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민 일기 1.
얼마전 우연히 예전에 봤던 ‘건축학개론’ 을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던, 20년도 넘게 지난 막 스무살이 되었을 즈음의 감정이 아련하게 가슴속에 몽울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보았을 때는 어느 순간 갑자기, 사춘기인 딸 아이에게 너무 현실적이기만 한 40대 중반인 나의 사고 수준을 들이대고 있구나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논리적이기 보단 감성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단 이상적인 그 나이때의 소중한 시간들은 당연히 보호 받아야만 할 딸 아이의 권리이자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는 성장의 과정인데,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현실만 생각하는 나의 우둔함이 결국 딸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지 못해 살갑지 못한 관계가 된 원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내가 딸아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로 딸아이가 나의 생각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신해철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는, 그의 노래를 다시 들으며,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 돈, 사회적 지위 따위는 단 하나도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던 25년여전의 철부지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런 것들이 문득 10년전 이맘때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이민을 하게 되고, 태어나 40년 동안 들어본 적도 없던 애들레이드라는 공간을 거쳐 이곳 멜번에 자리를 잡은 나의 이민 생활을 돌이켜보고 싶게 만들었다. 아마 요즘 메너리즘에 빠진 나의 생활도 이런 맘을 부추기지 않았나 싶다.
2008년 봄 직장을 옮기면서 시드니로 두 달간 교육을 다녀 온 후 진지하게 이민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두어차례 다녀갔었지만, 이번에는 2년전 이민을 와 자리를 잡고 있던 친구 때문이었는지 이민이라는 두 글자가 실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영주권과 직장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이민 오지 마라!’ 라던 친구의 충고에 우선 어떻게 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10년 넘게 외국계 IT 기업에서 일한 경력과 토익 840점이라는 말에 이민 법무사는 기술심사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고, IELTS each 6.0 도 충분히 6개월 안에 받을 수 있다며 매우 낙관적으로 얘기를 했다. 그 낙관적인 전망 때문에 영어에 덜 집중한 탓인지 아니면 이민에 대한 절실함이 부족했는지 번번히 speaking 에서 0.5 점 모자란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2009년 12월, 드디어 IELTS each 6.0 이 넘은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이제 유효기간이 지난 기술심사를 다시 받고, 접수만 하면 영주권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2010년 2월초, 기술심사가 들어가 있던 중 호주 이민성이 기습적으로 이민법 변경을 발표했다. 어쩔 수 없이 주정부후원 독립기술이민으로 진행을 했고, SA 주정부 후원으로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
2010년 가을 초기 입국을 위해 2주간의 휴가를 내고, 시드니와 애들레이드를 관광하고 돌아왔다. 이후 우리는 가족 회의를 거쳐 이민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 2학년 이었던 아이들은 이민이 마치 무슨 모험 여행을 떠나는 것인 듯 살짝 들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민을 가기 전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애들레이드로 이민을 떠날 사람들과 여러차례 만남을 갖기도 했다.
직장이 없으면 이민 오지 말라던 친구의 충고는 무시한채 2011년 7월 15일 인천공항을 떠나, 말레이시아를 거쳐 16일 아침에 드디어 애들레이드 공항에 도착을 했다.
남극의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 한겨울의 애들레이드 공항은 왜 이리도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던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근거 없는 자신감, 외국 생활에 대한 우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함 등이 애들레이드 공항에 발을 딛던 내가 한번에 느꼈던 감정들이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가 있는 한국을 1년에 한번은 방문해야지 하면서 떠났던 길이지만, 정착을 하기 위해 호주땅에 발을 내딛던 순간, 생각처럼 자주 한국 방문을 하지는 못할것이라는 예감이 엄습해왔다.
- 이민일기 2
내가 이민을 오던 2011년은 호주달러 1달러가 1150원에서 1200원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휘발유값은 리터당 1.6 달러선에서 머물러 있을 때였다. 그 당시 한국에서 벌어놓았던 돈을 가져와 생활을 해야 했던 우리 가족에게는 환율이 850원에서 900원 사이에 있고, 휘발유값이 리터당 1.2달러 (얼마전에는 99센트)선에 머물러 있는 지금 호주로 이민을 오는 분들이 너무나 부러울 따름이다.
