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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물질과 생명의 교통
<고린도전서 16:1-9>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빌립보서 4:10~20>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오늘은 '연보'에 관한 말씀이다. '물질과 생명의 교'통에 대해 말씀 드리겠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헌금을 잘하라는 이야기다. 헌금이 잘 되시는 분은 좀 졸아도 괜찮고, 헌금은 하고 싶은데 잘 안되는 분들은 똑똑히 들으셔야 된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교회 건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대부분 영적인 생활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부활을 말하고, 그 다음에 이 연보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적인 것을 다 이야기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물질적인 것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교회 건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영적인 것만 가지고 교회가 건축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가 마음만 가지고 무엇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마음이 있으면 어떤 현실적인 표현이 있어야 되고,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결국 이 현실적인 문제에 와서 마지막 결론이 나게 되고, 거기서 결산이 되게 된다. 우리가 영적인 삶에서 교회 건축 안으로 들어왔으면 현실적으로 몸으로 봉사한다. 마찬가지로 물질로도 그것이 표현되어야 교회가 온전하게 건축되지 몸도 없고 물질도 없다면 생각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 물질에 대한 말씀을 했다.
'연보(捐補)'라는 말은 원문에는 모은다는 뜻이다. 모금한다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서 연보라고 번역을 했다. 연은 기금을 출연한다고 할 때의 捐이고 이 글자가 버린다, 덜어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補자는 보할 補자인데 덜어내서 보한다는 뜻이다. 즉 내 것을 덜어내서 다른 사람을 보한다는 뜻이다.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로는 Collection이므로 모금이다. 돈을 모아야 뭔가를 하고 누구를 도울 것이니까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가 궁핍에 처해있어서 그것을 돕기 위해서 모금을 할 것인데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의 말씀은 그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한 것이다.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 큰 기쁨과 위로가 된 것이다. 나를 제일 기쁘게 하는 것은 물론 생명이 태어날 때 제일 기쁘지만, 그 다음으로 기쁜 것은 생명이 성숙하여 자기를 헌신하고 드릴 때 그때 결실을 보게 되기 때문에 기쁘다. 여러분이 나에게 헌금 좋아한다고 하는데 사실 헌금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헌금은 열매이고,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그러니까 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 쓰여지기에 따라서 그 돈이 잘 쓰여지면 참 좋은 것이고, 잘못 쓰여지면 욕이 된다. 요즘 BBK니, 비자금이니 B자를 조심해야 된다. 다 돈 때문이다.
교회 건축과 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떼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질은 반드시 부활 생명으로 통제되어야 된다. 그래서 부활 다음에 연보에 관한 말을 했다. 육신의 생명으로는 이 돈을 통제할 수가 없다. 부활 생명만이 하나님께 유용하도록 통제할 수가 있다. 우리 몸은 물질이다. 돈도 물질이다. 사실은 몸은 살아있는 물질이고, 돈은 죽어있는 물질일 뿐이다. 둘 다 성질이 같아서 짝짝꿍이 잘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적인 사람은 물질을 통제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물질에게 경배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왜냐하면 내 몸이 물질이니까 물질이라는 것은 몸에 필요하다. 하나님에게는 사실 물질이 필요 없다. 우리 인간들이 모여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물질이 필요한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무슨 물질이 필요하겠는가? 밥이 왜 필요한가? 육신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육신이 아니면 밥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에게 밥을 드려야 되겠는가? 귀신들에게 밥 드린다고 밥을 차려놓았는데 귀신이 육신이 있어야 밥을 먹을 것 아니겠는가. 사람의 생각이다. 옛날 사람들은 제사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조상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조상은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리화되다 보니까 심지어 집에 불이 났는데 어른도 있고 애기도 있을 것인데 애기를 먼저 꺼내기 보다는 신주를 먼저 꺼낸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제사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교리가 되었다. 알고 보면 그것이 헛일이고 마음인데 귀신도 몸이 없으니까 귀신에게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마음만 갖고 안된다. 배고픔 사람에게는 마음만 갖고는 안된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이라도 하나 주어야지 배고픈 사람에게 괜히 안됐다거나 배가 얼마나 고프냐거나 배고플 때 힘들지라는 소리만 하고 있으면 더 배고픈 것이다. 아무 소용없다.
결국은 우리는 물질적인 몸이기 때문에 물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물질과 몸은 같은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몸이 물질을 통제할 수 없다. 아무리 통제하려고 해도 배가 고프면 어떡하겠는가? 사흘 굶고 담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왜 나왔는가? 굶으면 배가 고프니까 내가 물질을 통제할 수 없고, 먹어야 산다. 육신적인 인간에게 물질을 통제하라고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부활 생명 안에만 이 물질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 그래서 부활 후에 이 말씀이 나오게 된 것이다.
1. 물질에 대하여
1.1. 생명을 위해 있음
물질은 무엇인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물질은 생물을 위해서, 생물은 동물을 위해서, 동물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졌다.(창1장 참조) 그런데 왜 인간은 사람을 위할 수가 없었는가? 부활 생명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도록 지어졌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려면 부활 생명이라야 하나님을 위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나는 것, 부활 생명을 갖는 것은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죄를 져서 죄인이 되어 꼭 죽어야 되는 문제만이 아니고, 이 생명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된 생명이다. 부활 생명만이 물질을 통제할 수 있다.
