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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2권
20.3. 오개연(五蓋緣)
[문] 어떤 것을 다섯 가지 덮개라고 말하는가?
[답] 첫째는 탐욕개(貪欲蓋)요, 둘째는 진에개(瞋恚蓋)며 , 셋째는 수면개(睡眠蓋)요, 넷째는 도회개(掉悔蓋)며, 다섯째는 의개(疑蓋)이다.
첫 번째의 탐욕개라고 하는 것은,
단정하게 앉아서 선정을 닦다가 마음에 욕각(欲覺)이 생겨 부질없는 생각이 계속 이어져서 이를 추구하여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근심이 생기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말한다.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술바가(術婆伽)는 왕의 말을 사모함으로써 마음 속에 애욕이 발몽하여 오히려 그 몸을 태웠고, 그 화가 천사(天祠)에까지 미쳤거늘 하물며 탐욕의 독을 내 어 치성해졌으나 어찌 모든 선한 법을 태우 지 않겠는가?
만일 그 미음이 애욕에 집착하면 도(道)를 가까이 할 길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논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도에 들어가서 참괴(慚愧) : 부끄러움)를 아는 사람
발우를 가지고 중생들을 거두거늘
어떻게 탐욕의 티끌을 놓아
다섯 가지 정(情)에 침몰하겠는가?
이미 버린 다섯 가지 욕망의 즐거움
그것을 버렸거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다시 얻으려고 하는가?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 토한 것을 먹는 것처럼.
모든 탐욕은 구할 때엔 괴롭고
얻었을 때엔 무섭고 두려움이 많으며
잃었을 때엔 흔히들 열뇌(熱惱)하나니
아무 곳에도 즐거운 곳이 없다네.
모든 걱정이 이와 같을 뿐이니
어떻게 능히 버릴 수가 있을까?
복된 선정의 즐거움을 얻으면
곧 이런 것에 속임을 당하지 않으려.
두 번째의 진에개라고 하는 것은,
성냄은 바로 모든 착한 법을 잃는 근본이요 온갖 악한 세계에 떨어지는 인연이며, 법요(法樂)의 원수요 선한 마음의 큰 도적이며, 악한 말을 내는 창고요 재앙과 걱정의 칼이며 도끼이다.
만약 도를 닦을 때 생각하기를
‘이 사람(성낸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하고 나와 절친한 사람을 괴롭히며 내 원수를 찬양한다’고 하면서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면 이것을 구뇌(九惱)라고 하며,
그런 까닭에 성을 낸다.
성내려는 생각은 마음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이름하여 개(蓋)라고 하는데,
마땅히 빨리 그것을 버려 증장케 해서는 안 된다.
『지도론』에서 석제바(釋提婆)가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쭌 것과 같다.
어떤 물건이 편안함[安隱]을 죽이고
어떤 물건이 걱정 없는 것을 죽이며
어떤 물건이 독(毒)의 뿌리가 되어
일체 선(善)을 다 삼켜 없애는가.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성냄을 죽이면 곧 편안해지고
성냄을 죽이면 걱정이 없어진다.
성냄이 독의 뿌리가 되고
성 냄이 일체의 선행을 없앤다.
이와 같음을 알고 난 뒤엔 마땅히 자비(慈悲)를 닦고 인욕(忍辱)으로 성냄을 없애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소리란 공(空)한 것이요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 마땅히 성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모든 법은 나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 성품이 다 공한 것임을 알고 만약 어떤 사람이 성내어 꾸짖거나 때리거나 죽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음을 않다.”
소리를 관찰해 보면 본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바람 소리만이 인연을 따라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찌 꼭 성낼 만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논(論 : 『智度論』卷六)에서 말하였다.
“민일 말을 하려고 할 때엔 입 안에서 바람이 일어나는데, 그 이름을 우타나(憂陀那)라고 한다.
이 바람이 다시 배꼽으로 들어갔다가 배꼽에 부딪치면 메아리가 생겨 나오고, 메아리가 날 때에는 일곱 곳에 부딪쳐 일어나나니, 이것을 말이라고 한다.
게송을 말한다.
바람의 이름은 우타나인데
배꼽이 부딪쳐 위로 나오고
이 바람이 일곱 군데에 부딪치나니
목과 잇몸ㆍ이ㆍ입술이며
혀와 목구멍, 그리고 가슴인데
이 가운데에서 말이 생겨나건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미혹하고 집착하여 성냄과 어리석음을 일으킨다.”
또 『우바새계경』에서 말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은 만약 악한 말로 꾸짖음을 당하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무라고 꾸짖는 소리는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 소리가 날 때에는 뒤의 소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뒤의 소리가 생기고 나면 앞의 소리는 벌써 사라지고 만다.
만약 한꺼번에 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것을 꾸짖는 소리라 하겠는가?
