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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22)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1960년대 미국불교 (5)
필립 카플로와 로버트 아이트컨
1966 로체스터 선원 설립회원들
필립 카플로와 [선의 세 기둥]
앞 1월호에서 야스타니 하쿤에 대해 소개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중에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나선 인물이다. 이런 그의 행적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한국불교계에도 그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불교사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다. 미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필립 카플로Philip Kapleau, 로버트 아이트켄 Robert Aitken 등은 야스타니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하라다-야스타니 계보라고도 말해지는데 하라다는 야스타니의 스승이다.
필립 카플로
하라다 로시 와 필립 카플로
야스타니가 미국 선에 끼친 영향은 필립 카플로와 로버트 아이트켄이라는 두 미국인 제자를 통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
났는데, 이 두 사람은 1960년대 초 선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중에서 필립 카플로는 야스타니의 첫 미국인 제자였다.
1960년대는 야스타니와 사사키 조슈 등 일본 스님들과 베트남 틱냑한 스님과 틱틱엔안(Thich Thien-An), 중국인 선화스님, 한국의 서경보스님, 스리랑카의 헤네폴라 구나라타나Henepola Gunaratana 스님 등 아시아 각국의 스님들이 대거 미국에 들어온 시기이다. 1959년에 입국안 스즈키스륜과 더불어 이들은 미국불교의 포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필립 카플로와 로버트 에이킨은 이 60년대에 백인으로서 미국사회의 불교포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불교가 미국화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필립 카플로는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에이컨은 하와이에서 활동을 하였다.
로체스터는 나이야가라 폭포 부근에 있는 버팔로 시에서 가깝고, 뉴욕 시에서는 차로 8시간 정도 가야한다.
필립 카플로의 생애와 일본과의 인연
‘필립 카플로Philip Kapleau, 1912~2004’는 커네티컷 주 뉴 헤이븐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에는 예일대학교가 있는 도시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법정 기록자로 일했다. 1945년 그는 ‘국제군사재판 전의 주요 전범들의 재판’의 법원 재판 기록자로 일을 하였다. 이 재판은 나치 지도자들의 재판이었다. 이 시리즈는 뉘른베르크 재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2차 세계전쟁 후에 도쿄 전쟁범죄재판으로 알려져 있는 극동에 대한 국제군사재판의 기록담당자로 일을 하면서 일본과 인연을 맺었다.
일본에서 그는 선불교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일본에서 13년을 보냈다. 처음에는 소엔 로시와, 이어 하라다 로시 밑에서 호신지의 재가승려로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스타니 로시와 함께 했다. 쉬운 세월은 아니었다. 그가 1948년 ‘국제 전범재판소’의 법정기록자로 일하면서 D.T. 스즈키를 만났을 때, 선 수행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어 그는 뉴욕 콜롬비아대에서 스즈키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 내부 서클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에 관한 철학일지라도, 철학을 통해서는 그가 뉘른베르크와 동경에서 전쟁범죄들을 다루는 재판의 법정기록자로 일한 뒤에 코네티컷의 일터로 다시 돌아갈 때 겪게 되었던 허무감을 달랠 수는 없었다.