1.2. 생명을 통하여 충만에 참여함
그리고 이 모든 물질들은 생명을 통하여 충만에 참여하게 된다. 물질 자체는 생명이 없다. 어떤 생명을 통해서 그 물질은 가치가 생기게 된다. 이것이 충만이다. 충만의 참여이다. 흙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식물을 통해서 충만에 참여한다. 식물을 보면 흙이 가치가 있다. 만일 식물이 없다면 흙은 아무 가치가 없다. 우리가 흙을 먹고 살겠는가? 식물은 흙을 먹고 살고, 사람은 식물을 먹고 사는 식이다.
생명을 통해야만 물질은 충만에 이르지 생명을 통하지 않고는 물질은 충만에 이를 수가 없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 돈이 충만에 이르러야 된다. 그러려면 온전한 생명 안에 잡힌 돈이라야 충만에 이르게 되지 잘못된 생명 안에 잡히게 되면 충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욕이 된다.
1.3. 물질은 생명에 종속됨으로 그 가치와 용도는 생명에 따름
물질은 생명에 종속히게끔 창조되었다. 그 가치와 용도는 생명에 달려있다. 타락한 인간과 함께 있을 때 그 물질은 악한 것이 된다. 모든 종교에서 물질은 악한 것처럼 이야기하였다. 또 특별히 그렇게 강조하는 종교도 있다. 영은 선한 것이고, 물질은 악한 것이라고 이원론적으로 한 종교도 있다. 기독교 안에도 그런 사상이 들어와 있다. 그래서 고행주의나 염세주의가 들어오게 되었다. 사람 때문에 악해진 것인데 물질 자체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은 빼놓고 마치 물질이 악한 것처럼 하였다. 마치 노름은 사람은 하고 화투짝 불태우는 것과 똑같다. 화투짝 때문에 내가 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화투짝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망한 것이다. 만일 물질을 악한 것이라고 한다면 화투짝이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타락한 인간과 함께 있을 때 물질은 악한 것이 된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된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탐심이 무엇인가? 물질에 대한 탐심이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된다.
회복된 인간, 다시 난 인간, 부활 생명 안에 있는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은 선한 것이 된다. 부활 생명의 통제 아래 있을 때 물질은 아주 고귀한 것이 된다. 생명의 어떠함만큼 물질은 고귀해진다. 똑같은 만원이지만 그 생명의 어떠함만큼 만원의 가치는 10배도 되고 20배도 되고 30배도 되고 100배도 된다. 이런 것을 수학으로 무엇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만원이 만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만원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서 헤아릴 수 없이 달라진다. 사람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부활 생명의 통제력 아래 있는 물질은 최고로 고귀한 물질이 되는 것이다.
2. 물질과 생명
2.1. 창조된 생명과 물질(1차 생명)
창조된 생명과 물질의 관계를 보면, 창조된 생명은 1차 산업처럼 1차적인 생명이다. 이 1차 생명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으로는 쓸 수가 없다. 금광석을 캐놓으면 그 안에는 분명 금이 들었지만 그대로는 쓸 수가 없다. 금광석 하나를 누가 갖다놓았다면 돌덩어리다. 반짝반짝 금이 박혀있지만 그대로는 금을 쓸 수가 없다. 다른 돌멩이보다 더 좋은 돌멩이가 아니다. 1차적인 생명은 바로 금광석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분명히 거기에는 좋은 요소가 들어있지만 그것은 제련을 해야 된다. 제련을 해서 금을 금대로 뽑아야 쓸모가 있지 그대로는 쓸모가 없다.
1차적 생명은 단지 생존하는 생명이다. 생존에만 필요하다. 그리고 물질 역시 1차적 생명에는 생존에 필요한 것이다. 먹고 입고 살기에 필요한 것이다. 잘 먹고 잘살자는 것이다. 세상 말은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합해놓으면 잘 먹고 잘살자는 말이다. 우리 동화 끝에 보면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Happy Ending을 미국사람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잘 먹고 잘 살았다로 표현했다. 그것이 더 맞고 원색적이다. 노는 것은 그 다음 일이고,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으로 먹지 못하면 어떻게 놀겠는가.
창조된 생명은 물질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단지 생존과 관계를 갖고 있다.
