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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집회
하나님의 신성한 건축
5. 건축 안으로 들어감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출36“1~7)
하나님 집의 건축은 인성과 신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인성과 함께 운행하시고, 그 주권을 땅위에서 행사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 스스로, 홀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어떠함이 그분의 주권을 행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왜 권세 있게 나타나는데 나에게는 왜 권세 있게 안나타나는가?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하나님은 같지만 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권세가 더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권세가 덜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모세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세와 예수를 통해서 나타나는 권세가 달랐던 이유는 하나님이 달라서가 아니라 인성이 달라서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도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서 그 권세가 더 드러날 수도 있고, 덜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를 바란다.
오늘은 우리가 건축 안으로 들어가는 체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건축이 될 때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건축이 됐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됐다. 그래서 바깥마당까지, 울타리를 칠 때 까지 그것이 종료가 된다.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때는 반대로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우리의 체험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발하여 진 것은 안에서부터 밖으로 발하여 진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고백한 것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고백해진다.
성막 안에 들어가려면 바깥뜰을 지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안에 계시고, 안으로부터 나오지만 우리는 밖에 있기 때문에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바깥뜰로부터 지성소까지 건축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 건축은 하나님의 증거이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증거 장막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바깥뜰로부터 들어가게 되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 옛날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지 않았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제사장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섬긴다는 말은 세상에서 보통 생각할 때 종이 상전을 섬긴다는 개념만 갖고 생각하니까 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일이 아니고, 그분을 형상화 시키는 것, 그분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늘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갈망은 자기를 형상화 시켜주는 것을 갈망하고 있다. 그분을 도우려면 그분을 형상화시켜주는 것이 그분을 돕는 일이다. 제사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분을 형상화 시켜주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한다는 것은 결국 그분을 형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된다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가 우리를 통해서 그분을 형상화시킨 것이니까, 우리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써 있을 것이다. 종들의 이마에 그의 이름이 있더라 하는 말이 그런 뜻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 이마에 그의 이름이 써 있도록 되어 있다. 늘 웃는 사람은 늘 웃어야 하는 사람은 그 이마에 항상 웃는 사람이라는 이름이 써 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황수관 박사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 인상이 너무나 고약하게 생겨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그것을 고쳐 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웃는 연습을 계속 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사방에 강의를 하고 다니는데, 원래는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주 무뚝뚝하게 생긴 사람인데 하도 웃다보니까 얼굴이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예쁘게 생긴 사람이라도 매일 찡그리고 있으면 찡그리는 사람이 되고, 아무리 못 생긴 사람이라도 매일 웃고 있으면 웃는 사람이 된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형상화시키는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이마에 써 있게 된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팔자를 고치려면 아주 간단하다. 내가 하나님 팔자로 팔자를 고치려면 내가 항상 하나님을 표현하면 된다.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경우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쓰게 된다면, 그럼 나는 그 사람 앞에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어떻게 행사되는가? 우리가 그분을 형상화하는데서 주권이 행사되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그 자리에서 바로 나타내신다. 우리가 하는 것 같은데 그분이 하시는 것이고, 그분이 하는 것인데 우리가 하는 것으로 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간다는 일은 그래서 신성한 일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지고의 축복이 되는 일이다. 맨 처음에 성막 안으로 들어가려면 바깥뜰로부터 들어가야 되는데, 바깥뜰에 들어가는 사람은 제사장의 의복을 입는 사람이여야 한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을 표현한다. 경찰관의 옷, 군인의 옷, 의사의 가운, 그것은 다 그 사람은 신분과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이다.
제사장이 제사장의 옷을 입는 것은 자기 신분을 표현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신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항상 표현해야 된다.
