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원은 수행 상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이 선정(止)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무슨 수행을 하든 수행에서는 선정(止)과 통찰지(觀)가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한 곳으로 모여 삼매가 일어나고 그런 삼매를 바탕으로 세상의 일체법을 꿰뚫어보는 통찰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삼매, 선정을 위해서는 마음을 한군데 붙들어 매는 것(所緣)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음을 한군데로 전일하게 모음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대상과 하나되는 선정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군데로 마음을 모으는 소연을 유식에서는 작의(作意), 천태에서는 가관(假觀)이라 부르는데, 화두는 선종의 소연이며 불명호는 정토종 염불의 소연이고 진언은 밀종의 소연이 됩니다.
원이 이러한 소연이 되는 것입니다. 간절한 원을 세울 때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이 원을 향하게 되고, 이렇게 하나가 된 원으로 인해 사마타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천태의 가르침은 무에서 일념이 생겨나는 것을 관하는데 이를 가관이라 합니다. 이렇게 가관을 통해 몸과 마음이 모두 잊혀지면(止) 이것을 공관(空觀)으로 전환시키고, 공관은 마침내 진공묘유의 중관(中觀)으로 전환됨으로써 통찰지(觀)가 일어나게 합니다.
수영을 배울 때 무조건 물에 뛰어들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안전 요원의 상주등 안정 장치는 필수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런 안전 장치 아래 직접 체험하는 문제점을 통해 무엇을 보완하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각성이 들게 됩니다. 그와 같이 행원도 직접 원행으로 세상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런 연후 원행으로 체험되는 세계에서 세상의 실상을 보게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많은 생명의 노래가 울려 퍼지며 얼마나 깊은 생명의 가르침이 설해지는지, 행으로 생생히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부처님 공덕 바다의 입수(入水)에는 완전한 안전 장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입니다. '원'을 가지고 행으로 바다에 뛰어들 때, 우리는 힘차게 물결을 헤치고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단순한 행이 아니라 '행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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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남회근 선생님 말씀
-오늘이 마지막 강의입니다.이번 강의는 원칙적으로 견지(見地),수증, 행원을 표방했지만, 주로 수증 공부 방면에 편중되었고, 행원에 대해서는 몇 구절 언급하지도 못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불법을 배우고 수도하면서 모두가 과위의 증득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배우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대로, 진정으로 과위를 증득한 사람은 왜 그렇게 적을까요? 주요 원인은 행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행원의 입장에서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행원이 없으면 견지가 철저해질 수 없으며, 진정한 행원이 없으면 수증 공부는 진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장 소홀히 하는 것이 바로 행원 방면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이 노력해도 제대로 길에 오르지 못한 듯한 느끼는 겁니다. p647-648
-진정한 수행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길, 즉 행원으로 통합니다. 무엇이 행원일까요? 바로 자신의 심리적 행위를 바르게 닦아나가는 것입니다. p650
-우리가 정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 씀씀이가 전환되지 못했기 때문!
-남회근 선생은 우리 공부가 진보하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이 잘못되고 스승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마음 씀씀이가 전환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함.p651
마음의 결사를 풀어내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기본적 폐단이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반성해야 한다. 먼저 불법을 배우면서 이 인간세상을 공으로 보려하기 때문에 우선 여기를 벗어나려 하며, 그런 후에는 세상에 개의치 않으려 한다. 세상을 벗어나 개의치 않으려 하기 때문에 자비를 실천할 수 없다. p652
-"제가 아는 바로는, 불법을 배우는 자들이나 다른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오만합니다. 다른 사람이 믿지 않는 것을 보면 마귀라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는 성인이라 우깁니다. 우리 불법을 배우는 사람도 똑같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단지 용어만 다를 뿐입니다. '저런! 뿔쌍한 것. 지옥종자로다!'(라고 말하면서mo) 똑같이 겸허하지 못합니다.
특히 공부라도 조금 한 사람은, 한 삼일 타좌하고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며, 다른 사람의 공부는 모두 틀렸다고 합니다. 오로지 성인의 척도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재려 합니다. 이 척도도 사실 자신이 정한 겁니다. 안광이 짧아도 한참 짧은 겁니다. 그의 척도로 보면, 사람들은 당연히 아무도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긴지 자기 척도로 재어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결코 자신을 돌이켜 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합니다
이 心行(심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왜 과위를 증득해야 하는가? 왜 定(정)을 얻을 수 없는가? 바로 이 심행, 탐진치만의는 조금도 전환되지 못하니, 정말로 두려운 일입니다. 엄중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재삼 강조합니다만, 수도해도 과위를 증득하지 못하고 공을 증득하지 못하는 것은, 심리 행위 자체가 전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앉아서 의식 경계가 조성한 약간의 空(공)을 가지고 도라 여기는 겁니다. p653-655
정의 자비와 지의 자비
-남선생이 든 구마라집의 제자 승조의 저서들에 나오는 말
1.'반야무지론'에서는,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반야지혜의 성취에 대해서, 지혜가 최고졸 달하면 지혜가 없어진다고 쓰고 있습니다.
2.또 물불천론(物不遷論)을 말합니다. 사물에는 오고감도 없으며,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으며, 과거도 미래도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는 겁니다.
3.또 불진공론(不眞空論)을 말합니다. 공이면서 공이 아닙니다. p650
-행원으로 말하면, '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견지. 행이 이르지 못하면 견지는 아무 소용이 없다. 바로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한 자비를 말할 수 잇다. 자비란 곧 무아이기 때문이다. p656
心行(심행)의 동요
-천하에 앞장 서지 않는 것은 바로 겸허입니다. 불가 또한 그렇습니다. 불가의 겸허는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할까요? 무아에 이르러야 합니다. 겸허가 극에 이른 것이 무아입니다.
