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에 대하여(대상 4:9~10)
여러분들은 기독교 백화점이나 어떤 가정 혹은 어떤 기독교인의 사업체 벽면에 역대상 4:9, 10절, 소위 ‘야베스의 기도’인 “주께서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하여금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는 구절이 적힌 표구나 액자를 더러 보셨을 것이다. 한국 사람은 워낙 복을 좋아해서 그런지 야베스의 기도와 그 응답에 대하여 상당히 호감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도와 응답에 대한 야베스의 간증을 성경에서 처음 접한 필자는 상당히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야베스의 기도는 그리스도인 일반이 거의 입버릇처럼 하는 기도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복을 달라는 내용이나,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나, 환난이나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는 일상의 식사기도 때에도 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은 없다. 유다의 족보를 나열하다가 뜬금없이 야베스를 부각시키면서 별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의 기도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거기다가 “그는 그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라”고 까지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기도와 응답이 마치 평범치 않은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데다가, 나아가 결코 존귀한 자처럼 보이지 않는 자를 존귀한 자로 일컫고 있기 때문에 의문은 더 증폭되었다. 이런 의문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야베스의 기도와 응답을 설교하지만, 그리고 책을 냈지만 정작 필자의 의문을 극복하는 수준을 결코 넘어서는 설교나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야베스의 기도와 응답, 그리고 야베스라는 인물의 출생은 상징성 있게 조명되어야 이해가 가능함을 그로부터 오랜 후에나 깨달았다. 야베스의 기도는 바로 이런 이해에 기초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이해의 기초 없는 해석이 본문에 대한 평범한 시각을 갖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럼 바른 이해의 시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 혹은 모형론적 관점에서 본문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대기기자가 왜 그런 기록을 했는지 의문을 가지고 본문에 어프로치 한다면 좀 더 쉬운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 해석은 반드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는 해석학적 기초에 대한 주장은 백번 지당한 것이다.
본문을 좀 더 유의미하게 읽어보면 그의 출생 이력에 관한 내용이 ‘야베스’라는 이름에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야베스는 그 어미가 난산을 통해 그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어떤 이유로 그가 난산이 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렵게 얻은 자식임은 아마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역대기기자는 야베스의 출생부터 예사롭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장차 여자로부터 나오게 될 후손, 즉 용이 여자가 낳은 아이를 집어 삼키려는 계시록의 내용과도 연결해볼 수 있다. 또한 아이를 낳자마자 헤롯의 보복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마리아와 요셉의 어려움과도 관련지을 수 있다. 시편 2편처럼 메시야의 반대세력에 의해 그리스도가 고난 중에 탄생하게 될 것에 대한 예시와 관련이 있다. 이처럼 야베스의 출생의 이력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출생을 역대기 기자는 암시하고 있다.
야베스는 출생 이력도 이력이거니와 그 형제 중에서도 존귀한 자로 칭함을 받는다는 점에서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유다지파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 다윗이다. 다윗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야베스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로 일컬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형제’가 단지 야베스의 형제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혹은 유다지파의 모든 남자들을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긴 하다. 그럼에도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라는 문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의 존귀함에 대한 암시를 읽어낼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야베스가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성의 인물로 인정된다면 평범한 기도라고 생각했던 야베스의 기도 내용조차도 메시야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아이디어가 그릇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확신시켜주는 것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기도와 그에 대한 응답의 본문 자체이다. 소위 별 볼일 없는 사건을 심도 있게 짚고 넘어간 의도를 발견하는 것에는 이런 해석의 방법을 적용하는 외에는 달리 만족할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베스의 기도와 응답에 대한 이런 해석학적 가설은 결코 무리한 추측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신뢰할만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을 접근하면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가 평범하다고 느끼는 것을 단번에 초극(超克)할 수 있게 된다. 필자가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야베스의 기도와 그 응답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야베스의 기도는 결코 일신상의 지복(至福)만을 간구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인 간구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야베스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이렇다.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라고 하고 있다. 타 국가, 타민족도 다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유달리 한국인은 복(福)에 집착한다. 그래서 “복 받으라”는 설교는 우리나라 부흥강사들의 전매특허다. 거기다가 야베스는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자식들이 번영하여 출세하는 기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개인의 지복에 초점을 두어 설교하고, 청중은 청중대로 본문을 복을 받게 하는 기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야베스의 기도’하면 온통 잘 먹고 평안하고, 사업도 번창하고, 자식들도 출세하는 것에만 이해가 집중되어 있다. 바로 그런 생각이 가정마다 문지방에 ‘야베스의 기도’라는 액자를 걸게 만들고, 사업체의 벽면에 표구를 걸어놓게 만든 것이다.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는 이런 기복적 효력이 모두 바닥나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복신앙인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면서 한 동안 교회는 정체기를 맞게 된다.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개인주의 난립이다. 기복주의, 기복신앙은 철저히 개인주의이며,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정신을 파괴하는 악마적 속성이다. 한국교회가 기복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 유례 없는 성장이 가능할 수 있었으며, 이런 기조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의 몰락 또한 기복신앙인들의 대거 교회 이탈로 빚어질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를 가업의 번창이나 출세와 상관없는 방면에서 이해를 하되,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확장을 간구하는 암시라고 이해해야 한다. 야베스의 이런 기도가 단순히 본인의 사업 확장이나 출세 등을 간구하는 구절로만 읽혀진다면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본문을 당신을 위한 기복적 측면이나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필자의 은사이신 김두석 교수님은 언약신학자이자 구약신학자이신데, 그는 이 부분을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p, 251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땅의 지경을 넓혀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는 단순히 세속적인 번영과 풍요를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메시야의 강림과 더불어 이 땅에 풍성히 임하게 되기를 청원하는 메시야적 간구의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같은 책에서 야베스를 그리스도의 모형론적 인물에 위치시키고 있다.
야베스가 그리스도의 예표성을 가진 인물로 첫 번째 간구가 해석되었다면, 두 번째 간구도 그렇게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야베스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하고 있는데, 이도 역시 개인의 심적인 평안만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사건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 드리는 한 인간으로서의 심적인 두려움과 절규가 들어 있는 간구인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겟세마네 기도의 예표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얼마나 두려웠으면 세 번씩이나 이런 기도를 올렸겠는가. 이런 간구를 하나님이 응낙하셔서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야베스의 기도’는 설교학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설교, 혹은 모범설교에 초점을 맞추려는 유혹을 쉽게 받는다. 이유는 첫째,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설교를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개인의 강녕과 지복에 맞춘 설교는 청중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야베스처럼 기도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데 싫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설교해야 하는 내용이 아님을 역대기 기자가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설교자라면 더욱 더 그리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복의 근원이시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가 주시는 복 가운데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그는 복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인색하다는데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들 중에 가장 큰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복이다. 그 복이 전제되어야 물질, 명예, 건강, 장수 등의 복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이 없는 부차적인 것들은 오히려 그것 자체로는 해악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부차적인 것을 원초적인 위치에 두려는 신자들도 많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야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야베스의 기도를 마치 복 받는 기도의 원칙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속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에 방향 지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은 어떤 복도 있을 수 없다. 야베스의 기도를 복 받는 비결처럼 설교하고 또 책을 내는 사람들의 저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