 했다. 진짜 ‘나’는 누구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마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마리가 데려온 ‘기억의 동물’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였다. 마리가 종종 데려온 기억의 동물에 대해, 니트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1.잠을 꼭 잘 것.
2.소변을 참을 것.
니트는 유독 이런 상태일 때만 기억의 동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곧바로 그 동물이 찾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벌레의 주먹이 감은 니트의 생각들이었다. 니트는 그 동물에 대한 이미지를 어떻게든 만들어 두어야 했다. 형체가 없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동물은 나이가 몇 살일까.
-기억의 동물을 만나고 싶니, 니트.
니트가 의미 없이 중얼거린 말들은 어느새 니트의 머릿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기억의 동물이 입을 크게 벌려 전부 먹어 치운 것이었다. 기억의 동물이 언제쯤 커져서 니트를 집어 삼켜 버릴지 니트는 불안했다.
-기억의 동물을 키울 바에는 차라리 코뿔소를 데려다 키우겠어.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 기억의 동물은 사람을 먹지 않아.
-하지만 보아 뱀도 코끼리를 집어 삼켰잖아.
니트는 노트를 꺼내어 나, 너, 우리라는 글씨를 적고 삼각형을 그렸다. 니트는 분명히 선(線)은 선(線)을 잡아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에 불과했다. 보아 뱀은 코끼리를 집어삼켜 모자가 되었고, 이름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니트는 간과했다.
마리는 니트에게 한 가지 문제를 내 주기로 했다. 니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니트는 마리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것은 곧 존재의 위기를 뜻했다. 허공에 손을 휘저어 잡히는 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마리 자신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
-잘 들어 니트. 넌 지금부터 마리야.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니트가 되는 거지. 그 차이를 잘 생각해 보도록 해.
한참동안을 마리에 대해 생각했다. 마리는 절대자다, 마리는 인간이다, 마리는 유령이다. 이밖에도 많은 것들에 마리는 척척 들어맞았다.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으니 마리는 절대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대화가 통하는 것을 보면 인간일 수도 있으며, 형체가 없으니 유령이라는 것도 전부 맞았다. 니트는 머리가 아팠다.
한참동안을 니트에 대해 생각했다. 니트는 절대자다, 니트는 인간이다, 니트는 유령이다. 이밖에도 많은 것들에 니트는 척척 들어맞았다.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으니 니트는 절대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대화가 통하는 것을 보면 인간일 수도 있으며, 형체가 없으니 유령이라는 것도 전부 맞았다. 마리는 머리가 아팠다.
-서로 바뀌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어. 그만 두자.
니트는 지쳤다는 듯 말했다. 사실 니트는 벗어날 구실이 필요했다. 우주 속에 갇혀 있는 지구가 어디론가 튀어서 태양계 바깥으로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구가 더 빠른 속도로 돌기를 바랐다. 원심력에 의해 튕겨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마리가 섞여 나갈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기대감에서였다.
그 때 에일리언이 다가왔다. 멀리서 보기에도 섬뜩한 몸체, 질질 끌리면서 따라오는 타액. 니트는 그것을 보면서 겁에 질려 있었다. 입속에 입 속에 입을 내밀면서 에일리언은 무언가를 바라는 눈치였다. 에일리언의 키가 너무 커서 눈을 쳐다볼 수 없었으므로, 니트는 그냥 배에다 대고 말하기로 했다.
-나를 삼켜줘. 현실이 아니라면.
하지만 에일리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넌, 에일리언에게 삼켜지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잖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겠지.
-아니야. 널 없앨 수 있다면 에일리언 같은 무서운 녀석에게 잡아먹혀도 상관없어.