2.2. 타락한 생명과 물질(변질된 생명)
타락한 생명과 물질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것은 아주 형편이 달라지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그 물질은 생존에 필요하도록 창조가 되었는데, 사람이 타락하고 보니까 이 물질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욕망의 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이 더 많이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만들어내려고 하게 되었다. 물질이 사람을 대표하게 되었다. 물질 뒤에 숨는 것이 쉽게 말하면 지금의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의 목표는 돈이니까 사람 뒤에 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돈 뒤에 사람이 있다. 돈이 그 사람을 규정하고, 돈이 그 사람을 좌우한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해주니까 돈을 갖고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끝없이 욕망을 부채질하고 더 가지려고 더 가지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돈이라는 것은 일정한 수준 이상이 되면 자기 것이 아니다. 내가 배고플 때 주머니에서 꺼내 쓰는 돈은 완전히 내 것이다. 누구의 통제도 받을 필요도 없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돈이 많아지면 내 마음대로 못쓰는 것이 돈이다. 예를 들면 내가 돈을 많이 벌어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다가 걸린 것이다. 내가 번 것을 왜 못주느냐고 하겠지만 이 사회가 그냥 두지 않는다. 왜 그 돈을 아들에게 주느냐고 말한다. 그러니까 일정한 수준 이상이 되면 자기 것이 아니고, 관리인에 불과하게 된다. 이병철씨가 5.16이후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나서 한 말이 재산은 일정 범위를 넘어가면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래도 계속 한다. 타락한 생명은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극단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신하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돈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돈을 섬기게 되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대신 돈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재물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사람이 재물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지배 아래에 사람이 있다. 점점 자본주의가 될수록 재물의 지배하에 인간이 놓일 수밖에 없도록 계속 돌아가는 것이 자본주의다. 그러면 자본주의 그렇게 되니까 공산주의를 해야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공산주의는 권력과 이념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다. 차라리 돈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이 밥이라도 먹으니까 돈 안되는 이념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본주의가 지금 승리했는데 우리 북쪽의 형제간만 안되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다. 타락한 생명은 물질이 자기 하나님이 되고 만다.
2.3. 부활 생명과 물질(2차 생명)
부활 생명은 어떠한가? 부활 생명은 1차적 생명이 아니고 2차적 생명이다. 몸은 그대로인데 부활 생명이라고 해서 몸이 다른 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은 그대로인데 우리 안의 생명이 바꾸어졌다. 이 생명은 2차적인 생명이다. 아까 금광석에서 금을 추려내었듯이 금을 추려내느라고 뜨거운 연단을 받았다. 한 과정을 거쳐서 죽음을 거쳐서 다시 난 생명이니까 2차적인 생명이다.
1) 하나님의 행정을 위해 길을 가짐
이 2차적인 생명, 부활 생명 안에서는 하나님의 행정을 위한 길을 갖게 된다. 부활 생명이라고 해서 그냥 부활 생명이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 생명은 물질이 있어야 하나님의 행정을 위한 길을 만든다. 자동차가 가려면 도로가 있어야 하는데 이 도로를 만들어준다. 아무리 우리가 부활 생명을 가지고 있어도 길이 없다.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여비가 없다면 안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부활 생명을 가진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부활 생명 앞에 길을 놓아주어야 한다. 이것이 물질이다. 일본에 가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 안되는 것이다. 책을 만들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 방송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 뭘 하고 싶은데 다 돈이 없다면 부활 생명이라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부활 생명 안에서 물질은 하나님 행정을 수행하게 하는 길을 만들어준다. 누구든지 돈을 내면 그 돈으로 인해서 길을 닦아주니까 가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놓으니까 지금 우리가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옛날에 내가 처음 서울에 갔을 때는 경부고속도로가 없었다. 시장의 어물전에 가보면 서해안에서 나온 인천 앞바다에서 나온 종류의 고기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조기나 갈치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뚫리고 나니까 시장 상태가 완전히 달라진다. 부산에서도 물건이 올라온다. 길이 없으면 올라올 수가 없다. 길이 없으면 교통이 안된다. 예수님도 그때 만일 비행기가 있었다면 많이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때 당시는 겨우 겨우 걸어다니면서 예루살렘에 갔다가 갈리리 갔다가 하는 것을 두세번 하다가 돌아가셨다. 나보다 못하다. 나는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지구를 수없이 돌아 다녔다. 예수님은 길이 없어서 나보다 못 돌았다.
복음 전파를 위해 절실히 물질이 필요하다. 물질 없이 복음 전파가 불가능하다. 교회 교통을 위해 역시 물질이 필요하다. 우리가 집회를 하려면 교통이 되는데 집회를 하려면 집회 장소가 있어야 된다. 장소가 없으면 어디에서 하겠는가? 모두 전화만 하고 앉아있겠는가? 전화를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한다. 돈 없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전기 없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듯이 돈 없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돈이 중요하다. 그 나라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역시 필요하다.
