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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2일
서해에서 맞은 아침
다섯 시가 되고 한참 있다가 일어나 화장실에서 얼굴만 씻는 고양이 세수를 하였다. 자리를 정돈하고 나니 창문이 밝아왔다. 카메라를 들고 유샘을 따라 갑판으로 올라가니, 뿌연 하늘에 해가 솟아 있다. 아래로 고개를 숙여 보았다. 바다를 헤쳐 나가는 배 주변의 바닷물이 마치 조류가 흐르는 것처럼 뒤로 흘러가는 것 같다. 어릴 적, 부모님 따라 버스를 처음 타고 읍내로 갈 때 가로수들이 버스 뒤로 획획 사라져 가던 것과 닮았다. 바다 빛이 누렇고 얕다고 생각해온 내 마음 속의 황해가 아니었다. 검푸르고 장대한 바다였다.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자란 나에게 바다는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다. 나이 마흔 중반에야 처음으로 일본으로, 울릉도로 갈 수 있었다. 일본에서, 신라에서, 백제에서, 고구려에서, 고려에서 구법 여행을 하고, 유학을 가고, 무역에 나서고, 사신으로, 원정군으로,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조운선을 끌고 이 바다를 항해하였을 옛 사람들에게, 이 바다가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던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옛 사람들이 왜 심청이를 용왕의 공양물로 바치고, 선묘낭자가 바다에 뛰어들어 용신이 되고 의상대사의 귀국길을 지켜야 하였던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당나라로 구법행을 감행한 일본 천태종의 2세 좌주, 엔닌 스님이 배가 난파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일이나 제주도에서 부친의 부음을 듣고 돌아오다가 풍랑에 떠밀려 명나라의 해안에 상륙하고 일년 만에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최부와 서귀포에 표류해온 하멜 일행의 공포를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었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지하고 법화사를 산둥반도의 적산과 제주도에 조성한 장보고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선실로 돌아와 가방을 싸고, 식당으로 가서 이 사장님과 동석하여 미역국으로 아침밥을 먹었다.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나니 배는 이미 칭다오 항구에 정박하고 있다. 뱃전에 나가보니, 자욱한 안개 속에 멀리 크레인탑이 보이고 항구는 해동에서 온 사람들이 상륙하기만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배에서 상륙하니 중국 공안이 부동자세로 서 있다. 셔틀버스를 타고 입국 세관에서 열지어 서서 입국 심사를 받았다. 단체비자의 비(B)조 끝에서 두 번째다. 중년의 남녀로 구성된 등산모임 사람들이 보였다. 물어보니 경기도에서 왔는데 산둥지방의 산들을 등산하기 위해 원정 왔다고 하였다.
세관 앞에 기다리고 있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이곳저곳에 아파트, 도로, 지하철 등 토목건축 공사가 한창이다. 한국가이드 이 사장님이 중국인 가이드 王雲來씨를 소개한다. 두 분이 친구 사이라고 한다. 중국여행사의 한국여행담당 간부인데, 몇 년 만에 현장 가이드 활동을 한다고 하였다. 매우 호탕하고 한국어도 능숙하다. 평양에 유학하여 국제무역을 전공하였고, 20년 전 한중수교 당시에 통역인으로 활동을 하였다고도 한다. 현대 중국의 현황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칭다오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진출해 있는 도시라고 한다.
칭다오 소어산 공원
얼마를 가니 곧 독일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19세기 말, 독일제국주의가 조차하여 중국으로 진출한 교두보가 칭다오이다. 백년이 넘는 유럽식 주택들은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을 걸어가자, 소어산(小魚山)이라고 하는 전서체 한자가 새겨진 원형의 돌문이 나온다.
