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學思想 및 傳統思想을 硏究, 承繼, 普及하고 現代化, 生活化하여 先賢의 崇高한 理念을 오늘에 되살리며 道德社會를 具現하는 靑壯年들의 壬辰年 7月 尙州地域 先賢遺蹟 踏査
2012년 7월 15일 社團法人 博 約 會 大邱廣域市支會 靑壯年部
1.이 전 (李 㙉) 1558(명종 13)∼1648(인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磵). 수인(壽仁)의 아들이다. 동생 준과 함께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퇴도(退陶)의 학설을 배워 주자서(朱子書)를 전심으로 공부하였다. 임진왜란 때 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동생을 등에 업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급난도 急難圖〉라고 하니, 당시의 명공·거경들이 이 일을 가영(歌詠)하였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세마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때에는 지례현감을 제수받았으나 사퇴하였다. 42세에 두 개의 낙사계를 합계하는 데 동참하였으며,1604년에는 수선서당을 중건하였고, 1606년에는 도남서원의 창설에 공을 세웠다. 55세 때인 1612년에는 이준, 정경세, 조찬한, 김지복, 정호선, 전이성 등과 함께 집에서 매화를 완상하는 문회를 열었고, 1617년에 옥성서원에서 강회를 열 때는 임숙영, 고인계, 최현 등 많은 분들이 모이게 되었다. 1622년에는 5월에 연악서당에서 문회를 가지고 연악문회록을 남겼으며, 7월에는 낙동강에서 배를 띄우고 시를 짓는 임술범월행사를 가지면서 임술범월록을 남기었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2. 이준(李埈) 1560년(명종 15)∼1635년(인조 13). 상주 출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이수인(李壽人)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석천(石川) 김각(金覺)에게 배웠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하였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으며, 그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천명을 모집하여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위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스승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하여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를 베풀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하였으며, 그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각각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집권 서인세력이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의 일원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하여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류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당시의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도남서원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3. 체화당 체화란 형제우애를 뜻하는 말로 월간(月澗) 창석(蒼石) 두 선생의 우애를 상징한 당호라 한다. 체화당(체華堂)은 월간선생(月澗先生)이 만년(晩年)에 청도(請道)하던 곳으로 1632년(年)(수정(수禎) 임신(壬申)) 월간선생(月澗先生)의 제삼자(第三子)인 신규공(身圭公)이 건립(建立)하였고 월간(月澗), 창석(蒼石) 양선생(兩先生)의 사당(祠堂)은 애초에 1656년(年)(수정(수禎) 병신(丙申)) 타처(他處)에 창건(병建)된 것을 1771년(年)(양묘(羊卯)) 체화당(체華堂)이 있는 이곳으로 이건(移建)하였다. 체화당(체華堂) 대청(大廳) 후벽상(後壁上)에 1941년(年)(양사(羊巳)에 작성(作成)된 묘안이건상량문(廟岸移建上樑文)과 체화당중건기(체華堂重建記)가 걸려 있다. 체화당(체華堂) 일곽(一廓)의 건물(建物)들은 뒤쪽에 낮은 야산(野山)을 배경으로 동향(東向)으로 경사진 대지(垈地)에 배치(配置)되어 있는데, 전면(前面)에 대문채가 동향(東向)하여 놓였고 뒤쪽으로 마당을 건너 체화당이 높은 축대위에 평행(平行)으로 배치(配置)되어 있으며 그 뒤쪽에 방형(方形)으로 토담을 두르고 사당을 건립(建立)하였다. 체화당(체華堂)의 좌측(左側)에는 관리사(管理舍)가 배치(配置)되어 있다. 체화당(체華堂)은 막돌 축대를 1.5m정도로 놓이 쌓고 큰 막돌 초석(礎石)을 놓아서 기둥을 세웠는데 정면(正面)에만 원주(圓柱)를 사용 (使用)하였다. 사간(四間) 전면(前面)에 길게 반칸폭의 뒷마루를 설치하였고 그 뒤쪽에 중앙(中央) 2간(間)은 마루방이고 양측면(兩側面)은 각각(各各) 1.5간통(間通) 온돌방(溫突房)을 들였다. 전후면(前後面) 주상(柱上)에는 초익공양식(初翼工樣式)으로 꾸며 놓았으나 우주상(隅柱上)에는 상면(上面)에 조각장식을 한 암서형의 촛가지를 두 개를 겹쳐서 뽑아놓고 있어서 형태(形態)가 다르다. 마루 상부(上部) 가량(架樑)는 오량가(五樑架)로 대량(大樑)위에 대접받침을 놓고 보아지와 첨차로 십자형(十字形) 태공(台工)을 짜올리고 종보와 종도리 장혀를 놓았다. 종보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우고 첨차를 직교배치(直交配置)하여 종도리와 장혀를 올려놓고 있어 비교적 고격(古格)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청(大廳)의 좌우(左右) 측면벽(側面壁)과 건축물(建築物)의 외측벽(外側壁)에 가새를 설치하여 보강하였고, 대청(大廳) 전면(前面)에 미서기 창문을 설치한 것, 주토부(柱土部)의 초익공부분(初翼工部分) 등(等)은 비교적 신재(新材)로서 재목(材木)의 부식정도로 보아 1941년도(年度)의 보수시(補修時)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월간선생(月澗先生) 묘우(廟宇) …… 장태석(長台石)으로 기단(基壇)을 쌓고 윗면은 몰탈도(塗)하였고 전면(前面)미만 원형(圓形)으로 다듬은 주초(柱礎)를 놓아서 원주(圓柱)를 세웠다. 주두(柱頭)와 주두(柱頭) 아랫쪽에 포개어서 촛가지를 두 개 전면(前面)으로 돌출(突出)시켰는데 그 모양이 체화당(체華堂) 우주상(隅柱上)의 것과 같으나 사당(祠堂)에서는 주두(柱頭)위에 올려놓은 툇보의 머리부분(部分)도 촛가지와 같은 형상(形象)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지붕은 겹처마이고 양측(兩側)의 박공면에는 풍판(風板)을 설치(設置)하였다. 전면(前面)에는 3면(面)이 개방(開放)된 반간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향간(鄕間)만 양개(兩開)높은 궁판 울거미 살문이고 양측간(兩側間)은 같은 모양의 외여닫이다. 내부(內部)는 통간(通間)으로 마루위에 돗자리를 말았으며 상부가(上部架)는 오량가(五樑架)로 대량(大樑)위에 십자(十字)로 태공(台工)을 짜서 대접받침위에 놓고 종보를 놓았으며 파련대공을 세우고 첨차를 직교(直交)시켜 종도리(宗道里)를 놓은 수법이 체화당(체華堂)의 가량지법(架樑枝法)과 같음을 알 수 있으며 다만 단청을 더 하였다. 양측벽(兩側壁)에는 가새를 후보(後補)하고 있는 것도 같다. 대문채는 정면(正面) 5간중(間中) 좌측(左側)에서부터 문간방, 대문간, 고방, 방 부엌의 순(順)으로 되어 있었으나 대문간은 전면(前面)쪽을 토벽(土壁)으로 막아버렸고, 고방은 전면(前面)이 개방(開放)된 마루로 개조(改造)하였다. 잡석기단에 막돌주초, 방주(方柱)를 사용(使用)하였다.