아무리 경찰관이라고 하더라도 사복을 입고 있으면 수사권이 없다. 경찰복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만 어디 가서 차가 잘못 가면 서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딱지도 뗄 수 있는 것이지 자기가 경찰관이라고 해서 평상복이나 추리닝 입고 나와서 딱지 떼자고 하면 누가 딱지를 떼겠는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그 일에 알맞은 신분이 되어야 되고, 그 신분이 항상 우리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된다. 이거 자체가 큰 축복이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화 하는 사람의 신분을 늘 지니고 있고, 늘 표현한다는 사실은 우리 인생에 얼마나 복 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옷을 입을 때는 씻기고 입는다고 되어 있다. 회막문에서 씻기고 그 사람에게 옷을 입힌다. 섬기는 신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묻었던 것을 씻어내야 된다. 그대로 가지고 옷만 입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몸을 씻고 옷을 입어야 된다. 우리는 세상을 섬기던 사람들이고, 바로를 섬기던 사람들이다. 세상을 섬기고 바로를 섬길 때 묻었던 때를 우리는 씻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된다. 그 옷을 갈아입지 아니하면 우리는 제사장의 신분을 행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제사장의 신분이 아니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사람은 기름 부음을 받게 되어 있다. 출애굽기 40장 13절에 보면 기름을 바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임을 받는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위임하기 위해서 옛날에는 기름을 부었다. 왕을 위임할 때 왕에게 기름을 부었고, 제사장에 기름을 부었다. 기름 부었다는 말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스도는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제사장의 옷을 입은 사람은 기름 부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도록 위임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신분은 유일한 신분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분이고 유일한 신분이다. 왜냐하면 원래 사람이 창조될 때 하나님을 형상화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신분은 우리 신분이 아니고, 오직 제사장의 신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분이다.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직무도 제사장의 직무만이 우리에게 인생에게 유일한 직무이고, 다른 것은 다 부수적인 직무에 속한다.
경찰관이 경찰 직무를 하면서도 밥도 먹어야 되고 물도 마셔야 되고, 그러나 밥 먹고 물먹는 것은 모두 다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에 살면서 어떤 필요들을 찾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모두 우리의 유일한 신분과 유일한 직무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다. 이것이 주객이 전도되면 절대로 안된다. 무엇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서 먹고 있는가, 이것이 거꾸로 되면 안 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길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서 먹는가 하는 말이 있는데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먹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산다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먹는 재미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것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부여된 고유한 직무, 유일한 직무를 위해서 다른 것은 모두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 기름 부음은 개인적인 것 보다는 단체적인 것이었다. 제사장의 봉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조를 짜서 봉사한다. 1조, 2조, 3조, 4조로, 성경에서는 그것을 반열이라고 되어 있다. 제사장 반열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로 하면 조를 짠다는 말이다. 조별로 오늘 제 1조가 봉사하면 제2조는 내일 봉사하는 식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기름 부음도 단체적인 것이다.
오늘 교회는 하나님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체적인 기름 부음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똑같이 몇 사람이 되든지 간에 우리는 유일한 신분이고 유일한 직무를 갖고 있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신분이 각기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많다 해서 우리의 직무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은 많아도 신분은 하나이고, 사람은 많아도 직무는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있다. 한 직무에 있다. 경찰관이 아무리 많아도 직무는 하나다. 치안을 유지한다는 직무가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분도 역시 하나다.
우리도 우리 안에 기름 부음은 유일한 신분을 위해서, 유일한 직무를 위해서 위임 받은 것이다. 우리 인생이 유일한 신분을 위임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정말 먹기 위해 사는 것뿐이 안된다. 사실 알고 보면 인생을 사는 것이 거의 대부분 먹기 위해서 일 한다. 먹고, 입고, 자고 이것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니까 만일 우리에게 이런 유일한 직무가 없다면 우리는 그냥 먹기 위해 사는 사람에 불과하다. 소를 가만히 보면 하루 종일 풀을 뜯어 먹는다. 풀을 뜯고 또 앉아서 되새김을 한다. 하루 종일 하는 것이 먹는 것만 하고 있다. 아무 일 없는 소는 그렇다. 사람도 아무 일이 없다면 그냥 먹기 위해 사는 것에 불과하다. 아침 먹고 조금 있으면 점심 먹어야 되고, 점심 먹고 조금 있으면 저녁 먹어야 되고, 저녁 먹고 나서 조금 있으면 잠자야 되고, 또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어야 되고, 계속 먹고 자는 일만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만일 이 유일한 직무가 없다면 우리 인생도 하루 종일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다를 바가 없다.
