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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14~20)”
우리를 어디로 부르시든지 거기서 할 일이 있고 맡겨진 일이 있다. 형제들이 군 복무를 하면서도 복음을 전해서 두 형제를 인도했다. 집은 당진인데 교회를 보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에게 하실 일을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형제가 간증한 경우처럼 젊은 형제들이 앞으로 당할 일을 생각해서 말하고 싶다.
형제 한 사람이 공무원 시험 합격을 해서 직장을 나가게 되었다. 수습 기간을 거쳐 정식 발령을 받았는데, 시청으로 발령이 날 줄 알았지만 동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속이 상해서 직장을 안가겠다고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현실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어디가든지 나만큼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왜 저 사람은 시청으로 가는데 나는 동사무소로 가나? 이게 아니다. 나만큼 대우를 받는다. 내가 그 자리에서 얼마만큼 열심히 했느냐, 또 얼마만큼 그 사람들에게 쓸모 있게 보였는가? 그것에 의해서 평가가 되는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나보다 실력이 못한 사람인데도 줄을 잘 서서 더 좋은 데로 갔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나는 힘이 없는 사람이고 그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 어떤 경우에는 돈을 써서 좋은 데로 갔고 나는 돈을 못 썼기 때문에 좋은 데로 못 갈 수도 있다. 그것도 현실이다. 나도 돈이 있었다면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돈이 없었기 때문에 못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자기만큼 대접을 받는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불쾌하게 생각하면 사회생활을 못한다. 만일 동사무소로 내려갔으면 거기서 최선을 다해서 시청으로 올라올 생각을 해야지, 사표를 낸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다. 젊은 형제들이 혹시라도 이런 일을 당하게 될 때 그런 일이 없기를 원한다.
내가 주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은 나를 동사무소로 밀어내더라도 거기 가서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시청에 간다고 월급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동 사무소에 간다고 월급 적게 주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준다. 직책이 다를 뿐이고 직장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만일 세상뿐이라면 박이 터지라고 해볼 일이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지 않는가?
내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갖는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만일 복음을 가졌다면 어디를 가든지 내가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군대를 가더라도 할 일이 있다. 내가 복음을 갖지 못하면 동사무소에 가는 것과 시청에 가는 것이 큰 차이가 생기게 된다.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된다.
참으로 주님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주님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의 어떤 환경에 간다 하더라도 그 환경과 관계없이 내가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동 사무소에 가서 주님이 더 나타날지, 시청에 가서 더 나타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시청에 가서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다가 동 사무소에 가서 두 사람을 구원했다면 동 사무소에 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왜 이렇게 수지맞는 인생을 살지 않고, 적자 인생을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시청에 가서 허탕 치고 동 사무소에 가서 이익을 본다면 어느 것이 낫겠는가? 동 사무소에 근무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 되는 삶이 아닌가!
그래서 그리스도가 지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이 엎어지는데서 나는 일어날 수 있고, 남이 손해 보는 자리에서 나는 이익을 본다. 육신적으로 한 사람은 좋은데 간다고 좋아하겠지만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저 사람보다 안 됐다고 동정을 받을지 모르지만, 거기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지혜가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지혜인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젊은 형제들은 직장 문제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 지혜가 되고 주님 자신이 우리 직장이 되서 어디를 가더라도 승리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만일 그런 일로 낙심한다면 그리스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순간에 그리스도는 간 곳이 없고 세상만 엄청 밀려와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는 것처럼 되면 창세기 1장 2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환경은 변하는 것인데, 사람은 어떤 경우이든지 똑같은 환경에 살 수 없다. 내가 원하는 환경에만 살 수 없다. 내가 원할 때도 있고, 원치 않을 때도 있고, 좋은 데도 있고, 나쁜 데도 있다. 거기서 그것으로 인해서 사망에 빠져버리면 사탄에게 돌아가 버린다. 그 자리가 우리가 승리해야 할 자리이기 때문에, 거기서 그리스도가 지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효과 있는 분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효과가 없는 분이 된다.