우리는 단지 타좌만을 통해 공에 이르고자 하지만, 심행 상에서 도달하지 못하면 공이 될 수 없습니다. 앉아서 공을 지키고 있지만, 그건 내가 지키고 있는 공으로, 무아의 공이 아닙니다. 만약 무아가 되었다면 무엇 하러 공을 구하겠습니까? 무아라면 이미 공이 되어 있는 겁니다.
행원으로 말하자면, '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견지입니다.
행이 이르지 못하면 견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한 자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자비란 곧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보통 자비를 情(정)에 속하는 것이지 智(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의 자비는 智(지)로서, 반야의 자비입니다. 진정으로 무아가 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자비가 됩니다. 내가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한다고 말한다면, 이미 下乘(하승)으로 떨어진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인자함은, 특히 모성애는 결코 대가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직 情(정)입니다. 이 정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겁니다. 보살의 자비는 '智(지)'로서, '무아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합니다.p656
-우리는 행원 방면을 살펴보고 있는데, 여기서 심리적 행은 청정해야 하며 공에 이르러야 한다. p660
-정신이 조금 배양되면 신경질도 늘어갑니다. 특히 청년들은 제1관인 욕정이 나타납니다. 바로 남녀가느이 애욕이 강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기만하면 안 됩니다. 공부가 시원챦으면 그만이지만, 공부가 제대로 되었다면 남녀간의 애욕이, 특히 생리적인 압박이 나타납니다. 무슨 원인 때문일까요? 탐진치 때문입니다. 탐욕의 제1의 근본인 무명이 곧바로 폭발한 겁니다. ...p663
-원은요? 더욱 말하기 어렵습니다. 행원이 이르지 않으면 견지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행원이 도달하지 못하면 수증 공부 역시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앉아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p666
-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타좌를 하는 것은 모두 자리에 앉아 도둑질을 하는 겁니다. 같은 시간에 사회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아침 저녁으로 외는, "위로 사중(四重)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삼도의 고통을 구제한다"는 구절은 참으로 멋집니다. 이것이 바로 행원의 원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공덕을 쌓도록 각성시키는 겁니다.
우리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수시로 자신을 검사하여, 날마다 위로 사중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은혜는 모두 우리가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부처님의 은혜, 부모님의 은혜, 국가의 은혜, 중생의 은혜"입니다. p667
-모든 불경, 삼장 십이부가 모두 우리에게 행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 삽십칠도품,육도만행의 불법을 배우는 기본이 이 곳에 있습니다. 삼세인과와 육도윤회를 이해하고, 심리적인 행위상(mo심행)에서 자신을 서서히 바꾸어 나가면, 공부와 견지가 자연스레 진보하게 됩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제가 직접 겪은 경험입니다. 여기서 공부하지 않으면 문제를 풀어낼 수 없으며 과위를 증득할 수 없습니다. 심행을 변화시키는 것은 타좌와 수증보다도 훨씬 중요합니다. 그리고 심행이 바르게 바뀌기만 해도 여러분의 정력과 타좌가 그에 따라 진보합니다.
왜 정을 얻지 못할까요?..
심행 상에서 추구해야지, 공부상에서 추구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공부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空(공)으로, 우연히 가능할지는 몰라도 며칠이 지나고 나면 사라져 버립니다. 여기 앉아 있다고 해서 여러분의 심신이 전환될 수 잇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결코 타좌의 자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행 상에 있습니다. 심행 상에서 자신을 검사해야 비로소 궁극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mo행원은 바로 행과 원으로 가는 것. 선생의 말에 따르면, 행원으로 심행이 바뀌는 것이 제일 중요~!
행하고 행하며 다시 행하고 행하라 p669
오늘 결론의 중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과정은 견지, 수증, 행운이 삼대 綱要(강요)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강조한다면, 행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행이 도달해야 견지가 비로소 원만해지며, 수증 공부도 비로소 과위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들 중 과위를 증극한 사람이 많았던 것은 바로 행원에 있었습니다. p669
견지가 도달하면 법신이요, 수증이 도달하면 보신이요, 행원이 도달하면 화신입니다. 삼신이 모두 일념 사이에 있으니, 수증이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만 둡시다! p670
첫댓글 대승불교에서의 자비는 智(지)로서, 반야의 자비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인자함은, 특히 모성애는 결코 대가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직 情(정)입니다. 이 정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겁니다.
보살의 자비는 '智(지)'로서, '무아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합니다.p656
제가 보현행원 말씀 때 수순중생 편에서 늘 그러죠?
보현행원의 자비는 지혜에서 나오는 자비라고!
딱 남회근 선생님이 제 말씀 증명해 주시네요
모든 불경, 삼장 십이부가 모두 우리에게 행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 삽십칠도품,육도만행의 불법을 배우는 기본이 이 곳에 있습니다
행원이 불교의 종착점 이라니깐요?
제가 수없이 강조하던건데
남회근 선생님이 또 증명!
제 말씀은 안 믿어도 남회근 선생님 말씀은 믿으시겠죠?
그러면 행은 어떻게 닦는 것인가? 견지와 수증을 이룬뒤에 닦는 것인가, 이후에 저절로 나타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남 선생님께서 이토록 강조하시진 않았겠지요.
카페에서 우리는 행원을 하면 견지, 수증이 모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마르고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니 견지도 기웃, 수증도기웃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 보현행원 참 쉽고도 어렵습니다.