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문학관 건립을 위한 발의문
세상에 나무가 없다면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환경 속에서 지독한 질병과 싸우며 절망스럽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작은 예가 되겠지만 가을부터 봄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황사를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면 공기가 맑아지고 기후가 안정되면 아름다운 새들이 모입니다.
각박한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정서는 날로 황폐해지고 있으며 그로인한 엄청난 부작용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각해지고 있는 인간의 마음속에 ‘문학’이라는 푸른 나무를 심어 주는 것이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기에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서 문학관을 세우거나 문학인들의 유업을 기리는 갖가지 사업들로 정신문화를 살찌우고 있습니다.
충북만 해도 이미 세워진 문학관은 옥천의 정지용시인을 기리는 ‘지용문학관’, 보은의 오장환 시인을 기리는 ‘오장환 문학관’, 충주의 박재륜 시인. 정호승 시인. 권태응 시인 홍구범 소설가를 기리는 ‘충주 문학관’, 영동의 ‘농민문학관, 제천의 ’원서문학관‘ 이 있으며, 청주․청원의 김수현문학관’, 괴산의 홍명희문학관, 단양의 우탁문학관 등이 준비 중에 있습니다.(음성은 소설가 이무영을 기리는 사업으로 생가 터를 구입, 문학비와 흉상을 세웠고 정자를 지어 놓았음)한국엔 현재 46곳에 문학관이 건립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진천은 빠졌습니다. 우리 진천에는 시인이자 소설가요, 한국 최초의 희곡작가인 ‘조명희’(1894-1938)라는 한국문학의 거목이 계심에도 해방 후에는 국가에서 금서라는 장막을 쳐서 가렸고, 해금 후에는 진천인들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외면해 온지 20년을 넘겼습니다.
현재 조명희선생의 작품은 대한민국 안에서는 대학교재로, 고3 수능교재로 채택되어있고 중국에서는 중고등학교 교재로 채택된 지 65년이 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에는 ‘조명희 거리’가 명명되어 있고, 우리지역에서는 문학비가 섰고 매년 ‘포석 조명희문학제’가 18년간 열리고 있으며 중국 연변에서도 ‘포석 조명희문학제가 10년째 매년 개최되고 있습니다. 2006년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조명희 문학비가 섰으며 진천의 문학공원에 또 다시 시비건립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에 대한 연구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선생의 고향을 찾는 이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음에도 진천에는 문학관이 없어 선생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는데 한계를 느끼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조명희선생님의 작품은 대학교재로 사용 중이며 이처럼 학생들의 교재로 사용하는 작가에 대한 지원은 중앙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우리 후배 문인들은 늦은 감은 있으나 조국광복과 한국문학에 열정적으로 생애를 바치신 그분의 뜻을 기리고 문학을 활성화 시켜 푸르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명희문학관’ 건립을 발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들의 이 간절하고도 아름다운 바람을 소중하게 받아들여 진천문인들의 자존심과 군민들의 자긍심을 놓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0년 12월 21일
진천문인협회 회장 나순옥
* 첨부
#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로 열정적 삶을 산 근대문학의 ‘우뚝한 별’
-포석 조명희선생의 생애와 문학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로 열정적 삶을 산 근대문학의 ‘우뚝한 별’
시인․소설가․희곡작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일관한
포석 조명희 抱石 趙明熙(1894.8.10~1938.5.11)선생.
▲생애
조명희(趙明熙)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아버지 조병행(趙秉行)과 어머니 연일 정(鄭)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조 말에서 한일합방 때까지 상당한 권력과 부를 누린 권문세가였다. 조부는 의정부 좌찬성이었고, 부친은 안동부사,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백부와 셋째 숙부는 각각 이조판서를 지내, 한 가문에서 형제를 이조판서로 배출한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다. 또 둘째 숙부도 진주목사를 지내는 등 전통 양반가문으로, 그 일가가 진천읍 열 두골 땅을 장악했었다 한다.