구원의 예언 -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너희는 온 천하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하는 말씀을 그냥 표면적으로 들으면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말이 된다. 그렇다고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이 되고,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멸망이 될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막상 세례를 받고 나오면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뿐이지, 다르게 변화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시고 걸어가신 과정을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하는 것이 맨 처음에 나왔다. 이렇게 잉태된 것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예언적인 탄생을 했다는 뜻이다. 미리 이런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이 되었고, 그 예언에 따라서 예수님은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가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우리와 같이 살았다. 세 번째는 그가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네 번째는 그가 부활했다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그가 승천했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그가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 생애의 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 구원은 그 분의 전 생애에 잠기는 것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여정 안에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가 있는데, 마지막에 이르면 하나님 보좌 우편이다. 그리고 생명주는 영인 것이다. 그 전체이신 그 분 안에 잠기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그 안에 잠겨지지 않으면 그것이 곧 정죄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 안에 들어갔다가 전 생애와 함께 승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세례를, 물을 떨어뜨리면 되는 것인가 물속에 들어가야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의식적인 표현으로 본다면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이 표시는 어떤 것을 표시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예수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니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물을 떨어뜨렸다’ 이것은 의미가 다른 것이다. 결례라는 의식이 있는데 물을 뿌려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침례라는 것은 뿌려서 깨끗하게 하는 게 아니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 침례이다. 이것은 이 행위를 통해서 어떤 것을 보여주려고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 안에 우리가 담겨지고 침례 되어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다 예언되어진 사람이기도 하고, 또 육신을 가지고 살기도 했고, 죽기도 했고, 부활하기도 했고, 승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그와 상관이 있으면 내가 그 안에서 침례된 것이고, 그와 상관이 없으면 그 안에 침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내가 그와 똑같고 한 운명 안에 있다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나도 죽은 것이고, 예수님이 사실 때 나도 산 것이다. 그런데 그와 내가 상관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나의 죽음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 예수의 출생
1) 빛으로, 궁창으로, 생명으로 예언되신 분
예수님은 분명히 예언적으로 출생했다. 우연히 출생한 것이 아니고 예언적으로 출생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람이 와야 된다는 것이다. 안 오면 안 된다는 사람이다. 예언적이라는 의미를 더 깊이 알아 보자.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 하더라. 여기서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창1:1~3).”는 것이다. 이 빛은 예언적으로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으면 반드시 빛이 와야 된다. 빛이 안 오면 안 된다. 예언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살아있는 분이고 생명이신 분인데, 하나님이 창조한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으면 안 될 것 아닌가?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살아계신 분이라면 당연히 빛이 있으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빛이 있으라 하는 것은 예언적인 것이다. 예정된 것이다.
우리 방 안에 전기가 배선되어 들어와 있다. 방 안에 캄캄한 어둠이 깔렸다고 하면 누구든지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켜려고 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불이 와 있으니까, 전기가 와 있으니까, 낮에는 전기 불을 꺼 놓았다가 밤이 오면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켠다. 왜냐 하면 낮에는 밝으니까 불 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저녁이 돌아오면 캄캄해진다. 그러면 불을 켜게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불 켜는 것은 이미 예정된 것이고 어둠이 오면 불을 켜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예정이라는 것은 반드시 불을 켜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어둠이 온다면 불을 켠다는 뜻이다. 만일 방 안이 해가 지지 않아서 계속 밝아 있다면 불을 켤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방 안에 어둠이 차는 밤이 돌아온다면 반드시 불을 켜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예언이라는 뜻이다.
성경에 모든 말씀들은 이런 예언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벌써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전기가 배선이 안 되어 있다면 캄캄한 밤이 와도 불을 켤 수 없는 것이다. 예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기가 배선되어 있으면 예언이 있는 방이다. 빛에 대한, 전등에 대한 예언이 주어져 있는 방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는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맞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어떤 경우이든지 어둠이 올 때는 밝아져야 되고, 물이 꽉 차 있을 때는 궁창이 생겨야 된다. 또 물이 땅에 덮여 있을 때는 물이 한쪽으로 가야 되고, 땅만 있을 때는 풀이 나야 된다. 이것은 예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분이니까 그렇다.