바깥뜰은 어떤 모양인가 하면 세마포로 울타리가 쳐 있는 모습이다. 말뚝이 있어서 거기에 세마포 장을 쳐 놨다. 이 말뚝 안에 울타리 안에 번제단이 들어있고, 물두멍이 들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재료는 놋과 세마포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놋과 세마포로 만들어졌다. 기둥이나 번제단은 전부 놋으로 만들어져 있고, 포장은 마포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놋은 심판을 상징하고, 마포는 의를 상징한다. 이 전체적인 분위기가 심판과 의를 우리에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막에 들어서면 첫째 분위기가 심판과 의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동산에서 나간 아담에게 한 말이 두로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 하게 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는 언제든지 화염검 앞에 서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막 안에 들어갈 때도 먼저는 화염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해 놓은 것이 바깥뜰의 모양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내 의를 주장하고 밖으로 튀어 나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고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가 중요한가, 하나님의 의가 중요한가, 이 판결을 해야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에 승복하면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에 승복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면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자기 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악과로 인한 자기의 자랑과 주장이다. 선악을 아는 것으로 인해 사람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도 자기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람도 없고 자기가 똑똑하지 않다는 사람도 없다. 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자기가 똑똑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선악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다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실 없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전에서 붙어보면 아주 똑똑하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옳고 그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이것 때문에 ‘나는 나이다’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주장할 때 이것을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아를 키운다고 모두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가면 이것이 부끄러운 것이 된다. 왜냐하면 선악과의 자랑과 주장 때문에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자기가 드리는 예물도 옳은데 왜 저 사람 예물만 받느냐는 것이다. 나는 농사를 지어서 내 정성을 들여서 드렸고, 동생은 동생대로 자기가 양을 가져 왔는데 왜 내 제물은 받지 아니하고 저 재물은 받느냐, 이래서 동생과 하나님을 판단했던 것이다. 참 똑똑한 일이다. 너무나 똑똑했기 때문에 자기 동생 가인을 죽였다. 이것이 최초의 살인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악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판단하고, 자기 동생을 판단하고, 그래서 결국 살인을 하게 됐다.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죽이고 할 때마다 항상 자기 선악과로 무엇인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주장이 없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누가 되게 밉다는 것도 내가 알고 있는 선악과의 지식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상대방이 반대로 주장한다. 그러면 밉다. 가인은 이것 때문에 아우를 죽였다.
그러면 아벨은 어떤가? 아벨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가인보다는 낫지만 아벨 속에는 나는 억울하다는 것이 항상 들어있다. 나는 억울하다, 당했다, 피해자라는 이 생각을 갖고 있는데, 세상에 보면 아벨이 참 많다. 문제를 가진 사람 모두를 보면 다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기가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둘이 서로 이야기 해보면 서로가 피해자라고 한다. 어떤 피해의식을 왜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항상 자기는 선한데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신원하는 피라고 한다. 한 사람은 자기주장으로 인해서 상대방을 죽인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자기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늘 하소연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기의 의라고 한다. 자기 의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뒤에 가면 율법의 의가 된다.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고, 또 도덕적인 의도 되고, 이래서 인간 사회는 의로 꽉 차 있다. 의로 꽉 차 있는데 그 의는 서로가 미워하고 판단하고 죽이고 원통해 하고 신음하는 그 의에 속한다. 이것은 평화가 없는 의이다. 참으로 의롭다면 평화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평화가 없고, 의가 많이 있는 곳일수록 더욱 더 불안하고 의가 많이 있는 곳일수록 더욱 싸움이 많이 있다. 의가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의가 많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인들이 많은데 가면 둘이면 둘이 갈라지고, 셋이면 셋이 갈라지고, 넷이면 넷이 갈라지고 하나도 연합되지 않는다. 차라리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면 그래도 훨씬 낫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면 한시도 싸움하지 않는 날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의가 얼마나 무익한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아들을 주신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란 말인데, 이것이 구약에서는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던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때문에 죽으심 당한 것을 이야기하고,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의미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임 당할 양이 된 것이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임 당하신 예수가 되게 된 것이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살리려면 어린양이 되어야 하고, 예수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엣날에는 하나님이 어린양이 됐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가 된 것이다.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이 참 의라는 것이다. 무엇이 의인가? 옳고 그른 것이 의가 아니고, 살리는 것이 의다. 쉽게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옳은 사람이 의가 아니고, 살리는 사람이 의다. 세상은 나가면 전부 옳고 그른 것으로 따진다. 그렇지만 부모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때로는 자기를 포기할 때도 있고 때로는 자기를 양보할 때도 있다. 부모만 그렇게 한다. 세상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세상 어디를 가도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의를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부모는 혹시 도저히 안되겠다, 저렇게 하면 자식이 죽겠다 생각되면 자기 의를 포기한다. 부모만이 그것이 가능하다. 그 외에 형님도 안되고, 동생도 안되고, 남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부모밖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가 이 의 앞에 서게 되면 자기 의라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살리는 의 앞에 오면 선악을 하는 지식의 따른 의가 얼마나 쓸모가 없는 것인지. 옳기는 옳은데 사람은 살릴 수 없다. 똑똑하기는 한데 살리지 못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부 옳고 그른 것만 생각하게 된다. 살리냐 죽이냐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옳으냐 그르냐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나지 못하게 된다.
