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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4일 주일메시지 (사도행전 제 15 강 강해) 아산_UBF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
말씀 / 사도행전 15:36~16 : 40
요절 / 사도행전 16 :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오늘 말씀에는 사도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의 시작과 유럽으로 인도하신 성령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개척과 선교를 섬기는 종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말씀에 기록한 개척의 비밀을 잘 배워서 우리도 이 시대 선교사로 개척자로 예수님의 역사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15장 36-3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바나바에게 1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를 방문하여 형제들을 권면하자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나바의 제안에 동의하였습니다. 하지만,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두 사람 의견이 달랐습니다. 각자 길을 떠났습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며 교회를 굳게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서로 의견이 달랐지만, 이렇게 두 길로 다니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 더 여러 곳들을 심방하여 도울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후 다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여러 서신서를 보면, 바울은 후에도 바나바를 사도로 인정하였습니다. 마가요한은 다툼의 원인을 제공하였지만, 성숙한 사도들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가에 대하여 ‘동역자’로 칭하여 마가의 변화와 성장을 인정해주었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준비하고 떠나는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놀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계속하여 선교하고자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계속하여 믿음의 형제들을 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한 30년 전에 대전에 있을 때, 한 부부가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부의 목자댁에 가보니 사모님이 우아하게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위기의 부부의 집에 전혀 심방 하지 않는 것에 문제의식이 느껴서 ‘그 집에는 왜 안 가보세요?’ 물었더니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택시타면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습니다. 목자로 섰다고, 이제 믿음의 결혼을 시켰다고 목자는 안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살펴야 합니다. 계속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개척을 하고자 도전하여야 하고 개척이 이루어진 곳에는 다른 어려움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찾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찾아갑니다. 그래가지고는 생명이 살아나는 것과 영적인 비밀을 배울 수 없습니다. 생명의 역사에는 목자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목자의 수고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수고와 희생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수고와 희생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많은 대학들이 있습니다. 우리 지역 대학의 교수들은 존경과 영광은 받으면서 희생 하지 않는 경우가 그동안 많이 있었습니다. 원래 교수직이 남에게 싫은 소리 안 듣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자기 좋아하는 공부하며 살겠다고 택하는 직업인 경우가 많습니다. 옆 방 교수가 한 달 출근하지 않아도 알지도 못하며 옆 사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교수입니다. 그러니 말귀 알아듣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대화해주고 관심 가져 주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지역의 교수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방대 교수’ 같은 목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센터 데려왔으니 이제 되었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수양회 참석시켰으니 할 일 다 했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목자 선서했다고, 믿음으로 졸업했다고 안도할 수 없습니다. 목자는 고상하게 연구실에 앉아서 좋아하는 책이나 읽고 커피 마시고 다니는 것이 본분이 아닙니다. 놀지 말고 부지런히 양떼의 형편을 살피고 돌아보는 것이 목자의 본분입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면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판단하는 개인의 논리만 따라 생활하면 상급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살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자기 생활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와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길을 체험하며 배울 수 있습니다.