오늘날 우리는 전자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전자 시대는 우리에게 예언되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머리 속에, 생각 속에 더 편리하고 더 완전하고 더 좋게 살기를 원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나 소나 이런 것들은 ‘더 좋게 더 편리하게’ 이런 것을 모른다.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면 5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자 시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때에 지금의 전자시대는 예언되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것을 원하게 되어 있고, 사람이 그것을 만들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전자 시대는 벌써 인류가 태어날 때 예언되어진 것이다.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어둠에 가서는 빛으로, 답답한 곳에 가서는 궁창으로, 생명이 없는 곳에 가서는 생명으로, 이렇게 나타나도록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되어진 것도 그렇게 해서 예언되어진 것이다.
맨 처음에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이런 예언이 있다. 이 예언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할 것이다.” 왜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해야 하는가? 반드시 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중간에 혹시 잘못 되었을지라도 하나님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고쳐서 뱀의 머리를 밟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사탄을 이기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은 예언적인 것이다. 그것이 언제 나타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2)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 – 임마누엘
두 번째 출생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사7:14).”한 이 예언도 꼭 마찬가지다. 하나님 자신이 어둠을 싫어할 뿐 아니라 밝게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빛은 온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어둠은 원치 않지만 빛을 만들 수 없는 분이라면 빛은 올 수 없다. 어둠은 원하지 않고 빛을 만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빛이 왔다.
하늘 높은데서나 낮은데서나 아무데서도 징조를 구할 수 없는 절망적인 시대가 왔다. 이것이 아하스왕 시대이다. 왕은 완전히 절망해서 “높은데서나 낮은데서나 징조를 구해 보십시오(사7:11)” 하니까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사7:12).”고 하였다. 이 말은 전혀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보라 한 징조를 네게 주실 것인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사7:14).” 이렇게 예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어떤 상황에도 절대적으로 낙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유다는 지금 완전히 연합군에 의해서 포위 상태에 놓였다. 그래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두 왕들이 앗수르를 대항하기 위해 연합군을 조직해서 유다왕에게 ‘같이 합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유다는 앗수르가 무섭기 때문에 연합을 안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연합군이 와서 대신 유다를 포위한 것이다. 그 때 이런 절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에서 보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까, 선지자가 하는 말은 “두 왕은 타다 남은 부지깽이에 불과하다(사7:4).”는 것이다. “타다 남은 연기 나는 부지깽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절망적이지만, 하나님이 절망적인 분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어두운 상황이 더 오면 더 올수록 더 많은 빛이 나온다. 더 절망적일수록 더 소망이 나온다. 하나님 자신이 그러하다. 그래서 역사가 더욱 절망 안으로 들어오면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더욱 더 명백해져 왔다. 예언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예언적 출생 안에서 태어난 사람 –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은 이렇게 예언 안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났지만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나?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언적으로 태어났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나도 예언적으로 태어났구나.’하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창조 된다는 것은 예언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통해서 밖에는 자신의 나라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당신의 원수 사탄을 이기는 것도 사람을 통해서 밖에는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창조할 수 없는 분이면 몰라도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이라면, 사람이 창조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난 것도 예언적으로 난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는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그 역사의 완전한 해답으로서 예언되어진 분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역사 안에서 그 역사의 해답으로 예언된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의 인류가 구원되기 위해서 예언되어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우연히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 예언적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 때문에 태어났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분명히 예언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도 분명하게 예언적으로 태어났다.
2. 예언된 삶 - 육신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사심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사셨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은 신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왜 밥을 먹겠는가? 신이 왜 행로에 피곤하겠는가? 신 같으면 밥 먹을 필요도 없고 피곤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그는 행로에 피곤하기도 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기도 하고, 잠을 자야 하는, 신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우리와 꼭 같이 산 사람이다. 틀리게 산 것이 아니다.
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심
‘예수님은 우리와 능력이 다르다. 우리는 능력을 못 하지만 예수님은 행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했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그 일을 행하였기에 그가 우리에게 중요했지, 만일 신으로서 능력을 행하였다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신이 물 위로 걸어간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는 일을 신이 했다면 너무나 당연하다. “저가 누구기에 바람과 파도를 순종케 하는고(막4:41)?”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이 나온 것이다. 사람이 아니면 그 말이 나올 필요가 없다. 그는 우리와 똑 같은 인생을 산 것이다. 육신을 가지고 땅 위에 살았다는 것이다.