언덕길을 돌아 오르니 3층의 전망대 정자가 있다. 이층 전망대에서 주변을 굽어보았다. 해안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정자 둘레에는 온통 유럽풍의 붉은색 기와지붕들이다. 뭔가 다사롭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붉은 지붕의 주택 단지 바깥으로 현대식 마천루들이 치솟아 있어서 중국 근대와 현대의 역사가 잘 대비되어 있는 도시경관이다. 100년이 넘는 건물이 가득하여 독일에서도 건축 공부를 하러 여기로 온다고 한다. 독일의 맥주 기술이 이전되어 탄생한 칭다오맥주 양조법은 독일에서도 구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관들을 보느라 잠시 넋을 놓은 사이에 내 주변에는 일행이 보이질 않았다. 아뿔사! 3층으로 모두 올라갔다. 잠깐 발품을 판 사람에게 황제도 보지 못했을 전망을 가능케하는 소어산공원 남조각(覽潮閣)의 위치가 또한 참 절묘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공원의 벽화도 아름답고 각기 다른 글꼴의 수십여 개의 물고기 어자로 꾸민 벽도 좋은 볼거리였다.
공원 입구의 기념품 가게 맞은편 집의 대문에는 분필 글씨로 커피를 파는 카페 광고가 붙어 있다. 그 앞의 골목길에는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중년의 과일장수가 입김을 불며 딸기를 팔고 있다. 그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딸기 맛만큼이나 신선하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오늘 중국의 보통사람 얼굴이다.
경복궁식당
점심을 먹으러 경복궁식당에 갔다. 기름기가 많아서 도저히 입에 대기가 곤란한 중국 음식을 먹어야 하는 나는 한식을 먹는다는 소식이 정말 반가웠다. 여행을 하면 그곳의 풍미를 맛보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지만 말이다.
기름기가 없고 신선한 생야채와 김치나 된장 같은 발효식품이 발달한 우리나라의 쌀밥보다 더 좋은 음식은 지구상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먹어본 음식 중에 일본음식은 느끼하고, 인도 카레는 맵고, 중국은 기름과 향을 많이 쓰고 밀가루 음식이 주식이라서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 중에 미얀마 음식이 나에게는 가장 입맛에 맞았다.
주 메뉴는 김치찌개이다. 내가 이제까지 먹어본 김치찌개 중에 제일 맛있었다. 한중수교 초기에 우리나라의 대통령도 이 식당에서 점심을 드셨다고 한다. 등 뒤에 걸린 기다란 달력에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미인이 경복궁 향원정을 배경으로 서 있다.
어릴 때 양복점 하는 이종형님이 보내준 그 추억의 달력을 오랜만에 이국의 식당에서 보니 반갑다. 식당에서 나오며 입구에 놓여있는 한글 신문을 보니 중국 내 우리 동포 사회가 발행하는 것이었다. 주로 상공인들이 많이 보는 것 같았다.
5.4광장
현대식 초고층 빌딩들과 독일식 건물들이 있는 시내를 달려 버스가 멈춘 곳은 5.4광장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내 눈에 ‘명주화원(明珠花園)’이라고 하는 고급 아파트 단지의 문패가 들어온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과 이름이 한자까지 같았다. 광장 주변에는 초고층 아파트들이 건설되고 빌딩들이 즐비하다.
칭다오시청 앞의 바닷가 광장 중앙에는 5.4운동의 횃불을 상징하는 빨강색 대형 조형물이 서 있다.
의화단 사건 때 살해된 2명의 독일선교사가 살해된 데 대한 댓가로 중국이 독일에게 99년간 칭다오를 조차하였다. 한적한 어촌이었던 칭다오에 1897년에 독일총독부가 들어서고 1903년에 맥주공장이 생겼다.
독일의 중국 침략의 교두보가 된 칭다오에서 제남과 철도가 연결되고, 독일의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1차대전에 독일이 패전하고 파리강화조약으로 독일의 중국 내 이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은 베이징 군벌정부의 원세개에게 21개 조항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중국 침략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조선의 3.1운동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분개한 중국의 학생, 지식인들은 칭다오의 반환, 매국노 처단, 일본의 21개조 수용 철회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노동자와 상인들까지 합세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차대전 이후 전승국이었던 중국에는 베이징대학의 진독수를 중심으로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유교와 미신의 타파와 과학과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신문화 운동을 펼쳤다. 루쉰과 후스는 중국인의 정신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백화문은 문어체에 기반하는 중국인의 사고와 문화까지 변혁시켰다.