임시숙소에 머물면서 차를 구매하고, 아이들 학교 입학을 시키고, 월세집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인스펙션을 다녔다. 밤마다 느린 인터넷과 싸우며 인스펙션 갈 집의 주소와 시간등을 정리해놓고, 아이들을 학교 보낸 후에는 인스펙션과 함께 정착을 위한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고 있었다.
이민 초기에는 가격표를 보면 3달러가 그냥 3달러로 계산이 되지 않고, 3450원으로 계산이 되었다. 동네 마트마다 반값 과자와 반값 아이스크림이 넘쳐나는 한국 마트의 가격을 생각하면, 수입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해도 한봉지에 3500원에서 5000원에 이르는 과자를 도저히 집어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시간에 6000원에 육박하는 시티 주차장은 그야말로 공포감을 줄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당 45만원에 육박하는 렌트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항목이라 그런지 무덤덤하기까지 했다.
정착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매일같이 아이들에게는 밥만 먹이다가 장을 보러갔을 때, 문득 이럴려구 호주 온 것은 아닌데 라는 생각에 오늘은 아이들이 과자를 집어들면 사줘야지 라고 맘을 먹었다. 딸내미가 ‘아빠 이거 먹고 싶어요.’, 나는 ‘그래 사.’, 또 ‘이것도 먹고 싶어요’, ‘그래 사’ 를 반복했다. 세번째 과자를 집은 딸내미가 또 사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갑자기 ‘아빠, 오늘 왜 그래요? 우리 먹고 싶은 거 다 사주고 버릴려구 그래요?’ 라고 묻는 것이었다. 불과 일주일 남짓한 이민 생활에서 집사람과 나의 모습이 얼마나 궁색했으면 아이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왔을까 하는 마음에 한없이 서글퍼졌다.
렌트를 구하고, 이삿짐을 받은 후 심리적으로는 조금씩 안정이 되어갔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뿌려도 연락 오는 곳은 없었지만, 아직 초기라는 생각에 그다지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를 가볍게 한바퀴 돌기도 하고,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나면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다시 아이들 돌아올 시간이 되고, 저녁을 먹고 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온 한국 가족들과 술 한잔이라도 하고 나면 일주일도 금방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시도때도 없이 서로의 집을 오며 가며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아마도 이민 초기의 불안함과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모 돈벌이 될 것이 없나 하는 마음이었던 듯 싶다. 간혹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마운 분들과의 인연도 참 많았었다.
일상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나서는 TAFE 의 4주짜리 이민자 구직 과정을 등록해서 수강을 했다. 호주식 이력서 쓰는 방법, 인맥을 넓히는 방법, 모의 인터뷰 등을 하면서 조금씩 영어 실력도 향상시키고, 자신감도 높이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형편 없는 영어 실력으로는 구직이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간혹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와서 두어차례 만나보기는 했지만, 그 이상 진전되는 것은 없었다.
취업시 반드시 레퍼런스가 필요한 호주에서 더군다나 바닥이 좁디 좁은 애들레이드의 IT Job market 은 수요보다는 공급이 많은 듯 했고, 그 지역에는 인맥도 없고 영어도 한없이 부족한 나같은 이민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없는 듯 했다. 더군다나 자본이 충분한 기업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UNIX, Oracle, EMC storage 등의 knowledge 를 가진 내 background 를 필요로 하는 곳은 Defence 쪽 project 가 유일한 듯 했으나, 이곳은 시민권이 필수였다. 모 시민권이 있었다 하더라도 99% 는 가능성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민 생활이 6개월이 넘어가면서 수입이 없는 상황은 걱정의 수준을 넘어 나를 점점 공포로 몰아 넣었다. 한동안 여유가 있으리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통장 잔고는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큰 부담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보냈던 흔히 준사립이라 불리는 카톨릭 학교의 학비와 아이들의 빠른 적응을 위해 보냈던 학원 수강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아마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2배의 속도로 돈이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냥 놀고 있을 수 만은 없어, TAFE 의 영어과정 (Diploma of English Proficiency)에 등록을 하여 본격적으로 TAFE 을 다니며 2012년을 시작했다.
