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림동 계곡에 으뜸 정자 '농월정은 없다'
국내 최고의 정자 답사 코스, 화림동 계곡
▲ 경상도 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 함양군청 홈페이지
1월의 두 번째 주말, ‘안동’에서 ‘함양’으로 길을 떠났다. 예부터 큰 인물을 낳은 땅으로 경상좌도에선 안동을, 경상우도에선 함양(咸陽)을 꼽으니 우리의 여정은 ‘좌 안동’에서 ‘우 안동’으로 가는 길이다. 영남 유림의 본산으로 안동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함양에는 일두 정여창(1450~1504)이 있었다. 조선조 5현, 동국 18현 중의 한 분으로 기려지는 이 영남 거유가 태어난 곳이 함양군 지곡면인 것이다.
함양에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안의다. 1914년 안의군이 폐지될 때까지 함양의 중심이던 고을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이 현감으로 다섯 해 동안 이 고을을 다스렸다. 그는 이 때, 나라에서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쓰게 했다는데, 그래서일까, 함양군의 상징은 ‘물레방아골 함양’이다.
▲ 안의 광풍루 조선 태종 때 건립한 선화루를 안의현감 정여창이 중건하고 광풍루라 고쳐 불렀다. 경남 유형문화재 92호다.
ⓒ 장호철
▲ 박지원 사적비 안의현청 자리에 들어선 안의초등학교에 있는 연암의 사적비. 연암은 55세(1792) 때부터 5년 동안 현감으로 안의를 다스렸다.
ⓒ 장호철
안의에서 연암은 40여 편의 책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안의에 이 실학사상가의 흔적이라곤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사적비밖에 없다. 그러나 괜찮다. 우리는 연암의 자취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린 남강 상류, 남계천이라 불리는 화림동(花林洞) 계곡을 찾아 왔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의 정자 답사 코스, 화림동 계곡
▲ 용추폭포 화림동과 함께 '안의삼동'에 드는 용추계곡의 용추폭포. 높이 15m.
ⓒ 장호철
화림동 계곡은 담양 일대와 함께 국내 최고의 ‘정자 답사’ 코스다. 무려 150여 개의 정자가 흩어져 있는 함양에서 화림동 계곡은 ‘정자 문화의 메카’로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화림동은 이름 그대로 화사한 꽃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맑은 물이 기암괴석과 너럭바위를 휘감아 돌아가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이 계곡은 골짜기가 넓고 물줄기가 맑고 넉넉하여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주변에 ‘여덟 곳의 못과 정자’, 팔담팔정(八潭八亭)을 펼쳐 놓았다.
화림동의 정자들, 그곳은 조선조 선비들이 이 아름다운 계곡의 물과 숲, 꽃과 나무와 교유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계곡에 남은 정자는 거연정·군자정·동호정 등 세 곳뿐이다.
정자는 자연의 일부로 인간을 이해했던 우리 선인들의 자연관 서술의 한 방식이었다.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서구인들과 달리 우리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물아일체, 즉 자연과의 동화를 관계의 최고 형태로 이해했다.
그래서 물과 바위,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시내마다 다소곳이 그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정자가 들어앉았다. 정자가 선인들의 삶과 가까워진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성리학의 생활철학과 한국불교의 주류로 떠오른 선종의 영향 때문이었다.
▲ 거연정 화림동 계곡의 한가운데 바위섬에 지은 정자. 계곡을 굽어보는 주체가 아니라 시내 바깥에서 바라보는 풍경 속의 객체가 된 듯한 정자다.
ⓒ 장호철
안의에서 육십령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6Km 남짓 가면 함양군 서하면 거연동 계곡에 이른다. ‘자연[然]’ 속에서 ‘살고[居]’ 싶은 선비의 마음을 담은 시내다. 갈수기인데도 푸른 물굽이가 기운차게 흐르는 계곡 한가운데 너럭바위 위에 거연정(居然亭)이 날아갈 듯 서 있다.
이 정자는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全時敍)가 1613년(광해군 5)에 처음 지었으나 퇴락해 없어졌다가 1881년(고종 18) 후손들이 재건했다. 정자의 이름은 주자의 시구 가운데 '한가히 내 자연을 즐기다[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따왔다.
