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인용되지만 내가 직접 본 적은 없는 영화, <트루먼 쇼>를 이 시간 떠올리는 것은 요즘 아내와 함께 즐겨보는 방송물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아내와 함께 보는 방송물 중에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는 프로그램이 부쩍 많아졌다. 어떤 것은 한 사람의 삶을 그대로 중계하는 것이고, 어떤 것은 한 모임이나 한 집단을 관찰(?)하는 것도 있다. 또한, 유명 연예인이 일반인의 집을 방문하여 그 가족과 특별한 시간을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유명인이 어떤 일에 도전하여 이루어가는 과정을 통해 시청자가 대리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예전부터 많이 있었다.
최근에 함께 시청한 프로그램으로는 미운 우리 새끼(미우새), 한 끼 줍쇼, 삼시세끼, 효리네 민박, 꽃보다 할배, 윤 씨네 식당, 잡학사전, 정글의 칙 등등이 잠깐 사이에 머리를 지나간다. 시절이 지난 것도 있으나 오래된 영상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민 와서 살면서 매물로 나온 집을 들어가 볼 기회가 많다. 굳이 집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면서 오픈 홈(Open Home)을 방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우리 부부의 경우는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집을 꾸며놓고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 제일이었다. 집에 방문해서 가구들과 전자제품과 함께 전시된 소품을 본다. 집 안뿐만 아니라 서울의 아파트에서는 생각지도 못하는 정원도 관람하면서 이런 것들도 있구나. 이렇게 꾸미면 좋겠다는 것을 말을 연발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이나 오픈 홈을 들릴까 말까 한다. 이제는 굳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이민 10년 차가 넘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널리 자랑해야 할 것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만족하며 딱히 다른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야 할 만큼 궁금한 삶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민 초기에는 모든 것이 궁금했었다. 하루에도 사계절의 옷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금은 다 알고 있으나 그땐 매일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가 궁금했다. 밥은 어떻게 먹는지. 구체적으로 도시락에 김치를 가져가도 좋은지, 아이들의 도시락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어인지, 오전/오후의 티다임(Tea Time)에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등이 궁금했다. 집은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가 통으로 궁금했다. 세상에 막 태어난 사람처럼 "의식주" 모든 것이 궁금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고 귀는 당나귀마냥 커졌다. 그 궁금증을 조금씩이나마 채울 기회가 오픈 홈이었으니 주말이면 산책 삼아 다니곤 했다.
오픈 홈에 가면, 모든 것이 다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어떤 집은 마치 한국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마냥 멋지다. 집에 어울리는 고급스럽고 깨끗한 가구, 요소요소에 배치된 전자 제품들과 조명, 넉넉하게 설계된 것 같은 수납공간들과 창고 그리고 깨끗한 차고까지... 그리고 좋은 분위기에 향기를 더하기 위해 빵을 굽기도 하고 커피를 내리기도 한다. 날이 조금이라고 쌀쌀한 듯하고 집에 벽난로가 있으면, 어김없이 불이 이글거리는 벽난로를 감상할 수 있다. 음악도 잔잔하고...
우리 가족도 오픈 홈을 한 적이 있다. 준비하는데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부동산 중개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중개인을 통해서 들은 비밀이 아닌 비밀은 다름이 아니라, 오픈 홈을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상품(집)을 돋보이게 하려고 불필요한 것들은 집에서 치운다는 것이다. 집을 더 크게, 더 아름답게,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치장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오픈 홈 동안 집의 모든 집기를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교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린 부부는 그처럼 잘 꾸며진 집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시장에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실소를 머금은 것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지만, 커피를 내리고 향수를 뿌려서 향이 집 안에 머물도록 하여 우리 집을 찾는 이를 배려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보이는 것 모두가 진실은 아니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본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오픈 홈을 보고 사람들이 진짜로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뉴스에서 나오는 것이 모든 진실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관련해서 기억나는 영화에는 <매트릭스>도 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은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화의 세계에서 가능했던 이야기가 영화의 시나리오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놀라움이란... 내 삶을 누군가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면 종교에 귀의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가 나를 프로그래밍하고 누군가의 의지대로 이끌고 간다는 것은 차가운 마음으로 생각할 때 두려운 것이다. 거기에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은 더욱 섬뜩한 일이다.