4. 존애원(存愛院) 소 재 지 :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동산밑) 문 화 재 : 경상북도 기념물 제 89호, 1993년 3월 25일 지정
- 건축 이야기 존애원이 지어진 배경은 이준이 지은 기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599년(선조 32) 가을에 정경세가 그 벗 성람(成濫)과 상의하기를, “사람들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 춥고 더움의 침해를 받아 병이 걸려 온다. 그러나 약은 한 두 가지도 구비하지 못하여 왕왕 죽을 때가 아니어도 죽으니 그것이 바위 담장 속에서 손발이 질곡에 묶여 어찌할 수가 없이 죽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 공이 시와 서, 학문의 통달로써 황제(黃帝)와 같이 의약의 술법에 능통하며, 공의 마음은 고인이 영사에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과 같으니 어찌 사람의 육체에 고통을 막연히 보고만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겠는가. 우리 동지들과 더불어 약재 몇 종류를 모아 급할 때에 쓰게 할 것이니, 이제 병을 진찰하고 약을 조제하는 일은 공이 맡아서 해야 할 것이라.” 하니, 그가 마땅한 일이라 하여 받아들이고 여러 사우들 또한 흔연히 참여를 원하며 협력하려 하였다. 이에 창고를 지어 저장하고, 손님이 날마다 모여 드니, 숙박하는 장소가 없을 수가 없어 이에 당우를 지어 대접하며, 약을 팔아 본전을 하고, 나머지는 모으고 늘려 모든 비용과 재료의 구입에 충당하면서 누구든지 약을 구하는 사람에게 얻게 해주니, 효과가 순식간에 파급되었다. 정경세가 성람에게 의료기관 설립을 건의하여, 존애원을 세운 내용이 잘 드러나고 있다.
- 건축 배경 존애원 앞의 안내판을 보면, “이 건물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회가 어수선한 가운데 서민의 질병퇴치를 자치적으로 해결하고자 1602년(선조 35) 청죽(廳竹) 성람(成濫),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 상산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13개 문중이 계를 모아 설치 운영한 전국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이다. 존애원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선비 정자(程子)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의료시설이 극히 미약하였던 당시 , 상주지역을 대표하는 각 문중에서 상주향약의 정신과 숭고한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존애원의 설립은 숭고한 인간애를 실천한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존애원의 역할로 의료 활동 뿐 만 아니라 지역민의 화합을 위한 각종 행사도 치렀는데, 1697년부터 1894년까지 백수회(白首會)라는 경로잔치를 개최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고 되어 있다. 존애원은 의료시설이 아주 적었던 당시 많은 약재와 시설을 갖추어 주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함으로써, 다른 지방에까지 큰 자랑거리였다.
- 건축 특징 율리(栗里)의 넓은 들판을 바라보면서 얕은 언덕기슭에 자리 잡은 존애원은 청죽(廳竹) 성람(成覽),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이 1602년(선조 35)에 건립한 사설의료기관으로서 1826년에 (순조 26) 중수된 적이 있다. 현재 존애원 주변에 의료시설에 필요한 지원용도의 다른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존애원 만 남아있다. 건물 앞 마당에는 당시에 약을 빻거나 할 때 사용하던 돌절구가 계단 양쪽에 설치되어 있다.
- 건축 구성 네모진 흙담으로 둘러져 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2단으로 되어 있다. 2번째 마당에 얕은 자연석기단 위에 중앙에 마루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1칸의 온돌방을 배치하고 있다. 좌우온돌방은 마루쪽으로 쌍여닫이문을 달고 전면으로는 하부에 마름을 둔 쌍여닫이띠살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온돌방 후편으로 2자 정도의 수납공간인 벽장을 설치하고 있다. 마루 배면에 퇴를 내고 있다. 퇴간상부는 퇴량을 걸쳐 내전주 위에서 대량과 합보시키고 외전주와는 뺄목으로 보강시키고 있으며, 마루상부의 구조는 만곡도가 큰 자연곡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한쪽에는 동자주를 세울 필요가 없어 종량을 그대로 얹고 원형판대공을 세워 오량구법으로 상부가구를 결구시키고 있다.
- 관련이야기 처음에는 존애당이라 했다가 존애원으로 이름을 바꾸다. 청리면 율리에 위치한 존애원 건물은 화려하지도 장식적이지도 않지만, 자연 속에 묻혀 있는 자체로의 편안함은 보는 사람을 여유롭게 만든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 칸으로 크지 않지만 이곳에 담겨있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만큼은 그 무엇보다 크고 높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존애당이라 했다가 존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존애원에서는 의료 활동 뿐 만이 아니라 낙사계의 회합자리가 되어 각종 행사도 치렀는데, 특히 1607년 이후부터 갑오경장(1894)에 이르기까지 경로잔치였던 백수회(白首會)를 개최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1607년 존애원 백수회 때는 송량(宋亮), 김각(金覺), 정이홍(鄭而弘), 윤전(尹塡) 등의 어른을 정경세, 이준, 김지복, 김지덕 등의 자질이 모시었다. 낙사계는 1797년(정조 21) 왕으로부터 ‘대계(大契)’란 칭송을 받았고 1906년에는 한광(韓匡)이 아들의 관례(冠禮) 때 존애원에서 “대계백수회(大契白首會)”를 가진 바도 있다. 이처럼 존애원은 민초들의 애환과 질곡을 헤아리며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상주 선비들의 박애정신에서 탄생한 의료시설인 동시에 향토 사랑을 실천한 낙사계원들의 모임 장소였다고 할 수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회가 어수선한 가운데 서민의 질병퇴치를 자치적으로 해결하고자 1602년(선조 35)에 정경세의 발의로 세워진 사설 의료기관이다. 토산 약재는 손을 모아 채취하고, 중국의 약재는 쌀과 베를 내어 무역으로 사들이고, 창고를 지어 저장하고, 당우를 지어 대접하며, 약을 팔아 본전을 하고, 나머지는 모으고 늘려 모든 비용과 재료의 구입에 충당하면서 누구든지 약을 구하는 사람에게 얻게 해주니, 효과가 순식간에 파급되었다. 운영은 각 문중에서 계를 모았고 계원은 창녕성(成)씨, 진양정(鄭)씨, 흥양이(李)씨, 여산송(宋)씨, 영산김(金)씨, 월성손(孫)씨, 청주한(韓)씨, 상산김(金)씨. 재령강(康) 씨, 단양우(禹) 씨, 무송윤(尹)씨, 전주이(李)씨, 회산김(金)씨 등 13개 문중이나 되었다.