- 이민일기 3
스피킹과 리스닝이 많이 부족했던 나에게 Diploma 과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한반에 20여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객관적으로 내 실력은 뒤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던 것 같다. 때문에 과제물을 하느라 가끔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있을때면, 만감이 교차했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한대 피우며 쳐다본 새벽 하늘의 별은 어찌나 그리 밝던지…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할때면, 자고 일어나면 한국에서 직장 생활 할 때로 돌아가 있기를 바라는 헛된 상상을 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Diploma 과정이 끝날 때가 다가오면서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더 이상 2년을 남호주에서 살겠다는 주정부 후원 당시의 약속에 얽매여 있지는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 약속이 강제성은 없는 약속이라고는 하지만, 끝까지 지키려 했었는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가족은 2년을 채우더라도 나는 일자리를 찾아 움직여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남호주를 벋어나 멜번이나 시드니쪽 포지션에도 이력서를 뿌리기 시작하면서 헤드헌터에게 연락오는 횟수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한두차례 Employer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영어 실력과 호주에서의 경력이 없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몇달전 한인 잡지에서 보고 이력서를 보냈던 핸드폰 수리점에서 연락이 왔다. 사업 비자로 호주에 온 분이었는데, 핸드폰 관련 가게를 하면서 영주권을 받은 분이었다. 핸드폰 수리를 가르쳐 주면서 시급 12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디플로마 과정이 2주 정도 남아있던 시점이었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길 바란다고 했다.
가장의 입장에서 의도치 않았던 1년여의 백수 생활이 워낙 큰 스트레스 였기에, 무슨 일이든 수입을 만들어 보고자 했었는데, 의외로 집사람의 반대가 격렬했다. 좀더 시간을 갖고 IT Job을 찾아보자며, 우선 디플로마 과정을 끝내고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디플로마 과정을 수료한 후,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또 다시 TAFE 의 Business Management 과정에 등록을 하였다.
그 사이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온 주위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일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업비자로 오신 분들은 사업체를 인수하거나 새로이 오픈을 하였고, 영주권을 받고 온 친구는 부부가 새벽에 청소를 나가는 등 어쨌든 호주에서 수입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한푼 벌지 않고, 돈을 까먹는 집은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장사라고는 생전 경험이 없었지만, 카페나 한식당이라도 인수해서 사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비즈니스 매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산에 맞는 가게는 4식구가 먹고 살기에는 수입이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고, 제법 장사가 되는 듯 보이는 가게는 터무니없이 예산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멜번에서 제법 큰 돈을 벌어 애들레이드에 크게 한식집을 오픈했던 분이 속된 말로 1년도 안되서 쫄딱 망해 집기도 처분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야반도주 하셨다는 소문은 장사 경험 한번 없는 나를 잔뜩 움츠리게 만들었다.
- 이민일기 4
비록 TAFE 과정이기는 했지만, 비즈니스 메니지먼트 과정은 로컬이 대상이라 수업을 따라가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강의 내용이나 조별 토론 시간 모두 4분의 1가량 알아들었던 것 같다. 나머지는 열심히 교재를 참고하며 따라가는 수 밖에는 없었다.
과연 내가 호주에서 돈 버는 날이 오기나 할런지 막막함이 더 해 갈 뿐이었다.
그러던 중 비즈니스 메니지먼트 과정 첫 텀이 끝나갈 즈음 멜번에 있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알고 지내는 한국분이 이번에 조그만 IT 회사에서 Coles 전산실로 옮기면서, 기존 회사에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마침 그 분이 하던 일이 Linux Server 에 Oracle Database 를 관리하는 일이라 나의 경력과 매치가 되는 부분이었다.
이력서를 보내고 나서 바로 다음날 부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30여분 정도의 전화 인터뷰 후 비행기표를 보내줄테니 내일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소개를 시켜주신 분과 연락을 하며 기술적으로는 무엇을 물어볼지 미리 입을 맞춘 후 한국에서부터 고객과 엔지니어로 알고 지냈던 사이로 포장을 하기로 했다.
애들레이드에서 1년을 넘게 지내다 멜번의 웨스트게이트 브릿지를 건너며 보게 된 멜번의 시티는 대도시의 위용이 느껴졌다.
한살 차이로 지금은 형, 동생으로 말을 놓고 지낼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된 그 형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무사히 인터뷰를 마치고 드디어 취직을 하게 되었다.