우리가 그 나라를 보존하고 확보하고 후손에게 물려주려면 마음만 갖고 되는가? 마음만 갖고 안된다. 지금 중국어로 처음 책을 번역했는데 왜 이것을 번역했는가 하면 중국은 워낙 땅이 넓다보니 남쪽 사람 말을 북쪽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북쪽 사람 말을 남쪽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글자는 다 똑같아서 책을 만들어놓으면 다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말로 하면 남쪽 가서는 다른 말을 해야 되고, 북쪽 가서는 또 다른 말을 해야 된다. 모두 방언이 틀려서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도 제주만 가도 순 제주 토종들이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는다. 정말 영어도 못 알아듣지만 할머니 세분 정도 앉아서 일하면서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한참 들어보았지만 가끔 단어 하나 알아듣는 정도로 영어 알아듣는 것과 똑같다. 영어도 가끔 단어 하나는 들린다. 그런데 중국 땅덩어리는 너무 커서 알아듣지 못하므로 이런 문자를 가진 출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자막 방송을 하는 것도 통역을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나라를 확보하고 유지하려면 돈이 있어야 된다. 출판도 해야 되고 방송도 해야 되고 별 것에 다 필요하다. 예수님 시대에는 별로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돈을 쓸래야 쓸 곳이 없었다. 나도 처음에 시작할 때는 돈 쓸 곳이 없었다. CCC에 처음 오니까 학생들이 있는데 그전에는 활동을 많이 하는데 활동을 하려면 행사를 하려니까 돈이 있어야 된다. 나는 행사도 하지 않고 활동도 하지 않으니까 성경 말씀만 앉아서 전파하다 보니까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이 나사렛 형제들이라고 CCC 후원자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연보를 받아다가 학생들을 위한 행사(이벤트)를 하는데 자기들은 내가 당연히 그렇게 할 줄 알았을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말씀을 들으러 오지는 않고 그냥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은 내가 모임에 가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은혜를 받아서 은혜를 전하려고 왔는데 여러분이 만일 이 은혜에 같이 참여를 하면 여러분이 나에게 헌금을 주고 도와주면 감사하겠고, 그러나 만일 참여를 하지 않으면 내가 돈 받을 이유가 없다고 겁 없는 소리를 했다. 그랬더니 대구 사람들이 싫다는 소리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충주도 싫다는 소리를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다가 뒤에 가서 하는데 대구 사람들 역시 그렇다. 아무 말 하지 않아 잘 들은 줄 알았는데 한 푼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나대로 돈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손 벌릴 일이 없었다. 그래서 돈을 쓰지 않았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간사들이 오면 찬조금을 달라고 하는데 어쩌려고 저러나 했을 것이다. 어쩌려고가 아니라 나는 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돈이 필요가 없었다. 타고 다닐 차가 있는가? 비행기가 있는가? 그냥 걸어 다녀야 한다. 11호 자가용만 있으면 되니까 예수님도 돈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서 나라를 확보하고 보존하려면 돈이 없으면 안되게 되어있다. 그만큼 또 돈도 많아졌다.
부활 생명 안에서는 물질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한 길을 갖고 있다.
2)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할 때 세상을 이긴 표시가 됨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할 때 무엇이 되는가? 우리는 세상을 이긴 표시가 된다. 왜냐하면 세상은 지금 물질이 지배한다. 전부가 물질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물질에 틀어지면 다 틀어져버린다. 친척도 형제간도 다 소용없다. 부자간은 조금 다르지만 형제간도 돈 문제 생기면 다 틀어져버린다. 여러분들은 좋은 육신적인 형제간이 있겠지만 돈이 틀어지지 않는 형제간은 없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지금 돈이다. 이 돈을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다면 이것은 내가 돈을 이겼다는 말이다. 정복했다는 말이다. 돈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다. 이 돈이라는 것은 맘몬인데 재물이라는 말의 아랍어라고 한다. 돈이 그냥 돈이 아니라 귀신이다. 돈이라는 것이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내가 돈을 하나님께 사용하려면 엄청난 전쟁을 해야 된다. 뺏어와야 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물질을 쓴다면 세상을 이겼다는 표시가 된다.
부활이라는 것이 단지 죄를 사함 받고 사망을 이기는 문제만이 아니고, 물질적인 소유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소유의 지배를 받던 사람인데 소유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게 했다. 이것이 비로소 인간답게 되는 것이다.
3) 교회를 위하여 물질을 사용할 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길이 됨
교회를 위해서 물질을 사용할 때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된다. 빌립보서 4장에서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너희의 준 것을 받음으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빌4:10-20)고 했다.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깊은 교통이 이루어졌다. 물질이지만 주고받았는데 마음의 깊은 교통이 일어났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디를 가야 되는데 뭔가가 필요한데 누군가가 승리한 재물을 드리면 말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깊은 교통이 된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많이 돕고 있지만 최명숙자매에게 내가 평생 물주라고 했는데 초창기에는 돈 버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아 필요하면 내 돈처럼 내놓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최자매다. 몰래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 달라고 하니까 평생 물주니까 그 자체로 말하지 않아도 깊은 교통이 있다. 간증을 꼭해야 교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간증하지 않아도 서로 교통이 된다. 최자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이 있겠나하는 생각이 든다. 물질이라는 것이 굉장히 귀중하고 죽고살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선뜻 가지고 온다. 내가 그것을 받을 때 물질을 받지만 교통이 이루어지므로 그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선물이고 거기서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명의 교통 안에서 주고받을 때에 생명이 무성해지고,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생명의 공급이 이루어지고, 생명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생명의 영광 안으로 이끌려 간다. 물질은 정말 쓸 곳에 쓰면 깊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잘못 쓰면 욕이 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는 하나님이 내 대신 갚아달라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사람 마음에도 그런 마음이 생기는데, 하나님은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적인 문제다.
3. 연보에 대하여(모금)
3.1. 주의 첫 날에 모음(부활 안에서 모으고 드림)
연보에 대하여, 아까 말한 모금이다. 주의 첫날에 모으라고 했다. 주의 첫날은 요즘으로 말하면 주일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끝나고 시작한 날이 주일이다. 주일, 주의 날, 주의 첫날이라고 말한다. 그날에 모으라고 한다.