조명희는 부친의 나이 칠순에 태어나서 아명이 칠석이었다. 자는 경덕(景德), 호는 포석(抱石)·목성(木星)이었으며 필명은 적로(笛盧)였다.
그가 4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그는 아버지뻘인 큰 형의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된다. 큰 형인 괴당 조공희(槐堂 趙公熙)는 구한말 관리로 목판본 한시집을 출간한 한학자였다. 조공희는 조국의 비운을 개탄하여 지리산에 수 십 년간 칩거한 우국적 인물이었다. 큰 형의 우국적 신념과 일제에 대한 증오심은 조명희에게 적지 않은 정신적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유년시절 그가 받은 가장 큰 정신적 상처는 부친의 사망과 맏형의 가출, 그리고 주권의 상실이었다. 맏형의 가출로 둘째형 집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진천성공회가 신명학교(삼수초 전신)를 세우자 그곳을 마치고 1910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에 입학해 김우진과 만나면서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카프’창설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청원출신 조각가 김복진 등과 프로연극운동단체인 ‘불개미극단’을 조직하여 민족주의 연극운동가로, 희곡작가로, 시인으로, 소설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23년 생활난으로 졸업을 앞두고 귀국하여 시대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최초 창작 희곡집<김영일의 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미발표 창작시를 모은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19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륙성촌, 우쓰리스크와 하바로프스크 등으로 옮겨다니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신문 <선․ 봉>의 편집자로, 조선사범대교수로, <노력자의 조국> 주필로 활동하면서 재소한인(在蘇韓人) 문학 건설에 힘쓰다가, 1938년 스탈린의 탄압정책 와중에서 일본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해 44세의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1956년 극동군 관구 군법회의에 의해 무혐의로 복권됐다.
▲작품활동
포석은 한국의 현대 희곡, 시, 소설 어느 분야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문학가이다. 그가 근대문학초창기 한국문단에서 활동한 기간은 8년 정도로 짧은 기간이지만 다양한 활동으로 민족주의적 극작가, 사실적인 시인, 현실비판의식이 높은 프로소설가라는 선구적 업적을 뚜렷이 남겼다.
1920년 극예술협회에 가담하면서 희곡 ‘김영일의 사’를 발표했다. 이 희곡은 그의 처녀작으로 ‘동우회’극단에 의해 1921년 전국순회공연을 올려 호평을 받았다. ‘김영일의 사’는 민족주의 신극운동을 개척했다는데서 희곡사적 의미를 가진다.
2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창작 희곡집 <김영일의 사>를 펴냈고, 2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발표 창작시집 <봄 잔디밭위에>를 펴냈다. 27년에는 그의 대표작이며 기념비적인 소설 ‘낙동강’을 <조선지광>에 발표했다. ‘낙동강’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후에는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비롯해 항일투사들의 활동을 그린 소설 ‘만주 빨치산’ 등을 쓰는 등 KGB에 연행될 때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7편의 산문시 수필 평론 등을 썼다.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교포문단에 활력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땅에 뿌린 한국문학의 씨앗이 되었다.
▲추모사업
1959년 조명희선집 발간(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
1988년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에 '조명희문학기념관' 설치.
1992년 타슈겐트 백쩨미르지역 "조명희 거리" 지정.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카자흐의 알마아타 등 한인사회에 조명희 문화협회 결성.
1994년 ‘탄생 100주년 기념 포석 조명희문학제’가 타슈켄트와 진천에서 동시 개최, 2008년까지 15회 행사 진천에서 개최.
(우즈베키스탄조명희문화협회, 동양일보․포석회)
생가터 표지비건립(동양일보․포석회)
1995년 포석 조명희선집발간(동양일보출판국)
1995년 연극 ‘김영일의 사’ 공연-진천군민회관 (조명희 원작 이창구 연출)
2001년 연변포석회 창립, 2002년 1회 연변 포석 조명희문학제 시작, 2008년까지 7회 행사.