“선은 철학이 아니야. 선이란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지. 네가 일본의 불교를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실로 배우고자 한다면, 너의 전 생애가 변형될 것이야”라는 일본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는 44세에 동경으로 돌아갔다. 처음 찾은 두 선사는 그가 일본어를 모르므로 거절했다. 선은 “단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가르침”으로 생각했다는 그의 강경한 항의도 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소엔 로시가 그를 받아 주었다. 소엔 로시는 카플로가 류타쿠지에 머물도록 허락하고, 그에게 “일본식으로 앉거나 무릎을 꿇든지, 의자에 앉든지” 선택할 수 있게 허용했다. 이어 카플로는 호신지로 들어가 다리, 등, 목에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견디면서 가부좌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첫 정진 내내 그렇게 앉았다. 그는 호신지에서 재가 승려로 3년을 머물다 “준엄하고 긴장된 분위기와 영양부족으로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는 소엔 로시의 조언에 따라 야스타니 로시와 함께 수행을 계속했다. 야스타니 로시에게는 사원이 없었으므로 카플로는 다른 재가 제자들처럼 자신의 거주구역에서 지냈는데, 그의 건강이 마침내 회복되었다. 야스타니 로시는 카플로에게 “선을 서양으로 전달하는 일이 너의 운명이다. 고통과 아픔이 있더라도 기죽거나 멈추지 마라”고 일렀다. 1958년 여름, 야스타니 로시와의 스무 번째 정진 때 카플로는 “완전한 집중으로 자신을 무無 속에 던져서 ‘나’가 완전히 사라졌다.” 일기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의 견성 체험은 “걸쭉한 풀로 가득한 어항에 갇혔다가 시원하고 맑은 바닷물로 풀려난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너무도 감사한” 느낌을 누리게 해주었다. 그는 일본에 남아 야스타니 로시와 함께 더 진전된 수행을 했다. 그는 야스타니 로시에게서 계를 받았고, 일본으로 오는 서양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개인면담을 할 때 로시의 통역을 맡았다.
개인면담은 항상 매우 사적이고 은밀한 만남이었지만, 야스타니 로시는 당시 카플로에게 로시와 제자 간의 자세한 대화내용을 받아 적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오랫동안 법정기록관으로 훈련받고, 이제 일본어에 능숙해지고 오랜 선 수행을 쌓은 그에게 적합한 일이었다.
로체스터 선원
카플로는 미국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처음에 돌아와서는 다소 당황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선의 세 기둥](이때는 미국에서도 출판되었다)을 홍보하기 위해 여행을 다녔지만, 자신의 근거지는 로체스터로 삼았다. 칼슨 부인은 그에게 대체로 40대 중반의 여성 20명과 2명의 남성으로 구
성된 자신의 공부 모임에서 강연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새로 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취사선택하는 태도였다”고 카플로는 기억한다. 이들은 의자에 앉아서 명상을 해왔는데, 카플로는 이들에게 좌선하는 법을 가르쳤고, 자신이 고생한 것에 비해 이들이 가부좌를 큰 어려움 없이 배우는 모습을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놀라워했다. 그러나 이 모임 참여자들을 개종시키는 일은 힘겨웠다.
오래지 않아 그의 책과 그가 전국을 다니면서 한 강연을 통하여 새로운 문하생들이 카플로와 몇몇 제자들이 세 들어 사는 로체스터 주택가,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거리에 자리 잡은 집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더 나이든 공부 모임의 구성원들을 제치고 카플로가 1966년에 설립한‘로체스터 선명상센터(Zen Meditation Center of Rochester)’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 새롭고 더 젊은 제자들은 카플로가 지금 기억하기에 “마치 오리가 물이 좋아지듯이 그냥 좌선을 좋아했고, 맨발로 다니며 땅과 가까워지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당시에는 특히 그랬다.”
1965년 무렵, 필립 카플로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
카플로는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선이 외국에서 건너왔고 이국적으로 비친다면, 선은 뿌리를 내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인들은 일본 스승 밑에서는 일본어와 관습을 따르려 하겠지만, 선생이 미국인이라면 이는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었다. 동남아시아를 순례하면서 그는 불교가 어떻게 다른 문화에서 다른 형태를 지니는지를 보았다. 그와 똑같은 변형이 미국에서도 일어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는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다. 선방에서 하는 독경을 영어판본의 경전으로 해보고, 앉기 편하게 디자인된 좀더 서양풍의 옷, 계를 받는 사람들에게 주는 서양식 불명佛名, 그 밖에 “서양의 전통과 더 잘 맞는 의식과 형식과 의례들을” 시도해 보았다. 야스타니 로시에게 로체스터 센터에서 반야심경을 영어로 번역하자고 제안했을 때, 로시는 기뻐하지 않았다. 수년 후 카플로는 이렇게 회고한다. “스승님과 얼마나 그 문제로 다투었던지요. 스승님은 결사코 반대하셨어요.”
