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길을 묻다
최 화 웅
영화는 20세기 들어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영화는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그동안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영화라는 이야기보따리는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허구의 산실로 종합예술의 한 장르를 이룬다. 영화는 대중을 향해 끊임없이 스토리텔링하며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는 언어, 의사소통 매체라고 정의한다. 영화는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 못지않게 폭넓은 언론기능을 수행해왔다. 영화는 사람의 생각이다. 나아가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철학의 영역, 공감의 실천이다.
최근에 본 몇 편의 영화가 자주 이야기를 걸어온다. 'Out of Africa'와 '쇼생크 탈출', 그리고 '그녀에게(hable con ella)'가 바로 그것이다. 시드니 폴락이 감독한 ‘Out of Africa'에서는 주인공 데니스와 카렌이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초원에까지 축음기를 들고 다니며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듣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음악을 통해 감미롭고 황홀한 사랑을 나누며 자연과 휴머니즘을 이야기한다. ’쇼생크 탈출‘은 교도소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리아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의 선율이 터져 나오면서 자유가 차단된 마음의 담장을 허문다. 프랭크 다라보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고 억누를 수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관통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야기꾼 스티브 킹의 중편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영화화 한 ‘쇼생크 탈출’은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교도관과 죄수들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장래가 촉망되던 은행원이다. 그는 부인과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악명 높은 쇼생크에 수감된다. 마침내 그는 비리와 부정이 우글거리는 감옥을 벗어나보려고 궁리한다. 그 여정에서 흑인장기수 레드를 만나 인간적 신뢰와 우정을 쌓아간다. 영화의 압권은 앤디가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인연을 맺은 도서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는 교도소에 도서실을 갖추기 위해 주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으려고 매주 빠뜨리지 않고 편지를 쓴 끝에 지원을 받아낸다. 어느 날 앤디는 기증도서를 정리하다 ‘피가로의 결혼’ 레코드 전집을 발견한다. 그는 레코드를 들고 교도소장실에 몰래 숨어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교도소의 모든 스피커를 통해 방송한다. 맑고 상큼한 소프라노 2중창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가 교도소 안에 울러 퍼진다. 마침 운동장에 나와 있던 재소자들은 넋을 잃고 그 노래를 듣게 된다. 레드는 그 순간을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새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교도소의 모든 벽들도 무너지고 쇼생크의 모든 이들은 자유를 느꼈다.”고 독백한다.
영화 ‘그녀에게’는 연극을 시작하듯 첫 장면에서 막이 오른다. 그리고는 헐거운 잠옷을 걸친 두 여인이 등장하여 자유로운 정신과 감정을 동작으로 표현하는 메타키네시스(Metakinesis) 기법을 보여준다. 기존의 틀과 형식, 일체의 관습과 질서를 거부하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현대무용이다. 느릿한 첼로 전주에 이어지는 비가(悲歌), 앞을 볼 수 없는 두 여인이 비통한 선율에 맞춰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 표정으로 춤을 추는 것이다. 한 남자가 그녀들이 나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위에 널린 의자를 필사적으로 치우는 모습에서 뇌사상태의 식물인간이 된 두 여인의 운명과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격렬한 슬픔을 품은 무용극 ’카페 뮐러‘ 못지않게 통곡하듯 노래하는 소프라노 아리아 ’오! 나를 울게 해 주오‘가 폐부를 찌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영화가 시작하고 끝나는 곳에 연극 개념을 도입한 무용극을 배치한다. 전설의 춤꾼 바니 바우쉬가 출연한 ’카페 뮐러‘는 발레리나 알리샤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남자간호사 베니그노의 사랑과 아름다운 투우사 리디아를 취재하다 사랑에 빠진 잡지사 기자 마르코의 사랑이 영화에서 만난다. 마주르카 스탶으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불타는 마주르카‘가 ’카페 뮐러‘의 슬픔을 딛고 환희로 반전을 꾀한다. ’카페 뮐러‘가 밤과 겨울, 죽음을 표현한다면 ’마주르카 포고‘는 낮과 여름, 생동감 넘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한 편의 영화 속에 오페라 아리아와 포르투갈 파두, 무성영화와 남미탱고, 재즈와 삼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요소를 담아낸 음악감독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가 예사스럽지 않다.