이것도 그에게 예언되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땅 위에 살아야한다. 살아야 하나님을 나타내게 되지, 땅에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땅에 와서 탄생할 뿐 아니라, 살아야 되는 것도 필연적인 예언이다. 예수님이 ‘태어나기만 하고 살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낳아 졌으면 원수를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 살아야 된다. 살아야 할 것이 예언되어 있다.
나. 우리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뤄야 하는 삶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언 때문에 살고 있다. 우리는 왜 살고 있나? 예언을 이루려고 살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마4:14,요12:38)”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뤄야하기 때문에 산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살고 있다. 왜냐하면 살아야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땅에 살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못하니까,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예언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예언을 이루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예언을 이루고 사신 사람이고, 우리는 그 예언을 이루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도 예언을 이루지 못하고 살 사람이 아니고,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산 것처럼 우리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살고 있다.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이 세상에서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냥 100년, 200년 흐르면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뭐 하러 사나?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고 살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무 이유가 없다.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고 안 살면 세상에 사는 이유가 없단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고 살고 있다. 우리에게 70년 80년 시간을 줬는데 왜 이 시간을 줬는가?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고 준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을 준다. 집을 하나 짓는데 얼마 동안 짓겠느냐고 물어봐서 석 달 동안 짓겠다고 하면 석 달 동안 기회를 준다. 그 기회 동안에 집을 지어야 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정해 놨는데, 그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주어진 시간 동안 그 예언을 성취해야 된다.
예수님께서 주어진 시간 동안에 그는 예언을 성취했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모두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요19:30)”하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주어진 시간 안에 예언을 다 이루어야,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다 이루었다 했는가? 그것은 아버지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나타냈다. 아들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나타내라고 주신 것이므로, 나타내라고 하신 예언을 이루었다. 그래서 “나는 다 이루었다” 그랬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생을 통해서 아버지를 나타내게 될 때 ‘내가 다 이루었다’ 그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3. 유대인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예언
세 번째로 그는 십자가에 죽었다. 그는 십자가에 죽도록 예언되어진 것이다.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도록 예언되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언 되었는가? 그러한 사람이 나오면 세상은 그런 사람을 멸시하고 죽이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예언이 그렇게 나온 것이다.
병아리 새끼를 하나 사다가 유치원 학생에게 주면 한 3일 정도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왜냐하면 밤낮 만지작거리니까 병아리가 죽을 것 아니겠는가? 당연히 죽게 된다. 그래서 거기다가 예언서를 붙인다면 ‘병아리가 세 살짜리 아기에게 가게 될 것인데, 세 살짜리 아기에게 간 병아리는 어린애 손에 주물럭거려지다가 결국 죽고 말 것이다.’ 이렇게 예언을 붙이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은 틀림없이 맞게 될 것이다. 꼭 같이 그러한 사람이 세상에 오면 세상은 그 사람을 버릴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게 된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간첩 하나를 보낸다면 남한에서는 그 사람을 잡으려고 비상이 걸릴 것이다. 이렇게 예언이 되어 있다. 간첩을 하나 남파해 보내면서 예언을 쓴다고 하면 ‘이 사람이 남한에 내려가면 비상이 걸릴 것이다. 전 군, 경찰에 비상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사방에서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수사해서 잡으면 사형을 언도할 것이다.’ 이것은 다 예언된 것이다. 그 사람은 와서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옥에 갇혀있는 간첩은 김일성이 예언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갇혀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어떠함 때문에 그 사람이 이러한 세상에 들어오면,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왕국 안에 들어온다면, 그 왕국에서는 그 사람을 발견해 내서 결국은 죽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언되어진 것이다.
가.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죽음도 예언된 죽음
우리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의 죽음도 예수 안에 예언되어진 것이다. 우리도 세상에서 그와 같이 멸시를 받게 되어 있다. 세상에서 그와 같이 버림을 받게 되어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오는 죽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면 우리도 그 죽음 가운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지 않으면 어떤 죽음 가운데 있는가? 우리가 보통 아는 죽음 가운데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들의 구원이 되었지만, 다른 많은 사람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 헛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헛된 죽음을 죽기 원치 않고, 예수의 죽음 안에 함께 죽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침례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놓으신 우리의 죽음은 예수 안에 있는 죽음이다. 그냥 저절로 죽는 것은 예수 안의 죽음, 예언된 죽음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죽음은 예언된 죽음이라는 것이다.