살리는 곳에 가면 옳고 그른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 있다. 그래서 살아나게 된다. 자녀들이 왜 자라나는가? 부모들이 살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살아난다. 부모가 어려서부터 계속 판단만 한다면 심판만 한다면 자기네들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세상은 심판해도 부모는 심판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들이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 것만이 아니고, 우리를 살리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바깥뜰의 전체적인 모습이 하나님의 의, 의가 표현되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안에 번제단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의 앞에 볼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내 갈 곳은 어디인가? 내 갈 곳은 번제단 밖에 갈 곳이 없다. 왜? 번제단 위에는 모든 것이 다 불 탈 것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의를 안다면, 참된 의를 안다면, 우리의 거짓된 의는 불 탈일 밖에 아무 것도 없다. 없어져야 할 것 밖에 죽을 일 밖에 없다.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이다. 번제단 위의 불은 모든 것 불사르기 위한 것이다. 모든 가짜를 다 불사르는 것이다.
성막 건축 안에서 보면, 금과 은과 놋이 주된 재료가 되어 있는데 이 주된 재료 이외에는 다 불태우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성이 만들어져 있는데, 불탈 것은 다 불타버리고 없어진 것이다. 타지 않을 것만 남은 것이다.
선악과의 능력, 선악을 아는 능력은 자기 이름을 높이는 데 필요하다. 남을 심판하는 데 필요하다. 살리는 데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살리는 데는 아무 능력이 없다. 모든 사람이 선악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 남을 심판하는 능력을 키우고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가 판단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꼭 하나님 같다.
교회 안에서도 심지어는 누가 누구를 판단할 때 보면 그 사람이 꼭 하나님 같다. 네가 이것을 먹는다면 정녕 눈이 밝아져 선악을 하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심판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자기도 그 심판에 의해 심판 받을 사람이 또 심판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우습겠는가. 이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람은 죽을 일 밖에 없다. 아무리 봐도 너는 쓸모가 없고 죽을 일 밖에 없다.
하나님의 불이 거역하는 것과 헛된 것을 불사르고, 영원하고 진실한 것만을 구별해 낸 것이다. 불을 태우면 금과 은과 놋만 남는다. 다른 것은 다 타버리고 없다. 이것이 건축의 재료가 된다. 우리가 건축의 재료가 되려면 건축 안으로 들어가려면 재료가 되어야 한다. 재료가 되려면 불탈 것이 타고 나야만 재료가 될 수 있다. 불타지 않는 것이 있으면 재료가 될 수 없다.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때 건축 안으로 들어온 것인데, 들어와서 왜 자꾸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불타지 않는 것이 있어서이다. 그것이 불타느라고 냄새가 막 난다. 우리 집은 시골이라서 가끔 가다가 사람들이 뭘 태워서 문제가 많이 된다. 쓰레기 종량제를 하여 도심지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사람들이 봉투 값이 비싸니까 봉투 값을 아끼려고 쓰레기도 줄이고 분리수거도 하는 효과가 있는데 촌이나 공장지대 같은 데를 가면 봉투 값 안쓰려고 그냥 밤이면 태워 버린다. 그래서 공해가 더 심해지고 있다. 시골에 가면 밤에 전부 다 태운다. 우리 동네도 시골이라서 뭘 태운다. 그럼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난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때는 고약한 냄새가 날 수가 있다. 때로는 송장 타는 냄새 같은 것이 난다. 그 냄새가 아주 고약하다. 나무 같은 것을 태울 때는 연기만 나서 맵기만 한데 동물성을 태우면 냄새가 지독하게 난다. 사람 타는 냄새처럼 지독한 냄새가 없다. 교회 안에서 타는 냄새는 아주 지독하게 난다. 그렇지만 태우지 않고는 건축이 안되니까 태워야 한다. 누가 나에게, 누가 너에게 이러고저러고 한다 하면서 속상해하는 사람들은 탈것이 좀 있어야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면 아주 쉽다. 내가 탈 것이 남아서 그래서 그렇구나. 상대방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나 때문에 그렇구나. 내 탓이요 하면 해결이 아주 쉬운데, 네 탓이요 하면 해결이 아주 어렵다. 네 탓이요 하면 60억이 되고, 내 탓이요 하면 하나밖에 안 된다. 내 탓이요 하면 해결하기가 쉽지만, 네 탓이요 하면 해결이 안 된다. 50억이 언제 해결되겠는가. 이 사람이 걸렸다가 괜찮아지면 다른 사람이 걸리고, 그 사람 걸렸다 괜찮아지면 또 다른 사람이 걸리고. 우리 교회만도 천명이 넘으니까 천명이 다 넘어가려면 죽을 때까지 해도 다 못 넘어간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내 탓이요 하는 것이다. 나만 고치면 다 해결이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래서 구속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 불타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이 심판을 통해서 구속에 이르는데, 이 구속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하나님 집을 건축하는데 헌신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내가 불타고 나면 금과 은과 놋 밖에 없다. 이것은 어디에 쓰는가? 건축하는데 밖에 쓸 곳이 없다. 그래서 자연히 나는 하나님의 집의 건축을 위해서만 필요한 사람이 되게 된다.