5. 愚伏 鄭經世 1563(명종 18)~1633(인조 11)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여관(汝寬), 어머니는 합천 이씨로 가(柯)의 딸이다.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어릴 때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 천자(天資)가 영오(潁悟)하여 7세에《사략(史略)》을 읽고 8세에《소학》을 배웠는데, 불과 절반도 배우기 전에 문리가 통하여 그 나머지 글은 스스로 해독하였다고 한다. 1578년 (선조 11)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류성룡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진력하였다. 1582년 회시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가 곧 대교로 승진되었다. 1596년 이조좌랑에 시강원 문학을 겸하였으며, 한때 잠시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어왜진영(禦倭鎭營)의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 교리에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였으며 곧이어 이조정랑·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정랑의 직에 있을 때에 인사행정이 공정하여 현사(賢邪)를 엄선하여 임용 또는 퇴출하였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에 승정원 우승지로, 3월에는 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경상감사 재임시에는 영남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이 탕갈되고 인심이 각박한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하여주고, 민풍의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가져오게 되었다. 1600년 영해부사가 되어 이 고을 풍습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함을 근절시켜 민풍을 일신시켰다. 그해 겨울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잠시 상경하였다가 다시 귀향하였다. 당시는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는 자못 시끄러웠다. 정경세는 이때를 기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그는 도학의 전수가 정몽주에서 창시하여 이황에서 집성되었으며 김굉필·정여창· 이언적 같은 여러 현인이 나와 정학을 강명하며 이들 모두 수백리 안에서 울흥하였고, 상주는 또한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서원을 세워야 함을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을 창건하고, 오현을 종사하여 후학으로 하여금 도학의 정통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교서를 내려 정경세에게 구언을 하였는데 그는 이에 만언소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하게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09년 (광해군 1) 봄에 동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 다음해에 돌아오면서 병부에 글을 올려 화약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교섭하여 그 수입에 진력하였으므로, 특지로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그해 4월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 외직을 원하여 나주목사에 배명되어 12월 부임하는 날 다시 전라감사에 영전되어 그 뒤 도정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8월에 정인홍 일당의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일변되자 3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그 뒤 대사헌, 도승지, 우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도를 확장하고 요해를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을 조화하여 국정에 심력을 기울였다. 정경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평소에 주자(朱子)를 흠모하고 존신하였으며, 주서(朱書)를 편람, 정독하여 후진교육이나 조의에서나 경연에서 진강할 때 조서에 근거를 두지 않음이 없었다. 양정편(養正篇)》은 주자가 편찬한《소학》과 표리가 되고 주문작해》는 이황이 편찬한《주서절요》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또 경전에 밝았는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제자로는 전명용(全 命龍), 신석번(申碩蕃), 강진용(姜震龍), 황유(黃紐), 홍호(洪鎬)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우복집》,《상례참고》,《주문작해》가 있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6. 立齋 鄭宗魯 입재 선생은 문장공(우복 정경세)의 6대 주손(冑孫)으로 휘(諱)는 종로(宗魯), 자(字)는 사앙(士仰)이오, 입재(立齋)는 선생의 호(號)이다. 우산 종가는 우복선생을 불천위(不遷位)로 봉향하면서 그 육대손인 입재선생을 또 불천위로 별묘(別廟)를 지어 봉향함으로써 한집에 두 사당을 봉향해 오고 있는데 입재선생의 별묘는 향내 유림이 뜻을 모아 받든 향불천위(鄕不遷位)이므로 봄(음 3월 보름), 가을(음 9월 보름)에 향사로 받들고 있다. 입재 선생은 영조(英祖) 14년(1738) 11월 13일 상주 함창(咸昌) 율리(栗里 ;現 문경군 영순면) 부림 홍씨(缶林 洪氏)2)마을에서 출생하여 순조(純祖) 16년(1816) 6월 6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향년 79세였다.
가. 어린시절 (출생-9세) 선생은 생후 3일 만에 어머니(洪氏)를 잃고 외조모(李氏)와 유모(權氏)에 의해 외가에서 자랐는데, 6세 때 잠시 상주 우산 본가로 돌아왔다가 조부의 명으로 다시 외가로 가서, 9세 때인 영조22년에 우산(愚山) 친가로 돌아왔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천재적 기질을 보였는데 5세 때 봄에 꽃봉오리가 달린 매화나무 가지를 꺾어 놀면서 꽃봉오리가 위로 올라간 것은 ‘오’자라 하고 옆으로 붙은 것은 ‘어’자라고 하는 등, 나무 가지에서 글자를 알아맞히는 글자놀이를 하였다. 옛날에는 아기에게 먹일 것이 없어 네댓 살이 되도록 영양이 넉넉하지 못한 모유에만 의존하여 아기를 키웠으므로 유아의 발육상태가 현대처럼 일찍이 발달하지 않았다. 7세 때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친가에 돌아온 후로는 어린 나이에도 밖에서 놀지 않고 서실(書室)에 묻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본가로 돌아온 후 처음에는 조부 엽동공(燁洞公;冑源)에게 수학하였는데 아홉 살 때 때 조부 엽동공의 글을 대서(代書)할 수준이 되었고 글씨가 훌륭하여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 소년시절 (10세-20세) 10세 (1747 영조 23) 때 이미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책이 쌓인 서고에 들어가 독서에 몰입하여 경전(經典), 정주학(程朱學), 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숙독하는 일로 일과를 보냈다. 11세 때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병구완에 매달려 이후 10년을 하루같이 시탕하였다. 선생의 선고(先考 仁模)는 20대 초반에 모친상을 당해 여막(廬幕)에서 건강을 잃은 데다 선생이 태어나던 30세 이후로는 깊은 독서로 몸이 더욱 쇠약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세월을 병석에서 보냈다. 13세 때부터 숙부 창주공(滄洲公;義模)에게 수학하여 가학의 기초를 닦아나갔다. 17세 때는 소학(小學)을 베껴 소책자로 만들어 소매에 넣고 다니면서 행동규범으로 삼아 유학자의 기본으로서 행신의 정립에 정진하였다. 18세 때 조부의 병환이 위독하여 삼개월간 약을 달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계모 충주 박씨에게서 동생(宰魯)이 태어났다. 1756년(영조21) 19세가 되던 봄, 2월부터 4개월에 걸쳐 연달아 상을 당하였는데 2월 18일 조부(燁洞公;冑源 章陵參奉 향년 71)상을 당하고, 3월 9일 숙부(滄洲公;義模 향년 48)상을 당한데다, 5월 21일 부친(仁模 향년 50)상을 당하였다. 이때부터 종가를 책임지는 종손으로 어머니(충주박씨)와 두 여동생과 남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 후로 넷째 숙부 추간공(秋澗公;智模 陰城縣監)에게 수학함으로써 가학연원(家學淵源)으로 학통을 이루는 기반을 닦았다.
다. 학문의 기초를 다진 시기 (21세-29세) 21세 때는 조부로부터 대를 이어 준비해온 선조(우복선생)의 신도비 건립이 당시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다. 신도비 건립은 고조부(無忝齋 道應) 때 비문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증조부(喚惺齋 錫僑) 때 석재를 마련하고 조부가 음기(陰記)를 작성한 것이었다. 이러한 누대에 걸친 유업이었으므로 한꺼번에 닥친 조부상․숙부상․친상의 삼년상을 탈상한 직후 서둘러 신도비를 세웠다. 그 해 가을에 완산 이씨(成宗의 왕자 茂山君 悰의 자손)를 맞아 혼인하였다. 23세 때 장녀(百弗庵 崔興遠의 손부)가 출생하였고 25세 때 우산 동네 동편에 작은 집을 짓고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길렀다. 5월에 차녀가 출생하였다. 26세에 심기당 황계희(審幾堂 黃啓熙)3)를 방문하여 도학(道學)에 관하여 토론하였는데 여기 심기당으로 부터 학문하는 데에 큰 영향을 입었다고 한다. 27세에 소학(小學)으로부터 사서(史書)에 이르기까지 탐독 연구하는 가운데 의아한 것을 해석하는 대로 기록하여 보망록(補忘錄)을 쓰기 시작하였다.