시민들이 즐겨 찾아오는 해변공원이다. 제법 세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다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차재환 선생님이 맥주를 나타내는 비주(啤酒)의 비자가 훈이 어떻게 되는지를 물어왔다. 간자체를 모르기는 나도 한가지이만, 영어의 '비어(Beer)'의 소리를 따서 만들어낸 음차자이라고 대답하니,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며, 본래의 뜻을 물어왔다. 이마가 넓어서 지성미가 있고 태음인 체질인 차 선생님은 성품이 부드럽고 남을 말없이 잘 배려하는 분으로 보였다.
멀리 등대가 보이고 수평선에는 배가 떠 있다. 이곳 교주만 바다에서 베이징올림픽 요트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군항이 확장되고 조선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바람은 제법 차갑지만 갈매기들이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차지하려는지 물가에서 떼 지어 날고, 물 위에 앉는다. 햇살이 황해 바다의 잔잔한 물결에 은비늘을 일으키며 눈부시게 부서진다.
저 바다 끝에 신선의 땅, 봉래산이 신기루로 떠오르고 도사 서복은 진시황에게 불로초를 구하여 오겠다며 동남동녀를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서복이 다녀갔다는 글씨를 바위에 새기고, 제주도 남녘 갯가에서 다시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그곳을 서복이 돌아간 갯가라는 의미로 서귀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가이드가 들려준다.
오늘날 제주도는 중국인이 땅을 사들이고 있고, 중국인의 휴양과 투자지가 되고 있다. 공자님도 뗏목을 타고 햇빛 속삭이는 이 바다를 땟목을 타고 건너 고요한 아침의 땅, 조선으로 가고 싶어 했다. 남의 나라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동쪽 끝, 우리나라가 벌써 그립다. 일제에게 산하를 잃고 중국에서 돌아갈 기약 없는 세월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애끓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꼬지나 군밤을 팔고 장난감을 파는 노점상들이 있고, 데이트를 즐기는 중국인 청년들이 아리따워 보인다.
칭다오 짝퉁시장
다시 버스를 타고 중국 안의 유럽풍 거리, 해안 휴양지가 된 팔대관 거리를 지났다. 100년이 넘는다는 상호들이 보이고, 칭다오(靑島)라는 명칭이 비롯된 교주만의 작은 섬과 항만 시설로 설치된 해상의 다리, 잔교는 수리 중이다. 군함이 서 있는 교주만을 지나서 버스가 멈춘 길가에는 지하철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여름 휴가철에는 교통 체증이 아주 심하여 걸어다니는 편이 낫다고 한다.
짝퉁시장 관광이다. 상가 2층에 올라가니 가방 가게들이 빼곡하다. 명품 가방의 짝퉁도 이젠 중국 정부의 단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다시 일층으로 내려와 가게들 사이로 한 바퀴 돌며 구경하였다. 두 주일 앞으로 다가온 중국인 최대의 명절, 춘절 분위기가 넘친다.
가게마다, 붉은색 타래가 늘어진 홍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집집마다 서기가 찾아오도록 치장할 붉은 색 장식 노리개들이 가득 걸려있다. 엄마가 사는 금빛 나는 커다란 복(福) 자와 온갖 길상무늬가 입체적으로 화려하게 들어있는 가오리 연 모양의 네모난 춘절 장식 타래를 바라보는 상기된 얼굴의 어린 아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옥 가게에 가니 둥글고 윤기 나는 우윳빛 환옥(環玉), 황옥을 다듬어 만든 불상, 벽옥으로 조각한 배추, 물고기, 수정, 산호 가지 장식품이 가득하다. 가격도 물어보지 않고 사지도 않았지만, 눈으로만 보아도 즐거웠다. 옥은 천지의 순수한 기운이 뭉쳐서 이루어진 보석이니,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옥을 양기와 생명의 기운을 집안에 머물게 하는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여겼다.
입구의 기념품 가게에는 죽간에 노자의 구절을 쓴 것도 보이고, 부지런히 일하는 자본주의 사회 중국인들이 좋아할 ‘天道酬勤(천도수근, 자연의 질서는 부지런한 사람에게 보답한다)’이라고 쓴 액자, 난초, 매화 같은 벽걸이 장식용 액자도 있다. 역시나 중국답고 나에게는 친숙한 물건들이다.