우리가 억지로 하나님의 집의 건축이 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을 받고 나면 건축 할 것 밖에 안 남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는 건축할 때 밖에 쓸데가 없다. 우리 인생을 잘 알고 보면 정리가 싹 되고 나서 보면,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일이 없구나, 내가 주어진 유일한 직무가 이것이고, 유일한 신분이 바로 이것이구나, 이거 이외에는 내가 할 일이 없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알게 된다. 그래야만 헌신하게 된다. 이 헌신이 바로 구원이다. 이렇게 헌신하게 된 것이 구원이다.
구속을 통한 구원! 이것은 건축에 들여지도록 되어 있다. 길은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심판하시는가? 그것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려고 심판하신다. 심판하지 않으면, 불태우지 않으면 건축 재료로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불태우는 것이다. 고물상에 가면 쓰다 남은 전선들이 많이 나온다. 예전 같으면 도로 갖다가 전선으로 쓰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했는데 그 껍데기를 다 까야 한다. 깔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불태워 버린다. 그러면 안의 구리만 남게 된다. 그것만 쓸 수 있다. 구리는 다시 구리 공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녹여서 구리철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건축에 필요한 것이 되게 된다. 산업에 필요한 것이 되게 된다. 재활용이 가능하다. 그냥 놔두면 아무 쓸 곳이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탈 것이 타고나면, 남는 것은 건축에 쓸 것 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 우리 인생은 원래 건축에만 쓸려고 만들어 놨는데 거기에 무엇을 많이 입히고 덮어서 건축에 쓰면 아까울 것처럼 만들어 놨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데 자기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데 자기를 사용하다 보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사탄을 형상화하는데, 바로를 형상화하는데 자기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를 형상화시키던지 형상화시켜야 한다. 하나님을 형상화시키지 않으면 사탄을 형상화시켜야 한다.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 나는 절대고 그렇지 않으리 생각하지만 안그럴 것이 없고, 내가 만들어지길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릇으로 만들어진 것은 어차피 무엇을 담게 되어 있다. 이것을 안 담으면 저것을 담고, 저것을 안담으면 이것을 담는다. 물바가지로 쓰지 않으면 똥바가지로 쓰는 것이다. 바가지가 팔자가 그렇다.
우리 팔자가 그렇다. 우리 팔자가 그릇으로 만들어졌다. 무엇을 담을 그릇으로, 무엇을 표현할 그릇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쓰여지던지 그렇게 쓰여지는 것이다. 다르게 쓰일 수가 없다. 물건을 자세히 보면 그 모양 생긴 대로 사용된다. 원래 만들어진 모양대로 사용된다. 우리도 만들어진 모양이 있기 때문에 그 모양대로 사용되게 된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축복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축복이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멸망에 이른다는 그 말은 우리가 사탄을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멸망에 이른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깊이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면 난 사탄을 표현한다. 다른 길이 또 있는가? 다른 길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심판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심판을 받고 들어와야 하나님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이 번제단에서의 심판! 오늘 이것이 십자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볼 때 남의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늘로부터 온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의 일도 아니고, 하늘로부터 온 특별한 사람의 일도 아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불타야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대표해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불타게 된 것이다. 그 불탄 것을 보니까 인생의 운명이 저것이구나, 저 사람이 저런 것은 바로 나 자신이구나.
제자들은 그걸 처음에 모르고 도망을 갔다. 그 사람하고 나하고 다른 줄 알기 때문에 도망을 갔다. 그런데 뒤로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구나.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 내가 거기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구나. 그것을 뒤에 알게 되었다. 남이 아니고 나였구나. 나는 그 안에 있었구나. 하나님은 그 지혜 속에서 나를 그 죽음 안에 포함시켜 놓았구나.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그의 죽으심 안에 나를 포함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사람이구나로 알게 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은 사람은 불평도 없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사람을 살리셔서 부활하게 했다.