라. 뜻을 세워 학문에 몰입한 시기(30세-39세) 30세 때 호를 ‘입재(立齋)’라하고 이때부터 학명(學名)을 떨치기 시작하여 학자들 간에 학문과 사상을 토론하고 교환하였다. 입재는 논어 위정편의 「子曰…三十而立」의 ‘立’자를 따온 것이다. ‘입재’가 이 고장에 사는 다른 어른분의 아호(雅號)임을 알게 된 후 ‘무적옹(無適翁)’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31세 때(1768, 영조44) 조정에서 각 지방에 탁월한 인사를 천거하라는 명이 하달되자 향중 서숙의 인사들이 입재를 천거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선생은 서숙에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는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32세에 우복선생의 옛 거주지였던 율리로 이사하였다가 34세에 율리에서 다시 우산으로 이거하였다. 33세 6월에 장자(象晋;호 石坡)가 출생하였다. 36세 3월에 차자(象升)가 출생하였다.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마을 느티나무 아래에서 초하루 보름으로 강좌를 열었다. 38세가 되던 해 삼자(象觀 호;谷口)가 출생하였다.
마. 학자들과의 학문 교류기 (39세-51세) 39세가 되든 해(英祖昇遐, 正祖卽位年) 영남의 큰 선비들과 학문과 사상을 토론하고 교유하는 여행길에 올라 학문여행(學問旅行)이 시작되었다. 이때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4)․남야 박손경(南野 朴遜慶)5)․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6)을 예방하여 학문을 교류하고 이어 의성 사촌에 들러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7)과 교유하고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서애선생 묘우에 참배했다. 당대 유학자로서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남야 박손경(南野 朴遜慶)․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을 「영남삼로(嶺南三老)」라 하여 높이 일컬었는데 세 선생을 모두 방문하여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산(大山)선생에게 3일간 머물면서 학문에 영향 받은바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42세 (1779, 정조3년) 정월에 우산은 깊은 산중이라 짐승이 많아 장기간 기거하기가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교유하는 친구들의 안내로 상주시내 북계(지금의 화산리)로 옮겨 살았다. 그러나 두어 달 뒤에 다시 공검 우복 선조의 산소 재실 근처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겨울에 다시 우산으로 다시 이사하였다. 45세에 거처하던 집은 동생에게 주고 계정 옆에 있는 서실(대산루)에서 생활하면서 계정을 사당으로 사용하였다. 남손재(南損齋)가 내방하여 선생에게 자제의 수학(修學)을 의뢰하였다. 46세에 11살 된 차남(象升)을 재종제(文魯)에게 양자 보냈다. 50세가 되던 해 영양 주곡을 방문하여 만곡 조술도(晩谷 趙述道)와 교유하였다. 주곡에는 선생의 매부(趙明復)가 있었다.
바. 대학자로서 강학 저술기 (52세 이후) 입재선생은 이 당시의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족적을 남긴바가 커서 지금에 와서 영남의 명가에는 선생의 문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대산 이상정․ 입재 세 선생을 당대 「퇴계학파의 삼고봉(退溪學派의 三高峰)」이라고도 하고, 당대의 생존한 인물을 중심으로 말할 때에는 「좌대산 우입재(左大山 右立齋)」라 말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도행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는데, 52세(정조 13)때는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조선시대 임금으로서 학자의 기품을 지닌 가장 뚜렷한 임금은 정조(正祖)임은 주지의 사실인데 임금이 영의정 채재공(蔡濟恭)9)에게 훌륭한 학자를 추천하라 할 때 “현 광릉참봉 정종로는 경학과 문장이 울연(蔚然)하여 영남 제일인자입니다.”하니 일약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하였다. 관직을 받고 입시(入侍)할 때 (정조 13년 12월) 《우복선생문집》1질을 임금께 올렸는데 그 이유는 광릉참봉에 제수되었을 때 임금이 우복문집에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국내의 다른 지방 저명한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실학파의 거유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을 찾아가 학문과 사상을 논의를 한 것도 이때이다. 《書天學考後》를 지었다. 55세(정조 16) 5월에 도산서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참배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수곡(水谷)에 들러 대산 문인인 동암 유장원(東巖 柳長源)을 방문하였다. 59세(정조 20) 되던 해에 주상이 우부승지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정종로의 행의와 문장에 관해서 들은 지 오래인데 과연 영남의 제일의 학자인가?”라는 물음에 “정종로는 가학연원으로 소년 때부터 뜻을 바로 세워 일상생활에도 근신하는 행동을 잃지 않으며 향리에서 뿐만 아니라 도내에 명망이 가득하니 주상께서 물으신바와 같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주상은 “처음 광릉 참봉으로 임명할 때 그 사람됨을 알았고 그 뒤 과연 깊이 있는 사람임을 들었노라. 이 사람이 곧 문장공의 봉사손이며 문장공이 경연에 출입하여 충성된 마음으로 임금에게 아뢰는 일을 맡아 대제학, 이조판서로 그 학식과 덕망이 지금까지도 세인들의 귀에 익었거늘, 지금 그 후손에 이러한 명사(名士)가 났으니 어찌 귀하지 않느냐? 대신(번암 채제공)에게 물으니 향중의 제일인자라고 하니 어찌 마땅한 자리에 등용치 않을 수 있겠느냐. 적당한 자리에 등용하라.” 하명하였다. 이에 의금부도사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숨은 학자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지평에 보임되자 정조대왕은 문장공묘(文莊公廟)에 치제(致祭)10)를 명하였다. 60세(1797, 정조 21)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거쳐 강령현감(康翎縣監)11)에 제수되었다. 이때 문장공의 사당에 치제를 내린 것에 사은하고 노모를 모셔야 하는 이유로 거리가 너무 먼 강령현감에 사의를 상소하고 물러났다. 곧 고향에 인접한 함창현감(咸昌縣監)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이 해 함창에 있는 임호서원(臨湖書院)의 사현(四賢) 행장을 지었고 《鬼神論》을 지었다. 62세(1799, 정조 23) 정월에 모부인(춘천 박씨) 상을 당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애곡을 하다가 몇 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63세(1800, 정조 24)에 정조가 승하하여 국상을 당하였을 때 선생은 모친상의 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읍내에 나가 객관 밖에서 멍석을 깔고 망곡하였다. 