-그렇지, 여긴 상상만을 취급하는 공간이니까. 여기서는 어떤 괴물도 튀어나올 수 있지. 바로 니트, 네가 상상하는 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의외로 강하지. 그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인간은 양날의 검과 같아. 존재를 믿는 ‘육체’와 ‘자아’가 원심 분리기 속에서 분리된 것처럼 따로따로 나누어져 버리면 무뎌진 칼날이 되지. 이상과 현실이 흔들리는 거야. 인간으로서 있을 수 있는 근거가 흔들려 버리는 거야. 기억의 동물은 바로 그런 균열을 통째로 집어삼켜버리는 놈이지. 멋진 놈이야. 제법 눈치가 있어. 밥값은 하는 동물이라구.
니트는 자신의 머릿속을 마리가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마리는 끝없이 어떤 질문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답을 내기도 전에 또 질문을 내 놓았다. 계속, 끊임없이 마리는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마리의 계속되는 질문에 니트는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두렵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연하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그 무언가를 감당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블랙홀 같이 니트를 빨아들인다. 니트는 안간힘을 쓰면서도 버텨낼 수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니트는 항상 보통의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리가 다가왔다.
-머리는 좀 맑아 졌니.
니트는 관심 없다는 듯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마리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니트는 생각했다. 마리는 니트 그 자체. 마리의 사고는 니트의 사고 그 자체. 그러므로 니트 자신과 마리는 동일 인물. 니트가 이런 결론을 낼 즈음, 니트는 어느새 공원 앞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웬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이 동네에는 무슨 일이세요, 라고 물어보려다가 니트는 그냥 여자로부터 좀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해 볼 요량이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할까.
사소한 것들 하나도 니트는 결정해야 했다. 그 전까지는 마리가 알아서 해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마리가 자신의 몸 전체를 지배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니트가 몸의 변화를 알게 된 시점부터, 이계의 사람이 되어갔다. 지구인이 아닌 외계인. 왜, 이 넓은 우주에 널린 생물 중에 왜 하필 나냐고, 마리에게 따졌다. 마리는 눈을 살며시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하지. 너는 아직 행복을 모르는 구나.
니트는 가슴에 통증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니트는 약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의사는 정신과 의사라더니, 내과 약을 처방해 준 것일까. 죽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니트는 언젠가 찾아올 죽음에 대하여 ‘나’를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아’를 남겨두는 것이 아닌, 완전한 의미로서의 ‘나’를 남겨 두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니트가 스스로 앓고 있다고 생각한 병은 죽음의 산물에 대한 것이었다. 죽으면 무엇이 남는 것인지 니트는 그것을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니트는 그것을 볼 수 없었고, 한 몸에 사는 마리조차 그것은 불가능했다. 마리는 절대자가 아니었다. 그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 같은 존재였다. 니트가 토양이라면 마리는 토양을 기반으로 자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니트는 마리를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그것은 한 몸에서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수 밖에 없는 ‘사고’와 ‘육체’가 서로 다투면 진정한 의미로서의 ‘나’는 없을 거라는 것을 니트는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네가 싫어. 꺼져버려.
-너나 나나 둘 중 하나가 없는데 그것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아’가 없어도 ‘사고’가 있다면 살 수 있어.
니트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그것은 아니라는 듯한 느낌이 밀려왔지만, 니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마리는 그 위에서 니트가 생각한 것을 막아섰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인간이 아니게 될 걸. 인간은 육체와 사고할 능력, 그리고 자아를 갖추어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너는 지금 자아를 없애려고 하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는 모르고 있어. 방아쇠를 당겨, 그리고 쏴봐. 그 끝엔 뭐가 있을지. 한없는 자유가 기다릴까? 나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쾌감. 착각 하지마. 나는 절대자가 아니야. 네가 멋대로 지어낸 허상(虛像)이야. 네가 만들어낸 거라고. 네 사고의 어둠이. 나는 데 사고 안에 있지 결코 밖에 있지 않아. 당겨, 그리고 쏴. 부숴버리는 거야. 네 사고의 틀을.
-하지만 그것은 무척 단단하지.
니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니트는 이제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구의 표면에 서서 마리를 향해 마지막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했다.