나. 사람은 예수 안에서 죽도록 지어짐
사람은 낳기 전부터 어떻게 죽도록 예언 되었나? 예수 안에서 죽도록 지어져 있다. 예수 안에서 죽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나기 전에 이미 벌써 십자가에 죽도록 지어졌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시기 전에 이미 십자가에서 죽도록 예정되어진 것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 죽도록 예정되어진 존재이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죽지 못하도록 빼내 간 것이다. 예수 안에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이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죽음은 영광스럽지 못하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도록 예정되어 있다.
한 알의 밀은 예정되어 있다. 땅에 떨어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도록 예정되었다. 이것이 예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이 예언되어졌다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은 모두 예수 안에서 죽도록 예언되어졌다는 뜻이다.
4. 예수 안에서 죽고 부활 함
부활도 우리에게 예정되어진 것이다. 부활이 예정되어진 것은 그렇게 죽기 때문에 예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활도 이미 예언되어진 것이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예언되었다. 많은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부활을 말한다. 우리도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어서 부활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예수 안에서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이 있도다(계14:13).” 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부활한 사람은 누군가? 예수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부활한 사람들이다. 예수 안에서 죽지 않으면 부활이 예언되어 있지 않다.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예언되어 있다. 그런데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튀밥 튀는데 가서 죽을 수 있다. 거기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예언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 죽으면 부활하도록 예언되어 있고 예수 안에서 죽지 않고 다른 데 가서 죽으면 부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과 예수의 인생은 바로 여기서 하나이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부 예언되어진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언되어진 분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자는 자기에게 정하여진 길로 간다. 사람에게 정해진 길이 있는데 예수님은 바로 정하여진 길로 갔다. 우리도 정하여진 길로 가면 하나다. 그런데 사탄이 그 안에 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갈라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정해지지 않는 길로 가고 말았다. 정해지지 않는 길로 가면 그 예언은 멸망이라는 예언이 되고 만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그 정죄를 받으리라는 예언에 포함된다. “악한 자는 악한 자의 부활로, 선한 자는 선한 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하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 죽으면 영원히 다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정죄 받을 사람들은 정죄 받는 부활로,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은 부활로 나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예언 중에 살기를 원한다. 사람이 창조될 때 예언 속에 창조되었다. 사는 것도 예언 되어 있고, 죽는 것도, 부활도 모두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이 예언되어 있으면 승천도 예언되어 있다. 승천은 부활의 결과이다. 그 부활의 영광을 말할 때 승천이라고 한다. 높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5. 승천하신 주님 – 우리에게 새 생명의 거듭남이 됨
이 사이클이 돌아가는 것이다. 낳고 살고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이것이 돌아가는 것이다. 승천한 영을 가리켜서 생명주는 영이라고 한다. 왜 생명주는 영이라고 말하는가? 우리가 승천 안에 있을 때, 높이 올리심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바퀴 돌아서 승천 안에 계신 것을 보고 거듭나게 되었다.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거듭남이 없다. 그가 부활하고 승천하여 영광 중에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거듭남이 되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다시 살게 되었다.
‘우리 인생은 정해진 길이구나’ 하고 정해진 노선 안으로 들어 온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가. 산 소망 안에서 다시 삶
만일 그가 십자가에 죽고 끝나 버렸으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를 버리고 가버렸으니까, 우리도 다 예수를 버리고 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없고 정죄 밖에 없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해서 새로운 생명의 기원이 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이제부터 우리가 죽을 소망이 아닌 산 소망 안에 사이클이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주님께서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 어떻게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 그가 나에게 대해서 높이 올리우신 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에 우리는 천사를 보고 부러워했다. 사탄을 보고 미혹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천사나 사탄을 보고 미혹당하지 않게 된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을 봤기 때문이다. 다시는 천사를 부러워 할 필요가 없고 사탄에게 미혹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거듭남이 없다. 성경구절을 읽어서 믿었으니까 거듭났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높이 올려진 것이 보이지 않으면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없다.