64세(1801, 순조 1년)에는 친상복을 벗었으므로 국왕의 소상에 곡하였다. 이해에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의 묘갈명과《태왕론(太王論)》을 지었다. 65세 때 우산 이십경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다. 또 南野(朴遜慶)의 문집 서문을 짓고 퇴계문인들의 필첩(溪門筆蹟帖)의 서문을 지었다. 66세 때에는 태극권자설(太極圈子說)과 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을 지었다. 또 도산서원묘정비명(道山書院廟庭碑銘)을 짓고 개령의 덕림서원 중수기를 지었다. 11월에 부인(完山 李氏)이 향년 68세로 별세하였다. 68세(1805, 순조5)에 「대순론(大舜論)」을 짓고, 69세에 「오상설(五常說)」과 「맹자불존주론(孟子不尊周論)」을 지었다. 70세에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을 지었는데 퇴계선생의 주리론을 옹호하였다. 또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12)실기의 서문을 지었다. 71세 되던 해에 사헌부 지평에서 장령(掌令)으로 승진 제수되었다. 이 해에 「논어연의(論語衍義)」를 지었고 또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13)의 《여사휘찬(麗史彙纂)》을 교감하고 서문을 지었다. 72세 되던 해에 사림들이 뜻을 모아 우산에 서당을 지어 선생의 강의소로 삼았는데 여기가 도존당(道存堂)이다. 이때부터 매년 강회(講會)를 열었는데 매회 수백명이 모여들었고 남손재를 강사로 초빙하기도 하였다. 이 헤에「안자(顔子)」를 저술하였고, 수촌 오시수(水村 吳始壽)14)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73세에 《백불암문집》을 교정하였고 대산(이상정)이 지은 퇴도서절요의 발문을 지었으며 손재(남한조)의 행장을 지었다. 74세에 소산 이광정(小山 李光靖)의 묘갈문을 지었고, 75세에 운곡잡영과 도산잡영을 차운하고, 76세에는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의 문집 간행에 참가하였다. 식산은 상주 사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문집간행은 입제선생과 그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상주 북장사(北長寺)에서 이루어졌다. 77세가 되자 늙어서 받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국정을 바로 잡는 정책상소를 올렸다. 78세가 되던 해에 적국 각지에서 글을 써달라고 청해오는 이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 해에 도암 유단(道庵 柳衤耑 ), 수암 유진(修庵 柳袗)의 묘갈문을 우선하여 지었다. 79세가 되던 해 (1816, 순조16) 3월에 도남서원 원장의 초청을 받고 많은 사림(士林)들이 참집한 가운데 중용에 관한 강론을 하였다. 당시 원장은 선생의 문인 임하 이경유(林下 李敬儒;1750-1821)였는데 행사를 마친 후 낙동강에 배를 띄워 시회(詩會)를 하였다. 5월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6월 4일 큰손자(民秀)에게 문고(文稿)를 수습 정리하게 하고 여러 가지 책을 잘 정리하도록 명하고 의관을 단정하게 하여 정좌하였는데 6월 6일 세상을 떠났다. 8월에 함창 황령산(黃嶺山)에 장사지냈는데 문상객이 800명이 넘었다. 장사 지낸 10년 후(순조 25년) 상주 외서면 관현리 뒷산 지금의 산소로 이장하였다. 장례가 끝난 후인 병자년(1816, 순조16) 8월 24일 조정에서는 증직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임금께 상주하였다. 임금이 몸소 경연하는 소대(召對)에서 참찬관 박종훈(朴宗薰), 검열직각 정원용(鄭元容), 시독관 홍경모(洪敬模), 검토관 강세륜(姜世綸) 등이 참석하여 검토관 강세륜이 계언을 올렸는데 그렇게 하라는 주상의 하명이 있었으나 노론의 세도정치로 왕명조차 실현되지 않았다. 곧이어 문인(門人; 參判 柳台佐, 正言 宋奎弼, 判書 李源祚, 進士 黃磻老, 參奉 李升培)들이 선생에게 증직이 내려지도록 차례로 상소를 올렸으나 노론이 세력을 독점하는 정치적 기류에 말려 이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유림들이 모여 유림소(儒林疏)를 올리려는 운동도 있었으나 중단되었고 헌종2년(1836) 유림들이 우복선생을 배향하고 있던 우산서원에 배향하였는데 봉안문은 황반로(黃磻老)가 지었다. 품계는 정삼품 통훈대부(正三品 通訓大夫)에 그쳤으나 태극권자설(太極圈字說)․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오상설(五常說)․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맹자론(孟子論) 등 많은 학설을 내고 저작을 많이 남겼으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하여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되면서 영남은 물론이요 호남이나 관동 서북지방에서도 선비들이 모여 250여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이로써 우산(愚山)이 다시금 문중의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유학의 연총(儒學 淵叢)으로 영남교학(嶺南敎學)의 본산을 이루었다.
7. 우복종택 우복 정경세 선생의 종가로, 대산루 남쪽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팔경을 바라볼 수 있다. 상주에는 이와 같은 많은 민가들이 남아있어 상주의 옛 마을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이 집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의 종가로 16대 손이 살고 있다. 선생의 유적은 공검면 부곡리에 묘소와 신도비, 사벌면 묵하리의 유허비, 청리면 율리에 유허비가 있고 이 곳에 사당과 서실 강당 등이 있다. 종택은 대산루 남쪽 언덕에 자리잡아 우산팔경(愚山八景)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명당지라 알려져 왔다. 토담으로 주위를 에워싼 종택은 넓은 공간에 다섯 동이 있는 독가촌으로 사랑채는 2단으로 쌓은 높은 기단이나 뒷면은 자연지세와 면을 수평 하게 하여 안마당과 평행 되게 하였다. 2칸을 통간으로 한 온돌방과 대청마루 2칸, 한 칸의 온돌로 하여 마루 앞은 계자난간을 설치하였고 홑처마에 탈작지붕을 한 정면 5칸 측면 한 칸의 12.67평의 기와집이다. 안채는 ㄱ자 집으로 남·서 쪽으로 배치하였는데 안방과 건너 방을 온돌로 하고 2칸의 대청마루와 부엌은 2칸으로, 위는 도장으로 루마루형을 이루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을 한 기와집이다. 행랑채는 2칸은 뒤주로 가운데 칸은 마루를 놓은 공간으로 하고 온돌방을 둔 정면 5칸, 측면 1칸, 11.37평의 맞배지붕이다. 사당은, 담장 안에는 우복선생, 밖에는 입재선생의 사당이 배치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집 전체 배치는 트인 ㅁ자 형이며 1600년경에 지은 집이다. 한마디로 이 건물은 우복선생을 비롯한 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을 저술한 무첨재(無添齋) 정도응(鄭道應)과 류심춘(柳尋春) 외 247명의 제자를 양성한 성리학자요 교육자였던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같은 석학의 학풍과 덕풍이 서린 유서 깊은 고택이다.