처음 3개월은 수습기간인 관계로 본인들이 그만두라고 할 경우 다시 애들레이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서비스 아파트먼트를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수습기간의 급여 Base는 적었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또, 가족이 애들레이드에서 멜번으로 이사올 때 이사비용을 3,000불까지 지원해준다는 약속도 있었다. 다만, 1년안에 스스로 그만둘 경우에는 서비스 아파트먼트 비용과 이사비용을 토해낸다는 조건하에…
드디어 이민온지 1년 2개월만에 호주에서 수입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주에 한번씩 비행기를 타고 애들레이드에 가족을 보러 왔다갔다 하며 두집 살림을 하다보니, 내 수입으로는 나 혼자 먹고 살면서 애들레이드 집 렌트비를 내고 나면, 가족의 나머지 생활비는 여전히 한국에서 벌어 놓은 돈을 까먹는 상황이었다.
서비스 아파트먼트에 있으면서, 회사에서의 점심, 숙소에서의 저녁 모두 주로 3분 요리로 해결을 하였다. 회사가 포트멜번에 위치한 관계로 마땅히 나가 먹을 곳도 없었지만, 한끼에 대략 10불에서 15불이나 되는 식비를 감당할 여력도 없었다.
2주에 한번 금요일 저녁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애들레이드에 갔다가 일요일 저녁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멜번으로 돌아오던 생활은 수습 기간이 끝나면서 메니저의 배려로 월요일 아침 첫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것으로 그나마 가족과의 시간에 조금 더 여유가 생겼었다.
- 이민일기 5
수습 기간이 끝나면서 쉐어를 할까, 하숙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하숙을 선택했다.
주당 300불로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지만, 식사나 빨래 걱정 등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하숙을 선택했는데, 한국에서 드라마로만 하숙집을 접했던 나의 기대는 첫날부터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침은 알아서 씨리얼을 챙겨 먹어야 하고, 너무나 자주 면 종류로 메뉴를 대충 제공하는 식단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날 저녁에 냉면을 먹었는데, 다음날 도시락은 스파게티, 다시 저녁으로 칼국수를 먹고 나서는 하숙 생활을 2달만에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호주는 그나마 교통이 괜찮은 대도시라 하더라도 차 없이 돌아다니기란 쉽지가 않다. 25km 정도의 거리면 50불에 육박하는 택시는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이 아니다. 회사를 마치고, 차 없이 쉐어집을 보러다니는 것은 생각만큼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Public Transportation 웹사이트에서 가고자 하는 지역까지의 대중 교통편과 다시 그곳에서 하숙집까지의 교통편을 알아본 후 대장정을 시작하곤 했다.
대부분 기차역에서 내려서 주소지까지 걸어가려면 족히 20, 30분은 걸렸다. 하루는 방을 보고 나서 다시 기차역까지 갔더니,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기차가 불과 30여초 전에 출발을 한 것이었다. 두 정거장 가서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하숙집까지 가야 했는데, 그때 시간이 대략 8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멜번에서 2년 넘게 지내보니 이곳은 4시30분 ~ 5시30분경이 가장 붐비는 퇴근시간이다. 저녁 7시만 되면 퇴근길은 뻥뻥 뚫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의 생활 패턴이 이렇다보니, 저녁 8시가 가까워지면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하더라도 기차는 30분에 한대 정도 지나갈 뿐이다.
다행히 해가 긴 여름이었고, 호주는 써머타임을 하기 때문에 8시라 하더라도 아직 환한 상태였지만, 차가 없어 사람도 없는 텅빈 플랫폼에서 30분동안 다음 기차를 기다리고 있자니 한없이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두 정거장을 더 가서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9시가 넘어가면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버스 창문에 비친 나의 모습이 스스로도 얼마나 쓸쓸하게 느껴지던지…
한달여의 대장정 끝에 박스힐 근처에 있는 3인 가족이 사는 타운하우스에 쉐어방을 얻었다. 그라운드 플로어에 방 하나와 화장실이 있어, 나는 그곳에서 생활하고 그 가족은 윗층에서 생활하는 구조였다. 방안에 냉장고와 전자렌지가 있어 아쉬운데로 윗층에 올라갈 일 없이 생활이 가능했다. 5개월 가량 머물면서 내 자신 스스로가 불편하기도 해서 주인집(?) 주방은 사용해 본 일이 없다. 밥은 전기밥솥으로 해결하고, 반찬이나 국은 오로지 3분 요리로 해결했다. 가끔은 전자렌지로 계란찜을 해먹기도 했다.