즉, 예언적인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이 삶을 예정해 놨구나, 예수에게 예정해 놓은 것처럼 내 인생을 예정해놨고, 죽음과 부활을 전부 예정해 놨다’ 하는 것이 어디서 결정적으로 보였나? 부활과 승천 안에서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이클을 다시 돌게 되었는데, ‘아, 나는 이제 예언되지 않는 삶은 살지 않아야 되겠다. 이제는 예언된 삶을 살아야겠다.’하는 이것이 거듭나 사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이클로 두 번째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를 본 사람이 또 한 바퀴 다른 사이클로 돌아가게 된다. 계속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맏아들이 되었다고 했다.
맨 처음에 한번 사이클을 돌려줬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서 계속 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부활과 승천 안에 있는 것을 볼 때, 그들도 그들의 삶이 예언 안에 살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살기를 원치 않고, 예언되어진 삶을 살기를 원하게 된다. 우리는 예언되어진 삶을 살아내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내 멋대로 사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놓은 길을 살기를 원하고 있다. 죽는 것도 내 맘대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죽음을 죽기 원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부활 안에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보좌 안에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보좌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되겠는가? 그 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또 살아난다. 그러니까 ‘이것이 생명주는 영이 되었구나.’를 알게 된다. 우리 자신도 어떤 사람에게 생명주는 영이 되어서 가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갈 때 그 사람에게 부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 사람의 생명주는 영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천사를 부러워하던 사람이 나를 부러워한다면 생명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길이 바뀐 것이다.
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부러워하는 생명으로
여러분 형제들을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이것은 생명주는 일이다. ‘어떻게 확 불어넣으면 생명이 들어가는가?’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가 원래 사탄에게 생명을 받을 때 뭘 받았는가? 사탄이 부러워서 받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럽게 보인 것이 천사였기 때문에,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부럽게 보인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이다. 이것이 바로 새 출발이다. 예수가 참으로 부러운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새 출발을 할 수가 없다. 어디로 새로 출발하겠는가? 더 부러운 것이 많이 있는데, 어디로 새 출발하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하나의 완전한 생애를 통해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온전한 씨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과정을 겪어서 마지막에 땅에 떨어지면 싹이 날 수 있는 씨가 되었다는 뜻과 같다. 예수님께서 첫 열매가 되었다는 말이 그 뜻이다.
맨 처음에 누구도 이 삶을 완전하게 살아내지 못했다. 완전하게 살아내지 못했으니까, 완전하게 부활하지 못했다. 그래서 생명주는 씨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살아내심으로써 생명의 씨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천사를 전혀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오직 예수를 완전하게 부러워하는 씨가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떨어지기만 하면 싹이 난다. 표현으로 볼 때는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적인 것은 그가 참으로 부럽다는 것이다. ‘참 존귀하다, 사람이 저런 것이 사람이구나! 저것이 진짜 사람이고 인생의 영광이구나.’ 하고 보여 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 난다. 내가 새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사이클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거기서 예언적인 삶을 받게 된다.
6. 우리의 삶은 선지자로 예언된 삶을 이루려고 사는 삶
결국 사람은 원래 예언적으로 살게 되어 있는데 사탄이 와서 거짓말로 속여서 헛길로 간 것에 불과하다. 모든 만물에게는 전부 예언되어 있다. 어떤 것도 그렇게 되어 있다. 보리는 보리에게, 밀은 밀에게, 사과는 사과에게 전부 예언되었다. 그것들은 어김없이 그 예언을 성취하고 가는 것이다. 가을에 사과가 하나 익었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사과에게 예언해놓으신 그 말씀들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이루어 놓은 것이 익은 사과다. 여름에 풋사과를 보고 ‘너는 뭐하고 있는 중이냐?’ 하고 물으면 ‘나는 하나님이, 선지자로 말미암아 예언해 놓은 것을 이루려고 살고 있다’ 할 것이다.
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구원
누가 우리에게 ‘당신은 왜 삽니까?’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선지자로 말미암아 예언한 것을 이루려고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예언을 이루려고 살고 있다. 이 예언 안에 들어가는 것이 침례를 받는 것이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막16:16)”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기이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생명을 구원하신 분이다.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다. 그 사람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보고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건져 주십시오’ 해서 건져지는 것이 아니고, 그 분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온 천하를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니(막16:15,16)”함은, 우리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말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예정해 놓은 그 길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 길에 사는 사람마다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서 영원히 똑같은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다.