16:1-5절은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러 디모데를 만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차 선교여행의 목적은 1차 때, 개척한 교회들을 둘러보고 각 교회 형제들에게 예루살렘 총회 결정을 알려주며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 때 개척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좋은 평을 받던 제자 디모데를 선교여행에 합류시켰습니다. 이 때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 받도록 하였습니다. 할례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교리적인 차원에서 할례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방인, 어머니가 유대인인 경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유대인 커뮤니티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 어머니가 유대인이므로 유대인 커뮤니티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장성하여서도 할례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 끝에 유대인커뮤니티에 들어가기보다 헬라인으로 살고자 한 것으로 봅니다. 이런 디모데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인품이 성숙하여 루스드라 지역에서 유명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동역자로 삼아 교회를 섬기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유대인 양들에게 오해받고 거부감을 받을 수 있으므로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받도록 하였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과 화합하고자 율법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있는 사람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디모데가 할례 받도록 한 것은 디모데를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개척한 각 교회에게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 사항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각 교회들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믿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였습니다. 믿음이 굳건해지는 것은 질적인 성장입니다. 믿는 자들의 수가 증가한 것은 양적인 성장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개척한 교회를 둘러 볼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새로운 개척지부터는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냉담하였습니다. 복음 전파의 결실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갔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다시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비두니아는 터어키의 북부지방 흑해연안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 성령께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북쪽으로 가는 것을 그만두고 서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드로아는 터어키의 서쪽 끝에 있는 항구입니다. 바다 건너 유럽과 마주하는 곳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이르러 기도할 때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환상의 내용은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환상은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종들이 앞으로의 일을 두고 무엇인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에 성령의 원하시는 바를 뚜렷하게 계시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은 환상이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그곳 사람들을 먼저 도우라는 성령의 지시임을 영접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께서 선교 할 곳을 알려 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길, 가장 은혜로운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방향에 순종했습니다. 바울은 다소 출신입니다. 다소는 튀르키에 동쪽지방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목자의 심정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를 유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뜻을 영접하고 성령의 방향에 순종했습니다. 성령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방향에 순종했을 때 어떤 역사에 쓰임 받았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 동북부 항구인 네압볼리로 갔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은 성령의 방향을 따라서 마게도냐로 들어갔습니다. 첫 성이 빌립보입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왕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입니다. 바울 일행은 거기에 도착하여 먼저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이 기도를 마쳤을 때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강가에 모여 있는 자매님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시대가 박혁거세의 후손 박씨들이 신라를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바울은 자매님들을 무시하지 않고 복음을 섬세하고 은혜롭게 전해주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이날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 내면에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사람은 루디아였습니다. 루디아는 자색 비단과 옷감들을 거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색 비단은 왕족이나 그 수준의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접하였습니다. 루디아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보내신 종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루디아는 자신의 가정을 마게도냐 선교센터로 오픈하였습니다. 루디아가 자기 집으로 강권하여 청한 것은 귀한 말씀을 사랑하여 계속 듣고자 함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신 종들을 영접하여 섬기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였을 때 마음이 준비된 선교동역자를 보내주셨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이 기도하러 가는 길에 점치는 여자종 하나를 길에서 마주쳤습니다. ‘귀신같이 잘 알아 맞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종은 귀신 들려 있었는데, 귀신이 이것저것 알고 맞추는 것이 많아 그 덕에 주인이 점쳐서 받는 복채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 여종 속에 들어가 있는 귀신이 바울 일행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귀신은 잘 알지만 성령의 역사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귀신의 특징은 아는 것이 많을 뿐 순종하지 않습니다. 여종 속에 있는 귀신은 여러 날 동안 이 말을 계속 해대며 하나님의 종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은 그대로 쫓겨났습니다.