-깨지지 않을 거야. 대신 구멍이 나겠지. 그리고 전원이 TV처럼 검은 것만이 머릿속을 채우면서 사라지는 거야. 나로부터, 지구로부터 우주로부터. 자, 마리. 너는 언제나처럼 나를 조여 왔어.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니?
사고, 자아, 나, 자신, 나, 너, 우리. 수많은 인간을 이어주는 끈들 중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사고하고, 자아를 말하며, 나를 나로써 있게 해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 니트는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가 죽음으로써 니트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 같은 것이다. 영원히 달려갈 수밖에 없는. 제어할 수 없는 것 말이다.
-나를 없앤다면, 너는 분명 어둠속에서 헤매게 되겠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어. 네가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나 또한 너를 죽이려고 마음먹을 거야.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므로 어느 한 쪽이 죽으면 다른 한 쪽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지. 그러니 나는 너를 죽이겠어.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니트는 말했다. 니트에게 있어 마리의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힘으로써 마리를 눌러버려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만들면 의지는 자신의 것이 되고, 완전한 나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흥, 그런 어설픈 협박은 통하지 않아. 너를 없애는 것으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어. 난 그렇게 믿고 있어. 넌 나에게 암적인 존재야. 점점 커져가며 내 머릿속을 지배하려 들지. 더 커져서 완전히 내 머릿속을 지배해버리기 전에 없앨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서서히 니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머리에 겨누어진 총구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아쇠가 당겨질 타이밍이 가까워 올수록 손의 떨림은 더욱 더 심해졌다. 니트는 긴장하고 있었다.
「탁.」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공기를 찢으며 말아가는 총알도, 매개한 연기도 없었다.
기억의 동물이었다.(*)
나비는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마리는 고민하면서 다시 종이를 구겼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기분을 대신한다. 아침부터 줄곧 그랬다. 그녀가 처음 나비 접기를 시작한 후부터. 그렇지만 손끝에서 나비가 태어날 때 마리는 희열을 느꼈다.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어설 수 없는 자신에 비해, 날아다니는 나비는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내면, 마치 신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무지 어쩔 수 없던 겨울날, 마리는 사고를 당했다. 흔히 당한다는 교통사고였다. 마리가 사고를 당한 날, 그녀는 아버지의 면회를 위해 가던 중이었다. 그 때, 어머니는 식당에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은 공부하러 학교에 있었다. 둘씩이나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어머니의 방문 횟수는 자연히 줄어들었다.
「마리야, 미안하구나.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해서.」
어머니의 모습은 추락하는 나비처럼 힘이 없었다. 그리고 먼지를 뒤집어써서 색이 바란 모습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말은 나비처럼 굴곡을 그리며 마리의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 빗속에 마리의 마음이 섞여 들어가 옹달샘을 만들었다. 마리는 수차례 옹달샘을 마주했을 터였다. 그녀는 어머니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리는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내어 달인이 되어서 TV에 출연한다거나, 아주 유명해져서 잡지에 실리는, 그런 경우와는 거리가 멀었다. 분명,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그것을 다른 쪽에 관심을 쏟으며 애써 외면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최고로 잘 할 수 있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나비를 곱게 접어내고, 그녀가 좋아하는 파란색 파스텔 색으로 덧칠을 하면, 정말로 이 나비가 실존하는 듯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비가 천 마리가 되는 날, 나을 거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왔나. 누나가 내 얼굴 까먹을 정도로.」
남동생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마리에게는 점점 엷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뚜렷하게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데, 가족이라는 것도 떨어져 있으면 소용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늘어갔다.
「오늘, 기말고사에서 1등 했어. 조금만 더하면 일류대도 꿈이 아니야.」
착하네, 우리 동생. 누나 대신 이렇게 공부도 잘 하고. 큰 일없이 잘 자라서. 그거 하나만으로도 나는 정말 기뻐.