밀은 밀에게 정해진 운명을 따라서 살기 때문에, 매년 밀을 심어도 항상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고 있다. 그러나 예언에서 제외된 뻥튀기 기계에 들어간 밀은 매년 반복할 수 없다. 영원히 부활에 이르지 못하고, 그냥 튀밥이 되어서 입에 들어가 똥이 된다. 우리도 예언에서 벗어지면 그렇게 된다.
주님은 우리를 어디서 구원했는가! 바로 거기서 구원했다. 우리도 뻥튀기 기계 속에 들어가서 익어버릴 인생인데 우리를 건져내어 밭에다 심어 놓은 것이다. 우리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도록 축복하신 것이다.
나. 정해진 길로 가는 것이 구원
우리에게 정해놓은 길을 제 코스를 따라서 정확하게 가면 빨리 갈 수 있고 완전하게 갈 수 있다. 그런데 사탄이 이런저런 여러 가지 것들로 방해물을 놓고 그 길로 제대로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천성을 향하여 가는 한 성도가 있는데, 그 천성 길로 가는 길에 여러 곁가지 길이 많이 있어서 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들여다보다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많은 고생을 하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문제들을 여러 가지 길로 만들어 놨다. 여기저기서 오라하면 들어갔다가 한참 고생하고 나오기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천성으로 간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정해진 길로 가면 곧은 길로 갈 수 있는데, 사탄이 이 세상에 자기의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어서 사람이 빠질만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거기 빠지다 보면 시간이 지연되는 것이 반복되게 되었다.
이미 우리는 이정표를 받았다. 이정표가 있으니까 갈 곳이 분명한데 가다가 곁길로 가서 한참 고생을 한다. 될 수 있으면 곁길에서 오래 고생하지 않고 빨리 돌아서 나오기를 원한다. 내가 갈 길이 바쁘면 빨리 돌아서 나와야 된다. 전적으로 안 보고 가버리면 좋겠는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 된다. 기웃거리다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러나 거기서 속히 나오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해진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해진 길이 있다. 사람에게는 사람에게 정해진 길이 있다. 사람의 정해진 길을 예수님께서 가셨다. 우리는 그 길이 우리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기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 새로운 세계를 삶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산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니(막16:16)”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안에 포함시켜서 우리 자신을 보여주려고 사신 것이 감사하다. 만일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리 맞추려고 해도 맞출 수가 없게 된다. 그 분이 사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똑같은 길을 걸어갔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딱 맞아지게 걸어갔다. 이것이 바로 감사한 일이다. 이것을 보고 은혜라고 말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안에서 은혜가 되었다’ 그렇게 표현하게 되었다.
만일 그가 엉뚱한 길로 가버렸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이 가신 다른 길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와 안 맞는 것이다. 물 위로 걸어간 것만 본다든지,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 아무리 해도 나와 맞지 않는다. 내가 물 위를 걸어갈 수도 없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수도 없다. 그것만 보고 있으니까 나하고 전혀 안 맞는다. 그래서 결국 예배만 드리고, 경배만 계속 드리고 있다. ‘주 예수님 살려 주십시오’하면서 절만 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꼭 맞추기 위해서 오셨다. 그를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나고 그 길이 나구나’ 그렇게 보여 지도록 삶을 살았다. 줄거리가 그렇다. 예수님이 사신 줄거리가 그렇다.