이 십자가의 체험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체험이다. 밖에서 볼 때는 죽음이고, 뒤에서 볼 때는 부활이다. 내가 그분의 죽음 안에서 발견됐는데 나는 부활의 삶을 살게 된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은 사람으로 사는데 살아지기는 부활이 살아진다. 이것이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비밀이다. 우리는 죽음을 살아내는데 삶이 살아진다.
바울은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했느니라하고 말했다. 바울은 날마다 가서 자기 죽은 것을 내놨다. 자기 죽음을 살아냈다. 그런데 살기는 다른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죽게 하시고,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예시해 놓은 것이 이삭을 모리야산으로 데리고 오라 했던 그것이다. 모리야 산에 갔을 때 이삭은 이미 제단 위에 올려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단에 올려진 이삭 대신에 수양을 준비해 놨다가 수양으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고 이삭을 다시 돌려보냈다. 그것은 이삭이 다시 부활해서 나왔다는 뜻이다. 한번 제단에 갔던 사람이니까 죽었다가 산 사람이다. 죽었다가 산 사람이니까 이 사람의 삶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도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은 좀 다르다. 죽음 앞에 갔다가 다시 온 사람은 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어디를 갔는데 자기에 대해서 기록해 둔 곳을 가서 보니까 자기에 대해서 아주 엉망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는데 다시 가서 네가 좋은 일을 하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나니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살아 있을 동안에 좋은 일을 하려고 애를 쓴다. 한번 죽었다가 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우리 집안에서도 돈이 많은 부자가 있었는데 고리대금을 했다. 옛날에는 지금 같이 은행에서 7부, 6부 이자를 내고 빌려주던 때가 아니라 모두 사채를 빌려 쓰는 그런 때로 달라 변으로 한달에 1할을 내는 것들이다. 어느 섬에 사는 사람인데 그런 것을 해서 돈을 많이 모은 사람이다. 봄에는 자기 양식을 풀어서 주고, 가을이면 비싼 이자로 되돌려 받는다. 장리쌀이라는 것은 봄에 한 가마니를 갖다 먹으면 가을에 두 가마니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가난이 대물림을 하는 것이다. 도저히 거기서 이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가마 먹고 두 가마 갖다 주어야 하니까 무슨 수로 그것을 갚아 내겠는가. 그래서 해마다 빚이 누적되는 것이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밉다고 고리대금업자라고 해서 묶어서 바다에 싣고 노를 저어 멀리 가서 발에 돌멩이를 달아서 빠트려 버렸다. 안죽으려고 물에 들어가는 동안에 발에 묶어 놓은 돌이 빠졌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살아났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다. 염라대왕 앞에까지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사람이 완전히 마음이 달라져서, 봄이면 보릿고개가 돌아오면 자기 창고에 있는 양식을 풀어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준다. 그냥 주지는 않지만 그걸 주고, 거기는 도미의 주산지인데 여름이 오면 도미를 잡거든 다른 사람을 주느니 나를 주라는 것이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좋겠는가. 봄에 배고플 때 양식을 갖다 먹고, 여름과 가을에 도미를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파는 값으로 판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이 없어지게 됐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세상에서도 죽었다가 나오는 것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죽으면 안 되겠지만 죽을 뻔하다 살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이 죽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고 그것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알면 우리는 옛날처럼 똑같이 살 수가 없다. 어차피 내 운명을 알았으니까, 내가 내 운명대로 다르게 살아야 한다. 이 사람이 건축에 쓰여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게 된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 다음은 번제단을 지나면 물두멍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놋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재단을 만든 놋은 250명의 거역하는 고라 자손들을 네 향로를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다른 부를 들이다가, 명령하지 않는 다른 부를 드리기 위해서 갔다가 이 사람들은 심판받은 사람들이고 한꺼번에 죽은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의 향로를 거둬다 그것을 녹여서 다시 번제단을 만들었다. 심판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것을 만들어 놓았다. 불사름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
물두멍은 그 놋이 아니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이런 유리거울이 아니고 놋쇠 거울이었다. 그것을 모아서 만들어 놓은 것이 물두멍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세수 대야이다. 이것은 심판이라기보다는 씻고 보기 위한 것이다. 거울은 자기 얼굴을 보려는 것이다.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본다는 뜻이다. 내가 번제단에서 지나오는 내 모습이 무엇인가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번제단에서 불타고 나면 나는 뭔가?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내가 보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보고 내가 그 거울을 보면 나는 뭔가? 나는 십자가에 놓여진 운명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보게 하는 것이 물두멍이다.