「말하는 게 엄마 같잖아. 아버지도 그렇고, 누나도 그런데. 나라도 잘 해야 집이 잘 굴러가지 않겠어?」
타인처럼, 이젠 조금씩 거리를 달리해가는 동생이 느껴졌다. 두 다리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낼까, 라고 마리는 생각했다. 뜻밖의 사고만 아니었다면, 분명 마리는 지금 취업을 해서 여느 사람들처럼 월급을 받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꿈 꿀 나이였다. 동생은 마리가 접어놓은 나비를 보더니, 하나만 갖게 해 달라고 말했다. 마리는 안 된다고 말했다. 생각보다도 말이 먼저 나와 버렸다.
「안 돼! 가져가지 마!」
동생은 그런 마리의 모습에 당황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누나가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마리의 그런 모습은 계속되었다. 동생은 그런 누나가 부담스러워졌다. 자신만의 일상을 지키고 싶었다. 하나밖에 없는 누나지만, 어머니가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동생과 다투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마리를 찾아왔다. 어머니는 또 다시 축 늘어진 날개를 달고 나타났다. 더듬이도 더 이상 생생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측은해 보였다. 아버지는 어때, 라고 마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의 표정은 사뭇 밝아 보였다. 지쳤지만 힘내서 살아야지, 라는 슬픔이 묻어나는 밝은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패댔으니 벌이야 받아야겠다만 그래도 너무 한 것 아닌 가 싶다, 라고 말끝을 흐렸다. 아버지가 들어 간지 벌써 3년째였다. 총 5년을 교도소에 있어야 하니까 이제 반을 조금 넘게 채운 셈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했다. 개인 사업이 그렇듯, 간간히 회사 사정이 좋아지지 않아서 파산하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서 근근이 유지해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마리의 아버지는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도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 파산해 버리고 말았다. TV드라마에 어쩌다가 등장하는, 부자였다가 순식간에 가난뱅이로 전락해버리는 그런 케이스가 아니어서 마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종이접기 따위는 당장에 치워버렸을 테니까, 라고 마리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철강 제품을 만들어서 대기업에 납품하거나, 해외로 수출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IMF사태가 터지기 전, 거품 경제가 한창 절정기였을 때, 아버지는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무언가 큰 꿈을 위해 노력해보자며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철강 제품이었다. 아버지는 공대 출신이었으므로, 당연히 그쪽에 대해 잘 알았다. 하지만, 사업 수완은 그리 능숙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들 경기가 좋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1997년. 아버지는 회사를 창건하고 자신의 인맥에 있는 후배와 친구, 지인들을 불러 모았다. IMF가 터지자, 그들은 빠지는 거품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잔거품이 남은 하수구처럼, 아버지의 옷은 초라해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채업자들이 하나 둘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꼭 갚겠다고, 흥분한 상태에서 들으면 당연히 옳은 말도 안 먹힐 말을 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버지의 양복을 잡고 흔들었다. 손에 잡혀 구겨지고 찢어진 양복처럼, 아버지는 그런 나날을 보냈다. 이번에는 옷 대신 몸이 수척해져갔다. 그런 날들에, 한 남자가 맛없는 양념처럼 끼어들었다. 아버지가 먼저 쳤든 그 남자가 먼저 쳤든, 마리에게는 그 남자가 무척 나쁜 사람이었다. 악당이고, 증오의 대상이었다. 마리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밀려오는 화를 감당해내고 있을 때, 담당 간호사가 들어왔다.
「자, 팔 좀 들어보시겠어요? 열 좀 재보게요.」
마리는 시키는 대로 팔을 들어 올렸다. 겨드랑이에 난 땀 때문에 그 주변의 옷이 젖어 있었다. 그녀는 간호사에게 치부를 들킨 것 같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병실이 덥거나 하면 절 불러요. 제가 조절해 줄 테니까요.」
마리가 이 병실에서 생활한지도 2년이 다 되어갔다. 아버지가 폭행치사혐의로 징역살이를 갓 시작했을 때였다. 아빠나 저나, 똑같이 갇혀버렸네요. 곤충도감에 있는 것 같이. 핀에 박혀있는 곤충들처럼 아빠나 저나 갇혀서 나가지 못하잖아요.