그는 카플로의 다른 제안에 대해서도 “똑같이 별로 달가와 하지” 않았다.
프라즈나파라미타(Prajnaparamita; 지혜의 완성)인 반야심경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것인데 한국, 중국, 티베트에서는 모두 이를 번역해 자기네 언어로 독송한다. 일본에서 13년간 공부했던 끈기를 지닌 카플로인지라 그도 역시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조동종 선은 조동종의 두 번째 조사인 케이잔이 도겐이 가져온 중국의 법식法式을 일본의 법식으로 바꾸었을 때야 비로소 일본 전역에 퍼졌다고 주장했다. 물론 필수적으로 남길 것과 단지 문화적 첨가물이라 폐기할 것을 구분해야만 한다. 그러나 카플로는 일본에서의 긴 수행과 체류 경험 때문에, 자신이 “아기가 목욕한 물과 함께 아기를 함께 내다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어쨌든 이 반야심경의 문제나 다른 세부적인 문화적 변형의 시도가 그렇게 오랫동안 일본에서 함께 협력해 온 두 사람 사이를 칼날처럼 갈라놓았다. 1967년의 결별은 고통스럽고 결정적이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일본에서 13년을 지낸 후에 필립 카플로는 이제 홀로 서야 했다. 그는 자기 스승의 선이 미국에서 성숙할 수 있는 길을 찾기로 결의를 다졌다.
선의 세 기둥
[선의 세 기둥(The Three Pillars of Zen)]
카플로는 야스타니 로시의 가장 가까운 제자로 시가를 피우는 병원 행정가 코운 야마다 로시와 함께 일하면서 선의세 기둥(The Three Pillars of Zen)이라는 책을 편찬했다. 이 책에는 스승과 제자 간의 개인면담을 받아적은 내용, 야스타니 로시의 소참법문(정진 전의 입문법문으로, 이는 야스타니 로시의 스승 하라다 로시의 개혁적인 시도다), 기타 선에 관한 글을 번역한 내용이 실렸다. 이 책에는 또한 야스타니 로시의 일본과 미국 제자들이 경험한 견성 체험이 묘사되어 있다. 선 전통 내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사람에 의해 쓰인 책이었고, 카플로가 야스타니 로시를 설득해서 로시가 견성 체험과 더불어 도쿠산의 면담 내용을 싣도록 허락해 주었다는 사실로 인해, 이 책은 어떤 언어로 쓰였더라도 독특한 가치를 지녔다.
[선의세 기둥]은 좌선이 선의 핵심임을 명시하면서 좌선을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 지침을 주었다. 이 책으로 인해 선의 스승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도 스스로 수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선의세 기둥]은 1965년 카플로가 미국에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바로 그 무렵, 일본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특허변호사이자 제록스Xerox 주식회사의 창립자인 체스터 칼슨Chester Carlson과 그의 아내 도리스Doris가 이 책을 읽었다. 이들은 로체스터의 베단타 공부 모임에 나가고 있었다. 이 부부는 [선의 세 기둥]을 읽고 매우 감명을 받아 책 5,000부를 구입해 무료로 공공도서관에 기증했으며, 카플로를 로체스터로 초대하였다. 이제는 고전이 된 책이지만 이 책은 미국불교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불교에 입문을 하였다.
로버트 아이트켄
카플로와 마찬가지로 로버트 아이켄도 미국선의 초기단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74년 야스타니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그는 야스타니의 뒤를 이어 삼보교단의 지도자가 된 야마다 코운(山田耕雲, 1907~1989)으로부터 전법을 인가받았다.