주의 첫날은 무슨 날인가? 주의 날이고 부활의 날이다. 안식일에 죽으시고, 안식일에 죽으신 것은 옛 창조를 끝낸 것을 의미한다. 새 창조 안으로 들어온 것은 지금 부활의 날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은 주의 날에 모였다고 한다. 떡을 떼려고 모였다고 한다. 안식교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안식일에 매달려있다. 자기들은 하나님 말씀이니까 절대적으로 지켜야 된다고 온갖 방식으로 하여 성경의 고증을 들어 해놓았는데 아무리 그래봐야 안식일은 예수님이 죽은 날이다. 죽어 있는 날이다. 옛 세계의 마지막이고, 창조의 마지막 날이다. 1차적 창조 안에서는 가장 귀한 날이 안식일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날을 복주어서 거룩하게 했다고 했다. 하나님이 일을 마치시고 그날을 쉬셨다. 너희도 쉬라. 그리고 그날을 복 주었다. 이것을 여호와의 안식이라고 한다. 구약시대에서 안식일은 가장 중요한 날이다.
그러나 지금은 새 시대가 열렸다. 어떤 시대인가? 부활의 시대가 왔다. 창조의 시대가 아니라 부활의 시대가 왔다. 이 부활의 시대는 주의 첫날이 중요한 날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 날이기 때문이다. 옛 세계 안에서는 내가 만들어진 날이 제일 중요한 날이지만 새 세계 안에서는 새 생명이 만들어진 날이다.
주의 첫날에 모으라는 말은 의미 있는 말이다. 물론 그때 주의 첫날에 모이니까 그렇게 했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모금을 하려고 해도 모이는 날이 주일이니까 주일에 할 것이다. 아마 그래서 나온 말일 수도 있지만 더 은혜롭게 해석해보면, 주의 첫날은 부활의 날이니까 부활 안에서 물질을 모으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더 은혜롭다. 성경은 더 좋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우리에게 더 은혜스럽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지옥 갈 일도 없으니 더 좋게 해석하고 자기에게 더 복되도록 해석하라고 만들어놓은 책이다. 부활 안에서 모으라고 했다.
1) 안식일 다음 날에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요제로 드렸음(레23:10,11,15)
레위기에 보면 안식일 다음 날에, 주의 첫날에,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요제로 드리라고 했다. 요제는 꿈틀거린다, 움직인다, 흔들어 드린다는 뜻으로 부활을 상징한다. 그때부터 이미 이것이 계시되었다는 뜻이다.
안식일 다음 날에 수확의 첫 열매는 그리스도다. 이 단을 요제로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첫 열매의 한 단으로써 그 주의 첫날에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의 첫날에 하나님께 물질을 드린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첫 날에 부활하셨음(요20:1)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첫 날에 부활하셨다. 안식일은 주의 마지막 날이다. 옛 창조를 마친 날이고, 옛 창조 안에서 가장 귀중한 날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대표적인 죽음 안에서 옛 창조 안에서 죽으셨다. 옛 창조를 끝낸 것은 부활을 위해서다. 우리는 끝난 것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것에 참여해야 한다. 이번에 선거 투표를 해야 하는데 될 사람에게 투표를 해야지 안될 사람에게 투표해야 무엇 하겠는가? 될 곳에 투표를 해야 당선되면 박수도 치고 좋아할 것이다. 안될 곳에 투표하여 떨어지면 같이 코 빠져 있는 것이다. 끝난 날에 끝난 세계에 투자할 것이 아니고, 새로 시작한 것에 투자해야 된다.
주의 첫날, 새 창조의 날은 시작한 날이다. 우리는 옛 창조 안에서 희망이 끊어졌다. 옛 창조는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까지가 옛 창조의 한계인가를 알게 되었다. 옛 창조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다시 난 부활 생명이 필요한데 이 부활 생명의 첫날이 바로 주의 첫날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집회를 하고 있는 오늘이다. 이 날의 복음을 행하라는 것은 내가 갈 때 어수선하게 돈 있니 없느니 어수선하게 하지 말고 미리 준비를 해놓으라는 말이다.
3) 사도들과 교회는 주의 첫 날에 떡을 떼고 모였음(행20:7)
사도행전 20장 7절에 보면 사도들과 교회는 주의 첫날에 떡을 떼려고 모였다는 곳이 나온다. 그 사람들은 주의 첫날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떡을 뗀 것이 분명하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다는 곳이 나온다. 그것은 회당에 들어가서 유태인들을 설복해 보려고 들어간 것이다. 안식일이 중요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안식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려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가야 유태인을 만나기 때문에 유태인을 하나라도 구원해보려고 갔던 것이고 자기들끼리 속닥하게 모인 것은 주의 첫날에 모였다. 부활한 다음에 모였다. 우리도 옛 창조를 구원하러 가려면 옛 창조의 안식일에 갈 수도 있다. 옛 창조의 안식일을 지키려고 간 것이 아니고 거기서 몇 몇 사람을 구원해보려고 가는 것이다. 우리끼리 모이려면 안식일에 모이면 안되고, 주의 날에 모여야 된다.