계단 난간에는 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았을 남자 아이 넷이 매달려 논다. 그 모습이 천진하고 귀여워서 악수를 청하였다.
다른 기념품 가게에는 녹색 바탕에 오색영롱한 빛이 감도는 비단벌레를 잡아서 투명한 플라스틱에 넣은 열쇠고리가 걸려있다. 여행 중에 버스 속에서 박재화 선생님이 학창시절에 고청(古靑) 윤경렬 선생님으로부터 신라 미술의 아름다움을 멋스럽고 흥겨운 수업으로 들었다고 하였다. 그 때 처음으로 천마총의 말타래에 비단벌레 날개를 붙인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일행과 떨어져 도자기 컵, 목에 거는 염주, 손목에 차는 염주, 인형 등등 온갖 생활 소품들을 파는 가게 코너를 지나서 혼자서 안쪽의 문방구로 갔다. 드디어 다른 나라에서 가지는 쇼핑의 즐거움을 맛본다. 붉은 바탕에 금박으로 복자를 도드라지게 박아 넣은 세뱃돈 봉투 한 묶음과 매화, 연꽃, 석류, 모란 그림이 들은 붉은 바탕에 금박, 은박의 연하장 4장을 골라잡았다. 디지털에 전자 문자 메시지에 밀려 연하장이 사라져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중국에서 산 이 호화스럽고 붉은 빛 나는 상서로운 느낌을 전하는 종이 새뱃돈 봉투와 연하장이 내 마음 가득 흐뭇함을 선사해주어서 여행 중에 뜻밖의 큰 기쁨을 맛본다.
문방구에서 돌아 나와 보니 일행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시장바닥에서 혼자 낙오자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불안해진 마음에 상가 뒷문으로 나갔다. 군밤장수의 손수레에서 구수한 냄새가 차가운 길거리에 깔린다. 그 옆에는 용과로 보이는 자주색 과일을 파는 손수레가 있다. 다시 상가의 앞문으로 돌아와도 나와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인들 쉴새 없이 왕래하지만,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를 않는다.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설탕 시럽을 버무린 딸기나 파인애플 꼬지를 사 먹는 중국인들이 보이고, 상가 앞 길가에는 굵고 싱싱한 대추를 파는 순수레, 작은 수박만한 크기의 노랑색 귤을 파는 트럭,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나 있는 굵은 두리안을 파는 손수레, 아주 작지만 색이 짙고 신선하여 보이는 귤을 가득 실은 짐차 위에 겨울 햇살에 얌전히 앉은 강아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들이 내 눈에 보일 뿐이다.
한참 상가 입구에 서 있자니 드디어 한 사람씩 일행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노인이 길바닥에 앉아서 말없이 바늘에 실을 자동으로 끼우는 프라스틱 물건을 팔고 있다. 그것을 3위안에 2개 샀다. 어린날 지금 내 나이가 된 어머니가 나에게 바늘귀에 실을 꿰어달라고 하던 일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젠 어머니는 세상 사람이 아니니 그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돋보기를 끼고 퀼트를 하고 재봉틀로 바느질도 하는 아내에게 선물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점에서 굵은 생강에 눈길을 보내고, 목이버섯을 사기도 하였다.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해 사는 도시답게 한국물건도매시장도 눈에 띈다.
버스로 돌아와 작지만 왁스를 칠하지 않아서 껍질부터 자연 그대로의 생명력이 넘치는 귤을 얻어먹었다. 내 인생에 가장 달고 시원한 맛을 간직한 즙이 내 입안에서 가득 씹히는 과육에서 터져 나온다. 혓바닥을 흡족하게 적시고 곧장 목구멍으로 직진하여 배 속으로 꿀꺽 넘어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시장법칙에 충실하기만 하지 말고, 제발이지 껍질에 왁스를 바르지 않은 투박하지만 신선한 자연의 맛과 색을 그대로 간직한 그런 귤을 사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뻐스간의 횡설수설
버스는 칭다오의 외곽지 해변을 달렸다. 바다 위에 건설된 엄청난 돈을 투입하여 건설한 몇 십 킬로 길이의 해상 고가 도로가 보인다. 교주만 대교라고 한다. 버스는 고속도로로 올라가 달려서 쯔보(치박) 시내의 임치를 향하여 달린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내려 화장실도 가고 편의점도 구경하였다.
