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 변천사


조선총독부 청사(朝鮮總督府廳舍)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시행한 최고 행정
관청인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건물
일본은 경복궁 내에 우리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라는 건물을 세웠다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1912년부터 설계에 착수하여 1914년 사망하기 전까지 기초 설계를 마쳤고, 그 후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등이 청사의 설계를 완성하여 지었다. 당시 동양 최대의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었다

1910 년 < 총독부 >는 경복궁안에 4000 여칸을 헐어 개인에게 불하했고 ,1926년엔 근정전 앞마당에 조선총독부를 지어 < 조선왕조 > 500 년 역사를 가려버린다 . 임진왜란 때 전소된것을 1869 년 <대원군 >이 왕권의 상징으로 무리하게 중건하여 숱한 반대와 고난을 받았고 , 명성황후도 이곳에서 시해를 당했다 . 고종은 아관파천 후 이곳을 자주 찾지 않은 탓에 퇴락했고 , 조선총독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제가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은 후 경복궁 동쪽 건춘문 옆쪽으로 옮겨놓은 광화문.
원래의 광화문 자리는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의 정문으로 쓰였다.

1926년 1월 4일에 건물을 완공하여 시용식을 거행하였고, 같은 해 10월 1일 시정기념일에 맞추어 건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인 낙성식을 가졌다 총독부 청사의 신축 공사는 처음에는 5개년 계획과 300만 엔의 예산으로 시작하였지만 완공까지 10년이 걸렸고, 675만 1,982엔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하던 과정에 조선인 건축가로 조선총독부 토목부 건축과의 기수(技手기술직 8급 공무원의 직급을 칭하던 기원(技員)의 옛 표현)인 박길룡(朴吉龍 한국 최초의 근대건축가 )과 이훈우(李勳雨), 고용직으로 이규상(李圭象), 김득린(金得麟), 손형순(孫亨淳), 박동린(朴東麟) 등이 참여하였고, 일본인과 중국인 석공 300명과 조선인 노동자 2백만 명(연인원)이 동원되었다 우리 할아버지대의 숨결과 땀과 회한이 뒤섞인 건물이다

일제감정기 조선총독부와 경복궁 (1926년에 완고하여 이전함)


◀ 동남외각옥 정면
◀돔 모양의 중앙탑옥
◀중앙홀 남측
◀ 중앙홀 북측
◀천장 유리화

▲조선총독부 중앙홀 북면도, 1922년 추정.

▲광화문통에서 바라본 청사 *광화문통;세종대로(世宗大路)는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역 로터리에서 시작하여 종로구 광화문 로터리에서 끝나는 도로이자, 국도 제48호선과 서울특별시도 제31호선의 일부이기도 하다. 법정동으로는 종로구의 세종로(世宗路)와 중구의 태평로(太平路)에 해당한다.

1936년 조선총독부(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쪽에서 바라본 세종로의 모습.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1945년 9월 9일에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였다. 같은 날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총독부 청사의 제1회의실에서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 군단장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과 제9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사이에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1962년부터는 정부청사로 사용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1995년)
누구에게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잊고 싶고, 묻어두고 싶은 과거의 일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 역사에도 잊고 싶고, 묻어두고 싶은 과거가 있다. 그 가운데 진하게 슬픔이 베어, 어쩌지 못하고 덮어두고 싶은, 그 과거가 ‘일제 강점기’였다. 그래서 진한 슬픔의 역사가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여,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남겨 놓고 싶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총독부’ 청사이다.

▲철거되기 전 사진
조선 총독부 폭파 김영삼정부(1985년8월15일)
1993년 8월 9일 김영삼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수치스럽다고, 1995년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던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을 재건하는 계획을 결정한다.
500년 조선왕조의 경복궁 앞에 있던 이 흉칙한 건물에 대한 철거결정에서 당시 한국인의 여론조사에서 90%이상의 절대 찬성을 나타낸다.이것과 함께 김영삼 정권의 지지율의 당시 최고조로 올라갔다.
후에 일본측에서 【"절대 안된다, 우리와 협의해서 총독부 건물을 폭파 말고 역사의 기록적인 차원에서 보존쪽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라고 말한다
이에 잠시 소강상태이던 국립중앙박물관 폭파계획은 일본정치인의 일본의 지배는 조선에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라는 발언과 일본교과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서 확실해진다.
이런 와중에 YS는 그유명한 발언을 한다.
【일본인(초크바리)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라고 발언이다. 그후 얼마안되 국내외의 반대를 묵살하고 말 그대로 치욕의 상징인 이건물을 바로 폭발시켜버렸다.
(다만 후에 Imf와 함께 경제도 함께 폭발시켜 버렸다는 후문이 있다)







▲철거 가림막의 설치 (1996년)

▲건물 철거 작업은 장장 1년 반동안 이루어져 96년 11월에 종료하게됨

▲중앙돔 랜턴

▲총독부 철거부재

▲총독부 철거부재

▲기둥 상부

▲정초석

◀ 지반 공사에 사용된 나무 말뚝
경복궁자리가 명당이고 풍수적으로 굉장히 명당이기에 ys정부에서 총독부를 철거하기전 밑에 경복궁과 조선의정기를 막는 말뚝이 박혀 있을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됐는데 총독부철거후 밑에는 실제 커다란말뚝들이 박혀있었다

조선총독부 철거 후 경복궁과 광화문이 한 눈에 보이게 되었다

▲1950년 6·25전쟁 직후의 경복궁


과거 모습(위)과 변화된 현재모습(아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육조거리에 광화문을 옮기고 조선총독부가 세워진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





조선총독부 자리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총독부 청사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던 시절,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1995년 국립고궁박물관을 건립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을 시작한 2004년부터는 문화재청이 인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사진과 현재의 사진을 대조하면,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총독부 후생복지관 건축물과 같은 위치에 세워졌다. 경복궁의 축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축 위에 건립된 셈이다.


광화문 복구 계획에 따라서 화제가 된 광화문광장의 본래모습을 구현한 모습이다. 광화문 복구와 함께 전체적인 모습은 2030년까지 되돌려 완성시키는 방안이라고 발표되었다.

경복궁과 이어지는 서울의 상징 광화문의 교통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