여기서 우리는 씻음이 생기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 모든 야망, 이 모든 것이 씻어져 나가고 투명한 거울에 비춰진 자기, 자기의 모습, 그 모습이 보인다. 자기만 알고 있는 자기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 모습은 번제단에서 나온 모습이다. 이 모습을 평생 봐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들어갈 때 이것을 먼저 보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된다.
그 다음에는 놋 받침과 기둥과 고리와 포장이 있는데, 바깥의 포장을 치는 말뚝이 있고, 그 말뚝에는 전부 받침이 있다. 그 받침이 또 모두 놋으로 되어 있다. 기둥들이 모이니까 기둥의 받침들이다. 그리고 기둥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띠가 있는데 그 띠를 연결하는 고리가 은으로 되어 있다. 놋과 은으로 띠가 메어져 있는 셈이다.
이 울타리를 왜 쳐 놓았는가? 이것은 경계선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어디까지가 세상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영역이다는 것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인생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것이냐, 사탄의 것이냐의 경계선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 바로의 것이었다. 광야에 나왔을 때 하나님의 것이었다. 이 경계를 가르기 위해서 홍해가 필요했다. 홍해 때문에 바로는 더 이상 쫒아오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시 건너갈 수가 없었다. 이것은 경계선이다.
성막 바깥에 쳐있는 포장은 경계선을 의미한다. 우리는 분명히 경계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여기인지 저기인지 개구리처럼 여기도 갔다가 저기도 갔다가 하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정해주신 영역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 경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직장 생활도 하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업도 하고 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형상화해야 할 사람으로 경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이 문제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나는 포장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포장들은 네모난 천을 칸칸이 막아서 울타리를 만들어 놨다. 네모반듯한 천이다. 네모반듯하다는 말은 정확하다는 말이고, 심판이 확실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의가 정확하다, 하나님의 의가 옳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은 고리는 연결하는 고리인데, 가름대를 서로 연결해 주는 것이 됐다. 이것은 심판과 의를 연결해 주는 고리라는 뜻이다. 바깥에 있는 포장들은 놋 받침과 기둥과 가름대와 은 고리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경계를 삼게 된다. 나는 놋 받침과 놋 기둥과 포장으로 경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세상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는 그런 사람이어서는 안되고, 개구리 같은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성경에 보면 개구리가 더러운 파충류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물에도 살고 땅에도 사니까 양서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편리한데 성경은 그것을 아주 부정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경계선 안에 있다가 밖에 있다가, 밖에 있다가 안에 있다 하면 개구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더러운 영이라고 되어 있다. 개구리를 보고 더러운 영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장막에 거하는 사람으로 출발해서 우리는 장막을 건축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말도 하지 말고 보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고 직무가 서로 다르다, 신분이 서로 다르다, 이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한 장소에서 같이 살아도 직무가 다르고 임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직장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싸운다고 나도 싸울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데모한다고 나도 데모할 일도 아니고, 나는 데모를 하거나 싸우거나 간에 나는 이 경계선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나만 있다. 데모가 더 중요하거나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거나 이권이 더 중요하다 하면 경계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때는 나는 하나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 무엇을 하던지 나는 경계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울타리를 치고 살아야 한다.
서양에 가면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서 울타리를 별로 하지 않고 열어 놓았다. 우리는 좁은 공간에 다 담을 쳐놓았다. 대구 시내에서는 담 헐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좀처럼 호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관공서만 담을 헐었지 개인은 허물지 않았다. 담을 헐면 2~3백 만원 정도를 시에서 보조해 준다고 해도 허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경계선을 굳게 갖고 있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좋지 않은 것이지만 세상과 우리는 담이 있어야 한다. 경계선이 있어야 한다. 물론 내가 밖에 나갈 수도 있다. 나갔다 들어올 수도 있다. 항상 안에만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교회 인간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대구 교회 있는 사람이고 대구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으로 나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다. 그 신분을 가지고, 우리의 신분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신분을 가지고 나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한다. 내가 나가도 그 신분을 이행해야 되고, 들어와도 그 신분을 이행해야 되는 것이다. 안에서만 이행하는 것이 아니고 밖에 나가서도 이행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표시해 놓는다. 십자가 있는 곳은 다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양은 잘 만들어놓았는데 실제는 없다. 우리의 표시는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 우리의 표시가 되어야 된다.
교회의 표시는 십자가이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표시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다. 이것이 우리의 표시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이 바울의 말대로 한다면,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볼 때 저 사람은 산 사람 같지 않고 죽은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 어떻게 죽은 사람인가? 십자가에 죽은 사람 같아야 된다.
