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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준의 청춘을 위하여] (4)
은퇴 어원 '오티움' 수동적 능동적 활동 모두 포함
고래가 되느냐 표류선이 되느냐 준비하기에 달려
오티움(Otium)의 항해를 위하여 냉정하고 철저한 출항 준비가 필요하다. /픽사베이
자정 무렵 '카톡!’ 소리에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필자가 평소에 ‘형’이라 부르는, 대학시절부터 절친 선배이자 대기업 현직임원 선배로부터 SNS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다음달부터 유유자적 푸욱 쉬기로 했어. 내일 저녁밥 같이 먹게 시간 좀 내주라···.”
순간 필자는 문득 눈치를 채고 격의 없이 선배에게 문자로 질문을 던졌다.
“선배 혹시 은퇴계획 아니죠?···.”
선배의 대답은, “은퇴가 별 일인가? ㅎㅎ··· 진짜 내 인생 찾는 거지 뭐~”
나는 카톡으로 “선배 건강하고 회사도 잘되는데 벌써 은퇴해서 뭐 하려고요?”
선배의 대답은 “일은 잘나갈 때 멈추고, 다음 여정 미리 조금씩 준비했거든 ㅎㅎ~. 최 대표도 100세 인생 슬슬 준비해야지? 언제까지 CEO 할 것 아니잖아? 아무튼 다음주에 만나서 은퇴계획 설계하자^^ 굿밤~".
‘은퇴 (隱退)’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평생 일만 잘할 것 같던 열혈남아 선배로부터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그동안 잊고 지낸 생물학적 내 나이를 정색하고 세어 보았다. 훌쩍 중년을 지나 어느새 60대 시니어를 목전에 두고 있음에 “으앗.. 나도 벌써···”라는 신음을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20대 후반에 시작한 직장생활이 다가올 60대까지 이어질 확률은 거의 없는데, CEO의 계급장을 떼고 늜수그레가 된다면 그때 뭘 하고 살지? 아··· 정말 시간이 별로 없네···.'
‘은퇴’란 단어는 외국어 자료를 읽다가 처음 발견한 단어처럼, 혹은 오랫동안 잊었다가 갑자기 걸려온 옛 고객의 전화 목소리처럼 내 의식의 흐름 속으로 낯설게 ‘쑤욱~’ 쳐들어왔다. '은퇴'란 단어는 나에겐 아직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동네 길거리를 지나는 마을버스에 처음 올라타야 할 것 같은 서먹한 기분이 들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직의 세단 외제 자동차에서 내려 오래된 은퇴의 동네버스로 갈아타는 것은 직장일 하던 인간의 당연한 운명임을 알아차릴 시간이 왔음을 의미하지 않은가.
은퇴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게 승승장구하던 선배의 갑작스런 은퇴 소식에 놀랐고 은퇴를 담담하고 당당하게 준비한 선배의 태도에 또 한 번 놀라움으로 몸살을 앓듯 ‘만일 내가 은퇴한다면? 오마이 갓~’ 질문으로 온통 이 글을 쓰는 주말을 보내고 있다.
생소한 외국어 단어를 보면 백과사전을 뒤적이는 습관 때문인지 ‘은퇴’에 관한 단어풀이를 구글서칭으로 찾아본다. ‘은퇴’를 뜻하는 라틴어 ‘오티움(Otium)’의 사전적 정의는, 1. 휴식하며 한가함 2. 유유자적함 3. 서재활동(書齋活動), 예술활동(藝術活動), 시작활동(詩作活動)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 이래로 ‘오티움(Otium)’이란 일에서 벗어나 유유자적 무위의 시간을 누리면서도 적극적 능동적으로 시를 짓고 음악·미술을 감상하며 배움을 즐기는 활기찬 활동으로 정의함을 발견했다.
라틴어의 사전적 의미로 은퇴는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 고3병에 직면한 요즘의 물질적 현실에 맞지 않게 퇴행적 귀족적인 뉘앙스로 체감이 되기도 하겠지만, 은퇴를 서서히 준비해야 50대에는 생산과 소비의 물질계로 기울어진 세계로부터 나의 중심을 세워 시서악(詩書樂)의 영역으로 변화하는 ‘삶의 균형(Life Balance)’을 잡아 나가기 위한 새로운 삶의 알까기 여정을 준비하는 시간임을 곱씹어 본다.
돈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고, 통장의 잔고 액수에 따라 각자의 은퇴준비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유자적하기 위한 은퇴의 첫째 조건이라면, 내 통장의 잔고를 줄이지 않는 대책을 세워야 하고, 통장의 잔고를 줄일 가능성이 있는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의 투자 방식은 절대 피하는 원칙과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인생 후반의 필요충분 조건이 아닐까? 은퇴생활 자금 계획은 별도의 개별 학습과 냉정하고 철저한 사전계획이 필요하다.
은퇴의 바다는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따라 바다를 향유하는 고래의 꿈일 수도 있고 바다 한가운데서 동력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다. /사진=최익준
은퇴의 두 번째 전제 조건으로, 정신과 전문의 문요한이 정의한 ‘오티움’의 의미를 곱씹는다. '오티움은 나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능동적 여가이며 책임과 의무와 보상과 결과를 바라지 않는 활동이다. 오티움은 활동 그 자체와 과정에 오롯이 기쁨을 체험하는 여가활동을 말한다. 즉, 예체능에서 느끼는 감동처럼 한 개인이 몰입하여 기쁘게 즐기는 것이며, 나의 실존을 재조명하고 재창조하는 능동적 휴식'이라 정의한다. 오티움은 수동적 충전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일상적으로 매일, 깊이, 주도적으로, 활기차게 하여 나를 기쁘고 감사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오티움의 새로운 항해를 하기 위한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준비함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첫 취업을 준비할 때의 긴장과 설렘과 같이 은퇴의 여정도 만만치 않게 생각과 태도의 변화와 사전학습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은퇴의 바다는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따라 바다를 향유하는 고래의 꿈일 수도 있고 바다 한가운데서 동력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다.
세상을 바꾼 불후의 영웅이라 해도 언젠가는 밀밭을 손으로 하나 하나 훑으며 가듯,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언스플래쉬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서, 파란만장한 미션을 마친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이 밀밭을 손으로 하나 하나 훑으며 고향과 가족의 세계로 천천히 되돌아가는 모습에서 ‘아~ 내가 은퇴하면 오륙도 섬이 보이던 내 고향 부산바다에 가고 싶어’라며 영화관에서 한 나의 독백을 여전히 기억한다. 글래디에이터 영화의 밀밭은 필자에겐 고향의 오륙도를 감싼 맑고 푸른 바다로 클로즈업 되었다.
일과 성과의 무거운 책임을 내려놓고 유유자적한 무위의 고향바다에서 학창시절 꿈꾸며 가슴에 묻어 둔 '시 한 줄, 에세이 한 줄 매일 쓰며 비발디의 사계-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매일 들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의 꿈은 아직 그대로임을 선배의 카톡 문자 한 줄로 깨달았다.
은퇴라는 낭만의 시서악(詩書樂)을 누리려면 냉정하고 차분한 현실적 계획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차근차근 준비할지···. 다가올 은퇴를 꼼꼼히 그리고 차분히 준비해야겠다.
다음달에 은퇴할 카톡 선배를 만나면 밥값은 꼭 내가 내어야 하겠다. 은퇴의 세상에도 눈뜨게 해 주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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