초기부터 아이트켄과 그의 아내 앤Anne은 선의 미국화에 앞장서왔다. 그들은 1959년에 하와이에 좌선단체를 공동 설립했는데, 나중에 이 단체는 ‘금강승단Diamond Sangha’으로 불렸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초기에 신비감을 안고 불교에 매료되었다가 1960년대의 보다 더 수행지향적인 관심사로 전환된 그 시점에 선 단체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아이트켄은 하와이에서의 첫 안거를 이렇게 회상한다. “신지학과 널리 퍼져 있던 비의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다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안거에는 블라바츠키와 그 후계자들을 연구해 온 사람들과 갖가지 심령 글쓰기(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글자가 나타나는 것) 및 점성술을 했던 사람들도 참가했다. 젊은이들은 마약 혁명이 일어난 다음에야 찾아오기 시작했다.”2
다이아몬드 상가는 설립된 이래로 줄곧 성장하여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 캘리포니아에 선 센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아이트켄은 미국선의 학장이라고 불려왔다. 그가 번역한 경전, 게송, 찬불가는 많은 선 센터에서 일상적인 예배시간에 사용된다. 그는 미국선이 저변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오랫동안 빈틈없이 지켜보아왔고 많은 회의와 협의에 참석함으로써 현재 미국선의 형성과정에 이바지해왔다. 하와이 원주민, 게이와 레즈비언, 여성의 권리 등의 문제에 한결같은 지지를 보내기도 했고, 또한 많은 미국선 진영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진보/좌익적 정치사회 성향을 대표하기도 한다.
로버트 아이켄 (Robert Aitken)은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참선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지식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아이켄(Aitken)은 1917 년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으며, 그 가 5 살 때, 그의 아버지는 호놀룰루의 비숍 박물관 (Bishop Museum)의 인종 연구학자로 임명되었다. 일년 반 동안 캘리포니아의 고등학교에서 재학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유년기를 하와이에서 자랐다. 제2차 세계대전 전, 하와이 대학교에서 2년 반을 수학한 후, 로버트 (Robert)는 대학 을 휴학하고, 미국령 괌 에서 그의 운명적인 계기를 결정짓게 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41 년 진주만이 폭격을 당한 다음날, 그는 괌 섬을 점령한 일본 육군에 의하여 체포되고, 전쟁 기간 동안 일본 내의 여러 민간인 포로 수용소에서 억류되어 있었다. 다행하게도, 포로 수용소의 한 경비원이 영국 문학과 동양 고전중의 하나인 브리스(R. H. Blyth )의 ‘선Zen’ 이 라는 책을 그에게 빌려 주었다. 브리스(Blyth)의 책에 매료 된 로버트(Robert)는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가 책을 너무 열심이 읽어가는 것을 보고 간수는 자칫 그가 허리를 다치지 않을 까 하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 후, 우연한 운명적인 기회를 통해 그와 브리스( Blyth)는 같은 수용소에 이동되어 수
감 되었고, 로버트는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참선수행(禅)이 확실한 수행 교육이 될 수 있도록 지적인 측면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로버트 아이트컨과 앤 홉킨스
야마다와 로버트 아이트컨
전쟁 후, 로버트는 하와이로 돌아와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캘리포니아로 이사하였다. 이주 후, 캘리포니아 해안을 여행하면서 여러 곳에서 임시 이동 선원(Floating Zen center)을 이끌고 있는 참선 수행 교육자인 요겐 센자키(Nyogen Senzaki) 스님을 만나게 된다. 센자키 스님(Senzaki Sensei)은 로버트에게 깊은 연못(Deep Pool)을 의미하는 쵸탄(Chotan)이라는 법명을 인가 하였으며, ‘Koan’ 수행 모임에 그를 소개했다.