타지 생활을 하다보니, 2주에 한번 애들레이드에 가면 집사람이 해주는 집밥이 얼마나 맛있던지…
주말부부 생활이 길어지면서 없던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애들레이드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멜번으로 돌아오기 위해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집을 나서면 공항에 갈때까지 늘 아랫배가 아픈 것이었다. 가족이 멜번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늘 어김없이 가족과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오면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졌었다.
이민 일기 6. – 아이들 이야기 I
우리는 딸내미 6학년, 아들내미 4학년 때 호주로 이민을 왔다. 아이들이 처음 다닌 학교는 한국인은 우리 아이들이 전부인 한 학년이 한반인 조그마한 학교였다.
당시 아들내미가 전학을 오기전에 4학년에는 남학생이 3명 밖에 없었다. (여학생은 한 열댓명… 복 받은 놈… 부러울 따름이다.)
기존에 이 장난꾸러기 3인방이 노는데 있어 편을 갈라서 몰 하려고 해도 2:1 로 머릿수가 안 맞다보니 많은 애로 사항이 있었던 듯 하다. 하다못해 4:3 정도면 실력있는 놈이 세명인 팀에 들어가면 대충 실력이 엇비슷해질텐데, 2:1 이다 보니 승부를 가르는 게임은 거의 불가능했던 듯 하다. 그런데, 아들내미가 조인하면서 2:2 로 머릿수가 맞춰지니, 이 세명이 아들내미를 격렬히 환영을 해 주었던 모양이다. 아들내미는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이 세명과 공놀이를 하며 별 어려움없이 빠르게 적응을 한 것 같다.
반면 딸내미는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꾸준히 다니다 왔음에도 적응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던 듯 하다. 여자아이들이 6학년 정도 되면 쉴새 없이 수다를 떠는데다가 기존에 아이들은 프랩부터 7년을 함께 자라오며 어느 정도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보니, 영어도 부족한 딸내미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못했던 듯 하다. 카톨릭 학교이고, 한 학년이 한반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친구가 너무나 그리울 나이에 맘에 맞는 친구를 못 사귀다보니 나름 많이 속상했었던 듯 하다. 친구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던 저스틴비버와 원디렉션 노래를 미친듯이 외웠다. Nicki Minaj 의 Super Bass 도 완벽하게 외웠으니, 그 당시 딸내미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하루는 아이들 학교옆을 지나가는데, 점심시간이라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와 놀고 있었다. 아들내미는 여지없이 그 3명이랑 열심히 볼을 차고 있었는데, 딸내미는 여자 아이들 몇명이 벤치에 앉아있다 일어나서 움직이니까,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대화에 끼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울컥 했었는데, 그 얘기를 전해들은 집사람은 아이가 겪고 있는 마음고생이 느껴졌는지 그만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애들레이드는 Primary가 7학년까지이다. 그렇게 1년반을 보내고, 딸내미가 High School 에 진학하면서는 학교 생활을 너무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각 Primary로부터 온 아이들이 헤쳐 모이면서 새롭게 친구 그룹이 형성되고, 지난 1년반의 고생을 통해 의사소통도 자유롭게 되다보니 단짝 친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호주 토박이 친구들 집으로도 두어차례 슬립오버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이제야 겨우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기 시작했는데, 8학년을 겨우 반년 다니고, 애들레이드에서 멜번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멜번은 애들레이드와 달리 7학년부터 High School 이다 보니, 아들내미는 어차피 6개월 후 하이스쿨에 진학할 거라 상관이 없었지만, 딸내미는 멜번 아이들은 이미 1년 반을 함께 지내며 그룹이 형성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또 다시 Primary 때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다며 무척이나 걱정스러워 했다. 안 그래도 사춘기도 막 시작했는데…
멜번과 애들레이드를 오가며 10개월을 주말부부를 하면서 가능하면 애들레이드로 복귀하고자 했으나, 여전히 애들레이드의 취업장벽은 높기만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 가족은 멜번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민 일기 7. – 아이들 이야기 II
딸내미가 사춘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집은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아들내미가 사춘기를 시작하는 지금은 집사람이나 나나 딸내미를 통해 한번 겪어봤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 평온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딸내미 때는 아이도 그런 변화가 처음이고, 우리도 부모로서 처음 겪는 일이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무지했음에 매일같이 폭탄이 터지곤 했다.