마리는 갑자기 옆에 있던 얇은 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팔목의 눈에 띄는 곳을 골라 찔렀다 뺐다. 붉은 색의 피가 나왔다. 얇은 핀으로 찔렀을 뿐인데도 피가 많이 나왔다. 따가움은 잊었다. 마리에게는 현실의 고통을 대신해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나비가 살아 움직이는 것.
유난히 나비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비라는 생물이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분명 자신의 근처에 무언가 날아들어도 정색을 하며 손을 휘젓던 그녀였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단순히 마리의 눈에 먼저 띄어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는 마리 자신도 몰랐다.
4시가 되자, 재활센터에서 사람이 나왔다. 물리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하는 그런 재활이었다. 어깨에 걸칠만한 평행봉을 붙잡고 걷기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재활프로그램에 마리는 벌써부터 의욕을 잃었다.
「젊은 나이에 벌써 그러면 어떡해. 힘내야지. 얼른 나아서 예쁜 옷도 고르고 남자도 만나고.」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물론 웃자고 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마리는 그 말을 받아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이 짧고도 긴 평행봉을 얼마나 왔다 갔다 해야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졌다. 모든 의욕을 사라지게 만드는 무서운 마법 같은 것이었다.
그날, 마리는 꿈속에서 걷는 꿈을 꾸었다. 그저 평범히 길을 걷는 꿈이었다. 그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가는 차도, 같은 보도를 걷는 사람들도. 가로등도. 그렇지만 길이 보였다. 어스름이었다.
꿈에서 깨고, 다시 꿈속의 어스름을 떠올렸을 때, 마리는 왠지 친구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점점 즐거움이 사라져가는 자신, 웃음이 사라져 가는 자신. 언젠가는 슬픔에 화가나 울고, 짜증을 내는 그런 여자가 될 지도 모르는, 그런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정말, 네가 하는 일은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
「하지만 종이로 만든 나비는 날 수 없어. 넌 종이로 만들어졌잖아.」
꿈속이든 현실이든, 마리와 친한 것은 오직 종이 나비뿐이었다. 손에 올려놓고서 비뚤어진 부분이나, 잘못 접힌 부분이 있으면 깔끔하게 다시 접어주었다. 그러자 나비는 하나하나 생명을 얻어갔다.
「언젠가 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오랜만에 찾아온 엄마에게 마리는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마리의 그 말이 마치 죽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들렸는지, 그런 말 하지 말라며 마리를 나무랐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마리는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엄마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고 받아쳤다.
밖은 바람이 세게 부는 모양이었다. 바람이 강렬하게 떨고 있는 소리가 창 너머 마리에게까지 들렸다. 바람의 기세에 눌려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마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천장을, 엄마는 두 손으로 마리의 손을 꼭 잡고 마리를 바라보았다.
「엄마, 나비의 집은 어디일까? 요즘 생각하는 건데 무척 궁금해져서.」
「글쎄, 꽃이 아닐까?」
마리는 무척 궁금했다. 자신이 나비라면, 어디 살까를 생각했다. 그녀는 나비가 보통은 꽃의 근처에서 많이 발견되니까, 아마도 나비의 집은 꽃일 거라고 엄마는 생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먼 곳에서 오는 건 아닐까. 얇은 날개니까 바람을 타고. 래프팅을 하듯이. 양 날개를 휘저어서 먼 거리를 흘러오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천 번째 나비를 다 접었을 때, 몸이 전부 나아 나비의 집을 찾아서 떠날 거라고 마리는 결심했다. 분명, 그 때 몸은 다 나을 거라고.