소변기에 붙어있는 팻말의 문구가 재미있다. ‘向前一小步, 文明一大步’, '앞으로 작은 걸음을 나가면, 문명으로 큰 걸음을 내딛는다'는 말이다. 암스토롱이 달에 착륙하며, '나의 작은 발걸음은 인류 문명의 큰 걸음'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작은 걸음만 앞으로 다가서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 있고, 장미꽃 향기가 날리는 한국의 고속도로 화장실로 갈 수 있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해는 지고 차는 달리는데, 박 단장님이 다가와 여행 오기 전에 주문한 중국사 개괄 강의가 준비되었는지 묻는다. 왕 가이드의 설명 뒤에 마이크가 나에게 건네졌다. 준비물이라고는 중국역대왕조의 이름과 연도만 메모해 왔다. 배낭 속에서 메모를 들고 씩씩하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강의를 시작하지만, 머릿속에는 강의할 내용이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서애 선생은 <<징비록>>을 집필하여 후세를 경계하였고, 위대한 민족의 영도자,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남북대치 상황에서 그렇게도 '유비무환'이라고 강조하셨건만!
일단 중국 역대 왕조의 이름을 나열하고 그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상황을 간략히 말한다. 나머지 시간은 그 시대와 관계있는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를 기억창고 속에서 찾아내어 들려주는 강의방식을 즉석에서 채택하였다.
우리역사와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온갖 일들의 원천이 곧 중국사이다. 지식고고학적인 이러한 방식의 강의는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강의 내용이므로 인문학의 본질과 만난다. 나의 방식은 과연 적중하였는지, 중간 중간에 계속 옆길로 새는 역사 이야기들이 오히려 일행에 좋은 호응을 얻었다. 앞쪽에 앉은 박재화 선생님이 시종일관 추임새를 넣어 주셨다. 고마워라!
미술 교사로 퇴임하여 세계를 여행하며 견문이 넓어지는 즐거움을 누리신다. 기간제 교사로서 사회 과목도 지도하는 박선생님은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였고, 구석기문화 유적인 베이징원인 화석이 나온 주구점 유적부터 미술사적인 안목으로 중국의 역사문화유적 답사여행을 하였다.
해월과 마하트마 간디와 비교하여 루쉰의 위치를 말하고,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국가자본주의의 길로 접어든 등샤오핑 이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현대 중국의 현실을 담은 조정래의 소설, <<정글만리>>를 언급하며 무려 2시간이 넘는 지루한 버스 간 강의를 마쳤다.
들으시느라고 고생하신 선생님들께 장시간 횡설수설하는 부족한 강의를 하여 미안하다는 말로 강의를 마치고 내 자리로 들어왔다. 그래도 박수를 쳐 주고, 강의가 재미있고 좋았다고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실수를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처음 만나는 분들과 여행하면서 실수를 하면, 여행 내내 마음이 불편하여 여행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황 5제 시대는 고고학적으로 서기전 3000년경의 양사오 홍도문화, 서기전23~18세기의 제남 룽산진의 흑도문화의 신석기문화에 대비된다. 충무공의 4형제 이름에 모두 중국 고대의 성군이 들어 있다.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은 태평성대를 이루어내는 성군들의 신하가 되어라는 작명이다.
문헌상으로 전하는 하왕조가 전설의 왕조로만 여겨졌지만 1953년에서 1970년대까지 발굴한 허난성 뤼양평야 동부 언사현 서남쪽의 얼리터우(二里頭)촌의 궁궐터, 대규모유적이 발굴되어 하왕조의 유적으로 인정된다.