그런데 예수님 사신 곁가지를 보고 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예수님인 줄 착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보니 안 맞는다는 것이다. 물 위로 걸어가신 분과 맞추려니까 맞춰지겠는가? 그래서 멸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침례를 백만 번 받고, 아무리 옳게 받아 봐도 안 된다. 바로 예수님이 받았던 그 침례통에 들어가서 받는다 해도 효과가 없다. 물 위에 걸어가신 분을 보고 침례를 받아 봤자 멸망 밖에는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줄거리가 있다. 낳고 살고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한 줄거리가 있는데 이 줄거리는 우리의 줄거리와 똑같다. 거기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니”하였다. 침례 받는다는 것은 ‘그 안에, 내가 그 안에 들어갔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침례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서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다. 그것을 여러 말로 표현하려니까 말이 어렵다. 표현하기 어려우니까 ‘봐라 내가 이렇게 산다’ 하고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다. 간단하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 그렇게 선포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죽어서 다시 산다. 예수 안에 다시 사는 것이다.‘ 하는 것을 보이려고 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때 의식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물에 들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고 엉뚱한 예수를 보고 물에 들어간 것은 백번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세례가 옳으니 침례가 옳으니 서로 싸운다. 형식상으로 보면 침례가 옳다. 그렇지만 다른 데서 받는 침례는 받아봤자 헛일이다.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침례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인생이지만 인생의 길을 모르고,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에게 예언된 길을 모르기 때문에, 헛된 길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고, 혹시 이것인가 혹시 저것인가 찾아다니다가 우리 인생이 헛되이 돌아가고 말 것인데,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서 사심으로 우리의 길을 바로 보게 해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정해놓으신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길 안에서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우리를 통해서 다시 생명주는 영이 되어서 온 인류를 구원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 예수 안으로 불러 주시고, 그 안에 포함시켜 주시고, 이 사실을 우리에게 역력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분명한 삶을 나타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 앞에 서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지고 귀가 열려져서, 주님이 우리 안에 있고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일 아침에도 어린이 교회를 하게 된다. 아이들을 데리고 일찍 나오시기 바란다. 지난 주일에도 어린이 교회를 하니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다른 데 가서 놀고, 집회는 집회대로 조용하고 좋았다. 저도 아이들을 키울 때, 내가 마음으로 사랑하니까, ‘내가 깊이 사랑하면 된다. 깊이 사랑하면 다 알겠지’ 생각했다. 아이들 가지신 부모들은 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크니까 그렇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잘 모른다. 하나님 말씀을 못 들으니까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사랑도 모른다. 그래서 저도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나는 알려니 생각했다. 냄새를 맡고라도 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씀을 준 일이 없으니까 하나님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고 이게 심각한 문제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말씀을 꼭 줘야 한다. 저의 아이들이 맨 먼저 컸기 때문에, 한 두 사람을 놓고 어린이 교회를 못했기도 하고, 한편으로 생각할 때 ‘부모의 사랑 안에 있으니까 다 알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새 사람은 말씀으로 창조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부모들은 명심해서 나와 같이 고통을 당하지 않기 바란다. 오늘 저녁에도 아들과 이야기하다가 안 되어서 왔고, 딸은 내일 모레 시험이라는데 억지로 데리고 왔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억지로 데리고 왔다. 왜냐하면 공부를 못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말씀을 모르면 부모도 모른다. 하나님도 모르는데 어떻게 부모를 알겠는가? 진실로 부모를 모른다는 것이다. 참 부모를 모른다.
물론 보통 아들로서의 수준은 될 것이다. 그 정도야 되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수준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은 수준을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 참 하나인 한 생명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것은 말씀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말씀이 없으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도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과 못 듣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면 그 받은 은혜가 자기한테 생명이 되지만,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많은 은혜를 받았어도 생명이 되지 않는다. 이것을 볼 때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요1:1).” 이 말씀이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줘야 한다. 공부를 못하더라도 말씀을 줘야 되겠다. 어찌하든지 교회에 데려와서 말씀을 듣도록 해줘야 된다.
아이들은 교회에 오는 것을 좋아한다. 떠들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즐겁고 좋은 일이다. 다른 친구들 만나면 즐겁고 좋지 않은데, 교회에 와서 한 시간씩 떠들고 놀다 가는데 이래서는 결국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으로는 모른다. 결국 말씀으로 양육을 해야 하는데 아빠 엄마들이 직접 집에서 말하는 것이 잘 안 될 것이다. 교회에 데리고 와서 말씀을 듣게 해주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일이 자녀들을 잘 키우는 일이 된다. 저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원한다.
아이들이 다 커니까 굉장히 힘이 든다. 자기대로 아는 것이 있고 이론이 명백하니까 반격을 하면 얼마나 예리하게 하는지, 그것을 받아 내려면 굉장히 힘이 든다. 아주 예리하게 반격을 한다. 물론 어렸을 때 매로 키웠으면 그렇게 못하겠지만, 매로 키우지 않으니까 자유롭게 반격을 하니까 매우 어렵다.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 안에서 키우도록 그렇게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