「그러려면 운동을 해야 해요. 아직은 무립니다.」
재활치료사가 말했다.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웠던 말의 결과가 ‘역시’로 판명 났지만, 마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바람만은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바람의 집이 또한 어디인지 마리는 알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때에 오는 편지처럼, 갑자기 오는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 해요.」
재활 치료사는 며칠이고 똑같은 말을 했다. 당연히, 걷기 위해서는 재활을 해야 한다는 것쯤은 마리도 알고 있었다. 재활치료사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전 애가 아니에요. 휠체어도 있고, 차가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잖아요. 그게 현대 과학의 힘이 아닌가요? 무엇이든 하려고 하면 할 수 있게 만드는 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그녀는 다시 집어 삼켰다. 말해버리면, 나비도, 바람도 영영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결코 혼자 나갈 수 없는 마리에게, 바람을 만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주말에, 마리는 엄마에게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어디선가 휠체어를 들고 와서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리를 휠체어에 태웠다. 그리고는 입원실을 빠져나갔다. 병원 복도는 꽤 길었다. 활주로 같았다. 빛이 쏟아지는 병원 입구에서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일어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엄마는 전의 그 사건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사고를 당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리의 신경은 온통 곤두서 있어서 누군가 다가기라도 하면 최후의 방어를 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고 그 때마다 침대에서 떨어져 상체를 다치거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열병을 앓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휠체어를 타고 나가는데 주저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을까.
-바람이 분다!
마리는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았다. 오래전, 흔하고 흔해서 그냥 ‘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예쁘게 보였다. 바람은 코스모스를 돋보이게 해주는 조명 같았다. 그 바람이 나를 돋보이게 해 주었으면, 하고 마리는 진심으로 바랐다.
「마리야! 왜 이래! 아직 일어나면 안 돼!」
정신을 차려보니 마리의 양 손은 휠체어 바퀴의 손잡이 부분에 가 있었다. 무게가 온통 그곳에 집중되자 바퀴가 굴러가 마리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번엔 다행히 왼쪽 팔꿈치가 까지는 것으로 끝났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젊은 여자가 이래서야 되겠냐고 의사는 나무랐다. 얼굴에는 잔뜩, 주목받지 못해 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 의사도 꿈이 있으니까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거고-문제를 일으키면 자기가 불리하게 되니까-나는 내 꿈이 있으니까 일어선 거라고, 마리는 생각했다.
「정신과 치료를 병행해야 할 듯싶습니다. 아, 그렇다고 마리 씨가 무슨 심각한 병이 있다는 건 아니고, 현재로써는 물리적인 치료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치료도 같이 병행해야 마리 씨의 상태가 호전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의사는 조심스러운 듯, 그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 옆의 간호사는 ‘그저 그런 거’라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카르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는 자기 스스로 치료를 시작했어요.」
엄마는 마리가 접어놓은 나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는 어처구니없는 의사의 발언을 이 한마디로 눌렀다고 생각했다.
「본인은 어떠시죠? 치료를 병행해서 몸 상태가 빨리 호전되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의사의 말은 유혹이었다. 달콤한, 사고 전의 맛있는 케이크를 먹을 때 들었던 행복한 느낌의 유혹. 마리는 침대에 앉은 채로 생리를 하고, 감기를 앓고, 기침을 해서 침대가 흔들리는 게 싫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것은 간호사를 통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엄마는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마리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일어설 수 있다는 욕망에 한 발 더 근접한 것이 좋았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엄마는 차마 욕을 하지 못하고 분을 삭이고 있었다.
「마리야, 우리 병원 옮기자. 처음부터 이 병원 마음에 안 들었어. 동생도 싫다 그러잖니.」
-바람을 만나고 싶어. 만나서 나비의 집이 어딘지 물어보고 싶어.