4) 주의 첫 날에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음(엡2:5)
에베소서 2장 5절에 보면 주의 첫날에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라는 말이 나온다. 언제 살렸는가? 주의 첫날에 살렸다. 주의 날에 살렸다. 내가 살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부활하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시 나려고 생각하니까 어렵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한다. 이 함께, 연합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가 부활한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부활한다. 그러니까 이미 부활했다.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한다. 그분이 살았을 때 우리는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나 바울이나 부활한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언제 부활한 것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주의 첫날에 살아난 사람들이다.
물론 또 마지막 부활이라는 것이 있다. 생명의 문제이니까 부활하고 또 부활한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내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다. 그 말은 나는 날마다 부활하고 날마다 부활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말하면 영 단번에 부활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어떻게 말하면 날마다 부활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영 단번에 죽었다. 예수님이 죽을 때 함께 죽었으니까 영 단번에 죽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다.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라고 한다.
5)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음
(엡2:6)
에베소서 2장 6절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어디에서? 무덤에서. 그리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으니라고 한다. 그냥 부활한 것만이 아니고, 하늘에 함께 앉히셨다고 한다. 하늘의 영역 안에, 하늘의 성질 속에 우리를 함께 앉혔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늘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그러면 하나님 보좌 우편은 어딘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성질의 문제다. 하늘의 성질의 영역이다. 그 영역 안에 지금 보좌에 계신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하늘의 영역 안에 앉혀있다. 우리가 지금 땅에 앉아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함께 앉아있다고 생각해야 된다.
이것은 실재 안에서 그 영역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땅의 것을 구질구질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또 언제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까를 생각하면 안된다. 절에 가면 극락전이 있다. 나무로 배를 만들어 공중에 띄워놓았다. 그 배를 타고 극락으로 간다는 말이다. 찬송가에도 배 타고 천당으로 간다는 노래가 있는데 아마도 절에서 하는 것을 보고 지은 노래 같다. 그렇게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 연기처럼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함께 일으키시고 이미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다. 앉히실 것이다가 아니고, 앉히셨다고 한다. 일으키실 것이다가 아니고 일으키셨고이다.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이다. 나 따로가 아니다. 우리는 옛 창조 안에서 그분과 함께였다. 그분이 피곤할 때 나도 피곤하고 그분이 잠잘 때 나도 잠자고 그분이 배고플 때 나도 배고프고 그분이 십자가에 죽을 때 나도 십자가에서 죽고 똑 같았다. 내가 예수 그분을 찾아가 만나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과 나는 한 체질이고 한 운명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앉을 때 나도 앉는 것이고 그분이 졸릴 때 나도 졸리는 것이고 그분이 먹을 때 나도 먹는 것이다. 함께라는 말이 그런 말이다.
그러면 지금 그분이 일으켜졌으면 우리도 함께 일으켜져있고, 또 부활생명은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혀있다. 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으니라고 한다.
6)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영 안에서 하늘의 계시를 보았음(계1:10)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영 안에서 하늘의 온 계시를 보았다. 이 주의 날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은 우리가 새로 태어난 날, 새 생명의 날,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는 날, 새 창조의 날이다. 이 날에 우리가 모금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고 1차적인 생명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고 나온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승리의 표시다. 승리한 사람은 다 표시가 있다. 우리가 이겼으면 다 이긴 표시가 있다. 속으로만 이겼다하고 말로만 이겼다하면 무엇하겠는가? 이긴 표시가 있어야 된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이긴 표시가 난다. 세상을 정복한 표시가 나다. 세상을 정복한 표시가 무엇인가? 물질을 정복한 것이다. 세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물질이 세상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세상이다. 우리 영관이는 아직도 세상이 뭔지를 모른다.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서 교회와 세상으로 알고 있는데, 교회는 어디인지를 아는데 세상이 어딘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자꾸 세상이 어디냐고 묻는데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세상은 물질의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 세상이다. 그 말을 영관이는 알아듣지 못하므로 밖에 나와 있으면서 하는 말이 교회 안에 너무 오래 앉아있으니 답답해서 세상에 좀 나갔다가 오자고 한다. 영관이는 교회 바깥은 세상이다. 세상은 바깥이 아니다.
물질이 지배하는 영역이 세상이다. 우리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물질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물질이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승리다. 다른 세계다. 그렇지 못하면 내가 항상 지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지배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지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그 이유로 자꾸 지고 있는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지고 있다고 하면 그거야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진 것이 아니고, 이 맘몬이라는 귀신에게 진 것이다. 맘몬이라는 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내가 어느 날 확 바꾸어지면 무슨 표시가 나오는가? 대번에 물질을 이긴 표시가 나온다.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오면 부활 생명이 밀려오면 내가 물질을 이긴 표시가 확 나온다. 두렵지 않아지고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참 특이하다. 여러분 경험해보시면 다 알 것이다. 제일 먼저 세상을 승리한 것이 나온다.