은은 서기전 1776년에 성탕이 건국시조왕이었는데 처음에 허난성 정조우의 박(亳)에 도읍하였는데 서기전1401년에 안양시 소둔촌(殷墟)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나라이름이 상에서 은으로 바뀌어 불렸다. 청동기 금문과 갑골문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주나라는 폭군 주왕을 정벌하고 건국하였다. <<사기>>에는 은나라 주왕이 연못에 술을 채우고 배를 띄우고 그 주변의 나무에 고기를 걸어두고 향연을 즐겼다고 한다. 단순히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표현하는 말로만 알았던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사실인 줄은 처음 알았다. 백이숙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 무왕, 주공은 은의 70만 대군을 목야(牧野)에서 대파하고 역성혁명을 달성한다.
무왕은 출전에 앞서서, 왼손에 황색 도끼를, 오른손에 백색 깃발을 들고 지휘하며 맹서의 연설을 하였다.
“옛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는다. 암탉이 새벽에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였소. 지금 은왕 주는 오직 부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선조에 지내는 제사를 그만두고 나라를 어지럽혔소. ......백성에게 포학하게 대하고 상나라에서 온갖 악행을 다 저질렀소. 지금 이 사람 발은 오직 하늘의 징벌을 그대들과 함께 행하겠소. ......그대들이 힘쓰지 않는다면 그대들이 살육당할 것이오!”
어릴 적 암탉이 알을 낳은 것도 아닌데, 낮에 울면 엄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망할 놈의 닭이 낮에 우네!’ 암탉이 울면 집이 망한다고 하는 이 말이 은나라 시대 때에도 속담이었고, 무왕이 목야 대전의 출전 맹서의 연설에서 하였다는 사실을 <<사기>>를 읽어보고 처음 알았다.
조선시대의 비석에 '有明朝鮮國'이라는 말이 나온다. 왜 명 나라 앞에 '有'자를 덧붙였는 지 그 연유를 늘 궁금해 하다가 고대부터 '유'하, '유은', '유주'라고 나라이름 앞에 '유'자를 관습적으로 불렀다는 사실도 <<사기>>를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중국 문명의 거대한 호수와도 같은 책이 <<사기>>임을 실감하고,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의 교양의 원천이 바로 이 책이었음도 알겠다.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사기>> <백이열전>을 1억1만3천 번을 읽고,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0만을 1억으로 보았으니 실제로는 11만3천 번을 읽은 셈이다.
경주 부윤에서 퇴임하여 영천 금호강가에 호연정을 짓고 머물렀던 대학자 병와 이형상 선생은 영천의 벗인 호여 박성세와 군경 안후정과 짝하여 초와 조가 합종한 일을 주제로 밤새도록 토론하다가 몇 번이나 해가 중천에 뜬 줄도 몰랐다고 하였다.
무왕을 도와 건국의 산파 역할을 강태공이 하였다. 공자는 은나라의 후예이지만 주나라 건국의 주역을 맡은 주공을 존경하여 그를 꿈에서도 만났다. <<논어>>의 ‘몽견주공(夢見周公)’이라는 말에서 ‘몽주’라고 이름을 지은 정몽주는 개경 태묘동 동구에서 칼로 살해되었다.
백이숙제의 고국인 고죽국(孤竹國)은 우리나라 땅에서는 황해도 일대에 비견된다. 황해도, 곧 고죽국의 중심지인 개경의 고죽국 상징이 된 장소가 선죽교이고, 백이숙제에 비견된 정몽주가 조영규의 철퇴를 맞고 순절한 곳으로 여겨졌다.
공자가 중국의 예악문물을 완성한 태평성대의 성군으로 흠모하였던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가 태임이다. 이 태임을 스승 삼는다는 호를 가진 조선의 여인이 사임당 신씨가 율곡이라는 성인을 길렀다. 유교를 이데올로기로 건국한 조선은 인류사에서 가장 유교적인 국가사회였다. 그 연장선상의 오늘 한국인들의 핏속에는 유교문화가 흐른다.
<<사기>>, <<논어>>, <<중용>>, <<맹자>>, <<장자>> 같은 고전 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견주는 중국사상 가장 정치한 문예창작이론의 고전, <<문심조룡>>과 <<루쉰전집>>도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던 책이다. <<문심조룡>>은 신라 사회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있어서 , 무염화상과 헌강왕?의 대화에서도 등장한다.