거연정은 계곡에 세워진 정자이긴 하지만 위치가 여느 정자와는 다르다. 대개의 정자들이 시냇가에서 계곡을 굽어보는 형태인 데 반해 거연정은 마치 계곡 한복판의 ‘섬’처럼 보이는 너럭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다. 말하자면 이 정자는 계곡을 굽어보는 주체가 아니라 시내 바깥에서 바라보는 풍경 속의 객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갈수기인데도 만만찮은 물줄기를 담고 있는 계곡을 넘어 거연정에 들려면 철제의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시내 이쪽에서 바라보는 정자의 풍경이 왠지 아련하다. 정자 아래를 휘도는 계류의 그윽한 비취빛과 정자 앞에 휘어진 노송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천박해 뵈는 푸른빛 칠을 한 철제 홍예교가 정자의 일부를 가려 놓음으로써 그 소담스런 운치를 깨어 버린다.
'쇠다리가 아니라 나무다리나 돌다리라면 좋았을 걸….'
거연정을 찾은 나그네들의 마음은 모두 비슷하다. 나는 철제 다리를 걷어낸 자리에 안동 묵계리의 만휴정(晩休亭) 돌다리를 놓아본다. 훨씬 낫다. <펜화기행>의 김영택 화백이라면 수월하게 그리할 수 있겠다. 대저 그림이야 그리는 사람의 마음이니 말이다.
▲ 군자정 지곡면 개평리에 살던 대학자 정여창이 이곳을 자주 찾아 주변 풍광을 즐겼다 하여 ‘군자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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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앞을 흐르는, 옛 선비들이 ‘꽃을 찾고 버들을 따르는 내’[방화수류천(訪花隨柳川)]라 부른 물을 100m쯤 따라 내려가면 군자정(君子亭)을 만난다. 군자정은 성리학자 정여창을 기리고자 정선인 전세걸이 세운,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짜리 정자다.
물가의 널따란 암반 위에 편안히 앉은 단청 없는 검박한 부재들에 서린 건 세월의 흔적이다. 인근 지곡면 개평리에 정침(正寢)을 두고 있던 대학자 정여창이 이곳을 자주 찾아 주변 풍광을 즐겼다 하여 ‘군자정’이란 이름을 얻었다. 누마루 위 기둥 아래 부분에 까닭 모를 푸른 칠을 해 놓은 이 정자는 같은 이름의 커다란 민박집 아래서도 호젓한 기품을 잃지 않고 있다.
▲ 동호정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정자다. 추녀 네 귀에 세운 활주가 시원하고 2층 누마루의 조망도 상쾌하다.
ⓒ 장호철
▲ 동호정 앞의 계류 굽은 ‘소나무’ 그늘 아래 펼쳐지는 ‘바위’와 담록빛 ‘물결’이 빚어내는 풍경은 정자가 깃들기 위한 최적의 지세다. 왼쪽 하얀 반석이 차일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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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호정의 나무계단 커다란 통나무의 한 면을 파내어 만든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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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에서 1.5Km쯤 내려오면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정자, 동호정(東湖亭)이 노송에 둘러싸여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동호 장만리(章萬里)를 추모해 1890년경 후손들이 세웠다. 동호는 임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 길에 임금을 업고 수십 리를 달렸다는 충의지사다.
동호정은 그 규모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불구불 다듬지 않은 거친 1층 나무기둥 위의 2층 누각인데다 추녀 네 귀에 세운 활주가 시원해 규모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게 느껴진다. 높다란 2층 누마루의 조망도 상쾌하다.
정자 앞 계곡에 길이 60m, 폭 40m 정도의 너럭바위, 차일암(遮日岩)이 섬처럼 솟아 있다. 매끈하고 하얀 바위의 살결이 여인의 속살처럼 빛난다. 그것은 마치 물 가까이서 맘껏 풍류를 즐기라고 자연이 사람들에게 베푸는 은혜 같아 보인다.