누군가 나를 보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고, 누군가의 삶은 몰래 보는 것을 즐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로움에 기인한 지존감의 결여? 자존감의 결여에 따른 외로움?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 살고 정보기술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지 세계의 어느 곳과 통화할 수 있다. 그리고 온갖 SNS(Social Network Service/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사회관계망)를 통해서 수많은 문장을 주고받지만 정작 마음은 언제나 허전한 현대인들에게 피부를 맞대고 희로애락을 함께 할 이웃이란 정작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민을 와서 아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친구들과의 관계가 거의 끊어졌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관계가 깊어질 때면 하나 둘 고국으로 또는 제3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을 가지고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건강을 추스르고 있는 사이 홀로된 듯한 느낌에 아내는 몹시 힘들어했다. 살기 좋은 시골에서 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옆집과 함께 밥을 먹는 관계에서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를 거쳐 지금은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시골이란 눈에 보이는 환경에 한한 것이고 인간관계에 관해서, 지금 우리 부부의 처지는 고국의 아파트에 살면서 경험하는 전형적인 도시 생활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처럼 이국만리에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는 사람이 아닌, 고국에서 같은 언어에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트루먼 쇼>와 같은 프로그램이 왜 필요한 것일까?
거창하게 누군가가 사방에서 시청자를 모니터링하고 있으니, 시청자도 누군가를 모니터링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도 있다. 시청자는 자기가 빅 브라더가 되어 프로그램을 즐길 수도 있다. "훔쳐"보는 것에서 "중계", "관찰"을 거쳐 "모니터링"이란 말을 쓰니 상황의 심각도가 "화-악" 줄어들어 거부감은 느낄 수 없다. 그러니까 방송국은 "당신도 빅 브라더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시청자에게 전하는 셈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한국의 거리, 특히 서울은 어는 곳이나 CCTV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이유는 누구누구의 삶이나 행동이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사람이면 이러한 환경에서 이렇게 행동할 것이고, 시청자는 이를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실시간 개그나 드라마를 방송을 통해 송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유발하기 위한 동기의 부여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어떤 프로그램의 경우는 무엇을 기대하고 시청했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오직 누군가의 삶을 몰래(?)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지루함이나 보이는 내용의 질과는 전혀 무관하게 화면은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자는지, 어떻게 먹는지,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는지. 불은 끄고 자는지.. 모두가 궁금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말로 이웃을 구할 수 없는 경우, 순수하게 이웃의 진솔한 삶을 듣고 싶은 경우이다. 누군가의 삶을 들으면서 우리는 나의 삶을 반추하고 위로를 받으며 마음이 정화되기도 하고 무릎을 치고 동지애를 느낀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내놓고 이야기 하거나,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환경이라면 더더욱 이런 부류의 프로그램을 통해 대리 만족감을 느끼지 않을까? 20여년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이사 떡을 돌리던 친구 아내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저희는 떡을 싫어하는데요!"
그런데 어떤 이유이건 이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이 전부 진실을 방영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함정이다!. 전체를 다 송출하기에는 시간상의 제약이 존재하니 어쩔 수 없이 편집한다. 편집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의도가 그 기저에 깔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크게 뜨지 않는다면 바보상자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20년 전의 영화 속의 트루먼은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트루먼 쇼>를 지켜보던 영화 속의 시청자들에게 트루먼의 탈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들은 제2의 <트루먼 쇼>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영화가 어찌 되었든지 현재의 우리는 또 다른 트루먼을 고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돌아봐야 한다. 지금의 내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트루먼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2017년 9월 26일 평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