일본 천태종 2세 좌주, 엔닌 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김문경 옮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제주도에서 돌아오다가 표류하여 명나라에서 겨우 돌아온 최부의 <<표해록>>, 연암 박지원의 세계적인 여행기, <<열하일기>>(김혈조 옮김, 돌베개) 같은 책들은 우리처럼 외국인이 미지의 세계인 중국을 여행한 기록이다. 중국 역사의 당대 현실을 생생하게 전한다. 이런 책들을 통하여 누워서도 중국사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사는 만리장성 바깥의 초원지대에 사는 유목민족과 그 안쪽의 농경지대에 사는 한족의 사이의 투쟁의 역사이었다. 중국 문명의 뿌리가 형성된 것은 제1차 제국인 한나라 시대이고, 중국 문명의 틀이 확장된 것은 제2차 제국인 당 나라 시대이다. 한 나라는 유교문명 제국이라면, 당 나라는 불교 문명 제국이다. 인도사에서 마우리아 제국이 불교 문명으로 경영된 제1차 제국이라면, 굽타왕조는 제2차 제국으로서 힌두교를 국교로 하였다. 중국사에서 분열과 혼란의 시대가 지속되면 한반도에서는 국가가 성장하고 통일된 강대국이 등장하고, 중국사에서 통일 왕조가 나타나면 한반도에 그 힘이 뻗쳐서 왕조가 교체되는 변란이 일어났다. 중국 문명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유교, 불교, 도교라는 3교의 경전을 읽어야 할 것이다.
치박의 첫날 밤
쯔보(緇博) 제도대주점(濟都大酒店)에 도착하여 가방을 방에 두고 내려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호텔 밖으로 진출하여 선술집을 찾아갔다. 찬바람을 맞으며 호텔 뒤쪽의 길을 돌아서 작은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강태희 샘 말고는 중국어가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다. 답답하여 영어가 입에서 나오고, 닭 날개짓에 꼬끼오! 소리를 내니 중국인 젊은 사장님이 우리가 알아듣건 말건 중국어로 설명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길 건너편으로 가보라고 하였다.
건너편의 식당 간판에 닭 계자가 보여 그집으로 들어갔지만, 말이 통하지 않고 눈치를 보건대 영업시간이 다 되어 더 이상 손님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옆으로 더 가면 우리가 찾는 식당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다시 불켜진 식당에 들어가니 서민들이 담배를 피며 음식과 술을 먹고 있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서비스 하는 여인이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이한다. 작은 방에 박단장님, 윤동진샘, 김우현샘, 강태희샘과 같이 앉아서 술과 안주를 시켰다. 환풍기를 돌려서 담배 연기를 빼내고 술과 안주를 시켰다.
김우현 샘은 과묵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감정의 기복이 없으신 것 같다. 퇴직하여 농사를 짓고 여행 중에는 부지런히 사진을 촬영하신다. 술을 받기만 할 줄 알고 안주만 축내는 나는 그냥 중국에서 맞이하는 첫날밤의 낭만 어린 음주 자리에 어울리는 즐거움만 맛보았다.
차가운 밤바람을 쐬며 호텔로 돌아오는데, 부부로 보이는 사람이 길가에 서서 말다툼을 한다. 남자는 말이 없고 기가 죽은 채 여자가 큰 목소리로 몰아 부친다. 남편이 과음을 하여 돈 낭비가 심하고, 아내가 바가지를 집밖으로 들고 나와서 한밤의 길거리에서 마구 긁어대는가 보다. 이번 여행에서 남녀가 다투는 장면을 세 차례 목격하였는데, 한 결 같이 여인의 목소리가 크고 남자는 다소곳하게 기가 죽어 있었다.
호텔에 돌아와 1902호 룸메이트인 윤동진 선생님은 다시 박 단장님 방으로 가서 맥주 한 잔을 더하고 오고, 나는 씻고서 침대에 누워 중국여행의 첫날밤 잠을 잤다. 어젯밤에 배위에서 불면의 밤을 보냈어도, 신경이 예민한 나는 오늘밤에도 숙면을 취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