「엄마, 나 밖에 나가고 싶어요.」
엄마는 넌 화도 안 나니 널 정신병자처럼 취급하잖아, 라는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코스모스는 흔들리고 있지 않았다. 마치 인디안 섬머처럼 부드러운 날씨였다. 분홍색 코스모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가을이니까, 나비가 있을 리가 없잖니.」
엄마는 투정을 하면서도 간호사를 부르러 입원실을 나섰다. 활주로를 벗어난 바깥 공간은 아름다웠다. 아빠도 느끼고 있을까? 밖으로 나간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일 거라는 걸. 마리는 멈춰 있는 코스모스를 보면서, 아빠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교도소에 있는 아빠에게도 인디안 섬머는 있을 터였다. 그 따스한 느낌을 아빠도 받고 있겠지.
마리는 가지고 온 종이를 가지고 나비를 접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아빠, 엄마, 동생. 나. 엄마의 손은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인디안 섬머따위로는 엄마의 거칠어진 손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비만이, 그 멋진 날개로 엄마 손을 포근하게 감싸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환자 면회 시간이 끝나고, 마리는 다시 침대에 누워 깜깜한 어둠속에 몸을 숨겼다. 마리는 머리맡에 있는 나비를 접어 넣은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이미 상당한 양의 나비가 잠들어 있었다. 마리는, 그 나비들이 날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나비가 되어서 날아갈 거라 다짐했다.
「안녕. 나비들아. 너희는 정말로 나비가 되어서 날아가고 싶은 것 같아.」
마리는 옆 칸의 환자가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하늘에 보이는 별 보다도 작았다.
복도에,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심해(深海)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마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힘을 들여 침대를 내려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삐그덕 거리는 문을 열 때는 정말 심장이 터질뻔한 느낌을 받았던 마리였다. 문 앞을 열면 바로 보이는 복도를 가다 보면 옥상으로 가는 계단이 보인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긴 활주로를 떠나면 무엇이 보일까를 생각하며 마리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도 잊었다. 어서 가지 않으면 간호사나 당직 의사에게 걸려버릴 거야. 그러면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못하게 되겠지.
마리는 있는 힘껏, 왼손, 오른손 기합을 넣었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은 정말 높았다. 더구나 유리병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기에 소리가 나는 것도, 잘못 놓아서 유리가 깨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했다.
겨우 옥상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가면 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위로로 삼으며 마리는 있는 힘껏 가기 시작했다. 하얀색 환자복은 이미 밤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마리는 그동안 참아왔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나비들이 들어 있는 유리병도 무사했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멈춰요! 뭐하는 거야 지금!」
당직 의사가 달려왔다. 결국 알게 될 것이었기에 마리는 담담하게 대했다. 당신 미친 거야? 정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겠냐고. 의사는 씩씩 거리는 숨을 토해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엄마의 손과는 달랐다.
「가까이 오지 마! 내 나비들을 건드리지 마!」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이 의사에게 정말로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비춰질지라도 상관 없었다. 마리는 나비들의 집을 찾아주고 싶었다. 나비들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안고, 한 손으로 난간을 잡았다.
강한 힘이 마리의 손을 움켜잡았다.
의사였다. 어느새 달려온 간호사도 있었다. 간호사는 카르테를 들고 있었다. 아마도 마리의 것일 게 분명했다. 간호사는 놀란 표정으로 그만 두라고 말했고, 의사는 마리의 팔을 움켜잡고 절대 놓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힘을 불어넣었다. 팔 끝이 아려왔다. 피가 통하지 않는지, 따끔따끔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리는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 날고 싶은 마지막 몸부림인지도 몰랐다. 휠체어를 타고서는 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유리조각이 사방에 퍼졌다. 나비들도 사방에 퍼졌다.
유리병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마리는 몸부림을 치다가 유리병을 건드려버렸다.
의사는 팔을 움켜잡고 계속 ‘정신병자’를 읊어댔다.
날고 싶은 자신을 막는 의사가 미웠다.
자신 몸을 자신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이 괴로웠다.
간호사는 흔들림 없이 계속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나비의 집은 어디일까. 그건 아마 바람이 가르쳐 줄 거라고 언제부터인가 마리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이미 바람은 나비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인디안 섬머의 밤이, 마리에게는 따끔거리는 유리조각으로 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