8. 계정 : 청간정 (溪亭 ; 聽澗亭) 우산(愚山)에 연고를 갖게 된 최초의 건물로 1603년(선조 36년) 우복 선생이 우산에 처음 자리를 잡은 지 3년 후에 지은 것이다. 비록 규모는 작고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어도 건물은 기와집 형태로 지어졌다. 계정은 우산의 가장 상징적 건물이므로 가능한 한 초가지붕으로 계속 유지되어 가야 할 것이다. 이름은 ‘청간정’으로 명명되었으나 통칭 ‘계정’이라 부르고 있다. 선생의 별장 겸 서실이기도 한 초가집으로 두 칸의 동향집이다. 남쪽 한 칸은 마루이고 북쪽 한 칸은 온돌방인데 방에서 대청으로의 문은 4짝 들문이며 앞쪽은 분합, 뒤쪽은 외문이다. 1982년 2월 24일 대산루에 붙여 유형문화재 156호로 지정 관리해 오고 있다
9. 대산루(對山樓) 이 건물은 입재(鄭宗魯 1738-1816)선생이 중창한 동향 건물로 개천과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우산 종택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넓직한 대지 위에 잡석으로 축대를 낮게 쌓고 자연석 주춧돌에 원기둥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단층 건물에 2층 누각을 연결하여 세운 T字형 건물이다. 단층은 정사(精舍)로 정면 4간인데 2칸씩 대청과 온돌방을 놓았고 부엌이 딸려 있다. 온돌방 앞에 툇마루 놓고 돌계단으로 누각에 오르도록 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면 마주 대하는 1칸 온돌방을 중심으로 앞에는 마루가, 뒤쪽으로는 1칸 창고방과 2칸 책방이 놓여있다. 3면이 트인 마루는 주인과 손님이 더불어 자연을 즐기며 휴식하는 곳으로 4방을 전망할 수 있는 곳이다. 창고방은 창이 없는 어두운 공간으로 서책과 귀중품을 보관했던 곳이다. 책방은 최고의 사적인 학습공간으로 툇마루 바닥보다 한 자 낮게 만들었다. 1982년 2월 24일 문화재(유형문화재 156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10. 도존당(道存堂) 도존당은 원래 입재선생 만년(순조 7년;1807)에 학풍을 일으키기 위하여 고향 사림(士林)들이 서당을 건축하고 강의소로 한 것인데 건물이 완공되어 순조 9년에 강좌를 처음 열었다. 이로부터 매년 강회(講會)가 열려 흥왕을 이루었고 순조 34년(1834) 우산서원(愚山書院)이 세워진 후에는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었다. 正門인 三門을 들어서면 잡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둥근 기둥으로 건축한 정면 5간 측면 3간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대청에 입도문(入道門)이란 현판이 있고 대청의 좌우측 방 입구에 “의재(義齋)” “경재(敬齋)”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도존당 북편으로 ㄱ자형 고직이 집이 있는데 여기에는 방?창고?부엌?다락을 설치하였다. 현재의 도존당 뒷쪽에 사림들이 愚伏선생과 立齋선생을 배향한 우산서원이 붙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정원의 연못 자리와 주춧돌 흔적만 있을 뿐 지금은 강당(도존당)만 남아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우산서원은 순조(純祖) 34년(1834)에 처음 우복선생을 봉향하였고 그 2년 뒤인 1836년에 입재선생을 배향한 서원이었다.
11. 병암고택(甁菴古宅) 소 재 지 :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12(하우산) 건 축 주 : 정재로(1755년생) 건축시기 : 1770년경(영조 40) 문 화 재 :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130호, 1985.8.5 지정 지정
- 건축 이야기 병천정이란 현판이 있는데 이는 정동두(鄭東斗)가 1840년경에 우산고개 계곡에 전면 5간, 측면 2간의 정자를 짓고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멋진 곳이었으나 1982년에 허물고 현판만 이 곳에 보관하였다.또한, 지붕 안에 양각한 현판의 병암은 정재하(鄭在夏)의 증조부인 진사 정철우(鄭喆愚)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 건축 구성 본(本) 가옥(家屋)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6대손(代孫)인 재로(宰魯)가 15세에 주거용(住居用)으로 사용(使用)키 위하여 1770년(영조 46)에 건축(建築)하였으나, 현재(現在)는 사랑채(병암(甁庵))만 그대로 남아있고 안채는 약 80년 전에 개축(改築)하였고 별채는 약 70년전에 건축(建築)한 것이다. 병암(甁庵)은 자연석기단(自然石基壇)과 주초(柱礎)에 각주(角柱)를 사용(使用)하고 벽체는 진흙으로 사벽처리하였다. 대청(大廳)은 우물 마루놓고 상부가구(上部架構)는 오량가(五樑架)로 동자주(童子柱)를 사용(使用)하였다. 병암(甁庵)의 평면구성(平面構成)은 부엌이 고방으로 바뀌었을 뿐 소위 남부형(南部型) 주택(住宅)의 안채와 꼭 같은 실배열(室配列)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예(例)는 특이(特異)한 것이라고 하겠다. 건물규모는 병암 본채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17평 박공기와이고,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28평의 팔작기와이며, 아래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9평 우진각기와이며, 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17평 팔작기와이뎌, 기타 대문간, 두지, 창고 등이 있다.
- 현판 병암(甁庵) 정동두가 1840년경에 우사고개 계곡에 지었던 정자가 있었는데, 1982년에 허물고 그 현판은 지금의 병암고택에 보관하여 오고 있다. 현판(懸板)의 ‘병암(甁庵)’은 정헌묵(鄭憲默)의 조부(祖父) 정철우(鄭哲愚)의 호(號)를 따서 붙인 당호(堂號)라고 한다. 글씨는 행서체로 썼는데 선의 굵기에 많은 변화를 주었으며, 행서 특유의 장방형으로 볼 수는 없고, 조금은 방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 문중 이야기 정종로 선생의 동생 정재노 공이 조선 영조 46년(1770)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만 남아 있던 것을 80년 전에 안채를 고쳐 짓고 70년 전에 별채를 고쳐 지어 현재 안채, 사랑채, 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6칸 규모의 一자형 평면구조를 이룬다. 왼쪽 부엌 1칸을 제외하고는 앞뒤로 반 칸 폭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랑채는 여러 칸을 터 놓은 통칸방과 마루방 2칸으로 꾸몄다. 별채는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방 앞쪽으로 반 칸 폭의 툇마루를 건물 길이대로 설치하였다. 병암의 평면은 부엌이 광으로 바뀌었을 뿐, 남부지방 가옥의 안채와 같은 방배열을 보이고 있어 독특하다.
12. 노수신[盧守愼] 1515(중종 10)~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대윤(大尹)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황·기대승 등과 주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관직생활]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지낸 홍(鴻)이다. 장인인 이연경(李延慶)에게 배웠으며, 휴정(休靜) 등과 사귀면서 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수찬을 지냈다.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대윤(大尹)에 속하여 인종 즉위초에는 정언을 지내면서 소윤(小尹) 이기(李 )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도 했다.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대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소윤이 정권을 잡은 뒤, 윤임(尹任) 등의 대윤을 제거하기 위하여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는 소윤계열인 윤춘년(尹春年)과의 친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조좌랑에서 파직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1547년(명종 2) 정황(丁 )과 함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진도로 옮겨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1565년 괴산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567년(선조 즉위년)에 풀려나 교리·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8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한 일이 문제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사상과 일화] 진도에 유배되었을 때 이황·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기대승 등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도심(道心)은 체(體), 인심(人心)은 용(用)으로 보는 인심도심체용설(人心道心體用說)을 주장했다. 주자의 인심도심설에 따르지 않고 선가(禪家)의 용어를 쓴다고 하여 이항과 이황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대상(大喪) 뒤에 갑자기 검은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 하여 국상에만 쓰던 흰 갓과 흰 옷을 입었는데, 뒤에 정철(鄭澈)이 이것을 본받았다. 원래 담제(i祭)의 갓에는 정해진 제도가 없었는데, 교리 신점(申點)이 경연(經筵)에서 이야기하여 백포립(白布笠)으로 정해졌다. 진도로 귀양갔을 때 당시 섬의 풍속은 혼례 없이 남의 집에 있는 여자를 중매를 통하지 않고 빼앗아오는 것이었는데, 예법으로 일깨워 혼인에 예식이 있게 했다. 이때 군수이던 홍인록(洪仁祿)이 심하게 박대했으나, 뒤에 요직에 있으면서 홍인록이 언관들의 규탄을 받을 때 오히려 그를 옹호했다. 부모의 봉양을 극진히 하여 몸소 음식을 만들어 바쳤으며, 관직이 높아진 후에도 이를 계속했다. 선조는 그를 "한·유(韓柳:즉 韓愈와 柳宗元)의 문장이요, 정·주(程朱)의 의논(議論)이다"라고 했다. 충주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광해군 초에 선조묘정에 배향하려는 의논이 있었으나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했고, 〈대학장구 大學章句〉·〈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했다. 저서로는 〈소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였다가 뒤에 문간(文簡)으로 바뀌었다.