바로 이것은 바람 소리이거늘 내가 왜 성을 내겠는가?’”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중생을 관찰하고 비록 또한 백천 겁 동안 꾸짖음을 받을지라도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만약 백천 겁 동안 칭찬을 받을지라도 또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음성이 나오고 사라짐은 꿈과 같은 것이요 메아리와 같은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세 번째의 수면개(睡眠蓋)라는 것은,
속 마음이 어둡고 산란한 것을 면(眠)이라고 말하며, 다섯 가지 정(情)이 어둡게 가려서 지절(支節)을 방자하게 놀리며 자리에 누워 깊이 잠이 든 것을 수(睡)라고 말한다.
이 수면의 개(蓋)는 지금 세상과 다음 세상의 진실한 즐거움을 깨뜨릴 수 있으니 , 이와 같은 악한 법은 가장 착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 하면 다른 개는 감정이 깨달아서 없앨 수 있지만 잠[眠]이란 죽은 사람과 같아서 촉감을 느끼지 못하고 느낌이 없는 까닭에 제거하여 없애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도론』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잠을 많이 자는 제자들을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여 가르치고 경계해야 한다.
너희들은 죽어 누워 있는 시체를 끌어 안지 말아라.
갖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임시로
이름 붙여 사람이라 하나니
마치 중한 병을 앓거니 봄에 화살을 맞은 것 같아
모든 고통이 다 쌓였는데 어찌 잠을 잡 수 있으랴.
마치 결박당한 채 끌려가서 죽임을 당할 사람 같나니
재앙과 해로움이 곧 닥쳐오려 하거늘
어찌 잠을 잘 수 있으랴.
맺은 원수 없애지 못했고 해로움도 제거하지 못하여
마치 독사와 함께 같은 방에서 자는 것과 같고
또한 전쟁터에 이르러 흰 칼날 사이에 있는 것 같나니
그런 때에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으랴.
수면이란 큰 어둠이 되어 아무것도 보는 것 없고
날마다 속이고 속여 사람의 총명함을 빼앗네.
수면으로 덮인 마음 아무것도 보는 것 없나니
이와 같이 크게 잃었는데 어찌 잠을 잘 수 있으랴.”
네 번째는 도회개(掉悔蓋)인데 여기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입의 동요[口掉]이니,
이른바 음영(吟詠)을 좋아하고 기뻐하며 옳고 그름을 논쟁하고 다투며 이익 없는 희론(戱論)과 세속적인 언어(言語) 등을 말 하는 것이니,
이것을 입의 동요라고 한다.
둘째는 몸의 동요[身掉]이니,
이른바 말을 타고 이리저리 치달리며 방일하기만 좋아하고 기뻐하며, 힘으로 서로 치고 받으며 팔이나 손가락 또는 손바닥으로 서로 끼는 것 등을 말하나니,
이것을 몸의 동요라고 말한다.
셋째는 마음의 동요[心掉]이니,
마음의 감정이 방탕(放蕩)하고 방종한 생각을 반연하며 문예(文藝)와 세간의 재주나 가술을 생각하는 온갖 나쁜 각관(覺觀) 따위를 말하나니, 이것을 마음의 동요라고 말한다.
이 동요의 법 [掉法]은 출가(出家)한 사람의 마음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지도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너는 이마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었으며
와발(瓦鉢)을 가지고 다니면서 걸식(乞食)을 실행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희도(戱掉)의 법을 즐거워하고 집착하여
감정대로 방일하게 놀아나 법의 이익을 잃는가?
이미 법의 이익도 없거니와 또 세간의 즐거움도 잃어버린다.
그 허물을 깨닫고 난 뒤엔 반드시 빨리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른바 회(悔)라는 것은
만약 동요하고도 뉘우침[悔: 懺悔]이 없으면 개(蓋)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동요할 때에도 그대로 인연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선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전에 한 일을 후회하면 근심과 고뇌가 마음을 덮기 때문에 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요한 뒤에 그로 인하여 뉘우침이 생기는 것이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둘째는 크고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이 항시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품고 독화살이 심장에 들어가 굳게 박힌 채 뽑을 수 없는 것이다.
『지도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될 것은 짓고
마땅히 지어야 할 것을 짓지 않으면
뉘우침과 괴로움의 불길에 타게 되고
후세(後世)엔 악한 세계에 떨어지리라.
만약 누구든지 지은 죄를 참회하였다면
참회한 뒤에는 다사 걱정하지 마라.
이와 같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항상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리.
만약 두 가지 뉘우침이 있고도
또한 꼭 지어야 할 것을 짓지 않거나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을 지으면
그것이 곧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라네.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짓고
온갖 악한 일을 이미 지었으면
그로 하여끔 잣지 않게 할 수는 없으리라.