3.2. 주 예수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심으로 물질도 그와 함께 있음
주 예수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심으로 물질도 그와 함께 살았다. 내가 있는 곳에 물질이 있고, 물질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음 있는 곳에 물질도 있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했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소매치기가 돈 있는 것을 안다고 한다. 투명인간이라 알겠는가? 물질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냥 걸어가도 마음은 돈이 있는 곳에 있기 때문에 무슨 행동을 해도 표시가 난다. 이 사람들은 전문가이니까 저 사람은 안주머니에 돈이 있음을 안다. 따라 가면 영락없이 밑으로 찢고 그 사람은 돈이 있는 줄 알고 멍청하게 가는 것이다. 마음 있는 곳에 물질이 있고, 물질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이것은 떠날 수가 도저히 없다. 그래서 돈도 주머니에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 많이 가지고 다니면 마음이 자꾸 그곳으로 가니까 잃어버려도 좋을 만큼만 가지고 다녀야지 많이 가지고 다니면 신경쓰여 안된다. 주 예수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 물질도 함께 거기에 있다.
1) 옛 창조 안에서의 죄와 허물과 죽음의 저주는 끝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인류가 탄생하였음
옛 창조 안에서의 죄와 허물과 죽음의 저주는 부활로 끝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새 인류의 탄생이 시작했기 때문에 물질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그 물건도 있는 것이다.
2)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용도로 탈취되었던 물질은 이제 하나님의 용도로 회복되었음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용도로 탈취되었던 물질은 이제 하나님의 용도로 회복되었다. 원래 하나님이 그렇게 쓰라고 만들어놓은 것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쓰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쓰도록 만들어놓았는데, 우리가 타락하고 나니까 사탄의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회복되어야 한다. 내 몸도 회복되어야 되고 내 물질도 회복되어야 되고 다 회복되어야 된다. 한쪽은 회복되고 있는데, 어느 한쪽은 회복되고 있지 않다고 하면 안된다.
3) 인격을 위하여 주신 물질은 이제 그 인격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회복되었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함
이것은 사람을 위해서 주신 물질, 그 인격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된다. 그래야 회복된 물질이 된다. 살림 받은 자리에, 하늘의 영역 안에 물질도 거기에 있어야 된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좀과 녹이 쓸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영역 안에. 거기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도 함께 있다. 나만 있고 물질은 따로 있다. 물질은 세상에 두고 나는 교회에 왔다면 안된다. 내가 교회에 올 때 물질도 함께 와야지 나는 교회에 와있고 물질은 세상에 있다. 물론 은행에 있는데 은행이 세상이 아니다. 우리 영관이 식으로 생각하면 물질은 은행에 있고 은행은 세상이 되는 것이고, 자기 집에 돈을 찾아다 두면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은행에 있다고 해서 세상이고, 은행에 있지 않다고 해서 세상이 아닌 것이 아니고, 그 물질이 지배하는 그것이 세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 내가 이 사람이면 이 사람이 있는 자리에, 내가 저 사람이면 저 사람이 있는 자리에 물질도 함께 있어야 된다.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3.3. 교회의 필요를 위해 드림
교회의 필요를 위해 드린다. 교회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행정의 수단이다. 하나님이 행정을 할 때 어떻게 교회 없이 행정을 하겠는가? 교회가 있어야 행정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정은 물질과 함께 하는 것이다.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같이 한다.
3.4. 선물을 나눔 (형제 간에, 교회 간에)
선물은 나눔으로 더 풍성해진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신 것을, 살아난 것을, 귀한 것이 된 것을, 하늘의 것이 되었으니까 귀한 것이 되었다. 옛날 돈과 다르다. 내가 같은 돈을 가지고 있지만 옛 사람일 때의 돈과 내가 새 사람일 때의 돈이 달라진다. 이것이 귀중해졌다. 이 귀중해진 것을 나눌 때 은혜가 더욱 풍성해진다. 옛 생명 안의 것은 나누어도 싸움이고 나누지 않아도 싸움이다. 주고 나도 싸움이고 안주어도 싸움이다. 사실은 세상은 전부 돈이다. 돈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세상사람 상대하기는 간단하다. 돈만 주면 다 해결된다. 중국에 가면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말이 있다는데 사실 그 말이 맞은 말이다. 아무리 원수된 사람이라도 돈을 많이 갖다 주면 원수가 어디 있는가? 다 해결되고 만다.