소재집[蘇齋集] 조선 중기의 문신 노수신(盧守愼:1515~90)의 시문집. 12권 8책(원집 10권, 내집 2권). 목판본. 초간본은 1602년(선조 35) 저자의 조카 대하(大河)가 천안에서 목판으로 간행했다. 속리산에 두었는데 1615년에 소실되었다. 1624년 아들 복성(復城)이 성주에서 주자(鑄字)로 중간했고, 1652년 증손 준명(峻命)이 다시 개편한 것을 1665년 경명(景命)이 봉화에서 목판으로 3간했다. 권1~6은 모두 시로 부 3편, 시 1,540수를 수록했다. 권7은 잠(箴)·찬·서(序)·발·기·제문 등과 과제(科製)·책론을 수록했다. 발은 나흠순(羅欽順)이 쓴 〈곤지기 困知記〉의 발문인데, 저자가 나흠순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과 인심도심관(人心道心觀)을 계승한 점과 관련이 있다. 권8은 소차(疏箚)·전(箋)·사면(辭免)인데, 모두 사직소이다. 권9·10은 행장·묘표·묘지·비명 등이다. 권10의 끝에 자명(自銘)을 실었다. 다음에 연보·부록·행장을 실었다. 행장은 16장의 장편으로, 1634년(인조 12)에 이준(李埈)이 쓴 것이다. 내집은 상편·하편으로 서연(書筵)에서의 강의록인 〈시강록 侍講錄〉을 위시하여 〈초창록 草創錄〉·〈구색록 懼塞錄〉·〈문답록〉·〈양정록 養正錄〉·〈서기록 庶幾錄〉을 수록했다. 대부분 성리학 관계의 저술과 서간·문답 등을 제목을 붙여 묶은 것이다. 저자의 사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자는 과회(寡悔)요 호는 소재 또는 이재(伊齋)라하며 또한 암실(暗室) 여봉산인(茹峰山人)이라 하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그는 활인서 별제(活人署 別提) 홍(鴻)의 아들로서 당대에 뛰어난 성리학자요 명신(名臣)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름답고 우뚝하여 어른과 같았으며 그의 나이 17세 때 탄수 이 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인 이 연경을 스승으로 하여 학문을 닦고, 나이 20에 박사(博士)에 올랐는데 함께 공부하던 인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27세에 회재 이언적과 학문적 토론을 하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의 초시(初試)를 비롯하여 그후의 회시, 전시의 세 과거에 모두 장원 급제하여 세상에서 삼괴선생(三魁先生)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1543년 29살 때 처음으로 성균관 전적에 취임한 이래 홍문과 수찬, 세자시강원사서,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때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 나와 홍문관 교리로 복직였다. 1585년(선조 18년)에 그는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문의(文懿)라 시호가 내렸다가 다시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국가 장래를 생각하여 인재를 뽑아 쓸 것을 주창하고 이이(李珥), 이지함, 김천일(金千鎰), 조묵, 민순(閔純), 이산해(李山海), 허봉, 류몽학(柳夢鶴), 최영경(崔永慶)등 많은 인재를 조저에 추천하여 쓰게 하니 그야말로 백성을 위하고 앞 일을 내다보는 덕과 재주를 갖춘 대 정치가라 하겠다. 학문면에서는 수 천수(數千首)의 시(詩), 부(賦), 찬(撰), 교서(敎書), 서문(序文), 소(疎), 비갈명(碑碣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글이 있다. 그러나 전란으로 그의 저술한 책이 다 불타 버리고 나머지를 간추려 간행한 시9권과 문6권이 있을 뿐이다. 그의 학문은 항상 바르게 하여 품행을 닦는 것을 발판으로 삼고 자신이 몸을 닦은 후에 사물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질서로 삼았다. 가정에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옷과 음식은 검소하였으며 몸가짐 하나하나에 법도를 지켰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정직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나라의 걱정은 언제나 발전이 없는데서 일어난다고 하고 관리는 맡은 직무에 충실하고 나라가 무사하기를 기원했다. 또 예의 교육을 실시하여 좋은 풍속을 이끌어 나가는데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 그의 집 뜰에 상록수 열 종류를 심어 놓고 정자 이름을 십청정(十靑亭)이라고 이름하여 만년까지 푸른 절개를 높이 간직하였다. 그는 또한 주자학에도 대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그의 저술을 보고 "동방에 공자의 길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육 상산(陸象山), 왕 양명(王陽明)을 주로 했다고 주자학과로부터 공격을 받을 만큼 되기도 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휴정(休靜).선수(善修)등 승려들과 깊이 사귀어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식(李植)은 도학자중 선학(禪學)을 겸한 것은 노수신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거니와 그에 앞서 이 항(李恒)은 노수신이 불철저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자 임을 공격했고 그가 선학에 치우쳐져 있음을 비판했다. 그는 천성이 온후하여 모가 없었다. 남이 자기를 해치고자 하는 일로써 한번도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임금이 자기에 대한 은충이 과분함을 송구하게 생각하고 관직이 오를 때 마다 굳이 사양하였으며 정승이 되는 날 그는 안색이 변하고 근심이 가득 했었다고 한다. 그는 귀양 가있는 곳에서 효도하지 못함을 큰 죄로 생각하여 수 천리 길에 인편 마다 낚시로 잡은 고기를 봉양토록 보냈고 양친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가고져하니 임금이 그의 고향과 가까운 충청 감사로 임명한 적도 있었다. 또 한 평생에 정사로 인하여 효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돌아가실 때 "선영(先塋) 곁에 시묘 살던 곳에 장례하라"하니 그곳(상주군 화서면 원천)에 장사하였다. 이와 같이 노수신은 조선조에 국가의 앞길을 내다 보는데 정치가이며 한림 삼걸의 하나인 대 문장가이며 학문에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대학자이며 또한 지극한 효자였었다. 그의 종택과 가묘는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에 있으며 후손이 그곳에 살고 있다. 영정은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에 있는 오현영각과 칠현영각에 가각 보존되어 있으며 봉산서원에 향사하고 있다.