다섯 번째의 의개(疑蓋)라는 것은,
이른바 의심으로 마음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온갖 법 가운데에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서도 공(空)하여 획득할 어떤 것도 없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보배가 있는 산에 들어가서도 만약 손이 없으면 아무것도 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온갖 의심이 너무 많으면 반드시 선정만을 장애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선정을 장애하는 것에 세 가지 의심이 있으니,
첫째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요,
둘째는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첫째,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오든 감각 기관이 암둔(暗鈍)하고 죄와 허물이 매우 중하니, 아마도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스스로를 의심하여 선정과 지혜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법을 배우고자 하면 부디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나니, 숙세(宿世 : 전생)의 선근(善根)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스승을 의심한다는 것은
‘저 사람(스승)은 위의(威儀)와 모습이 저렇고 스스로도 오히려 도가 없거늘 어떻게 나를 가르칠 수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심하고 업신여기면서 곧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다.
그런 법을 없애려고 하면 마치 악한 냄새가 나는 가죽 주머니일지라도 그 속에 금(金)이 있으면 그 금이 탐나기 때문에 그 가죽 주머니를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역시 그와 같아서 스승이 비록 깨끗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 또한 마땅히 부처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느니라.
셋째, 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저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본래의 마음을 고집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법에 대하여 곧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실천하지 못 하는 것이다.
만약 의심[猶豫]을 내면 곧 그 법에 마음을 깃들이지 못한다.
왜냐 하면 『지도론(智度論)』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치 갈림길에 있는 사람이
의혹이 생겨 어느쪽 길도 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온갖 법의 진실한 모습 가운데에서
의심을 내는 것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의심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부지런히 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의심은 어리석음으로부터 생겨나나니
악한 것 중에서도 가장 악한 것이니라.
착하고 착하지 않은 법 가운데
나고 죽음과 저 열반(涅槃)
정녕 진실로 그런 법이 있나니
그러한 법에 대하여 의심내지 말아라.
만약 너희들이 의혹(疑惑)을 품으면
죽음이라는 왕의 옥리(獄吏)가 결박하리니
마치 사자에게 잡힌 사슴과 같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으리.
이 세상에 있으면서 비록 의심이 있더라도
마땅히 미묘하고 착한 법을 따라야 하나니,
비유하면 마치 갈림길을 잘 관찰하여
편리하고 좋은 길로 따라가는 것과 같네.
[문]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은 한량없고 그지없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다섯 가지 법만 버리라고 하는가?
[답] 이 다섯 가지 법이 이름은 비록 협소한 듯하나 그 뜻은 세 가지 독[三毒]을 다 갖추고 있고, 또한 팔만 사천 가지 온갖 진로(塵勞 : 번뇌)의 문을 통틀어 포섭하고 있다.
첫 번째의 탐욕개(貪欲蓋)는 곧 탐독(貪毒)이요,
두 번째의 진에개(瞋恚蓋)는 바로 진독(瞋毒)이며,
세 번째의 수면개(睡眠蓋)와 의개(疑蓋)는 비로 치독(癡毒)이요,
그리고 도회(掉悔) 한 개(蓋)는 바로 저 삼독에 고루 나뉘어져 있으니, 모두 합하면 네 부분의 번뇌가 된다.
그 하나 가운데에는 이만 일천이 있으니, 네 가지 가운데에는 모두 합해 팔만 사천 번뇌 [塵勞]의 문이 있다. 그런 까닭에 만약 이 다섯 가지 개만 제거하여 없애버리면 곧 온갖 착하지 못한 법을 다 버리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채무[債]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과 같고 또는 중병(重病)이 나은 것과 같으며,
굶주리고 배고픈 사량이 부자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같고,
악한 도적의 수중에서 스스로 벗어나 편안하고 걱정이 없는 것과 같으니,
수행하는 사람도 또한 그러하여 이 다섯 가지 덮개만 제거하면 그 마음이 청정하게 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해와 달도 연기ㆍ구름ㆍ먼지ㆍ안개ㆍ아수라의 손으로 가리는 등 다섯 가지 사물이 덮어버리면 밝고 또렷하지 못한 것처럼,
마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유한 일에 견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다섯 가지 욕심은 신식(神識)을 어둡게 하고
다섯 가지 덮개[蓋 : 번뇌]는 복의 힘을 가리며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고통을 쌓아 이루고
여섯 가지 도적은 마음의 빛을 어지럽힌다.
욕심의 물결은 감정을 따라 일어나고
애욕의 그물은 마음을 따라 짜여진다.
세 가지 독은 인공(人空)을 장애하고
네 가지 폭류는 쉬지 않고 떠다닌다.
겨울이 되어 비록 가을이 바뀌어졌으나
참주(斬籌)는 그래도 끝나지 않았네.
비둘기의 관찰도 아직 끝나지 않았거늘
원숭이를 잡으려 하니 어찌 조복할 수 있으랴.
스스로 욕(欲)과 개(蓋)를 끊지 않으면
어떻게 멀리 뛰어오를 수 있으리.
수레를 나란히 하여 보배의 성으로 가면
모두 함께 능인(能仁 : 부처님 )의 덕을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