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江陵 鶴山 金光坪) 이야기
12. 풍물(風物) 악기의 관리
우리 금광평 마을은 수리조합공사가 끝나고 칠성저수지(七星池)가 생기면서 마을 가운데로 시멘트로 만든 봇도랑이 생긴 후 밭을 본격적으로 논으로 바꾸기 시작했는데 1965년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우리 마을에 논이 없었으니 지붕을 이을 볏짚이 없어 재궁마을로 볏짚을 사러갔던 적도 있었는데 한 지게에 얼마를 주기로 흥정이 되었던 모양으로, 나는 욕심에 볏단을 한 단이라도 더 지고 오려고 볏짚을 산더미처럼 지게에 짊어지고 살개바우(굴산사 幢竿支柱)를 지나 끙끙대고 집으로 오던 생각도 난다.
그렇게 가난하던 마을이 집집마다 개간한 땅을 정부에서 싼값으로 불하(拂下)를 받았고, 더구나 불도저까지 보내주어 밭을 논으로 바꾸게 되었으니 우리 마을 사람들은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농악에서 사용하는 주된 타악기는 꽹과리, 징, 장구, 북으로 사물(四物)이라 하고 거기에 덧붙여 가락악기인 날라리(太平簫)가 곁들여진다. 날라리는 고음으로 음량도 매우 커서 흥을 돋우는데 그만으로, 일명 쇄납(哨吶), 호적(胡笛)이라고도 부르는 목관(木管)악기이다.
사물(四物)의 어원은 원래 불교의식에 사용되던 악기인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 범종(梵鐘)을 가리키던 말이었는데 범패(梵唄:인도소리)의 바깥채비 소리에 쓰이는 태평소, 징, 북, 목탁(木鐸)을 가리키는 말로 전용되었다가 다시 농악패의 꽹과리, 징, 장구, 북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농촌의 가장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인 농악(農樂)은 경연대회가 생기면서 굉장히 복잡하고 멋진 공연으로 발전되었지만, 원래는 두레(돌아가며 일하기)로 일을 할 때 일꾼들이 많이 모이면 처음 시작할 때나 중간 잠시 쉬는 틈에 피로를 풀고 흥을 돋우기 위하여 연주하던, 비교적 단순한 연주였다.
날라리(태평소) / 꽹과리(상쇠) / 징 / 북 / 장구
우리 동네에서 모내기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 먼저 온 사람이 우리 집 사랑방 시렁(선반)에서 풍물을 꺼내서는 우선 꽹과리부터 치기 시작한다. 일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여 징, 장구, 북이 가세하여 어우러지다가 다 모이면 농기(農者天下之大本)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일을 나간다. 논에 도착하면 농기는 논두렁에 꽂아 놓고 악기들도 논두렁에다 두고 일을 하다가 새참이나 점심을 먹고 나서도 한바탕 풍물을 치며 흥을 돋우고 쌓인 피로를 푼다. 젊은이들의 놀이가 좀 길어지는가 싶으면 연세 있으신 어르신들이 ‘자, 그만 놀고 이제 시작허세.’ 하면 다시 논으로 나가 일을 시작했다.
모내기뿐 아니라 가을걷이를 할 때도 모여서 일을 하게 되면 풍물을 들고 나가곤 했는데 정작 풍물을 제대로 놀기는 정초에 걸립(乞粒)할 때다. 그때를 대비해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대충 일 년 농사일이 마무리되면 본격적으로 풍물 연습과 소도구들을 정비하였다. 먼저 사물(꽹과리, 장구, 북, 징)을 살펴서 닦고 손잡이를 바꾸는 등 손을 보고, 초저녁에는 가락을 맞추는 한편, 밤으로는 벅구(法鼓) 쟁이의 벙거지와 무동들의 고깔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벅구(法鼓) 쟁이의 벙거지는 우선 방바닥에 두꺼운 종이(비료부대 종이 등)를 깔고 놋쇠 밥그릇을 엎어놓은 물에 적신 종이를 밥그릇 위에 덮은 다음 진하게 쑤어놓은 밀가루 풀로 덕지덕지 종이를 붙여 나간다. 알맞은 두께로 골고루 되었다 싶으면 옆으로 내놓아 끄덕끄덕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놋쇠 밥그릇을 살살 끄집어내면 벙거지 모양이 되는데 이것을 응달의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놓고 하루 이틀 바짝 말린다. 다 말랐다 싶으면 들쭉날쭉한 벙거지 테두리를 자르는데 테두리의 크기를 잡아 실을 꼭지에 고정하고 적당한 길이로 둥글게 돌려 선을 긋는다.
그런 다음 가위로 잘라내면 모양새를 갖춘 벙거지가 되는데 먹물을 풀어 벙거지 전체를 새까맣게 칠한 다음, 단단한 박달나무로 미리 깎아두었던 냄비 뚜껑 손잡이 모양의 상모 돌리는 꼭지를 단다.
꼭지는 벙거지 꼭대기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단단하게 묶어 고정(固定) 시킨 다음 상모꼬리를 달면 거의 다 된 것이다.