로버트는 그가 1950 년 일본 연구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하와이로 돌아 왔다. 로버트는 일 년 전에 동서 철학자 회의를 개최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그는 이 회의에서 스즈키와 (D.T. Suzuki)과 평생 동안 우정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또한 1950 년에, 그는 전쟁 포로 시절 이후, 처음으로 일본을 다시 방문하였다. 일본에서, 그는 임제종 (Rinzai)의 선사 나카가와 로시 (Soen Nakagawa Roshi)와 함께 임제종 수행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를 여행하다가 로버트는 결혼하고, 이혼을 하였으며, 오자이에서 지드 크리스샤 나우 티(Jiddu Krishnamurti)의 해피 밸리 학교 (Happy Valley School)에서 직장을 가졌다. 여기서, 그는 앤 홉킨스(Anne Hopkins)를 만나고, 결혼한 후, 그들은 신혼 여행으로 일본 여행을 하였다. 일본에서, 로버트는 다시 선 스님(Soen Roshi)과 야스타니 스님(Yasutani Roshi)을 만났다.
1958 년 선 스님이 센자키 스님(Nyogen Senzaki)의 장례식을 주재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왔을 때, 로버트는 선 스님을 수행하는 수좌로 봉사 하였다.
taking the pathe of zen
그는 1961 년 좌선 수행(세신 Sesshin) 동안 있었던 수행 중에 초 견성을 경험 하였으나, 그의 스승인 선 스님 (Soen Roshi)은 그것을 조그만 빛 이상의 것으로는 인가하지 않았다. 그의 깊은 수행에 대한 견성과 이해는 1971 년 선 스님(Soen Roshi)에 의해 확인되었다 ‘Koan’ 수행에 깊이 참여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선지식에 이르는 능력을 보여준 오랜 수행을 통하여, 선 스님에 의하여 그의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마침내 확인이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이켄(Aitken)은 다양한 스승들과 교류와 협력을 유지하였으며, 그의 주요한 스승은 처음에는 야스타니 스님( Yasutani Roshi) 이었고, 다음으로는 야스타니 스님의 후계자인 고우 스님(Ko’un Yamada Roshi)이다. 1974 년 야마다 로시 (Yoshida Roshi)는 아이켄에게 법을 전수 하였나, 수행에 대한 책임감과 여러 면에서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는 아이켄(Aitken Roshi)은 캘리포니아를 여행하여 ‘Koan’에 대한 수행을 검토하고 마에즈미 스님(Maezumi Roshi) 함께 ‘Koan’을 통한 통찰력에 대한 수행을 깊게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에즈미 스님(Maezumi Roshi)의 정신적인 다양성은 아이켄( Aitken Roshi)이 북미주 지역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참선 수행 스승으로서의 교육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개척하는 출발점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1959년에 그는 앤과 함께 코코안 선원 (Koko An Zendo)을 설립했다. 이것은 하와이의 여러 섬과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텍사스, 워싱턴 주, 독일,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에 센터가있는 금강승단(Diamond Sangha) 네트워크가 될 승단의 핵심이었다. 호주에서 오랜 수행 제자와 법 제자인 죤 타란트( John Tarrant)와 함께 수행 정진하면서 금강승단(Diamond Sangha)을 가장 큰 참선 수행(Zen) 조직인 Down Under에 세웠다.
1967년, 에이킨은 하와이 대학교 동서양센터에서 은퇴한 뒤를 염두에 두고서 마우이 섬에 집을 한 채 사두었다. 긴 머리의 젊은이들이 그 무렵 마우이에 몰려들어 에이킨이 산 집의 방들에 세를 들었다. 에이킨이 계속 방을 세주었으므로 새 세대와 친숙해진 에이킨은 ‘동양의 불교도’지가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이들의 성향을 잘 묘사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반체제 문화의 요가에 기반한 막다른 곳에서 온 이 젊은이들은 계시적 종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전체성과 본질에 대한 의식, 자연에 대한 사랑, 청빈과 금욕주의에 대한 헌신, 서로에 대한 배려, 말만 하기보다는 실제로 수행하고자 하는 ‘열렬한’ 의욕을 지녔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좌선에 관심이 있어서 에이킨은 마우이에 코코안 지부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첫 단계로 마우이 선원은 “환각제를 복용하는 보헤미안들에 대한 일종의 사명”을 수행했다. 에이킨은 이렇게 썼다. “우리 문을 두드리는 젊은이들 모두는 LSD나 흥분제 메스칼린이나 환각제 심로시빈 등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는 이것이 다른 그룹들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선 센터에도 해당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마우이 선원은 “정신차릴 수 있는 장소”로 알려졌고 정규적인 좌선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기복이 매우 심하였다. 에이킨은 요즈음 이렇게 말한다. “이 놀라운 정신을 창조했던 그것이 또한 정신을 파괴했다. 그것은 마약이었다.” 에이킨의 관찰에 따르면, 마리화나를 상용常用하여 “현실감이 파괴되었고”, 논문에서 썼듯이 LSD는 “인성구조의 상당부분을 파괴하고, 순간의 충동만을 가장 중요시하도록 만들었다.”