베니그노는 오랫동안 돌보던 어머니가 숨져 떠난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건너편 발레학원에서 춤을 배우는 엘리샤를 창문 너머로 발견하고 혼자서 사랑을 느낀다. 창밖의 연인 에리샤가 비오는 날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베니그노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로부터 4년 동안 베니그노는 정성을 다해 엘리샤에게 책을 읽어주고 사진을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잡지사 기자 마르코는 방송에 출연한 리디아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고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남자는 무용극 ‘카페 뮐러’를 옆자리에서 함께 보다 마르코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 이를 본 베니그노가 공감하는 인연이 된다. 두 사나이는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여인을 사랑하는 시련과 고뇌를 함께한다.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치는 두 남자가 쌓아가는 아름다운 우정이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라틴 발라드 창법으로 노래하는 카에타노 벨로조의 ’쿠쿠루쿠쿠 팔로마‘는 하늘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레퀴엠이다. 마르코가 남미의 한과 트라우마가 서린 벨로조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쉽게 잊어지지 않을 명장면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심정을 기타와 첼로, 베이스가 처절한 슬픔을 참고 연주한다. 외롭고 쓸쓸한 창가에 날아와 슬피 우는 비둘기를 표현한 ’쿠쿠루쿠쿠 팔로마‘가 가슴을 파고들어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온 몸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절제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그의 노래는 1959년 흑인 가수로서 처음 카네기홀에 섰던 젊은 날의 해리 벨라폰테와 다른 음색을 맛보게 하고 뭇 여성을 매료시킨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보다 깊고 감성적이다. 브라질의 국민가수 카에타노 벨로조가 음유시인처럼 노래하는 ’쿠쿠루쿠쿠 팔로마‘가 이 쓸쓸한 가을에 우리의 감성을 허우적이게 한다.
베니그노의 지극한 사랑이 긴 잠에 빠진 엘리샤를 깨운다. 그것도 모르는 베니그노는 마르코에게 “엘리샤 곁으로 가기 위해 약을 먹는다.”는 유서를 남긴다. 눈물 많은 마르코가 교도소장 방에서 베니그노의 유서를 읽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영화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철모르고 살아가는 순수한 사랑이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는 2003년 아카데미 각본상과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고 2002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영화’로 빛난다. 영화가 우리를 막고 길을 묻는다. 주옥같은 영화가 영혼의 자유와 사랑의 감정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 무엇으로 사느냐고 다그친다. 영화가 꽉 막힌 보수의 형식과 내용을 과감히 거부하고 인간정신의 자유해방을 요구한다. 수많은 명곡들이 영화에서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내며 감동을 주듯 영화 속에 담긴 또 다른 영화로 우리의 삶을 품고 책과 음악, 그리고 춤이 있어 더 넓은 세계문화를 녹인다.
우리의 삶을 정복한 영화는 분명 이 시대에 새로운 영혼을 메시지로 비춘다.
첫댓글 '쇼생크 탈출' 저도 감명깊게 보았습니다....'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시간 내어 보아야겠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hable con ella)'도 보시면 좋을텐데요.^*^
이번주에는 집사람과 영화 한편 보러 가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영관에 가시는 것보다 지난 영화는 다운로드 받거나 DVD로 보시는 게 어떨런지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했던가요...
수도원의 일과 안에 매일 '영적독서'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고 했습니다.
영혼과 마음에 도움이되는 유익한 글,음악,무용,연극,영화는 인간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전하는 하느님의 선물이겠지요^^*
가을의 감성을 부추기는 환경을 이겨내기가 힘겹습니다. 이 가을에 건강하십시오. 신부님!!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2.09.27 20:55
발다살 신부님! 감사합니다.
따뜻한 가을의 감성이 정말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추억을 감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가다님! 추석 명절은 잘 보내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