우리는 이 돈이 부활 안에서 은혜로 쓰여지면 이것은 풍성한 선물이 되어 쓰면 쓸수록 더욱더 아름다운 것이 되고, 풍성한 것이 되고 심도있는 교통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가 중화요리를 먹으려니까 돈이 들어가고 일본 스끼야끼 요리를 먹으려고 해도 돈이 들어가고 갈비나 스테이크를 먹으려고 해도 돈이 들어가고 돈 쓸 곳이 굉장히 많다. 나는 사실 정말 돈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교회 가면 돈 쓸 곳이 너무 많다. 우리 교회는 돈 쓸 곳을 만들지 않아 돈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이 정도 되면 교역자가 최소한 10명이 있어야 된다. 매일 신방을 해야 하므로 한 사람이 100명을 관리하기 힘들다. 그러면 10명 인권비가 얼마이겠는가? 200만원씩이면 2000만원이다. 나 혼자 신방하고 밥값만 받으니까 돈이 안든다. 돈을 안 쓰도록 만들어서 돈이 안들어가는 것이지 돈 쓰게 만들려면 한 없이 쓰게 된다. 돈이 없어서 못쓴다. 이 정도 인원을 가지고 있는 교회면 예산이 엄청나게 크다. 우리 교회 예산을 보면 사람들이 웃을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많은데 왜 예산이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할 것이다. 돈 쓸 곳을 만들지 않아서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선교를 하려면 돈 쓸 곳이 많이 필요하다. 이 은혜를 더 넓게 나누고 전파하고 사람들을 살리려면 돈이 없으면 안된다. 아까 말한 대로 차는 준비가 되었고 운전기사도 잘 훈련이 되었다. 좋은 장로들이 나와서 운전도 잘하고 좋은 벤츠로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길을 닦아야 된다. 도로공사를 해야 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모두 옷을 벗어 길에 깔았다. 그냥 임금이 초라하게 가면 임금이라고 하겠는가? 종려나무로 흔들면서 자기 옷을 벗어 길바닥에 깔아주니까 임금 비스름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황금마차는 타고 가지 못할지라도 비스름하게는 해야 되지 않겠는가. 앞으로 우리가 돈도 많이 벌어야 되고, 버는 사람은 열심히 벌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누가 벌어가도 벌어갈 돈이다. 우리가 안 벌면 다른 사람이 벌어간다. 우리가 게으르면 못 버는 것이고 우리가 부지런하면 더 많이 버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많이 벌어야 된다. 그래야 쓸데가 있다. 많이 번다고 아무 곳에나 쓸 것이 아니고 그것을 유용하도록 써야 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써야 된다. 그러면 돈 버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겠는가. 내가 돈을 벌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그 영광을 위해서 쓴다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러면 BBK도 필요 없고 하나님 앞에 썼다고 하는데 B자도 필요 없다. 다른 곳에 쓰다보니 B자도 들어간 것이다.
물질적인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 때문에 나도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보았다. 알고 보면 돈 문제가 교회 안에서 나면 참 치사하다. 집사들끼리 장로들끼리 싸우는 것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전부 돈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것은 없지만 용도를 확실하게 알고 그 용도를 위해서 벌기도 하고 그 용도를 위해서 쓰기도 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쓰여져야 된다. 내가 돈 버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쓰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교통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물질의 교통이 필요하다.
바울이 돌아다닐 때 그냥 어떻게 돌아다녔겠는가? 천막치고 돌아다녔는데 몇 푼이나 벌겠는가? 그리고 천막 칠 시간이나 있었겠는가? 매일 쫓겨 다니고 밤이면 집회해야 하는데 언제 천막치고 있었겠는가? 그 전에 천막 친 사람이었다. 다 누군가가 대주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몇 몇 사람들 이름이 나오는데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이 물주들이다. 바울이 어디가면 대주어 가게 해주었던 사람들이다. 그때 당시로는 큰 돈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된 것이다.
오늘날 나도 마찬가지로 뒤에서 밀어주는 형제들이 있었고 자기들이 쓰지않고 교회에 내어서 내가 순회를 다녔지 내가 365일을 순회를 다녔는데 언제 돈을 벌 수 있었겠는가. 2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순회를 다녔다. 돈 벌 시간도 없고 돈 벌 능력도 없었다. 여비를 누가 주었겠는가? 형제들이 주니까 순회를 다닌 것이다. 이런 것이 결국 오늘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 것이다. 묻혀있는 것 같지만 그것들이 모두 다 한 목표를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 교회가 있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가 또 그렇게 할 때 앞으로의 교회가 있게 된다. 지금 우리가 한달에 선교비로 많이 쓰고 있다. 여비가 많이 든다. 다 누군가가 충당을 해주고 있어 형제들이 안심하며 가고 있다. 이번에 북쪽으로 순회를 갔는데 영하 20도라고 하여 감기에 걸리지 않고 올련지 걱정이다. 너무 추운 곳은 감기 바이러스가 없다고 한다. 영하 50도 이하로 내려가면 감기 바이러스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문화수준이 높지 않기 때문에 환경이 아주 열악하다고 한다. 옛날에 우리가 연탄 뗐을 때처럼 공기가 아주 탁하고 석탄을 집집마다 떼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석탄에 쌓여있다고 한다. 그런 속에서 몇 몇 형제들이 가서 사역을 하고 있고, 우리 교회에서는 한달에 한번 순회를 하고 있다. 더운 곳은 또 무지무지하게 덥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릎 쓰고도 기쁘게 갈 수 있는 것은 뒤에서 후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못 가더라도 여비라도 충당해주어서 가게 하는 형제들이 있기 때문에 격려를 받아서 가게 된다. 오늘 저녁에 튀김 요리를 통해서 여러분이 더 좋은 간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쓸모없는 저희 인생을 주님께서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부활 안으로 우리를 이끄셔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죽음에 들어갈 때 우리도 죽음에 있게 하시고 당신이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그 부활 안에 있게 하시고 당신이 승천하셨을 때 우리도 그 승천 안에 있게 하시고 오늘 당신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할 때 우리도 그 안에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 회복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소속된 모든 것도 회복되어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구체적인 현실인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온전하게 삶을 다 드리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우리가 뿌린 씨가 30배 60배 100배로 결실되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주님! 사랑하는 형제들이 수고한 모든 것이 그리고 헌신한 모든 것들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도록 주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