에이킨이 가장 결정적이라 생각했던 건, 결국 “집중하지 못하고 산란한 인간의 문제”였다. 에이킨이 알아챈 사실은 이랬다. “이 새로운 집시들은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처럼 오늘은 멘도시노로, 내일은 샌프란시스코로, 그리고 이어 마우이까지 흘러갔다가 이제는 본토로 몰려오고 있다. 이들은 항상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그건 단지 희미한 내적이고 외적인 충동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좌선은 자연히 이를 치유하는 방법이었고, 마우이 선원은 점점 더 이런 훈련장소로 발전해 나갔다.
아이켄 (Aitken Roshi)은 1990 년 말 은퇴를 하였으며, 호놀룰루의 금강승단 파로로 선원(Diamond Sangha Palolo Zen Center)으로 돌아가서 마지막 해를 보내기 전에, 하와이 빅 아일랜드의 카이무(Kaimu)에서 호놀룰루, 그 뒤에 보조 생활 시설이 있는 하와이 카이 (Hawaii Kai)로 갔다. 그는 2010 년 8 월 5 일에 세상을 떠났다. 금강승단(Diamond Sangha) 네트워크는 법제자와 후계자로 구성된 교사의 서클이 이끌어 나가고 있다. 아이튼 스님( Aitken)의 정식 상속인은 넬슨 포스트 스님(Nelson Foster Roshi)이다. 포스트 스님은 주목할만한 사회 정의 운동가이자 작가이자 편집자이며 현재 영어로 제공되는 전통적인 참선 수행법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저서 중 한권의 편집자로서 새로운 선 리더 (Andy Ferguson 's Zen 's Chinese 세습 재산). 포스터 로시 (Foster Roshi)는 캘리포니아 북부 샌 후안 (North San Juan)에서 ‘뼈의 고리' 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다.
호놀룰루의 금강승단 파로로 선원
파로로 선원에서 수행중인 신도들
미국 불교의 중요 연표 (1960년대)
(야스타니- 필립 카플로, 로버트 아니트켄(Robert aitekn 8년간 지도받음 ) 견성체험 강조. 본부는 뉴욕시 브롱스에 있고 장엄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민법 서명식이 거행됐다. 이 법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발의되었다. 저작들보다 훨씬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야스타니와 그의 방식을 많은 미국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76년 뉴욕에 Orgyne Cho Dzong 설립. 교수, 쵸감 트룽파 린포체, 람 다스(Ram Dass, )허버트 구엔터( Herbert Guenther, 카규의 역사, 티베트 문헌 번역 전문가),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위빠사나의 잭 콘필드와 조셉 골드스타 인. 잭 켈루악의 '영혼의 시학학교' 설립(School of Disembodied Poetics) 했다. 이곳은 학술회의와 연수회를 후원하며 하와이 대학교 출판부와 함께 동아시아 불교에 헌신하는 두 개의 출판 물을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다. 하나는 학술연구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전문헌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1987년 입적한 샴발라센터 설립하고 미국불교 포교에 큰 역할을 한 초감 트룽파 린포체 추모하기 위해 1988 년부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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