상모 꼬리를 달 때는 우선 한 뼘가량 무게를 실어 돌리기 쉽도록 철사를 몇 겹 실로 감아 고정시킨 후 창호지를 싸 바르고 그 끝에다가 창호지를 한 치 반 정도의 폭으로 석자쯤 길이로 잘라서 붙인다.
벙거지 꼭대기에 상모를 거는 것은 매우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데 너무 조이면 돌아가지 않고 너무 헐거워도 빠져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돌아가는 꼭지 부분에다 촛농을 문질러 부드럽게 돌아가도록 한다. 그런 다음 벙거지에 알록달록한 끈을 두르고 머리에 묶을 끈을 달면 완성이 된다.
열두 발 상모는 끈의 길이가 대여섯 자쯤으로 훨씬 길고 벙거지 모양도 챙이 없이 만들었다.
열두 발 상모의 끈은 창호지로 하면 쉬 끊어져서 옥양목 흰 천이나 삼베로 하였고, 긴 끈을 쉽게 돌리도록 추를 여러 개 매달아 아이들은 무거워서 잘 돌리지도 못했다. 강릉농악은 상모꾼 수만큼 무동이 있어서 여나무 개의 고깔이 필요하게 된다. 두꺼운 종이를 두어 겹 발라 고깔을 만드는 것은 쉬운데 고깔에 다는 꽃을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북에서 피란 나온 40대 초반의 홀아비인 권씨는 말수도 적고 어디 한구석 조금 부족 한 듯 했지만, 언제 어디서 배웠는지 신통하게도 꽃을 일구는(만드는 것을 ‘일군다’고 한다) 재주가 있었다. 흰 미농지를 여러 겹 포개서 이리저리 접은 다음 끝부분을 철사로 묶고는 가위로 요리조리 오려서 살살 일구면 불두화(佛頭花) 모양의 커다랗고 소담스럽고 꽃송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생겨나는 것이 신기하였다. 고깔 하나에 10송이 정도 달아야 하므로 상당히 많이 만들었는데 다 만든 후 색색의 물감을 풀어 병에 넣고 대롱을 끼워 꽃에다 대고 불면 흰 꽃이 빨강, 노랑, 파랑, 연두 등 가지가지 색으로 다시 피어나고는 했다. 강릉농악에서는 고깔은 무동만 쓰고 나머지 벅구(법고)쟁이와 악기 잽이들은 모두 벙거지를 썼는데 다른 지방은 잽이들도 거의 고깔을 쓰는 것이 다르다.
망덕봉(望德峰) 위로 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꽹과리 치는 가락은 더욱 흥겨워지고 날라리 소리도 더욱 간드러지게 넘어간다.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 빛에 어지럽게 휘돌아가는 상모꼬리는 흡사 정월 대보름날 쥐불놀이의 불꽃이 휘돌아가는 듯 눈앞이 어지러웠다. 붉은 치마 노랑 저고리의 무동들은 치마를 부풀리며 맵시 있는 손동작으로 춤사위를 맞추며 돌아간다.
흰 점투성이 검붉은 낯짝의 바가지탈을 쓴 영감은 흥에 겨워 장죽을 휘두르며 덩실거리고, 북재비와 징재비들도 덩달아 어깨를 우쭐거리며 돌아가면 장구재비도 날렵한 손동작으로 가락을 휘몰아 간다.
장면마다 쇠가락이 빨라졌다가는 느려지고 다시 빠르게 휘몰아 가는데 거기에 따라 날라리 가락도 변화무쌍하게 바뀌고 어깨춤이 덧들이면 놀이마당은 온통 흥겨움으로 휩싸인다.
마당 구석이나 삽짝 바깥에 웅기중기 모여선 구경꾼들은 간드러지는 가락과 풍물패들의 현란한 몸짓에 손뼉 장단을 맞추며 어깨를 같이 들썩거리게 된다. 어둠 속에 얼굴을 숨긴 숫기 없는 처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몸짓 하나하나라도 놓칠세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숨을 내 쉬기도 하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다가 행여 다른 사람이 눈치를 채기라도 하면 얼굴을 붉히며 어둠 속으로 꽁무니를 뺀다.
그중에서도 인기는 단연 상쇠인 만복이 형이 최고였다. 시골사람답지않게 흰 얼굴이며 시꺼먼 눈썹에 조각 같은 옆얼굴 모습은 물론이려니와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에 자신에 넘치는 표정으로 전체 풍물단을 이끌어 가는 모습은 정말 대단하였다. 쇠가락이 바뀔 때마다 꽹과리를 높이 쳐들고 고갯짓을 하며 강한 울림으로 가락을 바꾸면 다른 잽이들도 눈길을 맞추며 따라 바꾸곤 하였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감탄사를 쏟아내곤 하였다.
흥겨운 놀이판이 벌어지면 이웃 마을에서도 구경을 오곤 하는데 특히 고요한 밤에 울리는 징소리는 굉장히 멀리까지 울려 나가서 밤이면 10여 리 이상 떨어진 먼 이웃 마을까지 아련히 울려 퍼지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공연히 마음이 들뜨곤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