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낚는 미끼는 무엇일까?
마경덕
시인은 대상 너머에 있는 “추상의 것”들을 찾기 위해 미시적인 대상에 접근하여 고찰(考察)하며 “존재를 증언”한다. 끊임없이 호명되는, 문장과 문장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낯선 목소리, 미묘한 심리적 파장, 몸을 관통하는 슬픔들, 정돈된, 그러나 어질러진 조합들이 서로 충돌하며 ‘있지만 없는 듯한’ 모호한 경계에서 시는 태어난다. 화지(畫紙)에 시선을 두지 않고 사물만 보고 그림을 그리는 ‘블라인드 컨투어(Blind Contour)’ 기법이 있다. 이 드로잉 기법은 보는 것에 집중하며 최대치로 관찰력을 끌어올려 무언가를 발견하는 훈련이다. 시 쓰기 역시 집중이 필요하다.
시를 낚는 ‘미끼’는 무엇일까. “감성의 역치”가 낮은 시인은 스스로 세상에서 고립되기를 자처한다. 막막하고 아득할 때까지 “방치한 마음”을 먹잇감으로 쓰는 것이다. 막차가 끊어진 고적한 정류장, 텅 비어버린 겨울 백사장, 바람에 늙어가는 억새밭, 허물어진 돌담길 어디쯤에서 덜컥,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야 한다. 그리고 주저앉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다. 시 쓰기란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고 외로움에게 말을 붙이는 일이기에 수많은 질문을 만드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생각은 특별한 이미지로 전환되어 또 다른 서사로 나아가는 단서가 된다.
무대와 관객 사이에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벽, 누군가 무대에서 내려와 의도적으로 객석으로 들어섰을 때 “제4의 벽”이 허물어지듯이 언어를 발굴하는 시인들은 고정관념을 허물고 그 순간에 발현된 감각을 글로 지으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처음이 되기를 원한다.
1895년 비공식 최초의 영화인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의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가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상영되었을 때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보고 몸을 피했다. 그 장소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열차가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것으로 착각해서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그 당시 스크린 저 너머 “가상의 세상”이 “현재의 장소”로 돌진하는 장면은 큰 충격이었다. 층위가 다른 생각은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처럼 독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할 것이다. 이 얼마나 짜릿한 즐거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