19-24절을 보십시오. 귀신을 쫓아내어 주니 여종은 좋았습니다. 여종은 자아를 되찾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주인에게는 싫은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점을 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점 쳐서 받는 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원들에게 고소하였습니다. 그들의 고소에 따라 바울과 실라는 정죄 받았고 매를 맞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매 맞은 후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혀 고난 받는 두 사람은 거기에서 기도하였습니다. 25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사도들의 기도와 찬양이 울려 퍼지는 감옥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가둔 감옥과 그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둔 사슬이 다 풀렸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자다가 깬 감옥의 간수는 죄수들이 모두 탈옥한 줄로 알았습니다. 죄수가 탈옥 하면 간수는 그 책임을 지고 사형 당했습니다. 간수는 사형 당하게 될 것이라 여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탈옥할 수 있음에도 탈옥하지 않고 있는 바울과 실라는 조금 전까지 기도하고 찬양하던 하나님의 종들이었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와 물었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30절) 바울이 말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바울은 깊은 감옥으로부터 자기 한 몸을 빨리 내보내야 겠다는 생각보다도 눈앞에 있는 한 인생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사명감이 앞섰습니다. 매 맞은 곳을 치료하고 자기 몸 먼저 챙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절망하는 한 사람과 함께 하여 주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2-34절을 보십시오. 간수는 바울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매 맞은 상처를 치료하였습니다. 바울은 간수의 집으로 가서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간수와 그 집 사람들이 모두 바울에게 세례를 받고 예수님 믿는 새 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간수와 그 집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빌립보의 관원들이 바울과 실라를 때리고 감옥에 가둔 것은 빌립보 사람들이 흥분하기 때문에 그들을 잠잠케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관리들은 사람을 보내어 자기들이 가두었던 바울과 실라를 석방시키라고 했습니다. 간수는 그 명령대로 바울과 실라를 내보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민은 조사나 재판 없이 체포되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채찍질 하거나 고문 받으면 안 되었으며 그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로마 황제의 법정까지 상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38,39절을 보십시오.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관리들은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죄 없는 로마시민을 불법으로 처벌한 사실로 인하여 해당관리들은 로마시민권 박탈 또는 사형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바울의 말대로 직접 와서 바울과 실라를 정식으로 석방하여야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위함입니다. 바울 일행이 풀어 준다고 이대로 간다면 빌립보 사람들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죄인들의 양이라고 알 것입니다. 바울은 양들을 위하여 분명히 따지고 공개 석방 절차를 밟았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석방되어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다시 새로운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루디아의 집은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만나고 회합을 갖는 곳, 초대교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에 기록된 것은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유럽의 변화가 루디아 자매 한 사람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의 간지테스 강변에서 해준 일대일 성경공부가 로마를 변화시키고 세월이 흘러서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네델란드와 영국을 통하여 전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로 커나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은 선교역사를 섬기는 주의 종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배울 수 있게 합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은 마케도니아에 건너갈 때까지 튀르키에 이곳저곳 다니며 말씀 전하였지만 여러 지방을 열매 없이 다녀야 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준 일로 인하여 매를 맞았고 감옥에까지 갇혔습니다. 사랑하는 일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은 만사형통하며 진행하지 않고 고난이 따릅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 전하는 일에 고난이 따르는 것을 알고 이를 환영하며 감당하였습니다. 매 맞았지만 억울해 하지 않았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생명을 구하는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았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느라 많은 인내와 긍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지만 그는 떠났고 그의 후손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죄인의 특징은 존중해주면 도리어 무시한다며 반발하고, 용납해주면 오히러 억압한다며 반항하였습니다. 이런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결국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고난, 구원하시는 그 수고와 아픔을 사도들은 고난을 통하여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선교역사는 동역자를 얻는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라를 동역자로 삼고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데 2차 선교여행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함께 동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여행에 동참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 광을 내고 한 맺힌 자아실현 하려는 사람의 특징은 동역자를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주도하고 나의 업적이 되어야 하기에 동역자를 얻지 못합니다. 있는 사람도 떠나가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 곁에 실라와 누가와 디모데가 목숨을 걸고 함께 하는 동역자로 있었던 것은 선교역사에 있어서 동역의 중요성을 알고 모두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실라나 누가나 디모데나 ‘나’는 없었습니다. ‘나를 몰라주고...’ ‘나를 무시하고...’ ‘나를 챙겨주지 않는...’ 이런 생각은 마귀가 동역의 그릇을 깨기 위해서 심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곳이 보이면 기꺼이 ‘나’를 버리고 예수님 이름을 위하여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자세로 겸손하게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선교역사의 주체는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케도니아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유럽에서는 자매님들 마음을 먼저 감동시키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고 성령의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성령의 방향을 따라 갔을 때, 전 세계 역사가 바뀌는 대전환의 시점이 되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라시아 대륙과 중동에 걸쳐 일어나는 대규모 정복전쟁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휘말리지 않고 유럽, 그중에서도 서유럽에서 충분히 체계화되고 성장한 후 전 세계로 전파되어 나가는 절차를 밟아 나갑니다. 만약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방향대로 선교가 되었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을까? 아르메니아 교회의 현재 모습이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생명 살리는 역사를 섬기며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고 항상 자기를 버려 동역할 줄 알고 늘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여서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위대한 세계선교를 힘차게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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