어떤 이는 홍어에만 아니라 땅에도 삼합(三合)이 있다 했겠다. 굽은 ‘소나무’ 그늘 아래 펼쳐지는 ‘바위’와 담록빛 ‘물결’이 빚어내는 풍경은 바로 그 땅과 하늘과 함께 숨 쉬고자 한 선인들의 소박한 욕망의 공간, 정자가 깃들기 위한 최적의 지세인 것이다.
화림동의 으뜸 정자, 그러나 농월정은 없다
동호정에서 3.5Km 정도 내려와 안의면으로 들어서면 남계천은 굽으면서 완만하고 널찍하게 펼쳐진다. 계곡 저편 울창한 솔숲 앞에 화림동 계곡 정자의 중심을 이루는 농월정(弄月亭)이 나타나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건너편 반석 위에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농월정은 2004년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몽땅 타 버린 것이다.
▲ 농월정 불타기 전의 정자(위)와 현재의 모습(아래)
일찌기 펜화로 이 절경을 담았던 김영택 화백은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오래된 건물에는 영(靈)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전율했다고 고백한다. 농월정이 불탄 후 찍어놓은 사진을 뒤적이다가 농월정의 내외부 모두가 자신의 슬라이드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한 것.
이 자료를 함양군에 거저 제공하겠다는 그의 제의는 아쉽게도 정자 터의 양도에 반대하는 일부 후손 때문에 정자의 복원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김 화백은 전한다.
혹시나 하여 며칠 전 함양군에 다시 물었는데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2억 원의 복원예산을 세워놓고 함양군은 후손들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지족당 박명부(1571∼1639)가 지은 정자다. 그는 예조참판이었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강화를 반대한 척화파의 한 사람이었다.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 치욕적인 강화)이 이루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여기 농월정을 짓고 은거하였던 것이다.
정자가 사라지자 정자를 기준으로 어우러진 모든 풍경은 어그러져 버렸다. 하릴없이 건너편 정자 터를 먼산바라기 하듯 건네다 볼 뿐이다. 정자 앞에 펼쳐져 있는 1천여 평의 너럭바위(달바위)도 현실감을 잃었다. 마음 속으로 거기 아담한 정자 하나를 앉혀 보지만, 아직 부족한 내공은 그걸 신기루처럼 희미하게밖에 그리지 못한다.
정자,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선인들의 소망
여행에서 돌아와 책 속에서 다시 농월정을 만난다. 하나는 원색의 사진(박언곤, <한국의 정자>)이고 다른 하나는 흑백의 그림(김영택, <펜화기행>)이다. 정면과 왼 추녀 쪽에서 바라본 두 이미지를 통해 농월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운 아름다운 팔작집으로 되살아난다.
▲ 농월정 농월정은 2004년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몽땅 타 버렸다. 위 그림은 김영택 화백이 그린 펜화다.
ⓒ 김영택 <펜화기행>(지식의 숲, 2007)
'달을 희롱한 정자'는 밝은 달밤 ‘여울에 비치는 달그림자’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그러나 여기 ‘물’을 통해 이어지는 ‘달’과 ‘사람’의 만남에서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달’은 하늘에서 밝고, 누각 아래 ‘물’에 비치는 그 그림자를 굽어보면서 사람은 다만 ‘달과 물’이 연출하는 무위자연의 일부가 될 뿐인 것이다.
농월정 없는 ‘농월정 국민관광단지’는 개점휴업 중이었다. 텅 빈 주차장과 대부분 문을 닫은 음식점을 뒤로 하고 화림동, 이 '꽃과 수풀'의 계곡을 떠난다,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에 비겼던 화림동의 으뜸, 농월정을 만나지 못하고 이 계곡의 정자 여행은 끝이다.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은 주변의 물과 숲, 바위를 자연 그대로 받아들여 인간과 자연, 그 조화로운 관계의 미학을 창조했다. 그래서 화림동의 정자들은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더 강조된 구조물’이다. 화림동 계곡은 바로 그러한 우리 정자들이 말없이 건네주는 자신들의 '존재증명'인 것이다.
2008.01.25 11:09 ⓒ
출처 : 화림동 계곡에 으뜸 정자 '농월정은 없다'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