2003년 진천 벽암리에 문학비 건립과 포석공원 조성
2003년 1회 포석추모 전국시낭송경연대회 시작, 2008년까지 6회 대회개최(전국시낭송경연대회추진위)
200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술대 교정에 조명희 문학비 건립
(잃어버린 민족문학사를 찾아가는 작가들의 모임 주관)
▲연보
1894.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 수말(수암마을)출생(8.10)
1898. 진천 성공회에서 설립한 신명학교 초등학교 과정 수료
1907여흥 민씨 민식과 결혼
1910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진학
1915장녀 중숙 태어남
1919.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투옥 몇달후 출옥, 일본 도쿄 동양대 동양철학과에 입학
1920.도쿄에서 ‘극예술협회’에 참여
1921. 희곡 ‘김영일의 사(死)’ 발표. ‘동우회’연극단 전국순회 공연
1923. 생활난으로 대학졸업 앞두고 귀국
우리나라 최초 창작 희곡집<김영일의 사>(동양서원) 발간
1924.시대일보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춘추각)발간.
톨스토이 작 번역서 <산송장>(평문사) 발간
1925. <개벽>에 단편소설 ‘땅 속으로’ 발표· ‘카프’결성 창설회원으로 활동
1927. 프로연극운동단체 ‘불개미극단’조직, <조선지광>에 대표작 ‘낙동강’발표
1928. 소설집 <낙동강>과 이기영 소설집 <민촌>의 공동 출판기념식 거행(6. 5 청량사)
1928. 러시아로 망명(8. 21)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거주, 산문시 ‘짓밟힌 고려’발표
1929.륙성촌에 거주
1930. 륙성농민청년학교 조선어교사.
1931. 황명희(마리아)와 재혼, 우쓰리스크로 이사. 조선사범학교 조선어문학교수
1932장녀 조선아(조 왈렌찌나 명희예브나) 태어남
1933장남 조선인(조 미하일 명희예비치) 태어남
1934. 소련작가동맹원으로 가입(창설되면서 파제예프 추천으로)
블라디보스토크신문 <선·봉>의 문학 편집자로 일함
1935. 하바로프스크로 이사.‘작가의 집’에 거주 (꼼쏘몰스카야 거리52호).
조선사범대학 교수
1936.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에서 간사로 활동.
<노력자의 조국>의 주필로서 고려문학 건설에 힘씀
1937. KGB에 체포 사형선고 받음(09.18)
1938. 총살형 당함(05.11)
1956. 극동군 관구 군법회의는 1938.4.15 결정을 파기, 무혐의 처리후 복권시킴
1959. <조명희선집>‘조명희 문학유산위원회’주관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출간
1988. ‘조명희 기념실’이 타슈켄트의 알리세르 나워이 문학박물관에 설립됨
납․월북작가작품 해금조치로 조명희 연구 및 작품출판 허용.
1992. ‘조명희 거리’명명식이 타슈켄트 벡쩨미르지역에서 열림(.5.21)
1994. ‘탄생 100주년기념 포석 조명희문학제’ 진천에서 열리고, ‘태어난 곳’표지비 세워짐
1994. <포석 조명희 전집>(동양일보출판국)발간
1995.2회 포석 조명희 문학제 개최 연극 ‘김영일의 사’ 진천군민회관 공연 (조명희 원작 이창구 연출)
2001.연변포석문학회 창립(회장 이임원)
2002 1회 연변 포석 조명희문학제
중국 연길시를 중심으로 조선족 집거지역을 순회하며 2010년까지 매년 계속되고 있음.
20031회 포석 추모 전국시낭송경연대회(진천문화원)
2010년까지 매년 계속
2006.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술대 교정에 조명희문학비 건립
(주최.주관: 잃어버린 민족문학사를 찾아가는 작가들의 모임)
2008. 이명재의 <그들의 문학과 생애 ‘조명희’>발간.(한길사)
2010. 진천 문학공원에 조명희 시비 건립을 추진 중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