그때 느낀 심정은 정말 사춘기 아이는 정신세계가 안드로메다를 향해 가고 있구나 였다. 그 당시 딸내미는 자기만의 고민만으로도 차고 넘쳤을텐데, 장난꾸러기 2살 터울 남동생은 그런 누나에게 매일같이 시비를 붙었으니, 세상에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싶을 정도였다.
안 그런 집들도 있겠지만, 주변분들 중 그래도 점잖다고 생각했던 분들인데도 얘기를 나누다보면 사춘기 자녀들과 한번씩 전쟁을 치르면서, 다들 핸드폰 하나씩 부셔본 경험들이 있으셨다.
집사람과 나는 아이가 겪는 사춘기 또한, 다른 아이들처럼 큰 문제없이 성장통을 겪고 있는 좋은 시그널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사춘기를 겪어나가며 딸내미는 학교에 둘이 좋아 죽고 못사는 절친이 생겼고, 나름 안정적으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직장을 시드니로 옮기게 되면서 또 한번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새 아이는 부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속은 훌쩍 커 있었다.
2차 면접을 보고 나서, 이제 채용절차를 진행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아이들에게 주말과 대체휴가를 이용해서 시드니에 다녀오자고 하였다가 집사람과 딸내미가 말다툼을 하고 나서, 딸내미에게 카카오톡으로 말을 걸었더니 돌아왔던 답변이다.
=============================================================================
뭐라 해야 되지, 시드니를 안 가고 싶다가 아니라 아빠가 무슨 말 하는지는 이해가 돼요. 근데 나는 이번 주에 시드니를 가기 싫다는 이유가, 이렇게 확정이 난 걸 안 게 오늘인데 난 내 나름대로 그 적응 할 시간을 달라는 거에요. 아예 시드니로 이사 가기 싫다고 고집 부리지는 않을게요. 지금 당장 시드니를 간다는 게 급작스럽다 해야 되나, 그래서 그게 싫어요. 학교 알아 보고 집도 알아 봐야 된다는 건 알겠는데 조금 있다 하면 안 돼요? 아까 안 가겠다고만 성질내고 소리 지른 건 그냥 그 상황이 싫었기도 하고 지금 돌아보면 내 생각만 한 거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예 간다고 확정 난 게 아니니까 지금 당장 아빠가 시드니를 가야 하는 게 아니면, 그냥 조금만 시간을 두고 아 우리가 시드니로 이사를 갈 수 있구나 하고 좀 적응 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빠랑 엄마도 그냥 무조건 돈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해 보고 내가 할 고민 다 해봤던 거 내가 더 잘 아니까 굳이 나 설득 안 해도 돼요. 충분히 다 알아들었고, 아까는 경솔하게 했던 거 같아서 후회하기도 하는데. 그 때는 그냥 좀 되게 속상했어요. 적응하면 가고, 또 적응했는데 옮겨야 되니까. 물론 시드니를 저나 동생이 더 좋아할 거라는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전 멜번이 좋았거든요. 과목 선택도 그렇고. 아까 알아보니까 시드니는 제가 영어나 한국어 둘 다 제 2 외국어로 시험을 칠 수 있는 게 아닌 거로 봐서 그 걱정도 많이 들었어요, 여기서는 둘 다 2번 째 언어로 볼 수 있는데. 그래도 시드니 나름대로의 장점이 또 있을 거니까 싫다고 주장하지만은 않을게요. 어쨌거나, 아빠 말대로 시드니를 갈지 안 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놀러 가자는 마인드로 가던 사전조사를 하러 가자는 마인드던 전 너무 이르다고 봐서 이렇게 빨리 가고 싶지 않아요. 지금 당장 응원이나 잘 되라고 부추기진 못 해도 아까처럼 미숙한 짓은 안 할게요. 시드니에서 적응하는 게 설마 호주 처음 왔을 때보다 힘들겠어요, 뭐 다 잘 되겠죠.
=============================================================================
시드니로 이주할 때가 되어 아이들 학교 main office 에 exit form 을 받으러 가다가 수업 전 사물함 앞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것을 느꼈다. 시드니로 전학하여 저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아이들이 또 다시 겪어야 할 시간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