세상 사람이 볼 때 우리가 가능성이 있어야 자꾸 자기한테로 끌리지 가능성이 전혀 없으면 끌리지 않는다. 술도 먹을 것 같은 사람에게 술 먹자고 하지 술을 전혀 먹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술 먹자고 안 한다. 술 먹으려면 슬슬 피해 다른 데로 가 버린다. 술 먹는데 안 먹는 사람이 앉아 있으면 기분이 안난다. 저 사람이 절대 술 안 먹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슬슬 피해서 자기들이 다른 데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 오기를 원치 않는다. 당신은 오지 마라, 오지 말라고 한다. 어쩐지 보기에 술을 잘 먹을 것 같다 하면 방안에 잠자고 있는 사람까지 불러낸다. 술 한잔하자고 불러낸다. 어쩐지 술을 좋아할 것 같으니까. 그런데 싫어할 사람에게는 전혀 가자는 말 안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동네 친구들 가운데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한 번도 술 먹자고 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전혀 없다. 아예 안먹을 줄 아니까 술 먹자고 하지 않고, 술 먹는데 끼워주지도 않는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어떤 사람은 안먹으려고 하는데 친구들이 먹자고 해서 술 먹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뭔가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아서이다. 경계를 분명히 표시를 분명히 하면 상대방이 보고 저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면 그렇게 안한다. 가능성이 있으니까 자꾸 그러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우리의 표시를 분명히 해야 된다. 성막에 울타리를 분명하게 치듯이 우리도 우리의 울타리를 분명히 쳐서 표시를 해야 한다. 그 울타리는 너무 높아 사람들이 올라갈 수 없는 울타리가 아니다. 별로 높지 않다. 다섯 규빗이니까 넘어가면 다 넘어갈 수 있는 규빗인데, 단지 이것은 표시물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에 담을 치라는 말이 아니고 넘을 수 없는 담을 치라는 것이 아니고, 표시를 하라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사람이요, 나는 하나님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이요, 그 임명을 받고 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요, 이것을 늘 표시해야 한다. 내 삶을 통해서 표시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자기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고 하나님 일 할 일이 있으면 나를 부를 것이다. 하나님 일 할 일이 있으면 나를 부르고 하나님 도움 받을 일이 있으면 나를 부르게 된다. 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어떤 친구가 늘 자기가 술 먹고 가면 내 앞을 지날 때 마다 늘 미안하다고 한다. 나한테 자기 술 먹은 것이 미안할 일도 없는데 지나가면서 늘 미안하다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그 사람 술 먹는다고 욕한 일도 없고 뭐라고 한 일도 없고 눈치 준 일도 없다. 자기가 스스로 알고 그런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표시를 분명히 하면 세상도 자기 갈 길을 갈 뿐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 우리를 찾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그 표시를 해두지 않으면 하나님이 필요할 때 나를 찾지 않는다. 같이 술 먹던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하겠는가. 같이 놀던 사람에게 가서 나 좀 구원해 달라고 하겠는가. 안한다. 이것이 헛일이다. 내가 내 표시를 안해 놓았기 때문에, 중요한 공사를 수주 맡을 것인데 못 맡는 것이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런데 나한테 안 오고 다른데 가 버린다. 저 사람한테 가면 안돼, 저 사람은 나와 비슷해 이렇게 되면 안오고 만다.
경계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경계를 분명히 해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다. 남을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배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남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이 표시를 분명히 해야 된다. 의사는 의사로 표시를 분명히 하고 있어야 아픈 사람이 찾아올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길이다. 비행기를 타거나 오랜 여행을 위해 배를 타거나 할 때 의사들은 자기의 신분을 밝혀야 한다. 배 선주에게 가서 내가 의사라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급한 사람이 있으면 찾아온다.
우리는 우리 신분을 분명하게 밝혀야 되겠다. 이 바깥마당의 분위기를 통해서 우리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고, 우리의 직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복을 입고 누가 봐도 저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것이 보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첫째 관문이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임무를 우리가 맡았는지 다 모르고 살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의 유일한 신분, 우리의 유일한 직무가 제사장의 직무라는 사실을 성막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인생을 창조할 때 이 유일한 직무 때문에 사람을 창조했고 이 유일한 신분 때문에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 당신의 목적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거룩하고 당신의 소원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자들인지! 주님 우리가 당신의 목적과 소원을 깊이 알게 되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당신에게 필요한 우리 자신을 깨달을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 그 사람이 누군가를 찾게 되기를 원하고 내 인생에서 당신이 필요한 부분이 어디인가를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이 되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서 우리도 살고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되길 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들이 되게 되길 원합니다.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