13. 봉산서원 명종 때 상주 목사인 신잠(申潛)이 상주에 세운 18개 서당가운데 하나인 봉산서당이 그 모체이다. 이곳은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지방의 유생들을 위해 강학하던 곳이다. 소재가 시호를 받아 나라에서 치제하자 유생들이 서당을 서원으로 승원하기로 하여 숙종 14년(1688) 사당을 세우고, 다음해에 강당을 건립하였다. 숙종 34년(1708) 노수신을 주향으로, 일송 심희수(沈喜壽)와 판곡 성윤해(成允諧)를 배향으로 승원하였다. 그 후 성극당 김홍미[金弘微, 안동 정랑 김구(金榘)의 장인, 풍산 겸암 류운룡(柳雲龍)의 사위], 이재 조우인(曺友仁), 동원 정호선(丁好善), 백화재 황익재(黃翼再) 네 분을 추배하여 일곱 분을 모시게 되었다. 고종 5년(1868) 훼철되었고, 1923년에 사림의 중론으로 단소를 세워 향사하여 오다가 영남유림의 발의로 1977년 묘우가 준공되어 서원으로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은 3칸의 묘우, 4칸의 강당, 5칸의 재소, 4칸의 고사와 봉산지부도신도비, 봉산지사적비, 하마비 등이 있다. [경현묘(景賢廟)] 강당 뒤쪽에 돌계단을 올라 서원이 위치한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전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다. 원래의 묘우가 협소하여 강당 뒤편으로 옮겨서 세웠다. [내삼문] 묘정을 출입하는 삼문으로 평삼문으로 지어졌다. [봉산서원 선교당] 선교당(宣敎堂)은 봉산서원의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3칸은 마루이며, 양쪽에 온돌방이 시설되어 있다. [봉산 못] 봉산 못은 고려 말에 팠다고 하는데, 못 가운데 20여 평의 뜬 섬[浮島]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이 섬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낚시꾼들이 한가로이 손맛을 즐기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14. 옥연사 조선 중기 문신인 노수신 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옥연사 경내에는 산기슭 아래쪽에 강당이 있고, 뒤편 높은 곳에 오현영각과 불천위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노수신 선생을 모신 불천위사당은 영주군수였던 그의 아들인 노대해가 세웠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조선 중기 문신인 노수신(1515년∼1590년) 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그는 1543년(중종 38년) 문과를 급제하고 성균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사서(司書) 등의 벼슬을 하였으나 을사사화 때 파직되어 19년간 섬(진도)에서 귀향살이를 하였다. 그곳에 있으면서 이황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1567년 "숙흥야매잠", "대학장구"등의 주해를 달아 사림 사이에서 명성을 쌓았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기용되어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는 시, 문, 서예에 뛰어났으며 양명학을 깊이 공부하고 승려인 휴정과도 교분을 나눴다. 옥연사 경내에는 산기슭 아래쪽에 강당이 있고, 뒤편 높은 곳에 오현영각과 불천위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노수신 선생을 모신 불천위사당은 영주군수였던 그의 아들인 노대해가 세웠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강당은 봉화현감이었던 그의 증손자 노경명이 1658년(효종 9년) 오현영각과 함께 세웠다고 한다. 불천위사당과 오현영각은 각각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고,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다.
15. 옥동서원 옥동서원은 1518년(중종 13)에 방촌(?村) 황희(1363∼145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백화서원(白華書院)을 건립하면서 창건되었다. 1580년(선조 13)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향사(享祀)를 지내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714년(숙종 40)에 전식(全湜;1563∼1642)을 배향하였고, 1715년(숙종 41)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1716년(숙종 42)에 강당을 건립하였고, 1783년(정조 7) 황효헌(黃孝獻)과 황뉴(黃紐)가 추가로 배향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사액되었으며, 1789년(정조 13)에 청월루(淸越樓)를 건립하였다. 1987년 청월루를 보수하였고, 1991년 경덕사(景德祠)와 온휘당(蘊輝堂)을 보수하였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경덕사·온휘당·청월루·전사청·고사(雇舍)·화직사(火直舍)·묘직사(廟直舍)·팔각정(八角亭) 등이 있다. 경덕사는 향사(享祀)를 지내는 사우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앙은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황희를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전식·황효헌·황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온휘당은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 회합 및 학문 토론 장소인 강당으로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누문(樓門)인 청월루는 정면 5칸·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2층 누각(樓閣) 건물이다. 1층은 출입문이고, 2층은 중앙이 마루로 되어 있으며, 난간을 두르고 있다. 전사청은 향사(享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해 두는 곳이며, 팔각정은 유생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고사·화직사·묘직사는 각각 고직·화직·묘직이 서원을 관리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3월과 9상정일(上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갈천문집(葛川文集)』 등이 있고, 유물로는 황희의 영정(影幀) 등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대지 1,000평·전답 8,000여 평·임야 1,200정보 등이 있다. 황희는 태종(재위 1400년∼1418년)과 세종(재위 1418년∼1450년)대에 걸쳐 육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20여 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서 왕을 보좌하였다. 학문에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한 분으로서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이름 높은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6. 尨村 黃喜 1363(공민왕 12) 개성~ 1452(문종 2).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아버지는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다. 1376년(우왕 2) 음직(蔭職)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389년(창왕 1) 문과에 합격했고,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70여 명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그러나 태조의 요청과 백성만이라도 구제해야 한다는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가 성균관학관과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했다. 이후 직예문춘추관·사헌감찰·우습유(右拾遺)를 지냈다. 그뒤 좌천·면직·소환을 반복했고, 1399년(정종 1)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1400년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했다. 1401년(태종 1)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이 되었고, 이후 승추부도사(承樞府都事)·대호군·지신사·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141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16년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이듬해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부사가 되었다. 1418년 세자의 폐위가 결정된 후 태종의 미움을 사서 서인(庶人)으로 교하(交河)에 유배되었고, 곧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1422년(세종 4)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환급받고,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다시 예조판서에 올랐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찰사로 파견되어 선정을 폈다. 1427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1430년 태석균(太石鈞)의 치죄(治罪)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했다. 1431년 복직되어 1449년 관직을 물러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다. 성품이 강직·청렴했으며,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역대 왕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왕과 다른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그는 오랜 관직생활 동안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바로 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중복·누락된 부분이 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온전한 법률집으로 만드는 등 법전의 정비에 힘썼으며,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해 농사의 개량과 종자 보급을 실행하고, 양잠을 장려하여 의생활을 일신시켰다. 건국 초기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가 자주 침범하자 이에 대한 방비책 마련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원나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고려의 예법을 시의에 맞게 고치기도 했다. 세종대에는 그간의 국정경험과 세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등을 지휘·감독했으며, 왕과 중신들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세종을 도와 성세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1) 순충보조공신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17. 沙西 全湜 1563(명종 18)~ 1642(인조 20).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여림(汝霖)이다. 류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60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예조좌랑·예조정랑을 거쳐 1611년에는 울산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광해군에 대한 불만으로 벼슬을 버리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예조정랑에 등용되었고, 이어서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태복시정으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실책을 비판한 후 낙향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2년 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1642년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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